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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n 전체글ll조회 1826l 1

 

 

 

 

 나간다는 것은

W. The Sun

 

김우빈 X 이종석

 

 

--

 

// 멍하니 있다 눈물이 흘러 누가 볼까 봐 고갤 떨구고

도망치듯 그 자릴 피하긴 해도

풀려진 신발 끈을 묶으려 주저앉다가 무너져내려

순간 모든 게 멈춰버리긴 해도 익숙해요 //

 

--

 

 

 

 

날씨가 좋았다. 그놈의 장마가 뭔지 일주일 내내 우중충 해서는 비를 끊임없이 쏟아내더니 먼지도 빗방울에 섞여 다 가라앉고 맑게 개어 구름이 걷힌 하늘은 티끌하나 없이 푸르렀다. 비가 온 뒤라 덥지도 않고 딱 적당한 날씨에 기분이 좋아 하늘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우빈이가 날 집으로 불렀다. 저번에 사소한 걸로 싸워서 한동안 연락을 끊긴 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먼저 사과하는 쪽은 우빈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사과할 생각이 있긴 했는데… 이번에도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웬일이냐. 먼저 집으로 부르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한 나는 천천히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에는 집 더럽다고 안 된다고 생난리를 피더니 사흘 동안 연락 끊기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나? 예의상 사온 간단한 먹을거리들이 담긴 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나는 아무런 대답이 없는 우빈이를 바라봤고, 우빈이는 대답 없이 날 바라보기만 했다. 왜 저렇게 분위기를 잡는대… 어색하게.

 

 

 

“뭐야, 왜 갑자기 분위기를 잡아?”

“종석아.”

“어.”

“너한테 할 말 있어.”

 

 

 

뭔데.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식탁 위에 먹을거리를 늘어놓던 나는 아직 찬 기운이 감도는 맥주 캔을 집어 들고 그것을 건네주려 우빈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

 

 

 

“헤어지자.”

“…뭐?”

 

 

 

그런 우빈이의 말에 순식간에 눈앞이 아득해져 맥주 캔을 놓친 나는 맥주 캔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며 난 둔탁한 소리가 울려서야 정신을 차렸고, 그제야 시선을 옮겨 조금은 미안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우빈이를 바라봤다. 장난이지? 장난일 거야. 김우빈이 나한테 헤어지자고 할 리가 없잖아… 그렇잖아….

 

 

 

“…야, 무슨 거짓말을 그렇게 하냐… 저번에 싸웠다고 그런 장난치는 거야?”

“종석아.”

“알아, 인정해. 그거 내가 잘못한 거 맞는데, 그렇다고 그런 말을….”

“나 여자 생겼어.”

“무슨… 소리야?”

“우빈씨, 왜 이렇게 늦어?”

 

 

 

난 애써 현실을 부정하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우빈이에게 다가갔고, 우빈이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채 아무 대답도 없이 조금 뒷걸음질 쳤다. 그런 우빈이의 행동에 조금 충격을 받았을 때쯤,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며 처음 보는 여자가 나왔다. 젖은 머리를 하고 샤워 가운만 입은 채 방에서 나오는 그 여자를 발견한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였어? 여자 생겼다는 게 진짜 였어…?

 

 

 

“너 이러려고 나 여기로 부른 거야?”

“…어.”

 

 

 

일부러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고 여자랑 밤을 보낸 다음 날에 날 불렀다고? 너 내가 알던 그 김우빈 맞아? 너 이렇게 나쁜 놈이었어? 미안함이 순식간에 배신감으로 바뀌어 어이가 없어 웃던 나는 이를 바드득 갈며 잘난 그 얼굴에 주먹을 날렸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휘청거린 김우빈은 소파 위에 주저앉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너무 세게 때린 게 아닌가 걱정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짜증났던 나는 뭐라고 욕을 뱉으려다 말고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와 버렸다. 이를 악문 채 아파트 입구까지 빠르게 걸어 나온 나는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3년이란 시간이 헤어지자는 한마디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것도 일방적이고 잔인한 통보 방식으로. 분명 난 괜찮다고 생각했다. 김우빈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때도 난 제대로 된 복수를 한 거라고. 이건 잘한 짓이고 난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다. 근데 사람의 심리라는 게 자신이 제대로 깨우치려면 시간이 좀 걸려서… 아파트 입구 벽에 기대 그대로 주저앉은 나는 욱신거려오는 주먹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거침없이 흔들리고 있는 숨을 뱉어냈다. 나… 집에 가야하는데… 제정신으로 갈 수 있을까…?

 

 

 

“아… 미치겠네….”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한 시야에 당황한 나는 황급하게 손을 올렸고, 내 손이 눈물을 닦아버리기 전에 먼저 볼을 타고 후두둑 떨어진 눈물들은 내 바지를 처연하게 물들였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물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기 바쁘던 나는 사람들이 볼까봐 고개를 떨구고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누가 보면 실연당한… 아, 나 실연당한 거 맞구나.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버스 정류장에 다다르니 서서 버스를 기다릴 힘이 없었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너무 아프고 답답해서 미치겠는데 아무리 몸을 웅크려도 그게 나아지질 않는다. 멈추지 않는 울음에 끅끅거리면서 눈물을 끊임없이 닦아내던 나는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리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야, 이종석. 너 왜 그래.”

“…수안아.”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

“그러는 넌 왜 여기에 있냐.”

 

 

 

울음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니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던 수안이는 내 앞에 쪼그려 앉아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왜 그렇게 울어?”

“…아무 일도 없어.”

“수상한데… 여기 마침 우빈이 집 근처니까 우빈이 불러줄까?”

 

 

 

수안이는 핸드폰을 꺼내며 그렇게 말했고, 그런 수안이의 행동에 당황한 나는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목을 다급하게 붙잡으며 도리질을 쳤다.

 

 

 

“아니야. 하지 마.”

“너 왜 그래? 우빈이랑 무슨 일 있었냐?”

“….”

“아이고, 너네 하루 이틀 싸우냐? 싸웠다고 울어?”

“….”

“…됐다, 집까지 데려다 줄게.”

“아냐,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김우빈 그 자식은 내가 나중에 조별과제 모임 할 때 손봐줄 테니까 그냥 가자. 마침 차도 가지고 나왔어."

 

 

 

 

**

 

 

 

 

“고마워.”

“고맙기는. 정 고마우면 나중에 술이나 한턱 쏴.”

“알았어.”

 

 

 

작게 웃은 나는 현관문을 열었고, 손 인사를 하던 수안이는 나중에 김우빈 보면 등짝이라도 때려주겠다고 너스레를 떨다 문이 닫히자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다. 잠시 문에 기대 그 발걸음 소리를 묵묵하게 듣고 있던 나는 발소리가 끊어지자 길게 숨을 뱉었다. 피곤하다… 갑자기 너무 피곤해서 이대로 잔다면 하루 종일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노곤한 몸을 한시라도 빨리 쉬게 하고 싶어 신발을 벗으려던 나는 신발 끈이 풀린 것을 발견했다. 하마터면 쪽팔릴 뻔했네. 수안이한테 고마운 게 하나 더 생겼잖아. 작게 웃은 나는 신발 끈을 묶으려 몸을 숙였고, 그 순간 몸이 크게 휘청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자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다 갑자기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먼지를 머금은 집안 공기가 내 몸을 천천히 옥죄어왔고, 또다시 이유 없이 눈물을 뚝뚝 떨구던 나는 가슴 속이 푹푹 쑤셔오는 것을 느끼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내 슬픔은 끝내 그렇게 터져버린 것이었다. 밖에 나갔다오면 항상 같이 현관까지 들어와 잘 자라며 입을 맞추고 나가던 우빈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그렇게 자상한 우빈이의 모습과 이별을 고하던 그 차가운 목소리가 계속 겹쳐 들려서. 그 기억들이, 목소리들이, 너무 괴로웠던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웅크리며 그렇게 계속 울었다.

 

 

 

 

**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힘겹게 일으킨 나는 너무 울어 조금 부어오른 눈을 조심스럽게 부비며 주변을 둘러봤다. 날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같이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괜찮느냐며 날 꽉 끌어안고 이마에 입 맞춰주던 우빈이가. 리포트가 밀려 잠도 못자고 노트북을 두드리면서 잠투정을 하면 조금만 참으라며 내 어깨를 주물러주고 나중엔 직접 재워주기 까지 했던 우빈이가 없다. 일어나자마자 쓸데없이 추억을 회상하던 내 볼에 또다시 굵은 눈물줄기가 새겨졌고, 그렇게 한참을 눈물만 뚝뚝 떨구고 있으니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들어봤지만 애석하게도 핸드폰 화면엔 다른 사람의 이름이 떠있었다.

 

 

 

“어, 수안아.”

- 뭐야, 또 울고 있었어?

“…헛소리하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왜 전화했어?”

- 매정하기는. 야, 밥이나 같이 먹자.

“밥은 무슨. 됐어.”

- 아, 몰라. 나 지금 집 앞으로 가고 있어. 나올 때까지 버틴다.

“야, 야, 야, 잠깐만… 야!”

 

 

 

뚝- 끊어져버린 전화에 넋이 나가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끝내 뭉그적뭉그적 몸을 일으키며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 근데 이 자식은 왜 갑자기 폭풍 오지랖이지…?

 

 

 

 

**

 

 

 

 

평소에 내가 즐겨먹던 음식점으로 날 끌고 들어온 수안이는 먹고 싶은 건 다 시키라며 호들갑을 떨다 끝내는 가정식 백반으로 통일을 했다. 그럴 거면 왜 고르라고 하냐 이 거지야. 난 한숨을 푹 쉬며 밥맛이 없어 반찬을 뒤적거렸고, 그런 나를 힐끗 쳐다보던 수안이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지나가는 이야기 하듯 말했다.

 

 

 

“다 들었어. 우빈이랑 헤어졌다는 거.”

“….”

“…괜찮냐?”

“응.”

 

 

 

난 애꿎은 밥만 푹푹 찔렀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불편했다. 네가 뭘 아느냐며 화를 내고 싶었지만 괜한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 같아 그것을 꾹 참은 나는 조금 흔들리기 시작한 호흡을 가다듬으며 시선을 살짝 내렸다.

 

 

 

“우빈이 외국으로 이민 가는 건 들었어?”

“…?”

“아예 거기서 눌러 붙어서 영영 안 돌아올 작정인 것 같던데… 반응 보니까 못 들었구나. 아, 김우빈 이 자식 그렇게 매정한 놈이었나.”

 

 

 

일전에 나한테 그런 적이 있었다. 자긴 되도록이면 해외로 나가는 것보다 그냥 우리나라에 쭉 눌러앉아 살고 싶다고. 나중에 경치 좋은 곳에 집을 지어서 그곳에서 너랑 평생을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이민을 간다니. 나한테 한 말이 거짓이었던 걸까 아니면 우빈이 스스로의 심경변화가 너무나도 큰 것일까. 하긴… 이젠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조금은 냉소적인 태도로 어깨를 으쓱한 나는 천천히 물을 들이켰고, 그런 나의 눈치를 살피던 수안이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주말이 되었다. 떠나는 놈은 그냥 보내고 남는 놈들끼리 술이나 마시자고 친구들끼리 난리가 난 바람에 억지로 끌려간 술자리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아… 한수안 저 자식 하나 커버하기에도 벅찬데 대체 다 몇 명이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던 나는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친구들을 무시하며 그냥 술만 마셔댔다. 술 마시고 취하면 좀… 잊혀 지겠지. 괜찮아 지겠지. 항상 우빈이가 눈앞에 아른거려서 잠에 잘 못 들었는데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야, 종석아. 너 오늘 왜 이렇게 달리냐? 너 술 못 마시잖아.”

“야, 야, 이현. 신경 꺼.”

“뭐야, 김우빈 없다고 이젠 니가 얘 아빠 노릇 하는 거냐?”

“아, 저 새끼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진호야, 쟤네 말려라. 저러다 또 술판 뒤집어 지겠다.”

 

 

 

언성을 높이며 싸움이 붙기 일보직전인 친구들을 휘휘 둘러보던 나는 다시 시선을 내리깔고 말없이 소주를 들이켰고, 그렇게 한 병을 다 비우고 나자 심장이 빠르게 뛰며 잠이 몰려왔다. 밖에 나와서 이렇게 많이 마신 건 처음인데…. 뭐라고 중얼거리던 나는 그대로 상에 머리를 쿵- 박으며 잠이 들어버렸다.

 

 

 

 

**

 

 

 

 

그 날 저녁. 난 이상한 꿈을 꿨다. 뭔가 삑삑 거리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니 누군가가 우리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는 게 보였는데, 그 비밀번호는 나랑 우빈이만 아는 거라 그렇게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으니 갑자기 몸이 들썩 거리는 듯 싶더니 다시 기억이 끊어졌다. 그 이후에는 침대에 눕혀져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는 듯한 느낌에 다시 힘겹게 눈을 떴다. 술 때문인지 시야가 너무 흐려서 누군지 정확히 판단을 할 수 없었는데, 그냥 어림짐작으로… 우빈이 같았다. 하지만 이민 간다고 바쁠 놈이 여기엔 왜 있는가. 그렇다고 날 데려가라고 일부러 불렀을 리도 없고, 나랑 우빈이가 헤어진 건 수안이가 아니까. 아… 그럼 이건….

 

 

 

“꿈인가….”

 

 

 

술에 취해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그렇게 말하니 그 흐릿한 인영은 조금 몸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술에 취하면 꿈에서도 취해있나 보다. 혼자 실실 웃으며 중얼거리니 그 인영에서 뻗어 나온 큰 손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손에선 확실하게 우빈이 향기가 났다. 그 그리웠던 향기에 손을 붙잡고 가볍게 눈을 감은 나는 어느새 울음이 차올라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빈아아… 우빈아… 보고 싶어….”

“….”

“내가 다 잘못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혼자서 울먹이면서 중얼거리고 있으니 그 인영이 점점 나에게로 가까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을 감쌌다. 그 말캉한 느낌에 잠시 몸을 움츠렸던 나는 천천히 입술을 벌리며 그 인영의 목 뒤로 팔을 감았다. 꿈이라 그런가… 머리가 점점 멍해진다…. 그렇게 입술을 마주 댄 상태에서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나는 끝내 무거운 눈꺼풀을 감아버렸고, 또다시 기억은 끊어졌다.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는 지독한 숙취에 침대 위에서 끙끙거렸다. 아, 술 엄청 마시면 이렇게 되는 구나… 새삼 깨달은 나는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술은 이만큼 안 마실 거라고 다짐하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에는 문자가 두 개 와 있었다. 한 개는 너 술 마시고 주사 부리는 영상이 자기에게 있다며 당장 밥을 사라는 현이의 협박성 문자 였고, 또 다른 한 개는 어제 집에 잘 들어갔냐며 정신없는 와중에도 알아서 문 열고 들어 가는 게 장했다는 수안이의 문자였다.

 

 

 

“그럼 그건 꿈 맞았구나….”

 

 

 

내심 우빈이 이길 바랐던 걸까…. 그 사실을 깨닫자 다시 눈물을 떨궈 낸 나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

 

 

 

 

내 일상생활은 고작 김우빈 하나 없어졌다고 완전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우빈이의 이름과 내 침대에 아직도 남아있는 은연한 체취. 보고 싶던 영화가 나와 기쁜 마음에 핸드폰을 들고 정신없이 문자를 입력하다 정신을 차려보면 항상 우빈이에게 문자를 보내려하고 있었다.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들을 때도 졸지 말라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던 것이 기억나고 그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을 뿐더러 지나가는 모든 커플들이 우빈이와 그 여자로 보이기까지 했다.

 

우빈이가 내 삶에 이렇게 깊게 파고들어와 있었나. 하고 깊게 생각하다보면 우빈이도 나와 같을까. 하는 생각에 울적해지거나 억울해졌다. 이렇게 살다가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책상 앞에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던 나는 책꽂이 한 켠에 꽂혀있던 전공책을 보다 결심했다. 계속해서 미뤘던 유학을 다녀와야겠다. 모든 연락을 끊고 공부에 집중하다보면 금방 잊을 수 있겠지….

 

 

 

 

**

 

 

 

 

유학 사실은 가족과 수안이 에게만 알렸다. 나 유학 가니 찾지 말라는 의도에서 였다. 2주라는 단기간에 유학 준비를 마친 나는 한국을 뜨는 공항 안에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다들 왜 이렇게 갑자기 가느냐는 반응이었지만 어쨌든 밀린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선뜻 날 말리진 않았다.

 

 

 

“갑자기 웬 유학이냐.”

“나도 이제 공부해야지. 정리할 건 다 정리하고… 내 인생 챙기러.”

“그래도 늦진 않아서 다행이다. 좀 일찍 알려주면 어디 덧나냐?”

“덧날 것 같아서 그랬다. 왜?”

 

 

 

농담을 주고받으며 기분 좋게 웃던 나는 순간 수안이의 어깨를 밀치다가 내 손에 끼어진 반지를 발견했다. 내가… 이걸 끼고 다녔었나…? 무의식중에 꼬박꼬박 끼고 다닌 건지 내 손가락에는 원래 그 자리가 제 자리인 것 마냥 당당하게 빛나고 있는 은색 커플링이 있었다. 섬세하게 빛나고 있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망설임 없이 반지를 빼버렸다.

 

 

 

“너 반지 끼고 다녔었냐?”

“그러게. 나도 오늘 처음 알았다.”

“뭐냐 너. 그 반지 뭔데?”

“…우빈이랑 맞춘 커플링.”

 

 

 

새로 맞춘 지 5개월도 안 지났는데… 아깝긴 하네. 은빛으로 빛나는 반지를 엄지 손가락으로 천천히 매만지던 나는 쓰레기통 앞으로 다가가 반지를 버리려 했고,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수안이는 갑자기 기겁을 하며 내 손에 놓여져 있던 반지를 뺏어갔다.

 

 

 

“뭐야. 왜 가져가?”

“요즘 내가 돈이 좀 궁해서. 괜찮으면 팔아서 용돈 좀 해도 되겠냐.”

“니가 그러면 그렇지. 그래, 팔아서 써라.”

 

 

 

얼마 못 받을 텐데… 금이라도 가져가야 용돈 벌이가 되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린 나는 어느새 가까워져 오는 비행기 시간에 조급함을 느끼며 캐리어를 쥔 손을 부산스럽게 떨었다. 진짜 새 출발이다. 잘 다녀올 수 있을까… 내심 걱정스러웠던 나는 긴장을 풀려고 쓸데없이 심호흡을 했고,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안이는 작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다녀와라.”

“응. 6개월 뒤에 다시 만나.”

“오케이. 너 돌아오기 전에 나도 뭔가를 좀 해야겠다. 이거, 엄청 꿀리네.”

“그러던가.”

 

 

 

작게 웃은 나는 시간이 다 되어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슬픔은 사라지고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설렘에 작게 미소 지으며 깊게 숨을 뱉었다.

 

 

 

 

**

 

 

 

 

시간이 흘러 6개월이 거의 다 되어 갈 즈음.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았던 유학 생활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새로 만난 친구들도 다 좋은 사람들이었고, 소통 문제도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기 까지 2주라는 시간이 남았기에 친구들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었던 나는 침대 위에 엎드려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게 한참을 볼펜을 빙빙 돌리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정신이 없던 와중이라 누가 전화했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받으니 상대편에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

“뭐야, 잘못 건건가?”

“…종석아.”

 

 

 

유학 중에 그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고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었던 그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오자 숨을 멈춘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야.”

 

 

 

또다시 한 마디에 내 귓속으로 흘러들어오자 갑자기 마음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거라서 왠지 모를 그리움이 싹 씻어 내려가는 것 같아 작게 숨을 내쉰 나는 그 짧은 몇 마디를 곱씹으며 내 기억 속에 남겨놓으려 애썼다. 그런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우빈이의 목소리가 뭔가 이상했다. 어딘가 힘이 없어 보이는 데다 말끝이 묘하게 갈라지기까지 했다. 뭐야… 어디 아픈가…. 잠시 우빈이의 걱정을 하던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애써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전화했어.”

“…그냥, 잘 지내고 있나 해서.”

 

 

 

내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는, 보고 싶었다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잘 지내고 있는가 하는 안부 전화. 우빈이의 곁에 있다 보면 자주 보는 장면이었다. 한동안 연락을 못한 사람에게 전화를 해 안부를 묻고 잘 지내고 있다면 다행이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끝내는 끊어버린 뒤에 또다시 한동안 잊고 사는. 김우빈의 안 좋은 버릇. 아마 그걸 거다. 나에게 전화한 이유는. 그 안 좋은 버릇이 발동한 것일 거다. 순간 나와 우빈이 사이에는 이미 장벽이 쳐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나는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전화기에 대고 울분을 토해냈다.

 

 

 

“이런 전화 하지 마. 너 잊고 잘 살아보겠다는 사람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

“이제 겨우 편해져 가는데 꼭 이렇게 전화를 해서 내 속을 뒤집어 놔야겠냐? 날 그렇게 끝까지 괴롭히고 싶어?”

 

 

 

대답은 없었다. 그저 불안한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도 없던 우빈이는 조금은 담담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알면 됐….”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김우빈.”

 

 

 

이상했다. 갑자기 조급해져 말을 쏟아내는 우빈이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뭐야, 얘 갑자기 왜 이래. 술이라도 마셨나? 그런 우빈이의 목소리에 살짝 당황한 나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용서해줘.”

“…김우빈. 왜 그래 갑자기.”

“아… 미안. 갑자기 전화해놓고 이상한 말만 해서….”

“김우빈.”

“…종석아.”

“….”

“사랑해.”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전화가 끊어졌다. 이게 뭔가 싶어 전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들고 한참을 망연히 앉아있던 나는 어딘가 찝찝한 기분에 핸드폰 화면을 이리저리 매만지다 끝내 다시 전화 거는 것을 포기했다. 그냥… 술 마시고 나서 주사 부리는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 그렇게 다시 사랑한다는 말을 뱉을 리가 없잖아. 작게 한숨을 쉰 나는 침대에 힘없이 드러누우며 흰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이제 완벽하게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날 흔들어 놨다. 나쁜 놈.

 

 

 

 

**

 

 

 

 

정확히 2주 뒤. 한국에 도착해 공항을 나오니 새 차를 뽑은 수안이가 마중 나와 있었다. 새 차를 뽑은 걸 보면 그 사이에 좋은 곳에 취직이라도 한 모양이었는데, 어딘가 모르게… 수척해 보이는 모습에 난 조금 미간을 구겼다.

 

 

 

“야, 차 뽑으려고 일을 죽어라 했냐? 엄청 수척해졌네.”

“어? 어… 좀. 일을 엄청 하긴 했어.”

 

 

 

애써 웃어 보이는 것 같은 수안이의 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일 것 같아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차 트렁크에 짐을 실었다.

 

 

 

 

**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그런지 창 밖 풍경을 하나도 놓치기 싫었다. 고작 6개월 다녀왔을 뿐인데 향수병이 어찌나 심하던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유학 가면서 있었던 일화들을 줄줄이 뱉어놓던 나는 뒤로 갈수록 점점 수안이의 반응이 없자 조금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뭐냐 너. 반응이 그렇게 없으면 말하는 게 재미가 없잖아.”

“…미안.”

“너 뭔가 수상하다?”

“내가 뭘.”

 

 

 

마침 신호가 걸려 차를 세운 수안이는 차 핸들에 손을 올려놓고 어딘가 불안한지 계속해서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렸고, 그런 수안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뭔가 힘든 일이 있긴 있을 거라고 치부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쭉 직진을 해야 하는 길에서 갑자기 유턴을 했다. 뭐야 이거? 얘 우리 집 아는데?

 

 

 

“뭐야? 우리 집 저쪽인 거 벌써 잊었냐?”

“알아.”

“근데 왜 차를 돌려?”

“네가 가야할 데가 있어.”

 

 

 

 

**

 

 

 

 

수안이가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납골당이었다. 뭐야, 웬 납골당? 안전벨트를 푼 나는 멀뚱히 납골당 건물을 바라보다 수안이를 바라봤고, 어두운 표정으로 납골당을 바라보던 수안이는 나에게 고갯짓으로 내리라는 신호를 주고는 차에서 내렸다.

 

 

 

“갑자기 웬 납골당이야? 누구 돌아가신 분 계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침울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는 수안이의 시선만이 있을 뿐. 그 시선을 말없이 마주하던 나를 불현 듯 찾아 온 이유 모를 불안함에 눈을 크게 떴다. 수안이의 눈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슬픔. 그리고 그 슬픔이 불러 온 내 기억. 2주 전의 전화. 이상했던 우빈이의 태도.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나는 두려움에 거침없이 흔들리는 시선을 납골당 쪽으로 옮겼고, 수안이는 말없이 납골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그런 수안이와 조금 거리를 둔 채 그 뒤를 따라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나는 수안이가 어느 곳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덩달아 같이 걸음을 멈췄다. 수안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수안이의 눈은 어느새 붉어져 있었고, 그런 수안이의 눈을 마주하던 나는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그 앞을 바라봤다.

 

 

 

“우빈이는 끝까지… 평생 동안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그건.”

 

 

 

투명한 유리 속. 그 좁은 공간 안에 들어있는 함 안에는 우빈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뭐야. 왜… 우빈이 이름이 저기에 있는 거야?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그 바로 앞으로 달려간 나는 틀림없이 적혀 있는 세 글자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우빈이. 평생 너한테 숨길 생각이었어.”

“거짓말… 아니야… 아니라고… 너 지금 나한테 장난치는 거지? 어?”

“종석아…”

“장난이라고 말해! 멀쩡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죽어!”

 

 

 

 

소리치며 수안이의 멱살을 잡은 내 몸은 이미 거침없이 떨리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고… 그렇게 건강하던 놈이… 왜 죽는 건데…? 고작 6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왜…! 그렇게 흔들리는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내 손을 가볍게 잡아 내린 수안이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려뜨리며 말했다.

 

 

 

“시한부 판정 받았었어. 너한테 헤어지자고 하기 한 달 전에.”

“…!”

“너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 비밀로 해달라고 했어.”

“….”

“모두 거짓말 이었어.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것도. 이민 간다고 했던 것도. 너한테 헤어지자고 했던 것조차 전부 다.”

“그만….”

 

 

 

 

납골당 안의 공기가 내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점점 숨을 쉬기 힘들어져 가슴을 부여잡은 나는 애써 시선을 바닥으로 돌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사실 나도 부탁받은 거였어. 자기가 그렇게 하면 니가 많이 힘들어 할 거라고. 자기를 더 빨리 잊을 수 있게 옆에서 잘 도와달라고….”

“그만하라고 제발….”

“…2주 전에 우빈이 전화 받은 적 있지?”

“….”

“아무리 힘들어도 모든 일에 의연하던 놈이 갑자기 너 보고 싶다고 하더라.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고.”

 

 

 

2주 전에 왔던 전화… 유난히도 힘들어 보였던 그 목소리…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사랑한다고 했던 그 목소리… 내가 끝내 용서해주겠다는 그 짧은 말을 뱉지 못하고 모진 말만 뱉어냈던 그 전화….

 

 

 

“그 다음 날 떠났어.”

“…!”

“자기 갈 날을 알았던 거지. 아픈 목소리 숨겨야 한다고 한참 목을 가다듬고 통화를 하고 나서는 나한테 대뜸 그러더라. 자기가 여태 널 떨어트려 놓으려고, 자길 잊게 하려고 했던걸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그 모든 것이 후회된다고. 네가 괴로워할까 봐 일부러 떠나보낸 건데 정작 곁에 없으니까 너무 보고 싶다고… 곁에 종석이 네가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힘겹게 숨을 뱉어내던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우빈이의 자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투명한 유리로부터 전해져 오는 차가운 냉기. 예전의 그 따뜻한 온기를 다신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가슴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그 안을 그득하게 채우고 있던 것들이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전부 사라져 버려서 매서운 찬바람이 끊임없이 불어대는데… 그 찬바람에 이곳저곳이 찢겨져 나가 가슴 속에 피가 차오르는데… 아무리 손으로 가슴을 세게 부여잡아 봐도 그 바람은 멈추지 않고 벌어진 상처를 계속해서 긁어댔다.

 

 

 

“가기 전 까지 그러더라. 너한테 너무 미안하다고.”

“….”

“그래도 행복하단다. 네가 우는 거 안 바란다고. 자기를 잊고 평생 웃으면서 살게 될 거니까… 그거면 됐다고.”

“….”

“멍청한 자식… 어떻게든, 언젠가는 네가 알게 될게 뻔한데 왜 그렇게 서로 힘든 길을 택했는지…”

 

 

 

난 천천히 그 안을 살펴봤다. 함 옆에 놓인 사진 속 우빈이는 밝게 웃고 있었다. 그 사진 속 우빈이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끝까지 나한테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옮겨 그 옆을 바라보다 숨을 멈췄다. 나란히 놓인 한 쌍의 커플링. 슬프게 빛나고 있는 그 커플링을 본 순간 내 마음 속에 불던 서슬퍼런 바람이 멎었다. 그 바람이 멎으면 좀 덜 아플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그 바람이 멈추자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함에 마음이 아려왔다. 그게 너무 아파서, 고통스러워서 이를 악물며 가슴을 세게 쥔 나는 거칠어진 숨을 뱉으며 납골당을 빠져나가려 했다.

 

 

 

“어디 가려고.”

 

 

 

울음기가 섞여 있는 목소리를 내던 수안이는 내 팔을 붙잡았고, 어떻게든 터져 나오려는 무언가를 애써 꾹 누르던 나는 그것이 터지지 않게 숨을 참으며 작게 말했다.

 

 

 

“나… 우는 거 안… 보여 주려고… 우빈이한테 안 보여주려고… 그러려고 이러는 거니까… 제발 놔 줘.”

 

 

 

우빈이 앞에서 울긴 싫다. 나보다 마음 아파할 게 뻔하니까.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던 수안이는 내 팔을 놓아주었고,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기던 나는 끝내 소매로 입을 꽉 막으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

 

 

 

 

그렇게 납골당 뒤편 어느 나무 앞까지 달려간 나는 끝내 그 나무 앞에서 쓰러지듯 주저앉아 가슴을 쥐어뜯었다. 너무 아프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이 아프다. 이렇게 아파본 적은 처음이라 무섭다. 너무 텅 비어버려서. 가슴 속에 아무 것도 남지 않아서… 더 괴로웠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자 그 고통과 슬픔이 뒤섞여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눈물은 끝내 내가 억누르고 있던 것마저 터트려 버렸다. 난 그렇게 울음을 토해냈다. 숨을 쉬기가 너무 힘들어 꺽꺽 거리면서도 너무 슬퍼서 목을 타고 들어오는 숨을 쳐내며 울음 소리를 뱉어냈다.

 

 

 

“우빈아… 우빈아….”

“….”

“으으윽… 흑… 우빈아….”

“….”

“왜 그랬어… 왜….”

 

 

 

억지로 슬픔을 짓누르며 불러도, 끝내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불러도 내 목소리는 허공에 흩어져 스러질 뿐 그 부름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맘 같아선 당장이라도 내 가슴을 헤집어내 심장을 꺼내버리고 싶었다. 너무 아파서, 괴로워서 죽을 것만 같은데…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고 울부짖는데도 눈물에 젖어 경련하는 심장은 끊임없이 고동치며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나도 이렇게 아픈데… 우빈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혼자서 그 고통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렇게 한참을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던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올려 추운 날씨 속에서도 언 땅을 뚫고 돋아난 초록빛 새싹을 바라봤다. 그 새싹을 바라보자, 갑자기 내 머릿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또 다른 기억이 고개를 내밀었다. 헤어지기 일주일 전. 우빈이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종석아.’

‘응.’

‘어떤 기억이든 겨울이 지나면 잊어버린대. 괴로웠던 기억도, 슬펐던 기억도, 힘들었던 기억도… 행복했던 기억까지도.’

‘뭐야, 겨울 안티야? 겨울한테 왜 그래. 불쌍하게.’

‘봄은 모든 것이 다시 시작하고 태어나는 계절이잖아. 그 계절이 온다는 설렘에 정신이 팔려서 다 잊어버린대.’

‘그래? 음…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말하는 거야?’

‘니가 저번에 말해줬잖아.’

‘내가?’

‘와, 우리 종석이 기억력 진짜 대단하다.’

‘너 지금 내 기억력 비하하냐?’

‘아니, 그건 아니야. 그냥… 너무 인상 깊었던 말이라….’

 

 

 

그 땐 그냥 하는 말이겠거니 했는데… 자신이 겨울에 떠날 것을 알았던 우빈이는 내심 그 잔인한 겨울이 지나면 자신을 잊어주길 바랐던 것이었다. 그냥 잊고 잘 살아주기를…. 내가 슬프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뒀었는데… 이렇게 울고 아파하고… 미안해 우빈아…. 애써 울음을 참아내려 소매로 입을 막으며 소리를 죽인 나는 몸을 웅크리며 눈을 꽉 감았고, 그런 날 부드럽게 비추는 햇빛은 봄의 따스한 햇살이 곧 올 거라며 울지 말라 내 어깨를 한껏 감싸 안았다.

 

 

 

 

 

***

 

 

 

 

[ 그 남자는…. ]

 

 

--

 

 

// 맘에도 없는 말들로 그렇게 널 떠나보내고

멀어진 뒷모습에 참고 있던 눈물 왈칵 쏟아내 버렸죠

그 때 니가 나에게 했던 그 말 아직 기억하는 지

또다른 겨울이 찾아오면 모든 게 다 잊혀질 거라고 했던 그 말 //

 

 

--

 

 

 

 

크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참았던 눈물을 한 방울을 뚝 떨궈낸 우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 눈물을 닦아냈다.

 

 

 

“괜찮겠어 우빈아?”

 

 

 

방문에 기대어 서있던 여자는 제 가운을 제대로 여미며 우빈에게 다가갔고, 그런 여자를 힐끗 쳐다 본 우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웃어보였다.

 

 

 

“어.”

“….”

“종석이가 나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차라리 이렇게 날 잊게 해서 행복해지게 하는 게 나아.”

“하지만….”

“이건 나만 계속 아프면 되잖아. 종석이한테 괜히 큰 슬픔을 주고 떠나고 싶진 않아.”

“….”

“…고마워. 선뜻 도와주겠다고 해줘서.”

“너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그냥 그렇게… 떠나도 괜찮겠냐고.”

 

 

 

그 여자의 말에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던 우빈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지금도 미친 듯이 후회되긴 하는데… 내 영정사진 앞에서 울 종석이 생각하면 괜찮아져. 하나도 안 아파.”

 

 

 

 

**

 

 

 

 

화장실을 간다던 수안은 그 길로 음식점 밖으로 빠져나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우빈아.”

- 어, 수안아. 잘 되가?

“…어. 이민 간다는 이야기까지 했어.”

- 고마워. 앞으로 조금만 더 도와줘.

“…근데 우빈아.”

- 어.

“정말 괜찮겠냐? 종석이 많이 힘들어 한다. 너 잊는 걸 너무 힘들어하고 있어.”

- ….

“이제라도 다 말하고 그냥 같이 있는 게….”

- 아니야. 안 돼 그건.

“…하, 미련한 새끼. 꼭 그렇게 까지 해야겠냐.”

-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히 잊을 텐데 뭐….

 

 

 

사람을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느냐고 쏘아 붙이려던 수안은 끝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음식점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우울해 하는 종석의 모습을 지켜보던 수안은 끝내 눈을 꽉 감았다 뜨며 다시 음식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수안의 전화를 받고 술자리에 도착한 우빈은 수안이 미리 데리고 나온 종석을 업고 집으로 향했다.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애가 아니었는데…. 완전히 취해 거의 기절한 듯이 잠들어있는 종석을 보며 잠시 한숨을 푹 내쉰 우빈은 종석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 종석을 침대에 눕히며 이불을 정리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마음 아프게….”

 

 

 

이렇게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내가 너무 못난 놈이라… 어쩔 수 없다…. 곤히 잠들어있는 종석의 얼굴을 천천히 매만지던 우빈은 차오르려는 눈물을 참아내려 천장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 때, 종석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웅얼거리는 듯 싶더니 자기가 다 잘못했다고 보고 싶다고 하는 종석의 말에 끝내 눈물 한 방울을 떨군 우빈은 저를 붙잡고 울먹이는 종석의 입술에 입 맞췄다.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지만 개의치 않고 그 부드러운 입술을 한동안 마주하고 있던 우빈은 그 사이에 잠들어버린 종석을 다시 천천히 눕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다 종석아… 잘 자라.”

 

 

 

떨리는 숨을 크게 토해내며 몸을 돌린 우빈은 현관문 앞으로 걸어가다 갑자기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제 배를 부여잡고 고통을 참아내려 이를 바드득 갈았다. 왜 하필이면 이럴 때… 벌써 진통제 효과가 다 됐나…. 그렇게 제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고통스러워 하던 우빈은 고통이 조금 가시자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종석의 집을 나섰다.

 

 

 

 

**

 

 

 

 

“이거, 종석이가 버리려고 하더라.”

“…커플링이네.”

 

 

 

수안이 건네준 커플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빈은 말없이 제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바라보다 말했다.

 

 

 

“오늘 떠났다고 했지?”

“…어.”

“언제 온다고 했냐.”

“6개월 뒤.”

 

 

 

그럼… 모든 게 끝났을 때 오겠구나…. 잠시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던 우빈은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제 손에 있던 반지까지 빼서 그 두 반지를 수안에게 건넸다.

 

 

 

“나 죽으면 같이 넣어줘라.”

“….”

“뭐해, 안 받고.”

“야, 이 멍청한 새끼야. 그렇게 그리워할 거면 왜 보냈냐. 어? 그렇게 혼자 힘들어 할 거면서 왜 보냈냐고!”

 

 

 

수안은 끝내 참고 있던 분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다 우빈에게 뱉어냈다. 팔에 링거 줄을 줄줄이 매달고 있던 우빈은 그런 수안을 바라보며 잠시 놀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옅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난 괜찮은데.”

 

 

 

 

**

 

 

 

 

수척해져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우빈의 잔뜩 말라버린 팔 곳곳에는 진통제 주사 자국과 링거 바늘이 그득했다. 그래도 판정난 기간 보다 한 달 정도 더 버텼으니 이 정도면 기적인가… 텅빈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던 우빈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 왔던 종석의 목소리를 머릿속에 깊이 새기려 몇 번을 곱씹다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종석이… 목소리 많이 괜찮아 졌어….”

“….”

“다행이다… 싶기도 한데 괜히 전화했나 싶다. 나한테 막 화를 내더라고. 자기 괴롭히지 말라고.”

“….”

“내가 그렇게 미웠나….”

 

 

 

힘겹게 미소를 지어보인 우빈은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진 듯 고통스러워 하다가 차오른 숨을 천천히 고르며 말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종석이가 보고 싶냐… 나 진짜 나쁜 놈인가 보네….”

“…우빈아.”

“그렇게 매정하게 내쳐놓고 이제야 보고 싶다니… 나 진짜 나쁘지. 어?”

“지금이라도 안 늦었다. 종석이 한테 알려라 제발…. 종석이 아무리 못해도 이틀이면 올 수 있어. 그러니까 다시 전화해서….”

“…수안아.”

 

 

 

눈물이 차올라 붉어진 눈을 하고 말하는 수안의 말을 막은 우빈은 수안이 저를 쳐다보자 옅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우빈의 표정에는 묘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고통, 슬픔, 절망, 회한, 두려움… 어쩌면 그것보다 더 복합적이고 많은 감정들이 우빈의 눈 속에서 찰나의 순간에 나타났다 스러졌을 것이다.

 

 

 

 

“이미… 늦었어.”

 

 

 

 

***

 

 

쓸한 이별. 그리고… 또다른 끝. 

 

 

**


처음엔 원망도 많이 했지
울기도 참 많이 울었었지
근데 계속 그렇게 있다 보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거지

사실은 그래
흩어지는데 붙잡아 뭐해
마음만 더 아프게
근데 이렇게 살아지는 게
또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 싶긴 해
                                              - 그리고, 남겨진 것들

**


마지막 순간 까지도 너는 나를 위로했지
하지만 모르고 있는 듯해 뭐가 날 이렇게도 슬프게 하는지
혼자남겨질 그 날들 보다
잊혀질 날들이 눈물겹다
너를 가질 수 없는 것 보다
나를 줄 수 없음이 아프다
                                            - Slip away

**
 

 

 

귀를 때리는 소란스러운 소리들에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 부은 듯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려 손을 들자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아챘고, 살짝 당황한 내가 그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걱정이 가득 담긴 표정을 한 수안이의 얼굴이 보였다.

 

 

 

“정신이 들어?”

 

 

 

그런 수안이의 뒤로는 바삐 걸음을 옮기는 의사들과 간호사들, 응급환자들이 보였다. 난 그제야 내 폐 속을 그득히 메우고 있는 온갖 약품 냄새들을 자각할 수 있었다. 시각보다 앞서야 할 후각이 늦게 눈을 떴다. 이렇게 단시간에 몸이 망가질 수 있는 건가…?

 

 

 

“뭐야… 내가 왜 병원에….”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잠겨있었다. 그런 내 목소리에 살짝 미간을 구긴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고, 수안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런 나를 도와 내가 병원침대에 걸터앉게 했다.

 

 

 

“쓰러져 있었어. 납골당 뒤편 나무 아래에.”

 

 

 

허, 그런 거였어? 헛웃음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은 나는 내 몸에 연결 되어있는 링거액을 힐끗 쳐다보고는 뒤늦게 살아난 촉각에 입을 열었다.

 

 

 

“이제 내 손 놔도 돼.”

 

 

 

수안이는 희게 질릴 정도로 내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죽을병도 아니고 그냥 쓰러진 건데 왜 이렇게 유난일까. 그런 내 시선을 알아챈 수안이는 손을 놓으며 제 머리를 긁적였고, 피가 통하기 시작해 저릿해지는 손을 몇 번 쥐었다 편 나는 작은 한숨을 뱉었다.

 

 

 

 

**

 

 

 

 

“혼자 괜찮겠어?”

“내가 애야?”

 

 

 

수안이에게서 내 캐리어를 뺏어든 나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고는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수안이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 고마웠어. 하마터면 객사 할 뻔 했네.”

“….”

“잘 가.”

 

 

 

수안이는 뭐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떠듬거렸다. 듣기 싫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인 나는 수안이가 그 말을 뱉기 전에 집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닫아버렸고, 그렇게 그냥 제자리에 멀뚱하니 서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복도를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힘이 없고, 축 쳐져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고, 내려가는 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자 현관문에 등을 기댄 채 쓰러지듯 주저앉은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숨을 힘겹게 뱉으며 집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오랫동안 비워 사람의 흔적과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집 안의 공기는 서릿발 같은 냉기와 텁텁한 먼지를 끌어안은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듯 그렇게 고요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빛이 없어 집 안을 그득히 메우고 있는 그 어둠마저도 여유롭고 고요하게,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모르니까….”

 

 

 

진실을 모르니까… 알 필요 없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소중한 존재가 곁에서 사라지지 않아, 평생 그 존재에게 제대로 잘 해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될 수 없어 저렇게 고요하고 평온할 수 있는 것이다. 난 그렇게 그 고요에 대해 강렬한 적의를 느끼고 있었다. 난 이렇게 힘들고 망가져 가는데 어떻게 저리 멀쩡할 수 있을까. 숨을 들이쉴 때 폐 속을 파고드는 탁한 먼지와 차가운 냉기에 숨통이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며 그 고요를 노려보던 나는 어느 순간 적의라는 감정의 끈이 툭- 끊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울음이 섞인 한숨을 뱉어냈다.

 

 

 

“왜… 왜….”

 

 

 

또다시 찾아온 슬픔은 소름끼칠 정도로 첨예해서 적의라는 것을 끊어버리고 모든 감정의 끈을 모두 끊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모든 것을 마비시키며 오로지 자기 자신만 느끼게 하는 이 이기적인 감정은 날 끝까지 쫒아올 셈이었다. 무의식중에 눈물을 몇 방울 떨궈내던 나는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나 거실 한복판에 우뚝 섰다. 이 고요 속에 묻히면, 동화되면 이 감정이 날 떠나가게 될까? 거실 한복판에 우뚝 선 나는 거의 미친 사람이 되어있었다. 차라리 미쳐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을 해서 그랬는지 제자리에 주저앉아 바닥에 손을 대고 그 냉기를 몸에 받아들이려 용을 쓰던 나는 끝내 제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헛웃음 짓던 나는 터덜터덜 걸어 화장실로 걸어갔다. 안 그래도 아까 흙바닥에서 구른 탓에 온몸이 흙투성이다. 씻으면… 머리도 정리되고 좀 괜찮아 지겠지.

 

 

 

 

**

 

 

 

 

깨끗하게 씻었다. 그게 다였다. 겉이 깨끗해졌다고 해서 슬어가는 마음의 녹까지 같이 벗겨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녹이 전신으로 퍼지는 듯 삐걱거리기 시작한 몸을 억지로 끌고 침대 위로 향한 나는 갑자기 물밀 듯이 몰려오는 졸음에 눈을 감았다. 짐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리를 두드렸지만 슬픔이라는 감정에 마비되어버린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는 몸은 그렇게 칠흑 같은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아침이었다. 그것도 순전 AM 9:30 이라는 시계를 보고 알아차린 것이었지만.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던 나는 엎어져 있는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뭐야.”

 

 

 

핸드폰에는 엄청난 양의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그것도 거의 수안이에게서. 괜찮느냐는 식의 말로 도배가 되어있는 메시지 창을 아무 감정 없이 휙휙 내리던 나는 잠시 멈칫하며 눈을 가볍게 감았다. 나에 대한 수안이의 걱정은 과연 무엇일까. 정말로 내가 친구로서 걱정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떠나간… 우빈이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일까. 그 핸드폰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답장을 했다.

 

 

 

「 나 살아있어. 걱정하지 마. 」

 

 

 

그렇게 답장을 하고는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사실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긴 했지만 어떠한 사실 하나가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내가 잠든 날. 즉, 귀국한 날은 정확히 4월 5일. 잠든 이후에 깨어난 오늘의 날짜는 4월 7일.

 

 

 

“이틀을 내리 잔 건가….”

 

 

 

어쩐지 몸이 엄청 아프더라…. 바르게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나는 몸을 일으켜 앉고는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역시 사람의 기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텅 빈 옷장들과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가구들. 커튼을 치고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집 안까지.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 건지….”

 

 

 

확실하게 오래 자고 나니 제대로 된 사고가 가능해진 것 같았다. 그래… 뭐, 멀쩡해진 것 같긴 하다. 멀쩡해진 머리로 이것저것을 생각해보니 갑자기 한숨이 푹푹 나오기 시작했다. 우빈이가 그랬다. 꼭 행복하라고. 떠나는 그 순간 까지도 내 행복을 빌어주며 갔다. 그런데 지금 난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런 배려는 싹 다 무시한 채 괴로워하고 있다. 그리워하고 있다.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대체 난… 뭘….

 

생각이 그 곳까지 미치자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작정 화장실로 향했다. 나가야겠다. 일단 나가야겠다. 그 뒤는 나가고 나서 생각하자.

 

 

 

 

**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통해 나를 보니 몰골이 정말 말이 아니었다. 이거… 완전히 거지꼴인데? 우빈이가 보면 또 한소리 할 만한 그런…. 잠시 시선을 내리고 멍하니 수도꼭지를 바라보던 나는 샤워기를 틀어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차오르는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문득 내가 지금 그 물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깨끗하고, 투명하고, 청량한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에 의해 쉽게 뜨거워지기도 하고 때론 쉽게 식어버리는. 그런 점이 꽤 닮아있었다. 하지만 이제 날 다시 뜨겁게 만들어 줄 사람은 없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 어딘가엔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사람이 나에게 찾아온다는 희망도 없고, 찾을 생각도 없다. 지금은… 나와 닮아있는 물에게 잠시 따뜻함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작은 한숨을 뱉은 나는 옷을 벗어던지고 물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물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기운이 피부를 타고, 모세혈관을 타고 내 온몸으로 퍼졌다. 난 얼어있었던 건가. 물속에 들어간 몸은 그 온기에 천천히 녹아들며 그 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냉기를 밖으로 밀어냈다. 온기라는 이름의 거미는 첨예한 슬픔을 꽁꽁 묶어놓고는 꽁무니에서 새로운 감정들을 뽑아내 끊어진 감정들의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고, 감정이 되살아 날수록 난 평온함을 되찾았다.

 

 

 

 

**

 

 

 

 

다 씻고 나온 나는 무작정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좀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밖에 나갈 준비를 빠르게 마친 나는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들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젠장….”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현관을 열자마자 강렬한 햇빛이 현관을 통해 들어왔는데, 내가 그 빛을 본 순간 무의식 적으로 몸을 뒤로 뺀 것이었다. 그 빛에 닿으면 온몸이 새까맣게 타 스러질 듯한 알 수 없는 공포심을 느낀 나는 당황스러움에 가빠진 숨을 천천히 골랐다. 이 정도면 내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거 아닌가…? 햇빛이 무섭다는 게 말이 돼? 그렇게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던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내 발 끝에 닿을 듯한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반응한 내가 고개를 들자 내 바로 앞에 서있는 수안이가 보였다.

 

 

 

“어…? 네가 왜 여기에….”

 

 

 

수안이는 아무 말 없이 날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나는 그 품에 안긴 채 잔뜩 굳어버렸고, 따뜻한 온기가 나에게 전해져 올 때 즈음 뛰어오느라 가빠진 숨을 몰아쉬던 수안이가 조금 화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 걱정돼 미치는 줄 알았잖아…!”

 

 

 

안도감인지 뭔지 모를 감정이 묘하게 섞여있는 그 목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던 나는 햇빛에 닿았음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희게 빛나고 있는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작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자고 있었어.”

 

 

 

그렇게 한참을 품에 안겨 있던 나는 수안이의 어깨에 잠시 고개를 기댔다가 슬슬 몸이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끼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수안아.”

“응.”

“이거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인사치고는 과한 것 같은데.”

 

 

 

그제야 아, 하며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 수안이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디가는 거야?”

“…몰라.”

“모른다고?”

“그냥… 아무데나 가려고. 사람 많은 곳으로.”

 

 

 

난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올려 수안이를 바라봤고,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던 수안이는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같이 가줄게. 혼자 가는 것 보단 낫잖아.”

 

 

 

 

**

 

 

 

 

야, 근데 여긴 많아도 너무 많은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로도 모자라 외국인들 까지 가득 들어차 있는 명동 길을 낑낑거리며 지나가던 나는 속으로 온갖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필사적으로 수안이의 뒤를 쫒았다.

 

 

 

“야, 같이 가…!”

“잘 따라와. 길 잃지 말고.”

 

 

 

그러는 내 손을 꽉 붙잡은 수안이는 능숙하게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가며 작게 웃었다. 좀 외곽으로 돌면 사람이 덜한데 왜 굳이 사람 많은 길을 뚫고 다니는지…. 짜증 섞인 한숨을 뱉어내던 나는 문득 이 상황을 어디선가 겪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아 눈을 크게 떴다.

 

 

 

‘아, 같이 가!’

‘내 뒤에 찰싹 붙어서 따라와. 맛집이 이 근처에 있어.’

‘맛집이고 뭐고 압사당할 지경이야 지금!’

 

 

 

전에… 우빈이랑 온 기억이 있었다. 그 때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내가 투덜거렸었는데 날 달래면서도 제 갈 길을 잘 가던 우빈이의 믿음직스러운 뒷모습과 지금 수안이의 뒷모습이 얼핏 겹쳐 보이며 또다시 내 마음을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

 

 

 

 

수안이가 우빈이의 모든 행동을 따라하고 있진 않았다. 그렇다고 닮아 있지도 않았고. 하지만 ‘배려’ 라는 것 자체에 깊이 뿌리내린 우빈이와의 추억들은 끊임없이 잎을 펴고 꽃을 피우며 현실을 바라봐야 하는 내 시선을, 정신을 완전히 앗아가며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돌아다니다 집에 도착한 나는 밖에 나가는 것조차 좋은 선택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잔뜩 기가 죽어있었다. 그러나 티는 내기 싫었기에―그런다면 수안이가 슬퍼할 게 분명 하니까―애써 밝은 태도를 보이던 나는 수안이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

“….”

“난 항상 너한테 고마운 것 밖에 없네.”

“앞으로도 힘들면 전화해. 바로 달려갈 테니까.”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 수안이는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고, 그 뒷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나는 내 마음을 뒤덮고 있던 수많은 이파리를 헤치고 떠오른 의문에 충동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수안아.”

“어?”

“궁금한 게 있어.”

 

 

 

수안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바라봤다.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던 나는 그 의문을 여과 없이 뱉어냈다.

 

 

 

“우빈이와의 약속… 이제 끝난 거잖아.”

"…그래, 그렇지.“

“근데 왜 이렇게 날 도와주는 거야?”

 

 

 

대답은 없었다. 갈등이 서려있는 두 눈동자만 날 뚫어져라 쳐다볼 뿐. 평소에 날 자주 챙기긴 했어도 이 정도까지 가까웠던 사이는 아니었다. 친하기도 우빈이와 더 많이 친했었고. 그랬던 수안이가 지금은 마치 내 유일한 친구인 것처럼 굴고 있으니…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정적 속에 한참을 서 있으니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깊은 한숨을 내쉰 수안이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순식간이었다. 우두커니 서있던 내 볼을 가볍게 손으로 감싸며 내 입술에 입 맞춘 수안이는 내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놓아주며 말했다.

 

 

 

“이제 알겠어? 내가 널 왜 이렇게 챙기는지?”

“…!”

“그리고… 우빈이가 왜 나한테 널 맡겼는지.”

 

 

 

무슨… 소리야? 당황한 내가 짧게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보니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인 수안이는 빠르게 몸을 돌려 내 눈앞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

 

 

 

 

집으로 들어온 나는 힘없이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내 머릿속은 아까 수안이가 한 말 때문에 완전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럼… 수안이가 날 좋아하는 것을 알고… 날 지켜줄 사람인 것을 알고… 부탁한 거야? 힘겹게 결론을… 아니, 정확하지 않은 가설을 도출해낸 나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천장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세상에 남겨진 우빈이의 또 다른 배려를 다시 찾아내자 내 마음 속에 자라난 나무 주위로 슬픔이란 강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날 찾아오는 슬픔에 모든 감정이 젖어버린 나는 힘겹게 삼키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고, 이불을 품에 끌어안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쁜 새끼… 잔인한 새끼….”

 

 

 

대답은 없었다. 바라지도 않았다. 근데 그게 너무 서러웠다. 물어봐도 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사람이 없다. 그 대답은 평생 듣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람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대체 어떡하라는 걸까? 어떻게 살아가라는 걸까? 그렇게 혼자 쓸쓸히 누워 중얼거리던 나는 끝내 울다 지쳐 잠에 들 때까지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

 

 

 

 

그렇게 시간이 지나 한 달 뒤. 난 속을 다스리는 대신 겉을 다스렸다. 억지로 밝아진 척, 모든 것을 다 잊은 척 하며 친구들과 연락도 하고 가족들과도 가끔 놀러가 예전의 생활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회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따라한 것이었다. 수안이와는… 예전보다 조금 더 가까워졌다. 우빈이가 자신의 역할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적당한 사람을 찾아 나에게 남겨준 것이니… 또, 그 사람에게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답까지 받아냈으니 쳐낼 필요가 없었다.

 

 

 

- 도와줄까? 혼자 집청소 하는 거 힘들잖아.

“내가 예전부터 말했지. 내가 애야?

- 너 애 맞아. 그러니까 도와줄게.

“내가 알아서 할게. 넌 그동안 어디로 놀러갈 건지나 빨리 정해.”

- 그래, 알았어. 그럼 조금 있다 보자.

“응.”

 

 

 

핸드폰을 탁자 위에 가볍게 내려놓은 나는 물을 꽉 짜낸 손걸레를 들고 서랍으로 다가갔다. 하… 그래, 이놈의 먼지.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그렇게 호기로운 각오를 하며 서랍 위를 이리저리 닦아내던 나는 물품도 같이 정리할 겸 서랍을 열어봤다. 일단 버릴 거랑 그냥 둘 거를 구분해 놓으면 되겠지. 그렇게 한참을 이것저것 정리하고 있었을까, 서랍 깊숙한 곳에 어떤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이건….”

 

 

 

언젠가 우빈이와 놀러갔다가 같이 찍은 사진 같았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지 둘 다 정말 잘 나온 사진이었는데, 이건 분명… 예전에 우빈이의 집에 놀러갔을 때 침대 맞은 편 벽면을 그득하게 채우고 있던 수많은 액자들 중 마음에 든다며 날 달라고 떼를 써서 얻어낸 사진이었다. 그렇게 생떼를 써가며 겨우 얻어낸 사진이었는데 가져오자마자 잊어버렸었나 보네… 나도 참…. 헛웃음을 진 나는 그 사진을 멍하니 들여다보다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기억이… 안 나….”

 

 

 

어디에서 찍었는지, 어떻게 놀러가게 됐던 건지, 언제 찍었는지,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당시의 상황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왜…?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잊혀진 거지? 소중했던 추억 하나가 예고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해 당황을 한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참을 생각해내려 끙끙거렸고, 그러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왔다. 잊혀져 간다. 소중한 추억들이. 함께했던 시간들이. 그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져간다. 난 그 순간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핸드폰 사진첩과 내가 가지고 있던 앨범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둘러본 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이 절반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뒤. 나에게 남은 것은 두려움이 아닌 알 수 없는 공허함 이었다. 그 공허함에 마음의 허기를 느낀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허공만 응시했다.

 

 

 

 

**

 

 

 

 

수안이와 저녁을 같이 먹기로 약속을 했었기 때문에 힘겹게 마음을 추스린 나는 밖에 나와 수안이를 만났다. 그러나… 입맛이 없었다. 오늘 신경써서 준비했다고 했는데… 괜히 미안해지게 내 마음은 온통 잊혀진 추억들에 쏠려 있었다. 다시 찾기 힘든… 아니,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종석아.”

“…어?”

“방금 내 말 들었어?”

“어? 아, 아니… 미안.”

“안색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어?”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내 손을 가볍게 붙잡고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수안이는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날 바라봤고, 그런 수안이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보인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살짝 저으려다 잠시 멈칫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안아.”

“응.”

“아주 소중한 추억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추억을 잊는 것? 음….”

“….”

“우리한텐 불가항력이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잖아.”

“근데 그 추억을 정말 잊고 싶지 않으면?”

 

 

 

조금은 절박함이 묻어나는 내 목소리에 여유롭게 샐러드를 집으려던 수안이는 시선을 올려 내 표정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왜 그래? 엄청 불안해보여.”

“어?”

“무슨 일 있으면 말 해. 들어줄게.”

“어… 아무… 것도 아냐.”

 

 

 

난 시선을 내리며 절반정도 남은 파스타를 이리저리 뒤적였고,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안이는 조금은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잊혀진 추억을 대신할 추억은 새로 만들 수 없는 거야?”

 

 

 

난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절대, 절대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잊어선 안 된다. 만들 수 없기에 보존하는 것이 더 절박한 것이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수안이는 말없이 내 손을 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계속해서 파스타를 뒤적였다.

 

 

 

 

**

 

 

 

 

그 날 새벽, 난 추억들을 기억해내려 곳곳을 뒤지다 옷장 한켠에서 우빈이의 티셔츠를 발견했다. 다행히도 그 티셔츠에 관한 기억은 내 머릿속에 아직까지 살아있었다. 우빈이가 나에게 이별을 고하기 두 달 전에. 우리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둘 다 취해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덕분에 분위기가 잡혀 뜨거운 밤을 보내게 되었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서로 장난스럽게 다신 술 마시고 하지 말자고. 기억 하나도 안 난다고 투덜거리고는 옷을 찾아 입다 우빈이가 티셔츠가 사라졌다며 투덜거려서 내 널널한 티셔츠를 건네줬던… 그런 기억이었다. 그게 마지막 밤이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게다가 그 티셔츠가 우리 집 옷장 구석에 숨어있을 줄은 정말 몰랐는데…. 그 티셔츠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우빈이의 체취에 증폭된 그리움은 또다시 날 흔들어 놓기 시작했고, 그 미칠 듯한 그리움에 울음을 터뜨린 나는 그 티셔츠를 부여잡은 채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빈아… 나 진짜 너 없인 못 살겠어… 나 진짜… 더 이상 추억을 잃기 싫단 말이야….”

 

 

 

그렇게 제자리에 주저앉아 끊임없이 울부짖던 나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 순간 침대 옆 서랍 위에 올려져 있는 수면제 통을 발견했다. 그 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문득 넌 꼭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우빈이의 말을 생각해내고는 작게 헛웃음 지었다. 우빈아, 나 지금 하나도 안 행복해. 행복하게 살 자신이 없어. 제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나는 한 손에는 우빈이의 티셔츠를 꽉 쥐고 수면제 통의 뚜껑을 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난 더 이상 멈출 수 없었다. 그냥… 빨리 편해지고 싶을 뿐이었다. 약 냄새가 얼핏 느껴지는 수면제 통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옅게 미소 지었다.

 

 

 

 

**

 

 

 

 

텅빈 채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면제 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핸드폰을 들어 수안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난 지금 잔인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날 좋아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사랑도 주지 못하고 죽음이란 끔찍한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해야겠기에… 수안이에게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마웠다고 문자 한 통을 보낸 나는 갑자기 빙글 돌기 시작한 시야를 회복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가족에게 까지 어떻게든 문자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우빈이에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엇나가는 손가락으로 자판을 정확하게 누르려 노력하던 나는 끝내 그 문자 한 통을 보내고 힘없이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 금방 따라갈게. 기다려 줘 우빈아. 사랑해. 」

 

 

 

눈앞이 점점 흐려져 간다. 내가… 따라가면 우빈이는 나에게 화를 낼까? 미쳤다고. 왜 따라 왔느냐고… 그러면서…. 그래도… 그렇게 나에게 화를 내는 우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의 존재가 아예 없는. 그 목소리마저 들을 수 없는 이 세상 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

 

숨이 점점 가늘어진다. 계속해서 가늘어져 한줄기 바람이라도 불면 툭 끊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우빈이의 체취가 남아있는 옷을 내 품속으로 더 꽉 끌어당겨 안은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금방… 따라갈게….”

 

 

 

심장의 고동 소리가 점점 멎어가고, 정신은 아득하게 멀어져가고, 가늘어진 숨은 너무 가늘어져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툭 끊어져 버린 건지, 이젠 느껴지지 않았다.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듯이… 그렇게… 고요하고도 부드럽게… 금방 따라갈게. 이제 곧. 네가 있는 곳으로….

 

사랑해… 우빈아.

 

 

 

 

**

 

 

 

 

[ 재시작 ]

 

 

 

포근한 기운에 휩싸여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밝은 빛이 내 눈을 타고 온몸에 흘러들었고, 그 빛에 눈이 아파 눈을 감으며 그와 함께 몰려드는 나른함에 잠시 고개를 움직이던 나는 푹신한 침대와 이불 사이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죽으면 원래 이런 건가… 너무 편한데 이건…. 그렇게 한참을 나른함에 취해있던 나는 무언가…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런데…

 

 

 

“우빈…아?”

 

 

 

내 바로 앞에는 우빈이가 누워있었다. 날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우빈이는 손을 뻗어 내 볼을 살살 쓸어내렸고, 내가 당황해 저를 바라보는 것이 조금 웃겼는지 큭큭 웃던 우빈이는 젖어 있는… 듯한 내 눈가를 자상하게 닦아주며 그리웠던 목소리로 말했다.

 

 

 

“악몽이라도 꿨어? 자는 내내 울던데.”

“…뭐?”

“덕분에 나 잠 하나도 못 잤잖아. 깨면 바로 달래줘야 해서.”

 

 

 

살짝 붉어진 제 눈을 슥슥 비비던 우빈이는 날 가볍게 끌어당겨 품에 안으며 길게 숨을 뱉었다. 그런 우빈이는… 너무나도 사실적이었다. 마주 닿은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 강한 심장의 고동소리와 부드러운 숨소리까지. 정말…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무슨 악몽인지 들어나 보자. 얼마나 심했으면 그렇게 펑펑 울어?”

“나… 여태까지 꿈꾼거 맞아?”

“…뭐야, 무섭게 왜 이래. 인셉션 같잖아.”

 

 

 

너스레를 떨며 푸스스 웃은 우빈이는 날 품에서 꺼내며 싱긋 웃어보였고, 그런 우빈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손을 뻗어 우빈이의 볼을 만져봤다. 간지럽다며 큭큭 웃은 우빈이는 내 대답이 궁금한 건지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마저 너무 사실적이어서… 지금 나에게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지금이 현실이라 나에게 말하고 있어서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게 진짜 악몽이었다고? 사실적이고 너무나도 길었던 그 빌어먹을 시간들이 모두 악몽이었다고?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던 고통과 슬픔이 눈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내가 울음을 터트리자 당황해 하던 우빈이는 나를 끌어안고는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날 달래기 시작했다.

 

 

 

“하… 대체 무슨 꿈이었길래 이래…?”

“우빈아… 우빈아….”

“그래, 나 여기있어. 말해.”

“보고 싶었어… 진짜….”

“어제도 같이 있었으면서 무슨.”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모두 꿈이어서 정말 다행이다…. 난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이며 우빈이의 품 안에 더 파고들었고, 그런 내가 조금 버거운 듯 낑낑거리던 우빈이는 시간이 좀 지나 내 울음이 잦아들자 직접 내 눈물을 닦아주며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다 울었어?”

“…응.”

“누워 있어. 밥 차리고 올게.”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은 우빈이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내 입술에 짧게 입 맞추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고, 마주 닿은 입술의 감촉과 우빈이가 있었던 자리에 남은 온기까지. 지금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 증거들에 웃음을 찾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아, 근데 무슨 놈의 꿈이 그렇게 진짜 같냐… 결말도 완전 안 좋았잖아…. 1년 더 사는 바람에 현실에서도 늙은 기분이네. 그렇게 말하며 꿈을 기억해내려 하니 그 꿈의 내용이 물에 번진 잉크처럼 너무 흐릿해 정확히 기억나질 않았다. 그냥… 굵직굵직한 사건들만 조금 기억나는 정도?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마저 닦아낸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침대 맞은편에 있는 벽을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우빈이 집이네.”

 

 

 

나 어제 술 먹고 온 건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 벽을 그득하게 메운 액자들을 바라보던 나는 손을 뻗어 우빈이의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베개가 조금 젖어 있었다. 처음엔 설마 침인가 싶어 경악스러웠는데, 밤을 꼴딱 샜다는 우빈이의 말도 있었던 데다… 자세히 내려다보니 젖은 부분들이 띄엄띄엄 방울져 있었다. 마치… 눈물 자국처럼. 생각이 그 곳에까지 닿자 난 시선을 옮겨 다시 액자들을 훑어봤다. 대체적으로 어두운 갈색의 액자 속에 담겨져 있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훑어보던 나는 그 많은 액자들 속. 사진 하나가 비는 것을 보고 천천히 시선을 떨궜다.

 

 

 

“다 차려놨어. 특별히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쫙….”

“우빈아.”

“응?”

 

 

 

침대에 걸터앉은 우빈이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시선을 천천히 옮기며 그런 우빈이를 바라보던 나는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넌 끝까지 나 배려하냐. 나쁜 놈아.”

 

 

 

우빈이는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다 푸스스 웃었고, 그런 내 손을 끌어당겨 침대에서 일으키며 말했다.

 

 

 

“내가 가장 잘 하는 거잖아.”

 

 

 

네가 가장 잘 하는 거… 그래, 그랬지… 그거 빼면 넌 시체나 다름없었으니까…. 작게 웃은 나는 식탁을 향해 걸어가는 우빈이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마주잡은 두 손은 서로를 단단하게 끌어안고 있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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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너무 좋아요. 추천해요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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