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이브
05. 둘 만 남아있었다. 분명 새학년을 알리는 전체조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둘이 교실에 남아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찬열이를 따라 교실에 남았다. 교실에 그냥 있어야지. 하며 능글맞게 웃으면서 너도 같이 남아있을래? 하고 물어오는 찬열이의 물음에. 운동장으로 나가기 위해 서있던 몸을 먼가에 홀린 것 마냥 의자에 다시 앉혔다. 그리고는 한동안 찬열이를 빤히 쳐다보고있었다. 아무말 없이 빤히 쳐다보는 나를 마주한 찬열이는, 그저 히죽히죽 웃어왔다. 그렇게 몇 분이 되지 않아서 교실은 우리 둘만 남아있었다. 침묵과 함께.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갈 꺼내는 찬열이였다. 빨간색의 이어폰이 감겨진 네모난 MP3였다. 본체에 감긴 이어폰을 주섬주섬 풀더니 한쪽을 내게 건내왔다. 하지만 건내오는 이어폰을 나는 그냥 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건내던 이어폰 한쪽을 내 귀에 꽃아주고서는 나는 아침에 못잔 아침잠 좀 잘께. 하고 책상에 얼굴을 붙이고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잠들어 버린 찬열이가 지금 내 옆에 있다. 강하게 내리쬐는 봄햇살에 더울까봐 조심스럽게 열어놓은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살랑이 불어왔다. 불어 들어온 바람은 고개를 내 쪽으로 향한 채 잠든 찬열의 머리카락을 살짝이 스쳐 지나와 내 볼을 스쳐지나갔다. 멍하니 그런 찬열이의 얼굴을 감상하 듯 노래에 취해 찬열이에 취해 바라보고 있었다. 귀에 꽃힌 이어폰으로 금방까지만 해도 들려오던 빠른 비트의 힙합음악과는 상반되는 잔잔한 뉴에이지가 흘러오기 시작했다. 잘어울렸다. 지금 하얀 커텐 틈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저 봄햇살과, 조금씩 찬열이의 머리칼을 건드리는 선선한 봄바람. 그리고 지금 자고있는 찬열이의 모습과. 예쁘게, 잘 어울리는 음악이였다. 나는 조용히 가방에서 크로키북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새하얀 페이지를 펴서는, 천천히 새하얀 종이위에 찬열이를 담았다. 지긋히 감고있는, 끝이 조금 쳐졌지만 그것 마저 예쁜 그 눈 꼬리와. 그 감은 눈 끝에 예쁘게 내려앉은 속눈썹. 그 눈 위에 정갈하게 잘 정리 된 진한 눈썹.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갈색머리카락. 그리고 오페라 색을 띄고 있는 적당히 도톰한 입술과 그 입술을 따라 올라가면 곧게 뻗은 콧날까지. 하나 하나 정성스럽게 내 크로키 북 안에 찬열이를 담아냈다. 기억하고 싶어서. 평생. 기억하고 싶어서. 오페라 색깔과 비슷한 핑크계열의 색연필을 꺼내들어 그림 속 찬열이의 입술에 색을 들였다. 너무 색연필의 느낌이 나서, 인위적인 느낌이 나서 그 위를 손가락으로 문질러댔다. 천천히 번지듯 진짜 찬열이의 입술과 비슷하게 자연스러워져갔다. 천천히 분홍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두근. 심장이 떨려왔다. 오페라 색깔로 번져갔다. 내 심장도 점점. 나도 책상에 얼굴을 붙였다. 감은 찬열이의 눈과 마주했다. 감겨있는 찬열이의 눈은 깨어나려는 미동 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다시 한번 찬열이의 얼굴을 아까보다는 더 자세히, 그리고 천천히 내 눈에 담아냈다. 평소와는 다른 찬열이의 느낌이였다. 미동없이 굳게 감긴 눈 끝에 이상하게 슬픔이 보이는 듯 했다. 천천히 눈을 감고선 올려진 찬열이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려보았다. 다시 한번 두근. 심장이 찌릿해왔다. 감았던 눈을 뜨니 여전히 잠들어 있는 찬열이의 얼굴이 보였다. "찬열아." 그런 찬열이를 괜히 한번 불러본다. 대답따윈 전혀 들려오지 않을꺼란걸 알면서도. 괜히 잠든 너를 불러본다. 그리고는. "널 좋아해. 많이.." 부질 없는 고백도 해본다. 다 부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찬열이의 손 위에 올린 손을 다시 들어 힘없이 교실바닥을 향해 떨어뜨렸다. 여기까지. 딱 여기까지.
그리고는 눈을 감아버린다. 설마 니가 들어버리고 눈을 떠버릴까봐. 대답 없는 널 계속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왈칵 울어버릴까봐. * * *
문득, 그 때가 떠올랐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유독히 설레는 이 감정을 주체가 되지않아서. 괜스레 그 때가 떠올랐다. 2년 전.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종인이를 처음 마주친 날을 말이다. 아침부터 미묘한 웃음을 짓는 아이로 내 정신이 마치 마약에 취한 듯 몽롱해져 있을 때였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박찬열과 등교를 하고 오늘처럼 이렇게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 줄을 서있을 때였다. 기나긴 연설에 조금 지루함을 느끼고, 입학하는 학교니 만큼 이리저리 학생들을 하나둘씩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눈이 마주쳐왔다. 그 날 아침 보았던 어딘가 모르게 오묘한 느낌의 눈과.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한참을 쳐다보았다. 아니, 돌리지 못한게 아니라 그냥 피하고 싶지 않았었다. 조금 멀다면 먼, 그리고 가깝다면 가까울지도 모르는 거리를 두고 우리는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서로에게 시선을 떼지않았다.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시선을 마주 하는 동안, 연설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조용해지는 듯한 느낌이였다. 그리고 그 큰 운동장이 텅 빈 채 우리 두 사람만 서 있는 듯한 느낌이였다. 그 첫느낌이, 그 때의 종인이의 눈빛은 정말이지 너무나 오묘해서.
피식-하고 웃어왔다. 아무 표정 없이 바라보던 얼굴에서 피식하고 웃더니 다시 그 웃음을 머금은 채 내게서 다시 단상위로 시선을 옮겼었다. 이상하게 그 모습에 심장이 덜컹 하고 한순간에 내려 앉은 느낌이 들어왔다. 그 느낌과 함께 나는 또 바보처럼, 알 수없는 무언가에 사로잡혀 그때의 종인이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 날 아침에 보았던, 그 웃음이여서. 그 웃음과 똑같은 웃음이라서. 또 귀신에 홀린 듯이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더랬다. 그러니깐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둘, 그러니깐 종인이와 내가 서있는 거리가 좀 더 많이 가까워 졌다는 점. 그리고 우리는 1학년이 아닌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3학년이 되었다는 것. 또, 우리는.......... . "경수가 안보인다."
"어? 경수?" "응." "안나왔나?" "찬열이도 안보여." 그때보다 가까운 사이라는 것.
하지만, 아직은 그 날처럼 여전히 경수만을 생각하는 종인이라서, 그런 김종인이라서. 알 수 없는 벽이 가로막고있는 건 여전했다. 괜히 야속해서, 운동장의 모래만 발로 툭툭 차고있는데. 다시 들려오는 김종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덥다. 그치?"
"응?" "덥다고." ".....아." 뜬금없이 덥다.라고 말해오는 너의 말에 무슨 대꾸를 해야 될지 몰라서 아, 하고 짧게 감탄사만 바보 처럼 내뱉어버렸다. 그리고는 또다시 침묵. 여전히 너는 누군갈 찾는 듯이 이리저리 고개를 조금씩 돌려보고 있고. 나는 여전히 모래만 연신 차대고있다. 알게 된지도 벌써 2년이흘러 3년이되려는 데도 우리는 여전했다. 어색한 대화. 어색한 맞장구. 어색한 인사. 그리고..... "교실 가기 전에 매점...갈래?"
어색한 제안. 그리고 또..... 그 어색한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모조리 다 오케이 해버리는.
"...응.그래." 김종인에 대한, 너에 대한 내 이 멍청하기 짝이없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저 끙끙 앓는 바보 같은 감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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