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음이 급하다.
얼른 가방을 챙겨 의국을 나섰다.
[나 병원 앞이야.]_18:38
지금 7시 다 되어가는데... 얼른 내려가야겠다.
엘리베이터를 향해서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전정국을 마주쳤다.
"가냐?"
"어, 너는 언제 가려고?"
"나도 가야지. 오늘도 밑에 형님 와계시냐?"
"언제 봤다고 형님이래."
"야, 같이 어 술도 마셨는데 형님이지!"
"친한 척하지 마."
"야, 너 모르게 친해졌어."
"미쳤네, 이거."
"아, 형님도 참 고생이 많으시다. 어쩌다 외과의사를 만나가지고 맨날 병원에 묶여서..."
"자기소개하냐? 간다."
아오, 말 많은 새끼. 급해죽겠는데.
"형님께 안부 전해줘!!!!!!!"
내가 전해주나 봐라.
저기 있다.
"오빠!"
저 멀리 차에 기대서있는 김석진을 보고 냅다 뛰었다.
뛰어들듯이 안기니 커다란 품으로 나를 안아준다.
"왜 뛰어와. 넘어지면 어떡하려고."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 얼마 안 기다렸는데."
"아까 병원 앞이라고 문자 보내고 20분 넘었는데..."
"그래? 몰랐는데. 너 기다리는 건 하나도 안 지루해."
"....."
"진짜야. 하나도 안 힘들어. 기다리면 너 볼 수 있으니까 괜찮아."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김석진 냄새가 난다. 마음이 안정된다.
가슴팍에 코를 박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반복했다.
내 거친 숨결이 간지러운지 웃음을 터뜨리는 그.
"뭐해. 냄새 맡아? 나 냄새나?"
"오빠 냄새나요. 오빠 냄새 좋아요.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오늘 왜 이러실까. 설레게."
"......"
"공개하길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젤 좋은 게"
"....."
"네가 이렇게 신경 안 쓰고 표현해 줄 때. 설레 죽을 것 같은데 또 좋아 죽을 것 같아."
"가자. 차 얼른 타. 다리 아프겠다."
"저녁 어떻게 할까?"
아, 저녁.
"밖에서 먹고 들어갈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어... 딱히 없는데..."
사실 저녁보다는...
"표정 보니까 지금 밥보다는 씻고 싶네."
"헐."
드디어 독심술 한다고 밝히는 건가. 이젠 숨기지도 않네.
"놀라지 마. 이제 너 표정만 봐도 다 알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독심술 할 줄 알죠?"
"무슨 독심술이야. 표정을 읽는 거지. 너한테만 한정되는 거야. 내가 너한테 관심이 많아서."
아직까지도 사람 설레게 만드는 건 재주다.
"우리 집으로 가자. 집에 재료 좀 있을 거야."
우리 집만큼 익숙한 그의 집으로 가는 길 또한 낯설지 않다.
아, 빨리 가서 씻어야지.
"너 씻을 동안 저녁 간단하게 해둘게. 옷 챙겨 들어가서 씻고 와."
"네."
옷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옷방 한칸이 전부 내 옷으로 채워져있다.
겉옷, 외출복, 편한 옷, 양말, 속옷까지...
물론 우리 집에도 그의 옷과 속옷은 물론이요 그의 물건들이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새삼스럽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각자의 집에 서로의 흔적이 짙어졌다.
나의 집에는 그의 흔적이, 그의 집에는 내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다.
기분이 참.. 묘하다.
갈아입을 속옷.. 과 편한 옷을 챙겨 화장실로 향했다.
"저 금방 씻고 나올게요!"
"응. 천천히 씻고 와."
벌써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얼른 씻고 나와야지.
이젠 익숙한 그의 보디워시 향을 뿜으며 욕실을 나섰다.
머리는 뿌리만 말려도.....
"머리 다 말리고 나와. 감기 걸려."
쳇. 들켰다. 아, 귀찮은데...
부엌에서 나온 그가 다가온다.
"날씨 생각보다 많이 쌀쌀해졌어. 다 말려야 해."
"알았어요..."
"말리기 싫다고 온몸으로 티 내는 것 봐. 귀엽게."
"....."
"이리 줘. 말려줄게."
냉큼 드라이기를 건넸다.
뒷머리를 살살 쓸며 머리를 말려주는 그의 손길이 퍽 익숙하다.
바람도 따뜻하고, 좋다.
한참을 머리를 쓸면서 말리더니 드라이기 소리가 꺼진다.
별안간 목덜미에 말캉한 무언가가 짧게 다녀갔다.
"다 말렸다."
아, 목은 솔직히 진짜 반칙 아닙니까?
목부터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큰일 났다.
아무렇지 않게 드라이기를 정리하고 있는 그를 째려봤다.
정리를 다한 그가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내 얼굴을 잡더니 입술에 쪽.
"밥 먹으러 가자."
와, 진짜 반칙이다.
"맛있어? 먹을만해?"
"먹을만하다니요. 정말 맛있는데."
"그래? 다행이다. 재료가 많이 없었어."
"진짜 맛있어요."
진심이다. 진짜 맛있다.
오므라이스 되게 오랜만에 먹는데 맛있다.
열심히 오물오물 먹고있는데,
"밥 먹고 산책 갈까? 요 앞에 공원 있잖아."
헐.
입에 밥이 들어있어서 소리는 못 지르고 고개만 미친 듯이 끄덕끄덕. 밥 안 씹고 있었으면 우렁차게 대답했다.
"걷는 게 그렇게 좋아?"
"네. 완전요."
"근데 왜 말 안 했어?"
"네?"
"초반에. 나한테 걷자고 말한 적 없었잖아."
"아..."
그때는 걷자고 말할 수 없었으니까.
내가 어떻게 같이 걷자고 말했겠는가. 무슨 용기로. 미쳤다고.
"나 아예 몰랐잖아. 네가 산책하는 거 그렇게 좋아할 줄 꿈에도 몰랐어."
"그때는... 말을 못 하죠, 같이 걷자고."
"왜 못해."
"어떻게 해요. 걷자마자 사람들 다 알아볼 텐데, 미쳤다고."
"....."
"괜찮아요. 지금 같이 걸으면 된 거지, 뭐."
그의 표정이 뭔가 어두워졌다.
"얼른 먹고 나가요!"
"천천히 먹어. 그렇게 좋아?"
"완전."
내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는가. 그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뿐.
"옷 따뜻하게 입어. 생각보다 쌀쌀해. 어두워."
"음..."
"내 가디건 입어, 그럼. 네 가디건 얇아. 이거 입어."
그가 내 손에 들린 옷을 다시 옷장에 걸고, 본인이 고른 카디건을 입혀준다.
확실히 두꺼워서 따듯하긴 하다만, 좀.. 크다. 많이 크다.
"풉."
아빠 옷 훔쳐 입은 핏.
나를 본 그가 웃음을 참지 못한다.
"팔 이리 줘. 걷어줄게."
"왜 웃어요. 놀려요?"
"놀리긴. 귀여워서."
아무렇지 않게 던진 설레는 말에 저는 맞아 죽을 것 같은데요..
꼼꼼하게 두 팔을 다 걷어준 그가 다시 내 얼굴을 붙잡는다.
또 입술에 짧게 닿았다 사라지는 온기.
"가자, 우리 애기."
아, 나는 개구리였다. 그가 던진 다정한 돌을 온몸으로 맞는, 그러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어두운 공원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평일이기도 하고, 시간이 늦기도 했고.
그의 손을 잡고 함께 걷는 공원.
아, 진짜 많이 용감해졌다. 처음에는 옆에 서있는 것조차 겁났었는데.
옆에서 걷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어쩌다 이런 사람이 내 옆에..
"왜? 추워?"
"아뇨."
그를 처음 응급실에서 만났던 게 겨울. 추운 어느 날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벌써 7번의 계절을 보낸 후 다시 그와 보내는 두 번째 가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저기 잠깐 앉을까?"
"그래요."
산책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가로등 두 개가 주위를 밝혀준다.
"안 추워? 괜찮아?"
내 옷을 여며주며 나를 챙기기에 정신없는 그.
그의 손을 잡아 주머니에 넣었다.
"괜찮아요. 아직은 그렇게 춥진 않아요."
"추우면 바로 말해. 집 들어가게."
"네."
"따뜻한 거 사 올까?"
"아뇨. 그냥 이렇게 손잡고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그러자, 그럼."
고요하다.
어두운 하늘이 머리 위를 덮는다.
그와 맞잡은 손이 따뜻하고,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그의 향기가 포근하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다.
"ㅇㅇ아."
"... 네."
노곤노곤하다. 졸린 건 아닌데 눈뜨기 싫은 기분.
"나 뭐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요?"
"... 어..."
그가 망설인다. 대체 뭐길래...
".... 왜 결혼이 하기 싫은 거야?"
아하. 이거였구나.
혹시 아까 밥 먹을 때 표정이 안 좋았던 것도 이거 때문인가?
"그냥... 나는 진짜 너 옆에만 있으면 충분해. 그건 진심이야."
"...."
"이렇게 네가 좋아하는 산책 같이 하고, 손잡고 같이 돌아다니고. 행복해."
"....."
"근데... 한 번씩 울컥울컥 욕심이 날 때가 있어."
"....."
"작년에 내 친구 결혼식 갔을 때. 너무 행복해 보이는 거야, 신랑도 신부도."
"......"
"나도 널 저렇게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은데. 나도 할 수 있는데. 또 네가 신부 이쁘다고 그랬잖아."
"......"
"내 눈엔 네가 훨씬 이쁜데. 네가 저렇게 하얀 드레스 입으면 얼마나 이쁠까 싶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고. 내가 훨씬 더 이쁜 드레스 너한테 입혀줄 수 있는데."
"......"
"그리고 요즘 걔 프로필 사진이 아기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거든."
아, 최근에 출산하셨다는 얘길 듣고 선물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선물같이 골랐잖아, 우리. 그때 네가 아기 신발 고르는 모습을 보는데, 아 이게 우리 거 사는 거였으면 좋겠다, 싶고."
"...."
"너 닮은 아이면 정말 이쁠 텐데, 싶고."
"......."
"무엇보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쉰다.
"얼마 전에 너 아팠을 때."
아, 얼마전 당직 중 응급실에 찾아온 진상 환자. 알코올중독자였다.
아이를 향해 던지는 트레이를 몸으로 막았고, 트레이 안에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팔이 찢어졌었다.
"그때 연락받고 응급실로 미친 듯이 달려갔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했잖아."
"....."
"법적 보호자가 아니라서 아무것도 못한대, 나는."
"......"
"결국 네 선배가 내려와서 해줬잖아."
그는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접수가 불가능했고, 내가 직접 움직여야 했는데,
"여기랑 여기. 싸인만 해줘. 데스크에 얘기는 내가 해놓을게."
"감사합니다, 선배."
"왜 네 몸을 던져. 당분간 움직이지마. 무리하지도 말고. 링거 다 맞아. 확인하러 올거야, 나."
"...알겠어요."
결국 호석 선배가 내려와서 대신 나 대신 일을 처리해 줬었다.
"그때 너무 화가 나는 거야, 나 스스로한테."
"....."
"너는 피를 흘리고 누워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옆에만 있어야 되는 게 너무..."
"...."
"... 그래서. 자꾸 욕심이나."
"...."
"혹시 내가 뭔가 부족해서 그러는 거면..."
"아니에요."
그 때문이 아니다.
"오빠 때문이 아니에요."
그 때문일 리가 없지 않은가.
"저는..."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음... 결혼을 죽어도 안 하겠다!는 아니에요."
"... 응."
"근데 굳이 하고 싶지도 않아요."
"....."
"오빠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고, 결혼 자체가 좀... 부담스러워요."
"....."
"저는 제 일이 너무 중요해요. 소중하고."
"알아."
"최고가 되고 말고를 떠나서, 그냥. 그냥 제 일이 너무 소중해요. 그래서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것도 있고,"
"...."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만남으로 보는 경우가 많잖아요. 우리 부모님 세대 대부분이 그러시고."
"......"
"옛날부터 그랬잖아요. 딸 가진 부모가 죄인이라고. 저는 그게 너무 싫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죽어도 이해할 수,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내가 남자보다 더 능력 있고 잘났을 수도 있는데, 왜 우리 엄마가 고개를 숙여야 하지?"
"....."
"우리 엄마도 나를 참 귀하게 키웠는데, 나는 참 열심히 살았는데. 왜 욕을 먹어야 하지? 잘나면 남자 기죽인다고 욕먹고, 못나면 수준 안 맞는다고 욕먹고."
"....."
"물론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그런 곳이 적지 않으니까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싫어했어요, 결혼을."
"......"
"지금은 안 그런 분들도 많이 계시단 걸 알아요. 하지만,"
"....."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한들, 기본적으로 며느리에게 갖는 기대가 있잖아요."
"......"
"사위는 어려운 존재고, 며느리는..."
"....."
"저는 그게 너무 싫어요. 자신 없어요."
"......"
"나는 지금 내 부모님께도 연락을 잘 못 드리고, 다정하게 못 대하는데. 남의 부모님께 꼬박꼬박 전화드리고 다정하게 대해야 하고, 쉬고 싶은데 주말에 찾아봬야 하고... 그런 건 죽어도 못하겠더라고요."
"......"
"저한테는 제 일이, 제 인생이 소중해서. 제가 좀 이기적이어서 그래요."
당신 때문이 아닌, 나의 문제.
"저 때문이에요."
문득 지난번 그의 부모님을 뵈었을 때가 생각난다.
나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온 세상에 공개되어 있는데 또 인사를 안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함께 밥을 먹자는 제안에 그러겠노라-했었는데...
어머님은 밝음 그 자체, 아버님은 과묵 그 자체셨다.
"정말 반가워요! 나는 저 자식 누가 만나주나 엄청 걱정했었는데, ㅇㅇ씨가 만나주네."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나, 그. 어머님과 아버님.
그의 형은 일이 있으셔서 못 오시고.
어색하면 어떡하나 엄청 걱정했었는데, 밝음 그 자체인 어머님 덕분에 어색함은 1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자식이 얼마나 막 살았는지 알아요?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
"엄마."
"왜. ㅇㅇ이가 아까워서 그런다, 왜."
예상치 못했던 분위기에 당황하기도 잠시, 금방 익숙해졌다.
"안 그래도 전적이 화려하다고... 대표님한테 얘기 들었어요."
"남준이? 맞아. 남준이가 잘 알아요. 쟤 어마어마한 애야~"
"아니야! 김남준 그 자식이 뭐라고 했어?"
어머님과 함께 그를 놀리고, 아버님은 슬며시 미소 지으시고.
실로, 정말 편한 분위기였다.
"근데 멋있다. 외과 쉽지 않을 텐데. 많이 힘들죠? 잘 먹어야 해. 무조건 잘 챙겨 먹어야 해."
하며 대놓고 고기를 밥 위에 얹어주시는 어머님과,
"이게 맛있다."
하며 슬쩍 내 쪽으로 밀어주시는 아버님. 그리고...
"많이 먹어. 천천히 먹어. 괜찮아?"
나 체할까 봐 주머니에 소화제까지 챙겨온 그.
차에 올라타기 전, 내 손을 꼭 붙잡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셨었다.
"미안해요. 많이 부담스러웠을 텐데 나와줘서."
"아니에요, 밥도 사주시고. 덕분에 정말 잘 먹었어요."
"너무 궁금해서, 어떤 사람인지. 근데 보고 나니까 알겠네."
"....."
"내 새끼지만 여자 보는 눈이 참 좋은 것 같아."
"......"
"저놈 잘 부탁해요. 나는 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자세히 몰라. 어렸을 때부터 사회생활을 해서 그런지... 혼자 다하더라고. 우리가 신경 쓸 새도 없이 커버렸어요."
"....."
"근데 요즘 애가 바뀌었더라고. 저번에 집에 와서 나한테 자기가 먼저 말을 걸더라고, 쟤가."
"......"
"너무 고마워요. 이제야 좀 사람같이 살더라고."
"아니에요, 제가 오빠 덕분에 변한 게 많은데..."
"아니야. ㅇㅇ이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멋있기도 하고."
"...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고, 다음에 또 봐요. 그때는 내가 더 몸에 좋은 거 사줄게."
"다음에 또 뵐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서늘한 바람이 우리 앞을 지나간다.
가로등 불빛이 흔들린다.
손에 쥐고 있던 그의 손을 조금 더 힘껏 잡았다.
그 분들이라면. 무엇보다, 그라면. 김석진이라면.
"근데..."
"....."
"또 모르겠어요."
"....."
"내가 오빠 덕분에 변했잖아요. 너무 과하게 욕심내지 않고, 그걸로 너무 나를 몰아붙이지 말고."
"....."
"덕분에 많이 밝아졌고, 편안해졌고. 무엇보다,"
"...."
"오빠 옆에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 김석진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빠에게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진심이었다.
그의 옆에만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늘 나를 안정시켜주는 사람.
".. 너 충분해. 말했잖아 나한테 과분하다고."
"내 욕심. 오빠가 워낙 뛰어난 사람이니까. 어울릴만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죠. 나도 뛰어난."
"너 뛰어나."
"알아요."
지금 본론은 그게 아니다.
"근데 저번에 생각했어요."
"......"
"아, 오빠 때문에 바뀌는게 또 생길 수도 있겠다."
"......"
"내가 결혼을 그렇게 싫어했는데,"
"....."
"오빠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거예요."
"......"
"상대가 김석진이라면, 그래도 내가 미친 듯이 거부할 수 있을까?"
"...."
"모르겠더라고요. 상대가 오빠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
"어머님 아버님도 되게 좋으신 분 같았고."
"....."
"당연히 오빠가 젤 좋고."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나도 함께 눈을 마주했다.
"나 자체를 바꿔놓은 사람인데, 충분히 가능하죠. 오빠라면."
"....."
"아직 확답은 못하겠어요. 근데, 아직도 결혼이 하기 싫어?라고 묻는다면..."
"...."
"그것도 대답 못하겠어요."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그의 손이 느껴진다.
그의 두 손이 올라와 내 볼을 감싸고,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자연스레 눈이 감기며 맞물리는 입술.
"... 고마워."
"....."
"그냥... 네가 그렇게 생각 해주는 것만으로 고마워. 감동이야."
가로등 빛이 비치는 그의 눈이 깊다.
그의 검은 눈이 일렁인다.
"... 천천히 하자. 내가 천천히 하나씩 할게."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가자, 집으로."
내 손을 잡아끄는 그를 따라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