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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디단편] Dear ( 부제: 시들지 않을 내 꽃에게 ) |
Dear ( 부제: 시들지 않을 내 꽃에게 )
W.이브
"........"
"유서가 없어...한은 많은데..유서가..없어." "......" "근데 더 웃긴 건 뭔 줄 알아요?"
나는 사진으로도 한번도 처남을 본 적은 없었다. 그녀의 말로는 그는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었다. 그녀의 말만 듣고서는 처남의 외모가 어떤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고, 그녀의 말 대로 그가 멋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처음 약속장소에 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그 때도 나는 별다른 감정도 없었다. 새로운 사람을 본다는 설레는 감정도 전혀. 옆에 서서 자신의 동생을 기다리며 설레여하는 여자를 사랑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그녀의 남동생을 보는 것도 딱히 나에게는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였다. 그렇게 옆에서 들떠 계속 해서 내게 웃어보이는 그녀를 향해 따라 그저 웃어줄 뿐 그녀의 기분에 동참하고 싶진 않았었다.
".....다행이다." "......!" "이거예요.이거..하..다행이다..다행이다.나..정말..나쁜 놈인가봐요.."
"울지 마." ".....나...정말 나쁘죠.." "울지 마. 니가 나쁘면...나도 나빠지는 거야."
그게 비록 모두가 잘못되었다고 손가락질 하는 모순일지라도.
"매형!!" "이제 너하고 나 그런 관계도 아니잖아!!"
당연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내뱉은 나의 말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꽤나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얽매이기 싫었다. 아직도 매형과 매제 라는 그런 관계 속에서.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원치 않은 결혼으로 인해 멋대로 원치않은 관계로 맺어진 그와의 나의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내 말에 반사적으로 내뱉은 녀석의 매형 이라며 나를 부르는 소리에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냈더니 녀석이 많이 놀랐나보다. 그래, 녀석은 아직 죄책감에 묶여있다. 그녀의 시신을 화장하고, 그것을 뿌린지 얼마나 됐다고 뻔히 저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혀 길잃은 고양이 마냥 어찌 해야할 빠를 모르는 녀석에게 이런말을 꺼내는, 그래. 정말 나는 나쁜놈이다.
".....경수야." "이건, 이건...정말 누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누나가 왜 죽었는지 모르겠어?"
"........" "일부러 유서 같은 것도 남기지 않은 건, 날 위해서가 아니라 형을 위해서야. 형이 다른사람에게 욕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거라고!"
멍하니 넓게 흩어지는 자욱한 담배연기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는 내게 그가 '매형'이라 불렀음에도 무어라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허공에 떠다니는 담배 연기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아른 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어도 여전히 설레이는 감정보다 미안한 감정이 앞서는 나라서. 그래서...
"........우리, 당분간 헤어져 있어요."
멍하게 아른거리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내 귓가에 아련히 들려오는 그의 말에 피식하고 이유없는 조소가 흘렸다. 그리고 내 조소와 함께 연기 속의 그녀 역시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해, 연수야.
"........" "내 말 잘 들어." "........" "연수가 착한 건 알지만 나쁘기도 하다는 거... 알고 있어?"
"그래, 연수의 죽음은 남들 눈에는 왜 그랬는지 이해 할 수 없을꺼야. 적어도 남들 눈에는 나하고 연수는 행복해 보였으니깐! 너는 왜 연수가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에만 집착하는데!! 왜!! 연수가 죽었는지, 그 죽은 원인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건데!! 연수가 죽은 이유는... 너하고 나, 우리 둘..평생 죄책감 안고 살아가라는 거야." "....알아." "그래서 너하고 나 둘이 헤어지라는 거라고!! 그런데 도경수, 나는.... 경수야. 나는..." "........." "너 없으면 죽어."
그녀가 믿었던 위에 있는 신의 나라에서 우리를 보고 있을 그녀를 마치 올려다 보듯 고개를 들어 조용히 말했다. 비록 지금은 그녀가 우리를 보고 비웃고 있을지, 울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조용히.. 조용히 그녀에게 말했다. 헤어질 수가 없다고, 우린 그럴 수가 없다고.
무척이나 쉬운 말이었지만 그렇게 말처럼 쉽게 뱉기가 어려웠던 나랑 살자,경수야. 라는 말에 그는 가장 슬픈 표정으로, 그리고 가장 예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는 그의 조용하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의 목소리, 내 품에 폭 안기는 그의 몸집, 그가 해준 따뜻하고 맛있는 밥, 그의 조그마한 입술, 그와 함께하는 소소한 장난, 그저 나에게는 그와 함께하는 모든 것들이 행복이였다. 행복, 그녀와 함께 살 때는 느끼지 못했던 그 것.
".....응?" ".........행복하다.정말...나 너무 행복해."
나를 깨우러 온 그가 어느새 내 품에 안기는 꼴이 되어버렸고, 옆으로 오라는 내 말에 그는 안되는데 하며 아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내 옆에 살포시 누웠다. 눈을 감고 그를 안으며, 다시금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은 기분에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행복하다고. 그리고 뒤이어 들리는 그의 조그마한 나도 라는 말이 귓가를 간지럽게 파고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아마 그의 얼굴이 제법 붉어졌을 것이다.
"얼른 일어나. 찌개 다 식겠다." "그래, 그래."
붉어진 고개를 감추려는 듯 푹 숙이며 재촉하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고 일어나 그 뒤를 걸었다. 식탁에 앉아 걸게 차린 밥상에 이만하면 전문 주부 솜씨 못지 않다며 그를 칭찬하자 금세 또 눈꼬리가 휘어지게 입술은 또 하트모양을 하며 예쁘게 웃는다. 예쁘다. 도경수, 눈이 부시게 예쁘다.
"씻고 올게. 먼저 먹고 있을래?" "아니. 그냥 먹자. 박찬열은 눈꼽 낀 모습까지 멋있으니까." "뭐?"
"찬열 씨, 요즘 좋은 일 있어요?" "네? 왜요?" "아니, 바보같이 실실댈 때가 너무 많잖아요. 뭐, 좋아보여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마는, 그래도 가끔은 아픈 사람 같아보인다니까요!"
지윤 씨의 말에 회사에서까지 표정관리를 하고 있지 못하다는 걸 알았다. 잊고 있었는데 회사 동료들은 연수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고, 부인을 떠나 보낸지 이제 한 달을 겨우 넘은 남편의 표정 치고는 너무 밝아 보여 이상하게 생각했을 법도 하다. 솔직하게 완벽하게 그녀를 잊었다고는 말 할 수는 없으나, 어느 정도는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 무겁기만하더 그 죄책감도 이제 조금씩 사그라졌고 무엇보다도 나와 경수가 행복하니까. 그거면, 그거면 되니깐. 또 다시 경수가 생각나 피식하고 웃었더니, 지윤 씨가 또 의아하게 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 한다. 그런 나는 다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서류에 집중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항상 웃고 계시잖아.. 불과 한달 전에 와이프 죽은 사람치곤 너무 말짱하고.' '야! 그게 좋은거지. 오히려 나 죽겠어요, 하는 표정으로 회사 와봐. 괜히 대하기도 어렵고..' '그건 그렇지만... 혹시 새 여자 생긴 거 아닐까?' '설마! 그 선배가 그럴 사람이겠어? 그냥 좋은 일이 생겼나보지.'
어느새 날이 후덥지근해지더니 더운 여름이 되었다. 매해마다 느끼는 거지만, 여름은 갈수록 더워진다는 느낌이다. 환경을 위해서라도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사용하자고 누군가가 그랬지만, 내가 당장 더워 죽겠는데 그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회사에서는 이틀간의 휴가를 주었고, 그 시간동안 녀석과 놀러를 갈까 생각도 했지만 밖에 나가는 게 더 고생이라며 거부하는 경수의 찌푸린 얼굴을 생각하니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경수야, 이참에 나 회사 때려치울까?" "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맨날 이렇게 안고 있었으면 좋겠다." "당신 일 안하면, 우린 뭐 먹고 살고 뭐 입고 어디서 살아. 요즘 세금이랑 물가랑.. 지긋 지긋할 정도로 올랐다구!" "어이구, 우리 경수 아줌마 다되버렸네." "뭐?!"
그가 내 품에서 몸을 떼고는 나를 향해 눈을 흘겼다. 입은 웃고있으면서. 그런 그의 모습이 귀여워 짧게 웃었더니, 어느새 따라 웃고 있는 녀석이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입술에 쪽 하고 짧게 입을 맞췄더니 하지 말라며 또 베시시 웃는다. 아직 20대 중반이지만 하는 행동은 정말 아직도 어린애같다. 이번엔 그에게 장난삼아 조금 길게 키스를 하고나서 입을 떼자 얼굴을 붉히는 그였다.
"경수야." "....응?" "난 니가 이렇게 얼굴 빨개질 때가...제일 섹시해."
참을수 없이.
TV에 재밌는 거 안 하니까 끌까? 녀석이 차마 대답도 하기 전에 리모컨을 들어 빨간색 전원 버튼을 눌러 시끄럽게 떠들던 TV를 끄고 그의 입술에 또 다시 입술을 묻었다.
"...쉿."
무아지경으로 그의 입술을 빨아들이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침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그를 침대에 부드럽게 눕히고 더운 여름철에 걸맞게 얇게 입은 그의 옷가지를 빠르게 벗기고 그의 몸에 조금씩 나의 흔적을 남겼다. 입술, 목, 가슴... 그리고... 얼마나 안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여린 몸을, 내 사람을, 내 사랑을, 도경수을. 서로의 숨이 더욱이 가빠지고 점점 더 참을 수 없는 열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을 때였다.
누군가가 우리 둘만의 세상에 침범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려주는 듯한, 무언가가 둔탁하게 떨어져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움직이던 몸도, 급하게 내쉬던 숨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 멈추었다. 그리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바닥에는 여기저기 흩어진 반찬들과 깨진 플라스틱 반찬통, 그리고 그 가운데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있는 어느 한 중년의 여성.
[.....응?] [.........행복하다.정말...나 너무 행복해.]
숨막힐 정도로 답답하게 흐르는 침묵은 끝을 보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 어느 누구하나 쉽게 입을 뗄수가 없는, 입을 열 수가 없는 막막하고 숨이 턱하고 막히는 갑갑한 공기였다. 한없이 여린아이는 그런 침묵 속에서 내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울고 있었다.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달래줘야 하는데, 차마 그 어린손을, 떨고 있는 그 손을 잡을 만큼 나는 용기가 있지도, 염치 하나도 없는 놈이 아니였다.
"자네가 설명 해보게나." "엄마!!" "넌 조용히 해! 자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 한없이 예쁘던 두 눈을 가진 아이는 쉴새 없이 울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부서질 듯, 찢어 질 듯 아파왔다. 차라리, 이대로 심장이 멎어버렸으면.
"보신 그대로 입니다. 저와 경수 서로 사랑.."
짜악,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무겁던 공기를 파고 들었고, 그와 동시에 비명소리가 들려왔으며 내 고개는 한쪽으로 돌린 채 바닥을 향해 있었다. 돌아간 고개를 다시 돌려 맞은 편에 앉은 채 경멸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한 중년의 여성을 다시 마주 했다.
"장모님.." "누가 자네 장모란 말인가!!" ".....처음 봤을 때, 그때 저를 굉장히 예쁘게 여겨 주셨는데.. 어쩌죠..저도 지금 제가 너무도 큰 잘못을 저질러버렸는거 압니다. 하지만, 저와 경수, 서로 사랑합니다.
어떤 정신으로 말을 뱉었는지도, 방금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모를 만큼 긴장해 있었다. 모든 정신의 핀트가 끊긴 채 그냥 입에서 나오는 말 그대로 다 내 뱉었다. 무슨 말을 해야 되는지 구분도 하지 못하고 그냥 생각 없이 다 내뱉어버렸다. 불과 몇 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이라고 묻는다면 딱히 무시는 못하겠으나, 내 뱉은 내 말은, 그 말들은 모두 거짓하나 포함되지 않은 진실이자 진심이였다. 나를 더럽다는 표정으로, 그리고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는 맞은 편에 있는 그녀는 경수와 연수를 섞어놓은 듯 했다. 그리고, 그녀의 그 눈빛은 마치 우리에게 죄책감을 안겨주고 떠난 연수가, 그런 연수가 바라보고만 있는것 같았다. 나와 경수와의 관계를 눈치채고도 우리를 향해 한번도 저런 눈길로 쳐다 본 적이 없었던 그녀지만, 지금 맞은 편에 앉은 그녀의, 그리고 내 옆에서 울고 있는 여린 아이의 어머니가 지금 내게 보이고 있는 모습은 마치 연수를 대신하는 듯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 앞에서 몇 시간째 꿇고 있는 무릎이 다 헤져도 좋았다. 제발 부디 경수만, 이 여리고 사랑스런 이 아이만 데려가지 않는다면.. 그렇지만 않는다면.
"엄마!!" "짐은 내가 내일 사람 보낼테니 준비 해 놓게나." "엄마! 이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누나한테는 미안하지만... 사랑해, 정말 사랑해.. 사랑한단 말이야!! 제발 엄마.. 이 사람하고 나 떼어 놓지 말아줘.." "도경수!! 어서 일어나지 못해?!"
경수야, 나만의 붉은 장미. 슬퍼하지 마, 울지마, 아프지마. 내가 다 대신 할테니깐 넌.....넌... 그러지마.
* * *
한동안 미친 듯이 일 속에 빠져 살았다. 가끔씩 조금은 자주,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이를 앙 다물고 반쯤 미친 상태에서 일을 했었다. 하루는 잠도 자지 않은 채 하루종일 일만 하거나, 또 다른 하루에는 미친 듯이 꼭 죽은사람처럼 잠만 잤다. 그렇게 하면 생각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기에, 그렇게 하면 쉽게 잊을 수 있을꺼라고 믿었기에. 하지만 그 녀석은 끝내 내 몸 전체로 퍼저버린 지독한 맹독 같았다. 잠이 오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얼굴이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럴 때마다 결국은 밖으로 나와 독한 담배 한모금을 하는 것. 그것이 다였다. 그렇게 늘어가는 건 한숨과 하루에 피워대는 담배 수 였다.
"이게 뭡니까."
너는 잘 지내니. 그리고 가끔은 이따금씩 마치 그 예쁘던 아이와 같이 반짝이는 별 하나조차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조금 있으면 환하게 웃으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며 물어볼 것만 같은 아이의 얼굴이 나도 모르게 문득문득 떠올라서, 생각이 나서 눈물을 훔쳤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가고 싶어서, 보고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막상 찾아간다면, 그 아름답던 아이가 내게 왜 왔냐며 울면서 소리만 질러댈까봐, 나를 원망하는 눈빛으로만 쳐다볼까봐 그게 두려웠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아파하고 있을 녀석일테니깐.
"......자네!"
하지만 이기적인 나는, 그래도... 그래도 니 얼굴이 보고싶다. 이제 더이상 내 심장을 죽이기는, 이미 심장이 매말라 버렸고 죽어버렸기에. 힘들겠지만, 내가 찾아간다면 환하게 웃어줄래? 왜 왔냐는 물음보다는... 왜 지금 오냐며 투정을 부리며 따뜻하게 안아줄래? 그래준다면.. 니가 그래 준다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죽어버린 내 심장이 다시 살아날 것 같아서. 억지스러운 바램들을 해본다. 염치없이 그런 바램들을 해본다.
아무리 그 이름을 불러도, 내 눈 앞에 있는 하얀 문을 힘껏 두들겨봐도, 초인종을 쉴새없이 눌러도,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나는 그를 그동안 찾지 않았고 너 없이 살 수 없다는 말은 마치 거짓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딱 죽지 않을 만큼 살았다. 대체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그건 끝을 알수 없는 도박과 같은 것 같았다.
".....왜....."
목이 매여왔다. 그 고운 미성과 그 곱디 고운 얼굴이 내 눈에 보이는 순간 나는 어떤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그 쉬운 안녕이라는 인사도, 웃고 있는 표정도.
그러나 난 끝내 몰랐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건 결국, .....내 상처로 돌아온다는 것을.
* * *
알게 모르게 아이는 연신 나와의 만남을 불안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차에 태우고 가까운 교외로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아이는 아는 카페가 있다며 그 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가 말한 카페는, 그의 집에서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이였다. 실은,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맞추어 뜨거운 커피를 손에 움켜진 상태에서 서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대한 가까이 있고 싶었다. 그가 굳이 이 카페를 선택한 것은, 그동안 헤어져 있었던 우리의 공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벽. 그간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누군가가 가져다놓은 흔적. 그 벽을 두고 마주한 우리 둘. 그것이 카페 안에 있는 우리의 모습 이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는 걸까. 아니, 솔직히 어떤 말보다도 너의 따뜻했던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아니, 아니다. 힘없는 미소가 아닌, 밝은 미소를,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던 너의 그 밝은 미소를 보고 싶었다. 그런다면 그동안 내가 하지 못했던 말들을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럴 것만 같아서. 아이는 여전히 입가에 조그만한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정말이지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어서, 그걸 보는 나로써는 그 미소가 안쓰러웠다, 녀석은 최대한 밝게 행동하려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무언가 더 어색해보였다. 억지 미소, 억지 행복, 모든 것이 억지. 그것은 내 눈에도 훤히 보이는 것이라 보는 내가 안쓰러울 정도로.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형식적인 말도 없이 내 앞에 앉은 아이는 대뜸 그랬다. 그리고 그 말을 꺼낸 그 고운 미성의 목소리가 조금은 흔들렸을지도.
"......누나한테 미안했었는데." "도경수, 너!"
".........." ".......진심으로."
그때, 문득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오더랬다. 너무 뻔한 레파토리였다. 너무나도 지극히 뻔한. 너무 뻔해서 지겹고 짜증나고, 듣고싶지 않을 정도의 레파토리.
"당신..!"
"내가 말했지... 난 너 없으면 못 산다고. 살아보려고 했어, 이 악물고 바득바득. 미친 듯이 발버둥 쳐봤어. 어머님도 알아버린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너 없으면 못살겠더라. 니가 대체 왜 갑자기 이렇게 마음이 변해 버렸는 지 알 수는 없지만, 난 너에 대한 마음 하나만은 진심이야." "찬열 씨, 오해하지 마. 제발. 당신하고 헤어진 뒤에 많이 생각해 봤어, 이건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못 돼. 죽은 누나한테도 미안하고, 엄마한테도 미안하고. 그래서.... 나, 다시 유학 가."
드디어 너를 만나 조금은 다시 숨을 쉬려는 듯 아주 작은 미동을 하려는 내 심장이 겨우 쉬고있던 숨을 다시 멈추는 것 같았다. 내 앞에 앉은 아이는 단호했다. 그리고 눈물이 맺혀 있는 아이의 눈이였지만, 그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아이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확신은 서지 않았다.
"........." "......아프지말고, 행복해. 도경수."
내 몫까지.
그게 마지막이자 너에게서 영원히 떠나가는 내가, 남아있는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니깐.
"뭐요?" "아니, 글쎄 저번에 결혼한지 얼마 안됬던 그 새댁 아가씨 자살로 죽었잖아.." "아, 네. 맞아요. 예쁘게 생긴 아가씨였는데..." "유서도 없이 그냥 죽어서 안타까웠었는데...이번엔 그 집 아가씨 남편이 죽었다네..." "정말요? 어머어머, 죽은 아내 못 잊어서 따라 죽은 거에요?" "그런가 봐. 근데, 유서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 데.. 죽기 전에 무슨 쪽지를 남겨 놨다던데.." "뭐라고 적힌 쪽지 였는데요?!"
[........사랑한다. 내가 사랑했던건 너 하나뿐이다. 내 영원히 시들지 않을 꽃 같은 아이에게.] |
▶이브주저리 |
사실은, 예전에 적어놓았던 픽이였는데... 읽어보니 뭔가 허전함 감이 있어서 조금 수정했지만, 역시나 예전글이라 그런지 좀 그렇게 맘에 들지만은 않네요.
마지막에는 다른 이웃사람들의 말에 이제 찬열이가 죽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식으로 쓰고 싶었는데.. 허허허, 아무튼 오늘 또 청춘로맨스 써서 돌아오겄습니다. 빨리 써야될텐데, 이놈의 귀차니즘이란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