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로맨스
w.챼리
2013년 3월
역시 중학교랑 고등학교는 진짜 다르구나…. 중학생 때 보다 배는 늘어난 교과서들을 가방에 어거지로 집어 넣으며 생각했다. 오늘 두 번째로 입은 품이 조금 남는 교복도 어색했지만 가장 어색한 것은 같은 반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는 거였다. 여중을 졸업한 내게 아무렇게나 상스러운 욕들을 내뱉는 굵은 목소리가 있는 교실은 너무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역시 그냥 집 앞 여고에 갈 걸 그랬나. 공학에 가야 내신 따기가 더 쉽다며 1지망에 이 학교를 쓰길 권한 학원 선생님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심지어 친했던 친구들은 다 집 근처 여고로 가고 이 학교에 떨어진 건 정말로 나 혼자 뿐이었다.
아직 3월인데 전학 보내달라고 할까? 아님 자퇴 할까? 점점 더 극단적으로 치닫는 생각들에 혼자 웃음이 터져 고개를 숙이곤 힘 없이 웃고 있는데 내 앞으로 그림자가 지더니 누군가 손가락으로 내 책상을 톡톡 치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난생 처음 보는 잘생긴 애가 나를 보며 활짝 웃고있었다.
“진짜 맞네. 대박.”
“…….”
이미 나를 알고있었다는 듯 말하는 이 잘생긴 애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원래 아는 사이였다면 이렇게나 잘생겼는데 내가 까먹었을리가 없었다. 눈동자를 내려 슬쩍 명찰을 보니 이름 역시도 무척 생소했다. 김태형.
“너 나 알지.”
“모르는데.”
잘생긴 애는, 그러니까 김태형은 내가 자신을 모른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으며 혀를 낼름거렸다. 진짜. 진짜 몰라? 몇 번이고 확인한 김태형은 그래도 모른다는 완강한 내 대답에 당황한 듯 했다.
“어, 그, 나 제일학원 다녔던 김태형인데.”
“그런데?”
“그래도 몰라?”
“나 거기 일주일밖에 안 다녔어.”
“그니까.”
픽 하고 웃은 김태형은 곧 당황한 얼굴을 지우고 처음 봤던 그 얼굴 처럼 입을 네모로 만들어 웃었다. 와… 엄청 잘생겼다. 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김태형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암튼 난 김태형이야. 솔직히 좀 충격이다. 나는 학원에 나 모르는 애 없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 했으면 자뻑 미쳤다고 했을텐데 김태형이 그렇게 말 하니까 어쩐지 수긍이 갔다. 멋대로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빙글거리던 김태형은 곧 웃음기를 거두고 목을 한 번 큼큼 가다듬었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너 남자친구 있어?”
“아니.”
“그럼 나랑 사귈래?”
나는 김태형의 말에 너무 놀라 잡힌 손을 홱 하고 뺐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사귀자니?! 잠시 동안 장난일까 생각했지만 표정을 보니 퍽 진지해 보였다. 심지어 패기 있게 그런 말은 지른 사람 치고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대답 없이 김태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김태형이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굴 때 쯤 작게 대답했다,
“…그래.”
내 대답에 고개를 치켜 든 김태형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또 입을 네모로 만들어 웃었다. 나는 그냥 그 애를 따라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어쩌다 로맨스
w.챼리
“누나 떡볶이 사주세여.”
“내가 왜?”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정국이가 내 왼 팔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며 보챘다. 나는 나를 짖누르는 무게감을 애써 무시하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전정국은 내가 4년동안 몸을 담았던 테니스 동아리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이었다. 얘가 이러는 건, 공강 시간에 교내 카페에 자리가 없어 잠깐 들렀던 동아리방에서 쭈뼛쭈뼛 서 있는 정국이에게 괜히 말을 건냈던 내 잘못이었다. 스포츠과학과면 수업 때도 운동 많이 하지 않아? 뭘 또 동아리에서 까지 운동을 하려고 그래. 내 말에 전정국은 언제 쭈뼛거렸냐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헉 누나 저 스포츠과학과인지 어떻게 알았어여?! 혹시 저한테 관심 있어여?! 그 때 정국이는 뒤에 스 포 츠 과 학 과 라고 크게 써져 있는 과잠을 입고 있었다.
그 이후로 전정국은 틈만 나면 나한테 와서 앵겨댔다. 참다 못한 내가 왜 늬 동기들이랑 안 놀고 나한테 지랄이냐 물었더니 웃으며 그러는 것이었다. 욕 하지 마여. 근데 욕 해도 예쁜 건 인정. 나는 예쁘다고 해서가 절대 아니고 어이가 없어서 그냥 따라 웃고 말았더랬다. 정국이가 내게 앵겨서 하는 말은 딱 두 가지로 추릴 수 있었다. 밥 사주세요, 저랑 술 마셔요.
“다른 선배들은 사달라고 말만 하면 다 사준다 그러던데 누나는 도대체 왜 그래여?”
“나는 그렇게 말한 적 없으니까.”
정국이는 오 그렇넹.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포기 할 생각은 없는지 내 팔을 더 세게 잡았다.
“오키 오키. 그럼 내가 사줄테니까 가요.”
“됐거든. 너나 가서 쳐먹어.”
“쳐먹으라뇨 누나. 진짜 누나 너무 까칠해. 근데 예쁘니까 인정. 사실 튕기니까 더 매력 쩔어.”
“참 나 그렇게 말하면 뭐 누가 좋아할 줄 아나.”
나는 진짜 예쁘다고 해서가 아니라 마침 떡볶이가 먹고 싶기도 해서 결국 못 이기는 척 몸을 틀었다. 떡볶이 집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을 눈치 챈 정국이가 그제서야 내 팔을 놓으며 아싸 소리를 질렀다. 뭔가 속은 느낌이 조금 들긴 했지만 어차피 떡볶이가 먹고 싶으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떡볶이 집에 들어가 굳이 창문에 붙은 긴 테이블에 달려가 앉은 정국이는 자기 옆자리를 팡팡 치곤 얼른 오라며 손짓했다.
“이모 떡볶이 2인분이랑 꼬마김밥 두 줄이랑 순대 주세요! 내장 많이!! 아. 튀김두요!!”
“누나 혹시 며칠 굶었어여?”
“시끄러.”
근데 왜 이렇게 많이 시키냐며 웃음을 터뜨린 정국이는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본격적으로 나를 감상이라도 하려는 것 처럼 테이블에 팔을 괴고 나를 쳐다봤다. 부담스러우니까 눈깔 치워라. 다소 과격한 내 말에도 정국이는 실실 웃기만 했다.
“어 형!”
진득한 눈빛이 부담스러워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나를 내내 쳐다보고 있는 줄 알았던 정국이는 느닷없이 유리창에 손바닥을 붙이고 아는 사람이라도 발견했는지 소리를 질렀다. 문이 닫혀있어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았는지 그 사람이 가던 걸을 멈추지 않자 정국이는 요란스럽게 유리창을 두드렸다. 그러자 드디어 고개를 돌린 그 사람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몸을 틀어 떡볶이집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형 지금 수업 끝난거?”
“어, 근데 너 왜,”
“아. 누나, 이쪽은 김태형. 제 사촌 형이여. 경영학과예여. 형, 이쪽은 여주 누나. 과는… 근데 누나가 무슨 과였져?”
정국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잠시 생각하다가 토끼눈을 하고 박수를 한 번 짝 쳤다.
“헐. 둘이 같은 과였구나!”
“…”
“대박. 누나가 내 사촌 형이랑 같은 과라니. 우리 정말 천생연분 아녜여?”
그게 왜 그렇게 돼…? 나는 믿을 수 없는 정국이의 알고리즘에 고개를 휘휘 저었다.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로 정국이와 나를 번갈아 보던 김태형은 정국이의 손에 이끌려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된 거 같이 먹어여. 누나가 미친듯이 많이 시켜서 한 네 명까진 먹을 수 있음.”
근데 이게 아까부터 자꾸 비꼬네. 내가 눈을 치켜뜨고 쳐다보자 정국이는 장난이라며 두 손을 비볐다. 무릎이라도 꿇을까여? 하길래 손도 들라고 했더니 옆에서 풉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김태형이 언제 웃었냐는 듯이 무표정으로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너는 왜 웃냐고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찰나에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너는 운 좋은 줄 알아라. 김태형을 눈으로 살짝 흘기곤 포크를 집어 들었다. 떡볶이 냄새가 코로 들어오자 급격하게 아드레날린이 돌아 나도 모르게 허헣 하고 웃음이 나왔다. 옆에서 김태형이 또 풉 하고 웃었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근데 둘이 서로 몰랐어? 같은 과 같은 학번인데.”
“나는 한 학기밖에 안 다녔잖아.”
“그래두. 이렇게 예쁜데 몰랐을리가 없는데.”
“알긴 알았어. 안 친해서 그렇지.”
“아항.”
전투적으로 떡볶이를 흡입하는 나를 사이에 두고 정국이와 김태형이 대화를 시작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둘은 정국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오늘 처음 마주친 거였다. 내가 순대와 떡볶이를 한꺼번에 입에 욱여넣고 개강한 지 이주나 되었는데 왜 그동안 한 번도 보지 않았냐 물었더니 정국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태형이 형이 워낙 무뚝뚝하잖아여. 제가 여기 합격했다고 했을 때도 딱 두마디 했어여. 어. 그래.”
그러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정국이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테이블을 때리면서 웃다가 휴지를 두 장 뽑으면서 누나 진짜 며칠 굶은 사람 같아여. 했다. 그리고는 휴지를 작게 접어 내 입 쪽으로 내미는데 내 뒤에서 불쑥 나타난 김태형의 손이 휴지를 잡아챘다.
“뭐야 형.”
“나도 뭐 묻어서.”
허공에 어색하게 떠 있는 손을 내린 정국이는 어깨를 으쓱 하곤 휴지 두장을 다시 뜯어 이번엔 내 손에 쥐어주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 같아 둘의 눈치를 보며 어묵 국물을 느리게 퍼 먹는데 깜짝 놀라 숟가락을 떨어뜨릴 만큼 크게 벨소리가 울렸다.
“야. 매너 좀.”
김태형이 새 숟가락을 꺼내주며 말했다. 미친듯이 큰 벨소리 덕분에 떡볶이 집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정국이가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더니 헉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새끼가 왜 전화질이지? 하고 밖으로 나간 정국이는 몇 분쯤 지나 풀이 잔뜩 죽은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누나… 형… 저 운동 관둘까여…?”
일전에 정국이가 체대라서 그런지 선배들이 시도때도 없이 집합을 시킨다고 말 했었던 게 생각났다. 또 집합이냐 물으니 풀 죽은 토끼처럼 고개를 끄덕인 정국이는 옆에 내려두었던 가방을 매더니 고개를 까딱했다.
“전 먼저 가봐야 할 듯여… 기왕 이렇게 된 거 둘이 친해지세여. 앞으로 이렇게 셋이서 자주 놀게. 안녕 누나 형…”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잽싸게 밖으로 나간 정국이는 창문 밖에서 팔로 하트까지 만들어 보이고는 학교 방향으로 뛰어 갔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져나왔다. 슬쩍 옆을 보니 김태형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입술을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갑자기 정색을 하길래 나도 모르게 웃음을 뚝 멈추었더니 김태형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순간 지난 주의 일이 스쳐지나갔다. 김태형의 앞에서 울었던 게 생각나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 그 날 술도 별로 안 마셨는데 도대체 왜 그랬지…? 이제와서 후회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피해다닌 우리였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나는 더 이상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튀김을 억지로 입에 밀어넣었다. 애초에 배가 고프지 않았던 모양인 김태형은 포크로 접시를 긁고 있었다. 그냥 계산하고 나가면 되는데 왜인지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한 5분쯤을 그랬을까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건 김태형이었다.
“여주야.”
“…응.”
김태형은 옹알이를 하는 갓난애기처럼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마를 긁으며 혀로 입술을 축이는 김태형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지 고민하는 듯 했다.
“나는… 그냥 네가 반갑기도 하고, 보고싶기도 했고 그래서 그랬어.”
“…….”
“그니까 보고싶다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니라,”
“…….”
“우리가 물론 사귀었던 사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3년동안 가장 가까이 지낸 친구이기도 하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심지어 고등학교 3년 내내 나는 김태형을 제외하곤 친구가 없었다.
“친구로서 너가 신경쓰여서 그랬어. 근데 너가 싫으면 앞으로는 조심할게.”
“…….”
“앞으로 남자친구처럼 안 굴게. 괜한 오지랖도 안 부릴게.”
“…….”
“그러니까 우리 이제 그만 친구 할래?”
김태형은 말을 하는 동안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좋지. 근데 나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냐. 태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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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해요
댓글도 몇 번씩 정독하고 있어요!!
+) 정국이는 서브 남주는 아녜여! 서브남주는 미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