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 사람은 끝까지 다정했고
"얼른 들어가. 피곤하겠다. 얼른 씻고 쉬어."
"...... 네."
나는 끝까지 바보였다.
집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이건 아니다.
안되겠다.
[어디에요?]_9:03
[집 앞.]_9:04
벗어뒀던 코트를 집어 들면서 현관문을 박차고 뛰었다.
엘리베이터 탈 시간이 어딨어. 계단으로 간다.
"왜 이렇게 급하게 뛰어와. 다칠라."
"... 아직 안 갔네요?"
손을 뻗어 흐트러진 내 머리를 정리해 주는 손길이, 날 보는 눈빛이 다정하다.
"왜 다시 내려왔어, 안 쉬고."
"왜 아직 안 갔어요?"
"그냥."
"......"
"뭔가, 네가 다시 내려올 것 같아서."
일단 내려오긴 했는데... 어.... 음....
어떡하지.
"왜.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괜찮을 거야.
"무슨 일 있어?"
저 사람은 괜찮을 거야.
"우리 집 올라갈래요?"
어색하다. 미치도록 어색하다.
단둘이 있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엘리베이터가 문제인가.
"나 갑자기 막 집에 가도 돼?"
"네?!"
목소리가 너무 크게 나갔다. 쪽팔려...
저 사람은 또 왜 웃는 거야. 하 진짜...
"아니, 나 아무것도 못 샀는데. 과일이라도 사 올걸 그랬나."
"아..."
"혼자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굳어있는 거야. 혼자 화들짝 놀래기나 하고."
"아니에요!"
사람이 좀 놀랠 수도 있지. 놀리기나 하고 말이야.
"무서워라. 째려보지 마."
"자꾸 웃지 마요!"
"왜. 웃는 건 내 맘이야."
이 씨. 웃는 게 이뻐서 뭐라고 말도 못 하겠네.
"너 예뻐서, 귀여워서. 그래서 웃는 거야."
또 훅. 훅 들어온다. 버틸 수 있을까?
"너 안 잡아먹을게. 긴장하지 마, 귀엽게 진짜."
아아, 나는 질 수밖에 없나 보다.
"차는 아까 마셔서..."
"응. 괜찮아. 집 구경 해도 돼?"
"네. 뭐 볼 건 없는데..."
거실. 주방. 화장실. 침실. 옷방.
끝인데...
"거실에 책장이 있네?"
"아, 네. 소파에서 책 보기 편하라고..."
"와 죄다 영어야. 난 한 페이지도 못 읽겠다."
소파에 털썩 앉으면서 말하는데, 귀엽다 진짜.
죄다 의학 서적이니까 당연히 어렵..
.....귀여워?
"자, 이제 날 집까지 부른 이유는?"
"아..."
"할 말 있어서 부른거 아니야?"
역시 성격 한번 시원시원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 봐.
".... 미안해요."
"......"
"저는 일반인이지만, 당신은 아니잖아요."
".... 응."
"괜히 소문날까 봐, 안 좋은 기사 날 까봐. 사람들 사이에서 얘기 나오면 안 되잖아요."
"......."
"그래서, 그래서 숨겼어요. 진짜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그만하자, 바보 같은 짓.
"저 안 싫어해요."
"응?"
"저 오빠 안 싫어한다고요."
질러버렸다.
"저랑 엮이면 괜히 난처해질까 봐, 오빠는 공인이니까."
"....."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싫어서 피하고 숨긴 게 아니에요."
"......."
".... 미안해요. 또 의도치 않았지만 상처 줘서."
하. 진짜 속 시원하다.
"선배 빨리 가요!"
"왜? 대화하는 중 아니었어?"
"아니에요! 잘 몰라요. 모르는 사이에요."
"그래? 너 부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인사했으면 됐어요. 가요, 빨리! 차 어딨어요?"
"어어, 저기. 저 차야."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혼자 두고 선배에게 돌아갔을 때.
내가 선배한테 둘러대는 소리를 들었겠구나, 선약 때문에 혼자 남겨진 것보다 자기를 모른척하는 내가 더 상처였겠구나. 모른 척 얘기하는 나 때문에 속상했겠구나.
"... 진짜 속상했어."
"......"
"사실 선약이야, 내가 무작정 찾아간 거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 오히려 바빠서 못 볼 수도 있겠다, 각오하고 갔던 거라, 괜찮았어."
"....."
"근데, 네가 막 그 남자한테 모른다고 둘러대는데,"
"......"
"진짜 속상하더라."
미안해 죽겠다 진짜.
고개를 못 들겠다.
"나는, 걱정했어."
"......"
"내가 많이 부담스러운가. 내 직업이 이래서, 내가 이렇게 들이대는 게 부담스러운가. 나랑 만나고 연락하고 인사하고 밥 먹는 게 힘든가."
"......"
"그래서, 내가 싫은가."
이럴 줄 몰랐다.
내 잘못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내가 말했잖아. 기억 못하는 거야?"
"네?"
무슨 말을 했지, 나한테?
"나는 내 직업상, 누군가에게 대놓고, 드러내고 들이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아.."
"내가 대놓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정말 모든 걸 놓고서라도 끝까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거."
아, 그랬었다.
"말했잖아, 나 너랑 평생 갈 거라니까?"
또, 또 시작이다.
"난 너랑 끝까지 같이 갈 거야. 그래서 괜찮아."
"....."
"걱정하지 마. 내 걱정 말고, 네 걱정이 더 돼, 나는."
"......"
"나는, 네가 괜찮으면 다 괜찮아."
"....."
"근데 네가 힘들까 봐. 그래서, 좀 무서워졌어."
끝까지 다정하다.
또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다.
"내 걱정을 왜 해요..."
"나는 익숙하지만, 너는 아니니까."
"....."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다니고, 나를 보면서 수군거리고. 내가 모르는 내 얘기가 막 돌아다니고."
"...."
"그게 다 익숙한 사람이야. 그게 어쩔 수 없는 사람이고."
뭔가, 마음이 아프다.
"근데 넌 아니잖아."
"......"
"네 말대로, 넌 평범한 사람이잖아."
"..... 네."
"나 때문에 네 일상생활에, 하고 있는 일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는 거잖아. 그래서..."
"좀 망설이게 돼."
그랬구나.
"내가 널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네가 힘들거나 불편하면 안되는 거잖아."
"....."
"그건 잘못된 거잖아."
고요했다.
나도, 저 사람도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서로의 걱정으로 얽혀버린 이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병원은 늘 정신없이 바쁘다.
내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든, 불과 몇 시간 전 무슨 생각을 했었든,
"지금 가요!"
누군가의 삶을 지키기 위해, 또 누군가의 가족을,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오른다. 그 사람이.
잠깐 틈을 타, 옥상정원에 올라왔다.
시원하다.
또 떠오른다. 그 사람의 얼굴이, 표정이, 눈빛이, 목소리가.
".... 뭐 하려나."
5일 전, 우리 집에서의 대화를 끝으로 연락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각자의 생각할 시간을, 고민할 시간을 지켜주고자 하는 거겠지.
".... 후."
"왜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어?"
"깜짝이야!"
"뭐가 그렇게 고민이야?"
"놀랐잖아요, 선배."
"혼자 추욱 쳐져서. 무슨 일인데."
"아 그냥..."
"막 주위에 어두운 기운이 그냥 뭉게뭉게."
나는, 그 사람은 뭘 망설이고 있는 걸까.
".... 선배."
"응"
말해도 되는 걸까.
"제가 되게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는데요."
"왜 신경 쓰이는데?"
"그냥 되게... 제가 좀 미안할 짓을 많이 해서...?"
"누구 때렸어?"
"아니에요!"
"뭐야, 난 또 누구 한대 쳤다고. 사고 친 줄 알고 어떻게 뒷수습해 주나 잠깐 고민했네."
참나. 내가 누굴 때린다고. 내가 의사지, 깡패인가.
"거봐, 웃으니까 이쁘네."
"어이없어서 웃는 거거든요?"
"어쨌든. 내 덕분이네."
밝다. 환하다. 예쁘다.
참, 좋은 사람이다.
"ㅇㅇ아."
"... 네."
"솔직하게 얘기해."
솔직하게 얘기했는데...
"겉마음 말고, 네 진짜 속마음을 말해."
"....."
"어떻게 이쁘게 말하지, 어떻게 정리해서 말하지 고민하지 말고."
"......"
"생각나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끌리는 대로."
"......"
"정리할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막 떠오르는 대로 말해."
"....."
"상처받으면 상처받는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속상하면 속상한 대로, 무서우면 무서운 대로, 떨리면 떨리는 대로."
"그게 진짜 속마음이지."
"네가 뭘 어떻게 말하든, 진짜 너의 사람이라면 다 알아 들어줄 거야. 그리고, 본인의 속마음을 들려줄 거야."
그 사람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진짜,
내 사람이 맞을까.
[뭐해요?]_4:57
[촬영 일찍 끝나서, 쉬어.]_4:58
[왜?]_4:58
내 속마음은 뭘까.
[저 오늘 6시 반에 퇴근해요.]_5:03
그 사람의 속마음은 뭘까.
[저 데리러 와주세요.]_5:04
[저랑 저녁 먹어요. 제가 살게요.]_5:05
나는 내 속마음을,
말할 수 있을까.
[병원 주차장에 있을게. 뒤쪽으로 나와.]_5:07
그 사람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을까.
떨린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나올까.
혹시 이미 다 정리해버렸나.
내가 너무, 늦어버렸나.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못했는데.
보인다. 긴장되고 떨리기 시작한다.
심호흡하자.
"왔어?"
".... 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어디로 갈까?"
"오늘 제가 산다고 했잖아요. 뭐 먹고 싶으세요?"
"나? 나 진짜 다 괜찮은데. 난 너만 괜찮으면 돼."
"아 진짜..."
"일단 타자. 타고 얘기하자."
"그래서 어디로 가면 돼?"
"음... 파스타 괜찮아요?"
"파스타 먹고 싶어? 파스타 먹자, 그럼."
"아니 오빠 괜찮냐고요."
"응. 괜찮아."
"...."
"난 너 좋으면 다 괜찮다니까?"
하, 진짜.
"여기로 가요."
있는 시간 없는 시간 쪼개가며 검색한 가게는
룸 형식으로 되어있는, 테이블마다 공간이 분리된 레스토랑이었다.
"많이 드세요. 오늘은 진짜 제가 살 거예요. 카드 꺼내지 마세요."
"저번에도 네가 샀..."
"안돼요. 오늘은 제가 먹자고 했잖아요."
"그래, 알았어. 얼른 먹어."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았다.
대화가 끊기지도 않고, 어색하지도 않고.
밥도 괜찮았고, 분위기도 괜찮았고.
"근데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어?"
"에?"
"누구랑 와봤어, 이런 곳."
"누구랑 와보긴요, 인터넷 찾아봤어요."
"....."
"아무래도 사람 많은 곳은 불편하실 것 같아서, 검색 좀 해봤어요."
"... 고마워."
"별말씀을요."
밥도 다 먹었고,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티만 쳐다보다가
이제는 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스쳐갔다.
".....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 응."
"무슨 고민했어요, 5일 동안?"
"음..."
"저는요,"
"....."
"고민이라기보단, 걱정을 했어요."
"....."
"내가 민폐가 되면 어떡하지, 내가 걸림돌이 되면 어떡하지."
"ㅇㅇ아."
"혹여나 나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은 거예요."
속마음.
겉마음 아니고, 진짜 내 속마음.
"저는 좀 무서워요."
"...."
"오빠는 배우잖아요, 공인이고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사는 직업인데,"
"...."
"나 때문에. 내 존재가 방해가 되면, 그게 문제가 돼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하면."
"......"
"그건 진짜... 안될 일이잖아요."
"....."
"또 혹시나... 그런 일이 생겨서."
"....."
"나는 진심으로 좋아졌는데, 날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지. 나로 인해 생긴 문제들 때문에 날 미워하게 되면 어떡하지."
"....."
"그걸 걱정했어요, 혼자."
필터링 없이, 돌려 말하는 거 없이.
"제가 생각보다 혼자 남겨지는 걸 무서워해요."
진짜 내 속마음.
"그 작은 머리로 엄청나게 걱정 많이 했네."
"....."
"왜 그런 생각을 했어?'
"그냥..."
"나는,"
"...."
"나도 고민보다는 걱정이었던 것 같아."
"난 무서웠어. 네가 날 피할까 봐."
"내 직업이 배우라서, 네가 도망가 버릴까 봐."
"...."
"나는 너라면 다 괜찮은데, 나만 괜찮은 걸까 봐. 네가 안 괜찮을까 봐."
"....."
"네가 나를... 안 볼까 봐."
"....."
"그래서 연락 못 했어. 무서워서. 진짜 답장 없을까 봐."
나는....
괜찮을까.
"난 너라면 다 괜찮아."
"....."
"빈말 아니고, 그냥 하는 말도 아니고, 생각 없이 하는 말도 아니고, 지금 너 잡으려고 막 던지는 말도 아니야."
"...."
"진심이야."
"....."
"네가 날 버리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널 떠나는 일은,"
"....."
"없어. 내 모든 걸 걸고 말할 수 있어."
"....."
"내가 먼저 등 돌리는 일, 절대 없을 거야."
믿고 싶다.
설령 저 말이 거짓이래도, 지금뿐인 말이래도, 믿어보고 싶다.
"저는... 모르겠어요."
"...."
"지금 괜찮을 거라고 장담 못 하겠어요."
"....."
"어쨌든 저는 병원에서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고,"
"....."
"그러다 보면, 뭐... 여러 일이 생길 수 있잖아요."
"... 그렇지."
"근데, 또 겪어보기 전에는 모를 것 같아요."
"....."
"제가 생각보다 깡이 또 세요."
"... 풋."
"웃어요?"
다행이다. 표정이 좀 풀리네.
"그러니까, 제가..."
"응."
"짜증 낼 수도 있어요. 투정 부릴 수도 있고요. 화를 낼 수도 있고, 갑자기 막 울 수도 있고."
"다해. 나한테 다 해."
"......"
"내가 다 받아줄게. 나 때문인 거잖아. 괜찮아, 너니까."
"질려하면 어떡해요."
"내가 너한테 어떻게 질려."
괜찮을까.
내가 이 사람을 말려야 하는 건 아닐까.
"... 만났는데, 아니다 싶으면 어떡해요?"
"말해. 내가 바꿀게."
"아녀 아뇨, 저 말고 오빠가요."
"나?"
"네. 오빠가 이건 아닌데 싶으면 어떡해요..."
"그럴 리 없어."
"...."
"절대 그럴 리 없어."
"나한텐 네가 다 옳아. 다 네가 맞아. 네가 나한테 아닐 리 없어."
또 눈물이 날 것 같다.
"난 절대 그럴 일 없어."
"...."
"그러니까 혹시나 네가 아니다 싶은 게 생기면,"
"...."
"다 말해줘. 망설이지 말고."
"....."
"내가 다 바꿀게. 너한테 맞게끔 내가 다 바꿀게."
"....."
"그러니까,"
"나랑 만나자. 남자친구 여자친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