정신 차리니까...
밥 먹고 있더라. 그것도 단둘이서.
"어... 입에 안 맞으세요...?"
저 사람은 왜 나에게 밥을 먹자고 했으며,
"아뇨. 괜찮아요. 맛있네요."
나는 왜 그걸 덥석 따라와서 여기 앉아있고.
"잘 못 드시는 것 같아서요. 미리 물어보고 움직일 걸 그랬나 봐요."
왜 내 앞에서 다정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건지.
"궁금한 게 많으신 얼굴이네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물어보세요. 다 대답해드릴게요."
"그것 때문에 밥 잘 못 드시는 것 같아서요."
와 저 얼굴로 이렇게 다정하게 말하면 반칙 아닌가.
"물어보세요. 진짜 다 대답해드릴게요."
"음... 일단. 제 이름 어떻게 아셨어요?"
"선생님이 보여주셨었는데. 저 의사 맞아요! 하면서 이름표를 딱."
"제가요?"
"네. 저희 처음 만났을 때요. 기억 못 하시는 것 같네요."
살짝 미소 지으면서 말하는데, 홀릴뻔했다.
"저희 처음 만난 게 어제 응급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어... 그럼 왜 저 부른 거예요, 어제?"
"선생님 보고 싶어서요."
와 이렇게 훅 들어온다고?
"저를 왜요?"
"처음 봤을 때부터, 다시 만나봐야겠다 생각했어요."
"왜요?"
"확인해볼게 있었거든요."
"어제 확인하신 건가요?"
"네. 맞아요. 어제 다시 보고, 확신했어요."
내가 진짜 의사 맞는지 확인한 건가.
확인했다니 이건 패스.
"저 언제 처음 보신 거예요?"
"선생님도 약간 돌려 말하는 거 못하는 스타일이시네요."
"저는 어제 처음 뵀거든요. 기억이 안 나서요."
"음...
"한 달 전쯤인 가요.."
"그때는 사복 입고 계셨어요. 청바지에 베이지색 후드티."
"조카가 있어요. 제가 되게 이뻐해요. 하는 짓이 이쁘거든요."
석진은 조카의 손을 잡고 선물을 사러 가는 중이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한 번씩 만날 때마다 꼭 선물을 사주곤 했다.
"뭐 가지고 싶어서 삼촌한테 나가자 그런 거야?"
"비밀이야!"
"너 아빠가 안 사줘서 삼촌한테 사달라는 거지?"
"아빠한테 말하면 안 된다 삼촌!"
사랑스러운 아이다.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을 가지고 있다.
객관적으로 봐도 귀여운 것 같아. 내 조카지만 너무 귀여워.
길을 건너기 위해서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난도 치고, 농담도 하고 그렇게.
보행신호가 바뀜과 동시에
"빨리 가자!"
아이는 앞으로 뛰어나갔고, 신호를 무시한 차 한 대가 달려왔다.
"어.... 아이는..."
"아 아니에요. 조카 괜찮아요. 잘 지내요."
다행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그것도 아이의 죽음을 마주한다는 건 언제나 어렵다.
"지금은 괜찮아요. 그때 그렇게 사고 나고, 아이는 울지 나는 뭘 못하지, 뛰어가서 애 끌어안고 신고부탁하려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
"선생님이 짠. 나타났어요. 핸드폰으로 119 통화하면서 상황 설명하시면서."
"그러고 전화 딱 끊으시고는 저한테 아이 좀 봐도 될까요? 하셨었는데."
"..... 아...."
기억난다.
분홍치마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던, 작은 여자아이.
오래간만에 쉬는 날, 나는 자주 가던 카페에 가는 길이었고, 눈앞에서 사고를 목격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갔다. 본능이었다.
머리만 다치지 말아라. 숨만 쉬어라. 주문을 걸듯이 외우면서 뛰어갔다.
다행히 아이는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는 멀쩡했고, 다리를 다쳤었다.
멍하니 있는 보호자에게서 아이를 뺏어들고 응급처치를 했던 기억이 난다.
"제가 당황해서, 가만히 있었더니 저한테 명찰 보여주셨잖아요. 병원 카드."
"........"
"저 의사 맞아요! 하시면서."
"아... 그랬군요."
"이름이랑 병원은 그때 보여주셔서 봤고, 이번에 사고 나면서 온 병원이 그때 봤던 병원이길래, 선생님 찾은 거예요. 어느 과이신지도 모르고 무작정 불러달랬어요, 제가."
"그래서 저한테 호출이 왔던 거군요."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왔다 갔다 하시고."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때 일 때문이라면 괜찮아요."
"제가 선생님 찾아서 놀라셨죠?"
"네, 뭐. 처음에는 좀 당황했는데, 지금 얘기 듣고 나니 이해는 되네요. 아이가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덕분에요. 그때 응급처치 다 해주시고, 119에 설명까지 다 해주셔서 병원 가서 치료받고 깁스 좀 하고 지금은 잘 뛰어다녀요. 멀쩡해요 아주. 감사해요."
"저는 제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굳이 찾아서 감사 인사까지 해주시고. 제가 더 감사하네요."
"음.. 선생님께 감사한 건 맞는데, 선생님 찾은 이유가 감사 인사 전하려고만은 아닌데."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이제 제가 질문해도 될까요? 대답해 주실래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무언가가 있나?
"나이는 제가 선생님보다 많을 거고, 남자친구 있어요?"
".........."
"너무 단도직입적이었나."
"...... 없어요. 남자친구."
"오, 좋은 대답이었어요."
"그럼, 나한테 번호 알려줄 생각은 있어요?"
와 이 얼굴로 이렇게 들이대면 이건 진짜 반칙 아닌가.
퇴장감이다. 이건 레드카드 급이다.
".... 왜요?"
"그야, 제가 선생님한테 관심이 있으니까요."
"잘못 생각하신 거 아니고요?"
"저 그렇게 바보는 아닌데."
바보 맞는 것 같은데.
"죄송한데 환자분,"
"저 지금 환자 아닌데."
"보호자분."
"보호자도 아닌데요."
"그럼 저 뭐라고 불러요?"
"저 김석진입니다. 이름 불러요. 여기 의사랑 환자, 의사랑 보호자로 나온 거 아니잖아요. 난 남자 김석진으로 선생님 앞에 앉아있는 건데."
"네, 김석진 씨. 지금 생각하시는 그 호감, 그거 착각이에요."
"......"
"제가 김석진 씨가 당황했던 상황에 나타나서 침착하게 도와줘서, 그게 고마워서 그걸 호감으로 착각하신 것 같은데,"
"........"
"그거 아니에요. 설사 진짜 저한테 호감이 생기셨다고 해도, 아니에요. 저한테 호감 생기신 게 위급상황에서 제가 도와드렸기 때문이잖아요."
"아닌데요."
".... 네?"
"도와주신 건 감사한데, 그것 때문에 선생님 좋아하는 건 아닌데."
"...... 그럼요?"
"혹시 결혼할 사람을 만나면 '아 이 사람이구나' 느낌이 온다는 말, 들어본 적 있으세요?"
"그걸 느꼈어요. 선생님한테서."
"나랑 만나봐요."
"......"
"어제 다른 병원으로 갔었어도, 촬영장에서 사고가 안 났어도 제가 따로 선생님 찾아왔을 거예요."
".... 왜 그러시는 거예요?"
"어제 확인했던 건, 선생님이 의사인지 뭐 그런 거 확인한 게 아니고,"
"......."
"내가 느꼈던 그 느낌이 맞나, 정말 그 사람이 맞나 그거 확인하려 했던 거예요."
"그래서, 확인했어요?"
"네. 확인했어요."
"....."
"선생님 응급실 걸어들어오시는 순간 확신했어요."
"......"
"맞네. 저 사람한테 모든 걸 걸어야겠구나."
"......"
"진짜 저 사람이랑 결혼해야겠구나, 나."
"그런 의미로 번호 좀 줄래요? 나 지금 선생님 꼬시는거, 맞아요."
반칙이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