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이브
04. 변백현이나 나나 똑같았다. 아무말도 없이 그저 우린 가로수길을 걸었다. 나름 봄이라고 푸르게 물들은 나뭇잎들 사이로 간간히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부셔하면서, 그리고 크게 빵빵거리고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도로를 옆에 둔 채. 벌써 학교에서 멀어진지 20여분이 지났다. 그래, 20여분 동안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다. 누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마치 서로 무슨 큰 죄를 진 것마냥 아무말이 없다.
어쩌다 이렇게 말 수가 줄어들게 되었는지 아리송해졌다. 중학교때만 해도 우린 이러지 않았는데. 이야기의 끝이 안보일 정도로 서로 할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점점 한살 한살 먹어 갈 수록, 그 나이에 비례하 듯 우리의 거리감도 비례하고있는 것 같다. 어째서 일까? 변백현 넌. 넌... "......언제 돌아온거야?"
차만 쌩쌩 지나가던 도로의 소음들만 들려오던 우리둘 사이의 침묵을 가로질러 변백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물어오는 변백현의 질문이 내가 보고싶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내가 돌아오지 않길 바랬다는 의미인지 알수가 없어서. 니 마음을 알 길이 없어서. 그냥 아무말 없이 걸었다. 괜히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봄햇살만 바라보며 널 바라보지 않은 채 그냥 걸었다.
대꾸없는 나에게 짜증이 난건지, 아니면 아무말 없이 돌아온 나에게 짜증이 난건지.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다시 한번 언제 돌아온거냐고 따지 듯 물어온다.
왜 짜증을 내는 건데. 왜. 니가 지금 짜증 내는 이유는 도대체 뭐야 변백현.
짜증섞인 니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너를 내려다 보았다. 선한 듯 하지만, 앙칼진 듯한 눈이 날 올려다보고있다. 그 눈을 마주하자, 괜히 니가 나도 원망스러워졌다. "오늘."
"왜 온다고 말 안해줬어?" "꼭 말 해줘야되는거야?" 내 대답에 날이 선듯이 다시 또 한번 따져오듯 내게 말하는 니 말투에 또 한번 원망스러워서. 괜히 나도 너를 따라서 짜증을 내본다. 후회할 걸 알면서도, 너에 대한 내 감정을 이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어서. 그렇게 내 감정을 섞은 내 질문에 너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냥 고개를 돌리고는 우리는 다시 정적속으로 들어가버렸다. 한참을 정적속에서 또 걷기만 했다. 그렇게 한적함과 어색함 그리고 알 수없는 숨막힘을 등에 지고 걷고 걸어서. 익숙한 검은 대문이 눈에 들어왔고, 변백현은 아까보다 조금 더 빨라진 걸음으로 그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안되겠다 싶어서, 변백현의 걸음 속도를 따랐다. 걸음걸이를 빨리 하고서, 대문 손잡이를 잡고선 내게 작별 인사를 고할 것 처럼 쳐다보는 변백현의 말을 끊었다. "...잘..ㄱ.."
"내가 물어본 질문..왜 답장안했어?" 내 질문에 나를 그냥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다.
난 듣고 싶다. 너의 대답을, 내가 물어본 그 질문에 대한 변백현의 생각을.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변백현의 입에서 나왔으면 하는 대답은 딱 하나였다. 한심하지 않아. 전혀 한심하지 않아. 그래 딱, 그런 류의 대답들이였다.
괜한 기대심을 갖고는 변백현의 대답을 내심 기대했다. 내가 바라는 대답을 하기를.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는 듯 싶더니 다시 변백현의 목소리가 조금씩 내 귀를 타고 들어온다. 천천히 한글자씩 들려오는 그 목소리. "..잘가."
그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던 내 귓가에 무섭게 들려오는 쾅-하고 굳게 닫히는 문소리가 너무나 야속해서. 그렇게 무섭게 내 질문은 무시한 채 들어가버리는 니 행동도 너무 야속해서.
그리고 너에게서 한심하지 않다고,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고싶어서 안달난 내 자신이 너무도 바보같아서.. 멍하니 서서 변백현이 모습을 숨긴 검은 대문만 멍하니 바라보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아까 점심시간에 변백현에게서 받은 문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난 7반. 종인이랑 같은반.] * * *
봄바람이 두 뺨을 스쳐지나갔다. 그래도 봄이라고 조금씩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에 봄바람이 스쳐지나가니,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종인이는 그렇게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고, 나는 종인이의 허리춤에 있는 교복자락을 두 손으로 꼬옥 잡고 있었다. 묻고 싶은 말은 차마 많은데, 아까 부터 묻지 못하고있다. 그냥 종인이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나의 입을 막아버렸다. 아까 자전거 보관소에서 부터 지금 미술학원에 다와가는 지금 이때까지, 한마디도 못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건 종인이의 분위기때문만이 아니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내내 조심스럽게 종인아. 하고 불러도 아무 대꾸없는 종인이의 침묵때문이기도 했다. 그 침묵은 꽤나 무서운 침묵이였다. 원래 조용한 성격의 종인이였지만, 이렇게까지나 자기를 부르는데도 종인이가 아무 대답이 없다는건.... .
수백가지의 걱정들로 뒤엉켜져있는 머릿 속에 끼익- 하고 날카롭게 들려오는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브레이크 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시원하게 내달리던 자전거가 멈추고는 잡고있던 교복자락의 높이가 조금 높아져왔다. 그리고는 그렇게나 듣고 싶던 목소리가 내려. 라는 말과 함께 귓가를 파고 들었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아무감정없는 밋밋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종인이가 눈에 들어왔다. "다 왔어."
무슨 말을 건내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 그 표정과 똑같이 아무감정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아아, 하고 작게 감탄사를 입밖으로 내고선 자전거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서있는 종인이를 다시 말없이 쳐다보았다.
물어봐도 될까? 지금 물으면 되는건가? 하고 고민하고있는데 다시 무미건조하게 툭하고 내뱉어져 오는 종인이의 말은. "학원..안가?"
너무나도 단호해서, 무슨 말을 걸어보기는 커녕 그냥 어?가야지.응..가야지..하고 말끝을 흐리고는 돌아서서 학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옮기는데도 한발짝 한발짝이 떼기힘든게, 괜스레 이상하게 미련같은게 남아서. 계단 입구에 서서는 뒤돌아서서 잔뜩 입안에 고인 마른 침을 목 뒤로 삼키고는 다시 한번 종인아. 하고 불렀다. 그러자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려던 종인이가 다시 한쪽다리로 땅을 딛고선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왜이리도 긴장감 넘치고 조심스러운지. 다시 한번 마른 침을 넘기고는.
".....오늘 점심시간에 내 문자 봤어?"
".................." "...........오늘 무슨 일 있었어?" "................" 침묵. 내 질문들에 또 아무 대답이 없다. 그저 굳게 닫힌 입과 함께 나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는 종인이의 시선만 있을 뿐이였다. 바람이 불어왔다. 이번엔 조금 세게 불어왔다. 조금은 좁은 듯한 골목길에서 나와 종인이는 그렇게 서로 마주한 채 꽤나 오랫동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서있었다. 그렇게 니 대답이 언젠간 들려오겠지 하고 조금은 헛된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참을 서있었다. 하지만, 굳게 닫힌 너의 두 입술들은 떨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아서. 한쪽 손을 들어 잘 가. 내일 봐. 하고는 짧막하게 손인사와 같이 인삿말을 건네고는 돌아섰다. 그렇게 돌아선 내 등 뒤에서 경수야. 하고 니가 내 이름을 불러왔다. 경수야. 하고 불러오는 니목소리가 이상하게 몇 년동안이나 듣지 못한 목소리를 오래간만에 듣는 것 처럼 반가워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마자 고개를 돌리고는 종인이를 다시 마주했다.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불안해 하 듯 불안정하게 종인이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 마저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 눈동자에 하고싶은 말은 많은데, 다독여주고 싶은데. 차마 입밖에 말이 나오지 않아서. 그저 너의 다음 말을 기다리 듯이 그저 멍청하게 서있기만 했다. 그리고 흔들려 오는 너의 눈동자와 같이 조금씩 떨리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수야."
다시한번 불안한 듯 나를 불러오는 너의 목소리에 나는 안심 시키려는 듯, 응?하고 최대한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머뭇거리는 니 모습에 나도 모르게 느낌이 들었다. 지금 니가 나에게 하려는 말들이, 니가 나에게 무슨말을 하려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예상되는 너의 질문들이 하나 둘씩 머릿 속에서 늘어나는데, 자꾸만 이상하게 죄책감 같은게 나를 조여왔다. 너를 속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와서. 이상하게 너를 배신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와서. 마른 침을 몇 번이고 또 삼켜 댔다. 이런 저런 고민들에, 널 더이상 속이면 안될꺼 같다는 생각에, 내 마음 속으로 굳게 마음먹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고는 종인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머뭇거리는 니 입에서 나온 너의 말은. "내일..보자."
그리고 쓸쓸하게 돌아서는 듯 한 니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멀어져가는 니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너의 뒷모습에게 혼잣말을 하 듯이 혼자서. 바보. 니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잖아. 하고 작게 웅얼거렸다. 그리고는 학원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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