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 이상한 꿈
쨍그랑,
오랜 시간 이어진 정적의 끝에 여주의 머그잔이 주방바닥에서 깨어졌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좀 달래려고 일부러 받아온 뜨거운 물이 사방으로 튀며 여주의 핸드폰과 맨다리를 덮쳤다. 물에 흠뻑 젖은 핸드폰은 전원을 꺼둔 채 창문가에 올려놓고, 흩어진 머그잔 조각과 물을 정리한 후 아이스팩을 갖다대자 여주는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 아, "
여주는 신음을 흘리며 시선을 내렸다. 오른쪽 종아리가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조만간 물집이 크게 잡힐 것처럼.
언젠가 윤기가 제 목에 갖다댔던 아이스팩이 아직 열기가 남아있는 곳을 진정시켜주고 있었다. 아이러니했다. 이 열기는, 근본적으로 윤기의 탓이었으므로.
여주는 제 입술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따끔따끔한 통각과 아직 가라앉지 못한 열기가 방금 전의 일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친구가 있는, 구남자친구 민윤기가 제게 키스를 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며, 제게 사랑을 갈구하는 것처럼,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여주를 침대에 눕힌 윤기는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곧장 입술을 부딪혀왔다. 순간 사고가 정지한 여주는 온 몸이 굳었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윤기는 여주의 잇새를 파고 들었다. 격해지는 움직임에 여주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어깨를 밀려고 했지만, 이미 윤기의 큰 손에 제압되어 있었기에 불가능했다. 달뜬 숨이 끈적하게 섞이고 맞부딪혀오는 입술 사이에선 질척한 소리가 오갔다. 머릿 속이 아득해져올 만큼 거친 키스였다. 숨이 모자란 듯 간간이 입술을 뗀 윤기는 눈꺼풀이 느슨하게 풀려있었지만 끓는 듯한 정염이 가득한 눈동자로 바라보다가, 그 짧은 순간마저 아깝다는 듯 다시 입술을 포갰다. 여주는 벗어나기 위해 온 몸을 비틀었으나 제 위에 올라탄 윤기의 몸이 무겁고 단단하게 저를 누르고 있었기에 하릴없이 쏟아지는 키스를 받아낼 수 밖에 없었다. 이상했다. 쉐어하우스에 처음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윤기에게 성적으로 이끌리던 건 여주 자신이었다. 본능에 이끌린 충동적인 감정들을 꾹꾹 눌렀던 것도, 그에 괴로워했던 것도 전부 여주의 몫이었다. 하지만 여주는 윤기가 두려웠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구는, 숨소리만 들어도 다 안다고 생각했던 그 윤기가. 그래서 윤기의 입술이 자연스레 제 목덜미로 흘러갔을 때,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여주의 흐느낌을 눈치 챈 윤기가 고개를 들어 얼굴을 마주했다. 깨듯 바라본 눈동자가 황망했다.
" ...윤기야, "
" ... "
" 무서워. "
잠시 여주를 가만히 바라보던 윤기가 낮게 숨을 뱉었다. 그리곤 여주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다.
" ...미안. "
들릴듯 말듯 작게 말하던 윤기가 조심스레 침대에서 떨어졌고, 여주는 그를 신경쓸 겨를도 없이 방에서 벗어났다.
그게 한시간 전의 일이었다. 여태껏 머릿 속이 혼란스러웠다. 여주가 아는 한 윤기는 상식적으로 도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제 감정에 있어 매우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런 윤기가 도의에 어긋난 행동을 제게 한 것이었다.
여주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만히 눌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윤기의 행동에 대한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윤기가 제게 미련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선을 명확하게 그으려던 제 말에 스스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
만약 이 가정이 맞다면, 최근 묘하게 달라진 윤기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감정은 여주가 제일 잘 알았으니까.
상대의 사소한 말 하나하나에도 괜한 조바심을 갖게 되고, 옅은 감정조차 컨트롤하지 못하는 미련이란 놈은 끈질기게 사람을 괴롭혔다. 한없이 스스로가 작아졌고, 그 고통의 몫은 미련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덜어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왜 제게 미련을 가진 걸까.
그 의문이 영영 풀리지 않았다. 윤기는 저와 헤어지고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처럼 굴었고, 연애를 시작했다. 저와 연애할 적에는 볼 수 없었던 헌신적인 모습까지 보여가면서. 그에 상처를 받았던 건 미련을 가지고 있던 여주였고 이제 겨우겨우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제와서.
여주는 다 녹아가는 아이스팩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더이상 생각해봤자 스스로만 더 괴로울 뿐 해결법이 나올 것 같지 않았으니까. 불을 끄자 창가에서 들이치는 달빛이 머리맡에 걸렸다. 쓸데없이 친절하고 따스한 달빛이었다.
***
' 여주야. '
여주는 흐릿한 풍경 속에서 눈을 떴다. 마치 안개가 낀 듯 온 사방이 희뿌연 가운데 걸음을 옮기자 모래바닥이 지근 밟혔다.
" ...운동장? "
돌멩이들이 마구 섞여있는 모래위에 작은 발이 푹 박혔다. 여주는 아주 조그마한 제 손을 살펴보곤 고개를 들었다. 학교라고 하기엔 작은 규모의 운동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곳이었다. 어디더라, 여기가. 여주는 흐릿한 주변풍경을 살피며 방향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걸었다. 짧은 보폭에 한참을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몇 살인지 가늠할 순 없지만, 아주 어린 나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 여주야. "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을 때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은 사과나무 아래서 작은 인영이 보였다. 여주는 그 목소리를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 ...넌 누구야? "
걸음을 멈춘 곳엔 머리카락이 유난히 짧은 작은 소년이 나무 아래에 서있었다. 분명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는데, 아이의 얼굴이 흐릿했다. 누군가 일부러 지워놓은 것처럼. 아이는 제 물음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지 빤히 여주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두근두근, 이상한 고동이 심장을 울렸다. 이상했다. 왜 이렇게 세차게 가슴이 뛰어서 아픈지 모를 일이었다.
여주는 더 가까이 아이에게 다가갔다.
" 이름이 뭐야? "
" ... "
여전히 대답않는 아이는 저보다 반뼘 정도 키가 작았다. 자연스럽게 그 뺨에 손을 갖다대자 아이는 거부감없이 손길을 받아내고 있었다. 꼭 새끼강아지같은 모습이었다. 다가갈 수록 흐릿해지는 모습에 여주는 지금이 꿈 속이란 걸 알았지만, 제 손에 닿은 온기가 너무나 애달파서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 여주야. "
그렇게 제 손길을 얌전히 받아내고 있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리곤 뺨에 있는 손을 내려 제 두손으로 꼬옥 잡았다. 아이는 저보다 더 작은 손을 가지고 있었다.
엉겁결에 손이 잡힌 여주가 어리둥절하게 아이를 바라봤다.
" 나 잊지말아줘. "
" ...응? "
" 돌아올게. "
여주는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꿈 속에서 처음 본 아이가 제게 잊지말라는 부탁과 함께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게 어딘가 서글펐다. 가슴이 죄여오는 것처럼.
아이는 작은 손에 힘을 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 꼭 널 찾으러 올게. "
그 말을 끝으로,
꿈 속의 풍경이 아이와 함께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 돌아온 정호석
" 혀엉!!!ㅠㅠㅠㅠㅠ "
" ....형? "
별안간 들려오는 태형의 목소리에 여주가 눈을 번쩍 떴다. 해가 침대 위에 부서지고 있었다. 여주는 묘하고 이상한 꿈에 대해 되짚을 정신도 없이 태형의 '형'소리에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방문 앞에 달려갔다. 김태형이 저렇게 반갑게 유난을 떨면서 소리 지를 상대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덜컥'
" 다들 잘 있었어? "
문을 열자마자 들이치는 빛 가운데, 호석이 있었다. 여주는 문도 제대로 닫지 못하고 그대로 벙찐 채 하메들 사이에 있는 호석을 바라봤다.
그리고 문득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당장 달려가 안지 않고는 못배길 것 같이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남준의 물음에 웃으며 답하고 있던 호석이 기척을 느끼고 제 방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햇살같은 눈동자가, 못내 그리웠던 다정한 그 눈동자가 부딪혀왔다.
여주가 작은 숨을 내뱉었다. 어째선지 달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려가서, 저 품에 안겨야겠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그래서 저를 부르려는 호석에게 발걸음을 내딛은 순간.
" 혀엉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옆에서 치대고 있던 태형이 와락 호석의 품에 안겼다. 격하게 안긴 탓에 여주쪽을 보고 있던 호석도 안긴 태형을 받쳐주기위해 몸을 틀었다. 그에 질세라 옆에 있던 지민도 와락 호석에게 안겨들었다.
여주는 내딛은 발끝을 멈칫 세우곤 천천히 걸어갔다. 반대편 쇼파에 앉아있던 남준이 앉으라며 옆자리를 내준 덕에 호석의 옆에도 앉을 수 없었다. 보아하니 하메 셋은 일찍이 호석이 오자마자 이것저것 물어본 모양이었다. 남준은 지나치게 침착했고 물음표 살인마인 태형도 더이상 질문없이 치대고 있는 게, 영락없이 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여주는 당장이라도 호석에게 묻고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지민과 태형이 계속해서 징징대고 있는 덕에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었다. 호석도 둘을 달래느라 제 쪽을 신경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 안겨서 울고 싶은 게 누군데. 여주가 내내 언짢은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옆에 있던 남준이 푸, 하고 웃었다. 여주는 고개를 홱 돌려 남준을 째려봤다.
" ...왜 웃어요. "
" 여주는 표정을 못숨기는 것 같아. "
" ...네? "
그게 귀엽기도 하고. 남준이 푸스스 웃으며 여주에게 말했다. 경악에 젖은 얼굴로 바라보니 남준이 별 대꾸없이 웃음으로 받아쳤다.
여주는 눈물겨운 상봉의 순간 속에서 호석에게 엉겨붙은 둘이 언제쯤 떨어져나갈까 타이밍을 재며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호석을 따로 불러낼 요량이었다. 다같이 있을 때 물을 수 없는 질문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우선은 얼굴에 작은 생채기의 흔적이라도 남았는지, 꽁꽁 싸맨 옷 사이사이 상처가 있는지 살펴봐야 했다. 그리고나서 어디에 있었던 건지, 제겐 왜 따로 연락이 없었는지 투정을 부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엉겨붙은 둘이 먼저 그 기회를 가로채갔다.
" 형, 형. 저희 방에 잠깐 와봐요. "
" 응? "
" 보여줄 거 있단 말이에요. "
여태껏 징징대고 있던 태형이 호석의 품에서 말했다. 그 말에 호석이 머뭇대며 여주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눈치에도 아랑곳않고 지민이 말을 덧붙였다.
" 맞아요, 지난번에 형이 봐준다고 했던 거. "
" 그럼 좀있다가, "
" 안돼요~~ "
그리곤 그대로 호석의 양 팔을 잡고 제 방으로 이끌었다. 지민과 태형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호석이 잠시 여주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둘은 막무가내였다. 여주는 애처롭게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망할 놈들. 그리곤 낮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
" ... "
여주는 뚱한 얼굴로 거실쇼파에 앉아있었다. TV에선 한참 라이징 중인 스타의 열애설로 떠들썩했지만, 그 주인공이 누구따위인지 여주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테라스에서 호석을 데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쉴 새없이 하고 있는 둘이 언제쯤 호석을 놓아줄 지, 그게 가장 중요했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쌓인 건지, 벌써 한시간이 넘어갔다. 처음엔 얘기가 금방 끝나겠지 싶어서 무념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둘은 지독하게도 수다스러웠다. 여주는 테라스에서 소란스러운 셋을 잠깐 흘기곤 TV전원을 껐다. 신경질적이게 리모컨을 내려놓자 맞은편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남준이 시선은 책에 둔 채 물었다.
" 윤기 어디있는지 알아? "
난데없는 물음에 여주가 깨듯 남준을 바라봤다.
" 새벽부터 없던데. "
" ... "
" 어젯밤에 둘만 집에 있었잖아. "
남준이 책장을 넘기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여주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호석과 그에 엉겨붙어있는 둘에 정신이 팔려 윤기가 없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이렇게 윤기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는 게. 심지어 어젯밤엔...
여주는 불현듯 떠오르는 윤기의 눈동자를 잊기위해 도리질을 했다.
" 저도 잘 모르겠어요. "
" ... "
" 걔가 워낙 요즘 바빠서. "
" 그래? "
" ...아마요. "
그래서 회피하듯 대답했다. 아직까지도 테라스에서 왁자지껄한 셋도 짜증났지만 굳이 꺼내고 싶지 않던 윤기의 화제가 떠오르자 속이 급격히 거북해졌으니까. 문득 남준의 빤한 시선이 느껴지자 여주는 안고 있던 쿠션을 정리하며 물었다.
"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
" 아니. "
뭐에요, 싱겁긴. 여주는 남준의 지나치게 빠른 대답에 작게 웃으며 쇼파를 벗어나 방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남준의 말이 덧붙여 따라왔다.
" 명확해진 것 같긴 해. "
문고리를 잡아당기려던 여주가 고개를 돌려 남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여전히 의뭉스러운 웃음을 띄운 채 남준은 그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무슨 소리에요? "
" 글쎄? "
남준은 책을 덮곤 싱긋 웃었다. 여주는 그에 대꾸하듯 아랫입술을 한번 내빌곤 그대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하여간 이상한 사람이었다.
*
style="text-align: center;">
" ...이제 끝났나? "
여주는 문에 귀를 갖다댄 채 작게 혼잣말을 했다. 방과 테라스, 거실의 거리가 멀지 않은 덕에 여지껏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더니 한 십분전부터 조용해져 있었다.
드디어 어린 수다쟁이들의 수다타임이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석을 내내 가만둘 녀석들이 아니라, 잠깐 호석이 혼자 되는 틈을 타서 데리고 와야 했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호석은 내일도 둘에게 하루종일 시달릴 것 같았다. 곧 늦은 밤이 될 시간이라 서둘러야 했다.
여주는 적막이 도는 문 너머의 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속으로 30을 세고 문고리를 돌렸다.
" 어, "
" 히익, "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건 호석이었다. 노크를 하려던 참이었는지 오른손이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서로 문에 붙어있던 모양이라, 문 밖으로 반쯤 몸이 나가있는 여주와 그 앞에 서있는 호석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여주는 숨을 훅 참으며 고개를 올려 호석을 바라봤다. 호석 또한 사뭇 긴장한 얼굴로 가슴팍에 가까워져 있는 여주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팽팽해진 기류가 둘 사이를 휘감았다.
" ...왜 여기있어? "
잠깐의 적막을 깬 건 여주였다. 여전히 거리를 둘 생각조차 않은 채 물었다. 어째선지 이 거리를 좁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호석 또한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채 답했다.
" ...너 보려고. "
" ... "
" 그리고 얘기하고 싶어서. "
" ... "
" 두드려도 될까 고민 중이었어. "
여주는 가까운 호석의 얼굴을 가만히 새기듯 바라봤다.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인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와 동시에 피가 솟구치는 것처럼 몸이 뜨거웠다. 눈꺼풀까지 뭉근해지는게 기묘한 느낌이었다. 호석 또한 혼잣말하듯 답하다가 제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느리게 입을 열었다.
" 둘이 있고 싶은데. "
" ... "
" 들어가도 될까. "
묘하게 호석이 더 가까이 붙어왔다. 그만 아찔해서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빠르게 뒤돌아 들어갔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간 제가 먼저 안아버릴 것 같았다.
평소에 안는 거야 편하게 하던 사이였지만, 이건 좀 다른... 아주 많이 다른 문제였다. 여주는 홧홧한 볼을 가라앉히며 묘해진 분위기를 깨기 위해 장난치듯 등 뒤의 호석에게 말했다.
" 저 수다쟁이들한테 얼마나 붙잡혀 있던 거야? 진짜 쟤넨, "
뒷말은 이을 수 없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성큼성큼 걸어와 뒤에서 안아온 호석으로 인해서.
여주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세찬 고동을 느끼자 머릿 속이 어질어질했다. 여주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둘러진 호석의 팔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 무슨 일 있었어. 괜찮아? "
지금은 질세라 미친듯이 뛰는 제 심장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벅찬 숨을 내쉬는 호석이 걱정이었다. 하메들 앞에서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웃어넘기더니,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가늘게 떨리는 호석의 몸이 그걸 말하고 있었다. 여주는 팔을 토닥이며 괜찮아, 괜찮아, 진정시키듯 속삭였다.
" ...보고싶었어. "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귓가에 새기듯 하는 말같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눈이 시큰한 게 눈물이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더더욱 참을 수가 없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울 수 없었다. 유일하게 제 슬픔을 드러내며 의지한 게 분명했으니까. 여주는 알 수 있었다. 하메들 앞에서 보인 호석의 모습은 전부 하얀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제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던 것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 서운함과 속상함은, 호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가신지 오래였다.
지금 이 순간의 호석만큼은 온전히 제 것이었다. 아무도 욕심낼 수 없는.
여주는 눈물을 꾹 누르며 호석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곤 몸을 돌려 마주했다. 붉어진 호석의 눈가를 어루만지자 호석은 눈을 꼭 감으며 고분고분 제 손길에 따랐다.
여주의 손 끝이 눈가에 이어 호석의 코, 볼을 가로질러갔다. 다행히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오히려 호석의 살결이 닿은 제 손 끝이 상처를 입은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여주는 미끄러지듯 호석의 얼굴을 어루만지다가 종국엔 입술로 향했다. 따뜻하고 말캉한 입술의 끝이 닿자 소스라치게 놀란 여주가 손을 거두려했지만, 호석이 그 손목을 빠르게 잡은 채 말했다.
" 다 확인해줘. "
" ... "
"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 "
충동에 가까운 일이었다. 여주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아무리 오랜만에 봤다곤 해도, 이렇게 애달프게 얼굴을 쓰다듬는 건 친구 사이에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 눈동자 앞에선 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감정에 기인한 행동마저도.
여주는 손끝으로 호석의 입술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작은 떨림이 느껴지는 입술이 꼭 따뜻했다.
...금방이라도 제 입술을 맞추고 싶을 만큼.
" ...! "
여주는 불현듯 든 상상을 뿌리치듯 호석의 목덜미로 손끝을 내렸다. 공연히 숨이 가빠졌다. 어스름한 저녁, 밀폐된 공간에 남녀 둘이 있는 게 이다지도 묘한 일이었던가. 제게 상처를 내보이고 기대려던 호석에게 불순한 생각을 가진 스스로가 절망스러울 정도로 한심했다. 여주는 입술을 깨물며 호석의 목덜미를 살폈다. 하지만 목 끝까지 채워져 있는 단추가 그를 방해하고 있었다. 상처를 확인해보자고 제 손으로 호석의 셔츠단추를 풀 수 없었기에 포기하려던 찰나 호석이 먼저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 ...야, "
흠칫 놀란 여주가 눈을 어디에 둘 지 몰라 방황했다. 하지만 그 반응에도 호석은 태연하게 셔츠의 단추를 풀곤 여주야, 여전히 젖어있는 목소리로 불렀다.
여주는 숨을 훅 뱉고 느리게 호석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호석은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로 말했다.
" 여긴 아직 안나았어. "
그 말에 여주가 풀려있는 단추 사이의 목덜미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대로 굳을 수 밖에 없었다.
" 호석아. "
여주는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셔츠깃을 젖히며 다시 한 번 호석의 목을 바라봤다.
호석의 목엔, 누군가가 조른 듯한 자국이 희미하게 새겨져있었다. 시간이 지나 희미해졌을 뿐 꽤나 시퍼런 멍자국이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이건, 분명 또 그 아버지란 작자의 짓이었다. 여주는 이유를 묻듯 호석을 바라봤다.
하지만 호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옅게 웃으며 말했다.
" 나 좀 안아줘. "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주가 호석을 안았다. 달큰한 과일냄새가 났다. 눈물겹게 그리웠던 호석의 냄새였다.
호석이 두 팔로 제 등을 감싸며 숨이 막히도록 꽉 껴안았다. 여주는 속절없이 쏟아지는 감정의 홍수 속에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을 참아내려고 애꿎은 입술만 물어댔다. 그 위로 호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주야. "
" ...응. "
"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
" ... "
" 정말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
여주는 호석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벅찬 진심이 느껴지는 눈동자가 쏟아졌다.
눈부신 햇살같은, 그 눈동자가.
+++++++++++++++++++
아아...머리부터 박고 시작합니다...
무려 한달이 넘어서 왔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기다리고 있던 독자릠들...정말 제가 할 말이 없군요...
혐생이 맥스치를 도달한 지금,,그에 더불어 글도 잘 안써지는 시기가 도래하여 업로드가 늦어졌습니다ㅠㅠ
하지만 무조건 냥댕은 꼭...꼭 완결냅니다 진짜루
오늘 화에서 중요한 건 여주가 먼저 보채지 않으면 기대려고 하지 않던 호석이 먼저 여주에게 기댄 점이 가장 포인트입니돠,,,
작가인 제가 말안해도 천재지니어스하버드졸업생인 독자님덜...다 아시죠?ㅎ
곧 이어집니다
어남땡! 두구두구!
+ 추신
냥댕의 스핀오프격 글을 하나,,,대충,,,작성중입니다만
세계관은 비슷한데 주인공은 남준이와 석진이가 될 것 같숩니다
(독방 고르기글 중에서 냉선배-투표 받았던 글- 연장선상입니다)
냥댕은 남주 둘 다 여주 처돌이라면
스핀오프는...조금 다른 의미로 처돌이가 될 거 같아여 ^^...후회물이 너무 땡겼는지라^^^
제목은 개와 늑대의 집,,,뭐 이런 가닥으로 갈 것 같고여 헤헤ㅔㅎ
개랑 늑대 누군지 아시겟져?
++
암호닉은 제가 죄송한 의미로 이번화까지 계속 받고
나중에 아예 글 하나를 파서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지난 화까지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은 그대로 사용해주시면 되고, 신청하실 분은 [암호닉] 신청합니다! 이런 식으로 댓글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