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로맨스
w.챼리
김태형은 날 때 부터 잘생겼다. 굳이 잘생김의 역사를 따지자면 그랬다. 신생아실에 누워있었을 적부터 예쁘단 소릴 들었고, 유치원 재롱잔치에선 여자애들을 제치고 백설공주를 맡았다. 초등학생 시절엔 담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중학교에 다니는 누나들이 태형을 보러 담을 넘기도 했다.
그렇게 잘 자라주어 중학생이 된 태형은 남들과 조금 다른 사춘기를 맞이하게 됐다. 불타는 사춘기, 일명 중2병의 시기. 다녔던 초등학교 근처의 남자 중학교에 진학한 태형은, 얼굴 마담을 영입하려던 소위 말해 일진 무리의 레이더망에 들었다. 내심 일진 형아들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던 태형은 당연히 무리에 합류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착하고 마음이 여렸던 태형은 제 친구들이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거나 돈을 뺏는 것을 보는 게 전혀 즐겁지 않았다. 결국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자연스럽게 그들과 멀어진 태형은 다행스럽게도 깔끔하게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 시기에 시작한 담배는 쉽게 끊을 수 없었다.
중3이 된 태형은 핑계가 아니라 정말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딱히 미래에 되고자 하는 건 없었지만 그래서 더욱 더 공부를 해야만 했다. 태형의 부모는 공부에 눈을 뜬 태형을 아낌 없이 지원했다. 학원에 가고 싶다는 말이 꺼내지기가 무섭게 당시에 태형이 사는 동네에서 가장 큰 종합 학원에 등록을 시켜주었다. 이제는 말 하면 입 아플 정도로 당연하게, 김태형은 물론 학원 안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었다. 해를 거듭 할 수록 더 잘생겨지는 덕분에 인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건 덤이었다.
그 즈음에 모두가 의문을 가졌던 건, 도대체 김태형은 왜 연애를 하지 않는가. 였다. 사실 태형은 연애에 관심이 많았다. 제 친구들이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을 보며 부럽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제 눈에 차는 사람이 나타나질 않는 다는 게 문제였다. 번호를 따가는 친구들이나 누나들 중엔 더러 예쁜 애들도 있었지만 사귀고 싶단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대망의 그 날, 태형은 여느날과 다름 없이 학원에 등원했다. 그 날은 원장선생님의 영어 수업이 있는 날이었기에 혼나지 않으려면 숙제를 반드시 해가야 했다. 집에서 숙제를 하지 못한 태형은 조금 일찍 도착한 김에 숙제를 빠르게 하려 빈 강의실을 찾았다. 워낙 큰 학원이라 대개 수업이 없는 강의실이 꼭 한 개 쯤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은 빈 강의실에서 태형은 자그맣고 까만 뒤통수를 발견하게 된다.
“엄마… 나 진짜 여기 다녀야 돼? 그냥 우리 동네 상가에 있는 거 다니면 안 되나? 뭐? 거긴 초등학생이 다니는 데라고? 엄마… 그치만 나도 3년 전까지는 초등학생이었는데?”
가서 툭 건들이기만 해도 울음을 와앙 하고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책상에 엎드려 있는 뒤통수가 말을 할 때마다 움찔 거리는 게 퍽 귀여웠다.
“여기 진짜 이상하다니까? 한 수업에 듣는 학생이 60명이 넘어. 이게 말이 돼? 학원비도 웬만한 과외비 급이라며. 근데 왜 이러냐구… 아니, 왜 화를 내… 알겠다고. 알았어. 그럼 이주일만 더 다녀볼게. 한 달? 한 달은 좀 힘들 것 같은데… 알겠어어. 응. 응.”
코를 훌쩍거리며 마무리 멘트를 내뱉는 목소리에 태형은 자기도 모르게 문 뒤로 몸을 숨겼다. 통화 내용을 엿들은 걸 알면 민망해할 것 같아서였다. 전화를 끊은 까만 뒤통수는 책상에 이마를 몇 번 콩콩 박았다. 이마 빨개졌겠다. 태형은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고개를 빼꼼히 빼자, 공중에 덜렁거리던 발을 바닥에 딛고 선 뒤통수가 곧 뒤를 돌았다. 그 순간 태형은 숨을 헙 하고 들이쉬었다. 문 뒤에 숨은 태형을 발견하지 못하고 강의실에서 나간 여학생은 김여주라고 쓰인 명찰을 달고 있었다.
태형이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태형이 학원에 나오는 이유가 완전히 바뀌었다. 전에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였다면, 그 날 이후로는 오로지 김여주를 보기 위해서였다. 김여주는 통화 내용대로 적어도 이주는 고분고분 다닐 생각이었는지 울상을 하고서도 매일같이 등원했다. 태형은 제 친구들과 얘기를 하면서도, 수업을 들으면서도, 화장실에 가면서도 여주에게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태형이 보는 여주는 늘 혼자였다. 혹시 같이 다닐 친구가 없어서 학원에 다니기 싫은 걸까? 태형은 본인이 여주의 친구가 되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잘 구슬려서 계속 다니게 해야지. 한 달이 뭐야, 6개월도 다니게 할 수 있어. 늘 곁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 뿐이었던 태형은 여주를 학원에 붙들어 놓을 자신이 있었다.
무슨 맛을 좋아할 지 몰라서 맛 별로 전부 산 마이쮸를 손에 들고 등원한 태형은 늘 있어야 할 자습실에 여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늘 이 시간이면 자습실에 있었는데, 오늘은 어디갔지. 화장실을 갔나 해서 기다렸지만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에 태형은 선생님을 찾았다.
“쌤! 그… b반에 여주? 걔 오늘 안 왔어요?”
“여주? 그만 뒀어. 어제.”
네? 태형이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어제. 그만 뒀어. 여주. 태형은 드라마 주인공처럼 그 자리에서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 했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분명히 적어도 이주는 다닐 거라고 했는데…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었다. 태형은 그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여주를 보고 부터 일주일간 피지 않았던 담배를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 시각 여주는 이미 결국 동네 상가에 있는 학원에 등록한 상태였다. 그 학원은 원래 초등학생 전문 학원이었지만 여주를 계기로 중학생을 받기 시작 했다는 일화가 전해졌다.
여주는 학원을 그만 두었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 김태형은 결국 여주가 다니는 학교를 알아냈다. 전에 여주가 학원을 그만 뒀다는 걸 알려준 학원 선생님의 도움이 컸다. 태형이 여주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선생님이 눈치 챘다는 사실을 태형은 끝까지 몰랐다. 각설하고, 여주는 신화여중을 다녔다. 학원에서는 좀 멀었지만 태형은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제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신화여중으로 찾아간 태형은 정문에 서서 무작정 여주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3일을 내리 출석 했지만 여주는 털끝도 볼 수 없었다. 당연히 볼 수 없었다. 태형은 신화여중에 후문이 있다는 걸 알 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쯤 되니 태형은 김여주가 신화여중인 게 아니라 신화 속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나가는 신화여중 학생들한테 물어도 김여주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 조용히 학교만 다니는 애라 없는 게 당연) 심지어 김여주는 웬만한 사람들 다 있는 싸이월드 미니홈피 조차도 없었다.
결국 첫사랑을 그렇게 떠나 보낸 태형이 여주를 다시 만난 것은 1년 가까이가 지나서였다.
“아, 몰라아…. 어. 아는 사람 아무도 없지…. 나도 그냥 신화여고 갈 걸. 응. 응… 지금 학교 들어가는 중. 나 너무 무서워…. 야, 그리고 지금…”
태형은 고등학교 입학 첫 날 부터 선생님에게 찍히고 싶지 않아 부러 뒷골목까지 돌아 와서 담배를 피우려던 중이었다.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던 순간, 1년 전 그렇게 찾아 다녔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그 때 처럼 툭 치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내 앞에서 여기 고등학생 오빠 담배 피고있어… 응, 눈깔았지…….”
태형에게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태형은 반가운 마음에 순간 여주에게 아는 척을 할 뻔 했지만 제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로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에 동작을 멈추고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엄청 귀엽네.
피지 않은 담배를 다시 곽에 넣고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은 태형은 여주가 지나간 길을 따라 걸었다.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벌써 저만치 앞서 가는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정문 현관 앞에는 신입생 반배정 표가 붙어있었다. 표를 잠시 쳐다보고 안으로 들어가는 뒤통수를 바라보며, 태형은 교회에 발을 들여 본 적도 없으면서 갑자기 하나님을 찾았다. 제발. 하나님. 제발. 김여주랑 같은 반이게 해주세요. 뚜벅 뚜벅 걸어 현관에 크게 붙은 종이 앞에 선 태형은 눈을 감고 심호흡 했다. 다시 눈을 뜬 태형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1학년 3반
.
.
.
김여주
김조연
김태형
.
.
.
미친. 진짜 같은 반이잖아. 태형은 믿기지가 않아 큰 눈을 끔뻑이며 그 자리에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잘못 봤나 싶어서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앞구르기 1000번 뒷구르기 1000번을 하고 봐도 같은 반이었다. 혹시나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른 반도 샅샅이 훑어봤지만 김여주와 김태형이라는 이름은 오직 3반에만 존재했다. 태형은 내적 댄스를 추고있는 몸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뛰는 것에 가까운 걸음으로 1학년 3반 문 앞에 선 태형은 또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열었다.
그 와중에 김태형은 여전히 너무 잘생겨서 반에 먼저 있던 모든 학생들의 주목을 받았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앞에서 태형이 교과서를 받으면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건 말건, 반 애들의 시선이 모두 태형에게 집중 됐건 말건, 가방을 챙기며 고개를 숙이고 입을 비죽이고 있던 여주는 교실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태형은 여주가 앉은 자리의 건너편에 가방과 받은 교과서를 내려놓았다. 괜히 긴장이 되어 바짝 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축인 태형은 여주가 앉은 책상 앞으로 가 섰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여주가 고개를 들었을 때, 태형은 또 다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 했다. 원래도 예뻤는데, 더 예뻐졌네.
“진짜 맞네. 대박.”
“…….”
“너 나 알지.”
“모르는데.”
호기롭게 말을 건넨 태형은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아무리 며칠 안 다니고 학원을 끊어버렸댔지만, 자기를 모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여주는 태형을 무지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설마… 모르는 척 하는 거겠지? 모르는 척 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태형은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학원에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 그, 나 제일학원 다녔던 김태형인데.”
“그런데?”
“그래도 몰라?”
“나 거기 일주일밖에 안 다녔어.”
태형의 입에서 작게 헛웃음이 터졌다. 뭐야. 진짜 모르네. 얘.
“그니까.”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의 여주를 쳐다보던 태형은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교복 바짓단에 대충 비벼 닦고 여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여주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암튼 난 김태형이야. 솔직히 좀 충격이다. 나는 학원에 나 모르는 애 없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태형은 그냥 대뜸 여주의 손을 끌어다가 잡았다. 어거지로 손도 위 아래로 흔들었다. 그 와중에 손이 너무 귀여워서 태형은 또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몸은 마른 편인 것 같은데 손이 유독 통통했다. 계속 잡고 주물거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간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할까봐서 아쉽지만 손을 놓았다. 태형은 전부터 여주를 만나면 꼭 하려고 했던 말을 입 안에서 곱씹었다. 가장 중요한 거.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너 남자친구 있어?”
“아니.”
아까와 비교도 안되는 내적 댄스 욕망으로 몸이 조금 꿈틀거렸지만 꾹 참고 태형은 말했다.
“그럼 나랑 사귈래?”
이번엔 경계의 수준이 아니라 진짜 충격 받은 표정을 한 여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게 아닌가…? 태형은 속으로 생각했다. 여주의 반응은 정말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누구한테 고백이란 걸 해본 적이 없던 태형은 여주의 반응에 제가 더 당황했다. 나 잘생겼는데… 취향이 아닌가.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장난이라고 할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을 때 즈음 드디어 여주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그래.”
김태형 인생 첫 연애의 시작이었다.
어쩌다 로맨스
w.챼리
태형은 고민이 많았다. 호기롭게 고백을 했던 고등학교 1학년과, 순탄하게 연애했던 2,3학년을 지나,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붙은 것 까지는 참 좋았다. 하지만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많이 달랐다. 신경쓸 것들이 너무 많았다.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었다. 여주는 cc는 절대 안 된다는 사촌 언니의 말을 듣고 와서는 굳이 비밀 연애를 해야겠다고 했다. 처음에 태형은 그래도 전혀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밖에서의 애정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빼면 별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입학 전 들어간 과 단톡방에서 여주를 유독 반갑게 맞는 동기 남자애들은 좀 기분 나쁘고 그랬다.
또 신경쓰여 미치겠는 게 있었는데, 여주의 자취방에 둘이 있게 되는 경우였다. 사실 여주와 뽀뽀나 키스를 할 때, 제 몸이 반응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꽤 오래 전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런 끈적한 분위기가 진전될 만한 상황이 잘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학에 붙어 상경을 하면서 상황이 좀 달라졌다. 방 하나가 전부인 자취방에서, 성인 남녀 둘이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태형은 몹시 고통스러웠다.
태형은 겨우 그런 것들을 신경쓰고 있었을 뿐이지, 이런 상황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3년을 사귀다보니 전보다 서로에게 편해졌고, 태형은 그래서 더 좋았다. 태형은 그렇게 생각했다. 굳이 나가서 데이트를 하지 않아도 그냥 같이 있으면 좋았고, 하루 종일 서로 다른 만화책을 보다가도 같이 밥 먹으면 또 좋았고, 오가는 대화 없이 서로 핸드폰만 보고 있다가도 웃긴 걸 보면 공유하는 그게 좋았다. 그러나 여주는 그렇지 않았다는 걸 몰랐다. 전혀 티를 내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정말로, 이런 상황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태형아, 우리 헤어질래?”
그날도 역시 태형은 여주의 자취방에서 늘 보던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너무 평온했던 상황을 갑자기 깨뜨린 여주의 말에 만화책을 쥔 태형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태형은 여주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얼굴을 보면 울 것 같았다.
그래도 태형은, 여주가 그러자면 그러고 싶었다. 그 때 태형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랬다.
“그럴까.”
언젠가 여주와의 마지막이 온다면 자신은 어떤 반응일까 상상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태형은 절대 울지많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 태형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꽉 물었다. 기지개를 펴는 척 하면서 천장을 쳐다봤다.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제발 여주가 눈치 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느린 동작으로 짐을 챙기는 동안에도 여주는 전혀 미동이 없었다. 짐을 대충 다 싼 태형은 읽던 만화책을 가방에 넣으려다가 몰래 테이블 밑에 숨겼다. 이건, 진짜 너무 보고싶어서 죽을 것 같을때 마지막 핑계로 써야지. 애써 슬픈 내색 없이 전기 장판까지 끈 태형은 현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여전히 여주를 쳐다보지 않은 채였다.
“잘 지내.”
어쩌다 로맨스
w.챼리
여주와 헤어진 이후 태형은 여주의 전화번호와 카톡을 차단했다. 적어도 찌질한 전남친으로 기억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지만 태형은 일부러라도 번호를 잊으려고 노력했다. 술만 마시면 전화를 걸고 싶어지고 카톡을 하고 싶어져서 술도 잘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제발 천천히 오길 빌었던 개강 시즌이 찾아왔다. 단톡방에서만 이야기를 나눴던 과 동기들을 실제로 만났다. 태형은 언제나 그랬듯이 인기가 많았다. 하루에도 밥 먹자, 술 먹자 하면서 연락하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하지만 태형은 혹시나 여주가 나올까 싶어 남자 동기들만 있는 술자리에만 참석했다. 그게 신비주의가 되어 인기가 더 많아졌다는 건 몰랐다.
남자들만 있는 술자리에선 자연스럽게 여자 얘기가 나왔다. 들리는 말로는 남자애들 사이에서 여주가 인기가 많다고 했다. 너는 김여주 어떠냐는 동기의 말에 태형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태형은 여주의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을 모르는 동기들은 말을 이어갔다.
“김여주는 얼굴은 예쁜데 애가 사회성이 좀 없더라. 맨날 혼자 다니고.”
태형은 그 날 동기들에게 화를 냈다. 적당히 좀 해. 너넨 만나면 여자 얘기 밖에 할 줄 모르지. 덕분에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태형은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누구도 태형의 탓을 하지는 못했다. 그 즈음에 과 내에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김태형과 김여주, 둘이 만나면 서로 티나게 피하더라 하는 소문이었다. 그 날 이후 어쩐지 김태형이 김여주 얘기 나오는 것 자체를 싫어하더라 하는 소문이 추가 되면서 결국 둘이 싸웠다는 결론이 동기들 사이에서 나왔다. 소문 덕분인지 더 이상 태형의 앞에서 여주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여주에 대한 최근 근황을 듣게된 건, 여주는 듣지 않는 전공 수업의 강의실에서였다.
“그거 들었냐? 김여주, 남친 생길 삘이래.”
“뭐? 누구? 설마 성훈이? 아니다, 병재? 그 새끼 결국 고백했대?”
여주가 없는 곳에서 여주 얘기를 하는 건 못 견디게 싫었지만, 그보다 대화 내용이 궁금했던 태형은 온 신경을 대화에 집중했다. 여주가 사귈 것 같다는 사람은 우리 과도 아니고 동아리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했다. 이름은 김석진. 학교 안에서 꽤 유명할 만큼 잘생긴 사람이랬다. 지나가다가 헐 잘생겼다 싶으면 그 사람이 김석진인 것도 아니고, 지나가다가 헐 김석진이구나 싶으면 그게 진짜 김석진이라고.
하지만 태형은 여주가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을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주를 믿어서라기 보다는 그냥 느낌이 그랬다. 그렇게 쉽게 3년간의 추억을 지워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김석진이란 사람 얼굴은 좀 궁금했다. 얼마나 잘생겼길래.
그런데, 김석진도 양반은 못 됐다. 다음 수업에 가기 전 잠깐 들른 화장실에서 손을 씻던 태형의 옆으로 누군가 와서 섰다. 남자는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통화 중에 나온 이름이 익숙했다.
“어, 여주야. 나 지금 화장실. 응, 동방이야?”
태형은 바로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봤다. 좀 전에 친하지 않은 제 동기들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헐 김석진이구나 싶으면 그게 김석진이라고 했던. 태형은 알 수 있었다. 그 남자는 김석진이 분명했다.
솔직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대뜸 혹시 김여주랑 사귀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와서 걷던 태형은 문득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돌아본 곳엔 여주가 있었다. 여주는 웃으면서 누군가와 얘길 나누고 있었다. 그 앞엔 김석진이 있었다.
태형의 발걸음은 다음 수업이 있는 건물이 아닌 피시방으로 향했다.
그 날부터 며칠간 수업을 전부 빼먹고 피시방에 쳐박혀 의식주를 해결한 태형은 피시방에서 나오기 전 충동적으로 입대 신청을 했다. 영장은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나는 바로 다음 날이었다. 태형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종강 파티에서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볼까했는데, 그럴 수도 없게 됐다는 게 좀 아쉬울 뿐이었다.
그렇게 태형은 군대를 갔다.
군대 안에서도 태형은 여주의 소식을 듣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휴가를 나가서도 일부러 대학 동기들은 만나지 않았다. 대학 근처에도 가질 않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서 태형은 제대를 했고, 제대를 하고도 여주의 졸업을 기다리며 계속해서 휴학을 했다. 그리고 더 이상 휴학을 할 수 없다는 학교의 통보를 받고나서야 태형은 복학 신청을 했다.
그 때 즈음에 태형은 여주를 거의 잊고 살고 있었다. 이제는 마주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차피 졸업 했겠지만.
개강 파티를 간다고 했던 건 여주를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는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태형은 여주가 당연히 졸업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개강 파티 포스터에 써 있던 주점 앞으로 가자 담배를 피고 있던 동기들이 반갑게 태형을 맞았다. 짧게 그간의 안부를 주고 받은 한 동기는 별안간 아, 하면서 말했다.
“맞다 근데, 안에 김여주도 있는데 괜찮냐? 너네 완전 앙숙이었잖아.”
“김여주가 있다고?”
“응. 걔 원래 이런 거 잘 안 빠져.”
“졸업…안했대?”
“학점 모자라서 한 학기 더 다닌다던데.”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이렇게 마주치게 될 걸 예상한 건 아니었으나, 분명 마주쳐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는지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고개를 조금 틀어 주점 안을 보니 딱 봐도 여주같은 사람의 옆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태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지. 들어가야 되나. 고민하고 있는 머리와 다르게 다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주점 안으로 들어간 태형은 무의식 중에 여주의 옆 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난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여주가 자기를 보자마자 사례가 들려 켁켁거리자 덩달아 놀란 태형이 바로 휴지를 뽑아서 건냈다. 태형은 표정 관리를 하며 술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졸업 했을 줄 알았는데.”
“…….”
“왜 아직도 졸업을 못했어?”
진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여주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당황한 태형이 불편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여주가 어금니를 물고 잇새로 중얼거렸다. 이번 학기 하면 졸업이거든. 태형은 순간 눈물이 나올 뻔 했다. 너무 그리웠던 목소리였다.
이왕 이렇게 만난 거, 여주와 둘이서 얘기라도 좀 하고 싶었는데, 바람과 다르게 태형의 주변으로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서 태형에게 아는 체를 하고 말을 걸어대는 바람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냥 눈 딱 감고 여주의 손목을 잡고 데리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여주는 여기 있는 다른 누구보다도 제가 가장 불편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근데 둘이 친한 줄 몰랐는데.”
그 때,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여자 선배가 여주와 태형의 사이로 툭 끼어들어서는 말했다. 태형은 여주의 표정이 조금 굳어가는 것을 보았다. 선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 저기에서 여주와 제 사이를 의심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대부분이 둘이 원래 사이 나쁘지 않았냐는 말들이었다. 몹시 불편해 보이는 여주의 옆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태형이 입을 열었다.
“우리 되게 친한데.”
“……”
“사귀었어요.”
솔직히 다음 말은 좀 짜증이 나있던 상태에서 자기도 모르게 한 말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놀라 자빠지는 게 느껴졌다. 놀란 건 여주도 마찬가지였는지 내내 옆 모습만 보여주더니 고개를 휙 돌려 동그랗게 뜬 눈으로 태형을 쳐다봤다. 더 예뻐졌네, 너는. 와중에 태형은 그런 생각을 했다.
“3년 정도.”
그래서 태형은 뒷 말을 덧붙였다. 우리 이런 사이니까 다들 김여주 건들지 마세요. 사실은 그 말이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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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태형이 안 나온 기념 오늘은 태형특집입니당
하루종일 방방콘 봤더니 허리가 넘 아프네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