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 구원
우리 윤기는 엄마의 자랑이지, 그렇지?
아주 어리던 나날, 윤기는 엄마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어야 했다.
아니,
나는 저주야.
엄마가 자초한, 지긋지긋한 저주.
*
희고 검은 건반들의 나열 속에서 실타래같은 가느다랗고 뽀얀 손가락이 나풀거렸다. 신기하게도 그 움직임 속에서는 순식간에 압도되는 선율이 흘러나왔다. 어린 윤기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며 그 옆을 지켰다. 아름다운 연주가 끝나고 땀이 맺힌 엄마는 그제서야 저를 보며 웃어주었고, 윤기는 그게 좋아서 더 높게 입꼬리를 올렸다. 피아노 앞에서 저를 바라보는 엄마는 세상 무엇보다 해사했고 맑았으며 어여뻤다. 채 완성되지 않은 발음으로 윤기는 엄마를 향해 말했다.
나는 엄마같은 피아니스트가 될 거야.
*
윤기의 엄마는 피아니스트를 꿈꾼 음대생이었다. 국제 콩쿠르에서도 순위권에 들 정도의 수재였고, 우리나라 음대에서도 세손가락에 드는 곳을 입학했다던가. 그러던 중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아빠를 만나 덜컥 윤기를 임신하게 되었고, 손이 굳어 피아니스트를 포기했다고 했다. 이를 윤기가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이유는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는 부모님의 말다툼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 당신이 임신시키는 바람에, 내가, 내가. "
" 그게 왜 내 탓이 돼? "
" 내가 지우자고 했는데도 낳자고 한 거 당신이잖아! "
" 그럼 애를 지웠어야 해? 너 진짜 어디까지 갈래. "
겨우 여섯이었던 윤기는 그 다음날 유치원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애를 지우는 게 뭐에요? 그 질문을 받은 선생님의 얼굴이 이상한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는 선생님에게 윤기는 다시 물었다.
저를 세상에서 지우려면 어떻게 해야해요?
윤기는 제 세상의 얼마 있지 않은 어른이었던 선생님께 진심으로 물었다. 만약 지우개처럼 말끔히 지워낼 수 있는 거라면 저를 깨끗이 없애고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엄마도, 아빠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윤기는 애를 지운다는 말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저때문에 엄마의 인생이 망가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부모님이 다 불행해졌다는 것까지도.
부모님의 다툼이 시작될 때면, 윤기는 꼭 자신이 이 집의 저주인것만 같았다. 그래서 피아노가 있는 작은 방에 가서 하루종일 귀를 막고 있었다. 웅웅대는 소리너머에선 꼭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너를 왜 낳아서. 너같은게 세상에 왜 나와서.
엄마의 목소리는 잔혹할 정도로 어여뻤다.
*
일곱살부터 윤기는 엄마의 지도아래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날이 느는 실력에 윤기도 흥미를 느꼈고, 실력이 눈에 띄게 늘 때마다 행복해하는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어 필사적으로 열심히 했다. 지나고 보면 일곱살의 아이가 소화해낼 수 없는 양의 연주시간이었지만, 그 때의 윤기는 다 견뎌낼 수 있었다. 저로 인해서 엄마가 행복해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에 재미를 붙일 무렵부터 엄마는 윤기를 구속하기 시작했다. 방과후 학원을 다닌다거나, 친구들과 논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꼬박꼬박 학교가 끝나면 집에 칼같이 들어와서, 끊임없는 피아노연습이 이어졌다. 윤기는 그 흔한 반친구의 생일파티조차 가보지 못했다.
엄마는 윤기가 하루라도 연습을 게을리 하면 절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게 병적인 집착으로 이어지는 걸, 그녀는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다. 제가 이루지 못한 꿈을 윤기에게 투영시킨 순간부터였다. 그를 피해 윤기는 시시때때로 창고로 피해 숨었고, 그런 날마다 엄마는 자해를 시도했다.
네가 피아니스트가 되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버리겠다며.
그 절규에 윤기는 하릴없이 창고에서 나와 엄마에게 미안하다 빌었다. 눈물범벅인 엄마의 얼굴은 이제 괴물에 가까운 형상으로 망가져있었지만, 윤기는 그녀를 차마 저버릴 수 없었다. 그건 사랑이었을까, 연민이었을까. 아직까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윤기는 무뎌지기로 결심했다. 엄마가 제 곁에 있을 때까진 엄마의 바람을 들어주자. 제 삶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엄마가 원하는 인형으로 살다가, 조용하게 세상에서 지워지는 것. 그것만이 윤기의 소원이었다.
*
" 야. 너 하늘아파트 101동 613호 맞지. "
열둘. 이젠 살인적인 피아노연습이 일상이 되어버린 윤기의 앞에 이상한 아이가 하나 나타났다. 아이는 제 하교길을 기다린 듯 정문 앞 귀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와선 배를 두둑히 내밀고 있었다. 겨우 일센치정도 더 큰 주제에.
" 그건 왜. "
" 맞지, 너? 내가 오늘 미행해서 다 알아. "
" 넌 누군데. "
" 나? 612호 김여주다. "
" 뭐? "
" 너 옆집 산다고, 근데 너 밤마다 피아노 치지? "
" ... "
" 내가 밤마다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해! "
" ... "
" 피아노 그만 안두면 그 손 뿐질러버린다?? "
그 말에 윤기는 제 손을 잠시 내려다봤다. 어제도 하루종일 연주하느라 손이 퉁퉁 부어있었다. 윤기는 잇새로 작게 숨을 뱉으며 여주를 쳐다봤다. 저 혼자 성이 나서 씩씩대는 모양이 왠지 우스웠다.
" 부러뜨려보던가 그럼. "
" ...뭐어...? "
어이상실한 표정으로 벙쪄있는 여주를 지나쳐, 윤기는 집으로 향했다. 공부라, 차라리 저도 연주가 아닌 공부였다면 이 정도로 허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윤기는 여주의 말이 꼭 배부른 소리인 것만 같았다. 방과후 시간에 놀거나 공부하는 평범한 일상이 제게는 바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얼마 전에 이사왔다던 옆집은 넉살좋게 같은 아파트라인에 떡도 돌리고, 오고가며 인사도 하는 가족으로 기억했다. 늦은 밤 연주가 끝나고 지쳐 베란다로 향하면 간간이 그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런 집에서 자란 아이는 저렇게 말간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윤기는 늦은 밤 잠에 들면서도 여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나치게 무구하고 밝은 얼굴이었다. 제가 평생 가질 수 없는.
" 야, 민윤기. 너 어제 또 치더라? 내 말이 말같지 않냐! "
여주는 매일같이 제 하교길을 찾아왔다. 매일 들어주는 척하다가 떠났는데도, 아이는 끈질겼다. 어느 날은 제가 연주한 시간까지 빼곡히 적어서 들고 오기도 했다. 알림장에 삐뚤빼뚤 적은 글씨가 가여워서 잠깐 봐주다가 윤기는 대뜸 물었다.
" 내 연주 어때. "
" 엉? "
어땠냐고, 내 연주. 윤기는 여주에게 되물었다. 여주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하더니 답했다.
" 슬퍼. "
그 단순한 대답에 윤기는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의 그 한마디가 왜 이렇게 가슴이 저며오는 지 모를 일이었다. 윤기는 그런 여주를 향해 무언갈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곤 여느날처럼 그 곁을 스쳐지나갔다. 다문 입 안에선 그런 말이 맴돌았다.
나도 그래. 나도, 내가 슬퍼.
절대로 전해지지 않을 말이었다.
그 날 윤기는 집으로 돌아와 어김없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부르튼 손가락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그 날 연주했던게 아마, 리스트의 사랑의 꿈이었던가. 윤기는 늦은 밤이 될 때까지 피아노를 치며 이 건너에서 제 연주를 듣고 있을 아이를 생각했다.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 윤기는 본질적인 슬픔을 생각했다. 이젠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그 날의 어여쁜 엄마의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자연스레 눈물이 맺혀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악보 위의 음표들은 엉망으로 종이 위에 떠돌아다녔다. 울음때문에 호흡이 흩트러지자 거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엄마가 문고리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윤기는 여전히 연주를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들었다. 실핏줄이 터진 엄마의 눈이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엄마, 엄마. 울음 속에서 그 부름이 덮혔다. 그런 윤기를 일그러진 얼굴로 바라보던 엄마가 성큼 다가가려던 순간,
'띵동'
초인종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엄마는 이를 악물며 몸을 돌려 현관문으로 향했고 윤기의 연주가 멈췄다. 엄마가 신경질적이게 연 문에선, 엄마의 키 절반만한 실루엣이 보였다. 눈물범벅이 된 윤기는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갔다. 한걸음, 한걸음, 가까워지는 인영이 점차 또렷해졌다. 그리고 비로소 그 앞에 다다랐을 때, 그 아이가 보였다.
" 저희 엄마가 전 부치셨는데요, 가져다 달라고 하셔서요. "
" ...고맙다. 잘먹겠다고 전해드리렴. "
" 넵. ...어, 민윤기. "
여주의 시선은 그 뒤에서 망연히 바라보던 윤기에게 멈췄다. 제 얼굴에서 울음기를 발견한 여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꼭 왜 우냐고 묻는 것 같이.
" ...윤기 아니? "
" 네. 친구에요. "
거짓말. 윤기의 입가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윤기의 기척을 느낀 엄마의 고개가 돌아갔다.
" 윤기야. 들어가서 연습해야지. "
메마른 목소리에 윤기는 뺨에 말라가는 눈물자국을 훔쳤다. 윤기는 그 모습을 빤히 보는 여주를 외면하고 돌아섰다. 예기치 못하게 눈물을 보인 건 창피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제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 애였으니까. 윤기의 생애는 몇걸음 건너의 저 작은 방에 고여있었다. 새어나오지 못하고, 흐르지 못한 채로.
윤기는 남은 눈가의 물기를 훔치며 발걸음을 뗐다. 그 때 뒷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 민윤기. "
" ... "
" 너 지난번에 나한테 받아간다던 거 있지? "
" ... "
" 지금 줄게. "
얼른 나와.
이어지는 여주의 말에 윤기의 몸이 느리게 돌아갔다. 퀭한 눈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저 문 밖에서 보채듯 제게 눈빛을 보내고 있는 여주만이 또렷히 보였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저가 친구도 아닌 애한테 부탁한 것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닿지 못할 경계선 바깥에 서있는 아이는 꼭 자신을 구하러 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 작은 손을 꼭 잡는다면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서로 안 것도 고작 한달도 채 되지 않은 사이였다.
응. 윤기는 대답하며 여주에게로 단숨에 걸어갔다. 저를 따라오는 엄마의 시선을 외면한 채 신발을 걸쳐신고 오롯이 여주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현관문의 문턱을 넘어섰다. 그리곤 제 뒷켠에 있을 엄마에게 말했다.
" 잠깐 다녀올게요. "
문을 닫자, 따스한 봄바람이 윤기의 뺨을 스쳐왔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밤공기일까. 윤기는 숨을 작게 들이마시며 여주를 바라봤다. 고작 한달남짓 저보다 키가 작아진 여주가 눈동자에 물음표를 달고 있었다. 먼저 맹랑한 거짓말을 쳐놓고선, 제 의도대로 따라주니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게 퍽 귀여워서 다시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에 입술을 불퉁 내민 여주가 말했다.
"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나. "
" 알아. "
" 치, "
" 왜 거짓말했어. "
" 친구니까. "
망설임없는 대답에 윤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되묻듯 뱉어낸 윤기의 말에 여주는 다시 답했다.
" 울 엄마가 친구가 울면 도와주랬거든. "
" ... "
단단한 목소리에 윤기는 제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쿵쿵, 점점 빨라지는 제 심장의 속도가 이상하리만치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매일 침잠하듯 가라앉던 어떤 것이 붕 떠올라 와르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윤기는 제가 서있는 바닥에 시선을 내렸다. 발뒷꿈치 너머에 평생토록 넘어서지 못한 문턱이 있었다. 이다지도 쉬운 일이었던가. 마냥 고여있을 것만 같던 제 생애가 이 벽을 넘어 쏟아져 있었다. 그게 새삼스러웠다. 제 눈 앞에 흔들림없이 저를 보고 있는 아이가 이끈 것이었다.
" 고마워. "
그래서 윤기는 여주의 작은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고맙다는 말을 내뱉었다. 고작 할 수 있는 말이 그 뿐이었지만, 맞닿은 온기 너머에 제 진심이 닿길 바랐다.
최초의 구원.
윤기에겐 그게 여주였다.
# 징조
" 오는 길에 사왔어. 먹어. "
대전으로 향하는 ktx가 출발했다. 언제 한건지 두자리를 미리 예매해놓은 윤기로 인해 여주는 제 표를 취소하고 윤기의 옆에 앉아가고 있었다.
대뜸 대합실에 나타난 윤기가 땀 범벅인 채로 제 손을 잡고 승강장에 당도한 덕에, 여주는 자초지종을 알 수 없어 의아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윤기가 가방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건네서 여주는 받아들며 물었다.
" 고마워. 근데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
" 택시 타고. "
" 아니. 그거 묻는 거 아니잖아. "
" 너는 어머니 얘기 왜 안했어. "
" ...어? "
" 왜 그냥 대전간다고만 했어. "
예상치 못한 질문에 여주는 말문이 턱 막혔다.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는 호석이 괜히 걱정할까봐. 두번째는 괜히 알렸다가 윤기가 신경쓸까봐. 후자의 경우, 어차피 뒤늦게 확인할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난 밤 윤기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기로 결심했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윤기는 무심하지만 착하고 다정한 애였다. 특히나 자신과 제 가족에게는 과할 정도로. 그래서 괜한 친절에 흔들리기 싫었다.
여주는 차마 그 말까진 할 수 없어서 에둘러 답했다.
" 괜히 걱정하니까. 다들 바쁜데 좀 그렇잖아. "
" ...그래도 말했어야지. "
" 괜찮아. 큰 사고는 아니래. "
마음에 안든다는 듯 윤기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그, 걱정했어요? 여주는 장난스럽게 굴며 샌드위치를 뜯었다.
" 근데 진짜 어떻게 알고왔어? "
" 아버님이 연락주셨어. 너 챙겨달라고. "
" 아. 진짜 아빠도 유난이야. 날 왜 너한테 챙겨달래. "
얼굴이 화끈거렸다. 진짜 유난이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을 챙겨달라니. 그것도 구남친에게.
아마도 여주와 윤기가 연애를 했다는 사실을 아빠가 몰라서 벌어진 일인 것 같았다. 나중에 그러지 말라고 귀띔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여주는 샌드위치를 물었다.
속이 꽉 찬 샌드위치가 입 안을 가득 메워서 꼭꼭 씹어삼키는데, 그 곁에서 빤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윤기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주가 우물대며 물었다.
" 왜에, 나 얼굴에 뭐 묻었어? "
" ...아니. "
영양가 없는 대답에 여주는 시선을 거뒀다. 어째 눈빛이 멜로눈깔 같아서 하마터면 착각할 뻔 했다. 뭔 생각을 한거야, 여주는 도리질을 하며 커피를 들이켰다. 그 때 텀을 두고 윤기의 대답이 돌아왔다.
" 귀여워서. "
" 푸ㅜ웁!!!! "
여주는 머금고 있는 커피를 그대로 뿜었다.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윤기가 눈을 꼭 감은 채 아, 작은 탄식을 뱉었다.
여주는 허둥지둥 물티슈를 꺼내서 윤기의 얼굴을 닦아냈다. 야, 그러니까 왜 그딴 소릴하고 난리야. 온 몸이 달아오르는 것처럼 민망해서 여주는 변명하듯 윤기를 탓했다. 얼굴에 맺힌 커피가 닦여나가자 윤기의 눈꺼풀이 느리게 올라갔다. 얼굴을 닦아내느라 필요이상으로 가까워진 거리를 느끼지 못한 여주가 그 눈동자를 마주하자 흠칫 놀랐다. 윤기는 멈춘 여주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 여기도 닦아줘야지. "
그리곤 제 손목을 이끌어 턱 끝을 닦아냈다. 여주는 제자리로 돌아오며 마구잡이로 뛰는 가슴께를 지긋이 눌렀다. 미친. 자연스럽게 욕이 튀어나왔다. 몹시 혼란스러웠다. 연애 때도 저런 말은 안하던 애가, 왜 갑자기, 왜 하필이면 정리를 하려고 굳게 마음을 먹은 때에 저러는 지 모를 일이었다. 희주랑 연애하면서 애정표현의 정도가 달라진 걸까. 의문은 점점 살을 붙여가며 커졌다.
아냐, 친구한테 귀엽단 말 할 수있지. 그래, 새벽에 작업하다가 뛰쳐나올 수도 있지. 그래, 원래는 걸어다니는 것도 싫어하지만 땀 범벅으로 뛰어다니며 찾아다닐 수도 있지. 그냥 친구도 아니고 절친인데. 여주는 가까스로 상황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스스로 말이 안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야만 했다. 이러다 삐끗하면 정말 착각할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이 스쳐지나갔으니까.
*
접촉사고의 규모에 비해 엄마는 꽤나 무사한 모양이었다. 의사의 말마따나 작은 골절상이므로 당장 수술하면 2,3주 이내로 다 나을 것이었다. 여주는 안내에 따라 수술동의서를 작성하고 기다리고 있던 윤기의 곁에 돌아와 앉았다. 언제 사왔는지 바나나우유를 제게 안기며 윤기가 물었다.
" 괜찮으시대? "
" 응. 작은 수술이래. "
" 다행이네. "
그제서야 안심이라는 듯 윤기가 벽에 머리를 기댔다. 여주는 받아든 바나나우유를 손 안에서 데구르 굴렸다. 혼자 왔다면 아직까지도 불안에 떨고 있을 제 모습이 눈에 선연했다. 곁에 있는 윤기가 꽤 든든했다.
" 고마워. "
" 뭐가. "
" 와줘서. "
진심으로 뱉은 말이 작게 떨렸다. 사실 일부러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곁에 누군가 있어주길 바란 건 사실이었다. 여주는 윤기를 힐끗 보곤 장난스레 윤기의 허리를 팔꿈치로 쳤다. 고맙다고, 친구. 여주는 친구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그런 식으로 가까스로 선을 그었다. 윤기는 빤히 여주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 ...우린 이미 가족 이상 아닌가. "
" 응? "
" 뭘 새삼. "
그리곤 벽에 기댔던 머리를 제 어깨로 옮겼다. 뭉근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뜨거웠다. 가족 이상, 그 말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지만 막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주의 엄마는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윤기에게도 엄마같은 존재였고, 바쁜 윤기의 아버지를 대신해 이런저런 가족행사도 함께하곤 했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있었지만 사실 남매와 다름없이 지냈던 나날들이었다. 완고한 성격의 엄마와 싸우고 나면 윤기가 항상 그 사이를 중재해줬고, 그 덕에 엄마와의 냉전은 며칠을 가지 못했다. 아빠의 실직으로 집안 사정이 잠시 기울었을 때에도 윤기는 제 아버지 몰래 알바를 해가면서까지 여주의 집을 도왔다. 엄마는 아직까지 그 이야기를 꺼내며 윤기에 대한 칭찬을 시시때때로 했다. 그러니 엄마의 사고를 곧바로 윤기에게 말한 아빠도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니었다. 새삼, 윤기가 제 인생에 지나치게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여주는 기분이 이상했다. 저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제 가족에게도 윤기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뜸 두려움이 일었다. 온전히 윤기에 대한 마음을 접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 이여진님 보호자분. 수납하러 오시겠어요. "
그 때 간호사가 여주를 불렀다.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있던 여주는 고개를 들었다. 아직 수납을 안했던가. 여주는 네, 대답하며 제 어깨에서 윤기의 머리를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제 손을 꾹 누르곤 일어서는 윤기가 더 빨랐다.
" 있어. "
" 응? "
" 기다리고 있어. "
아니, 여주가 말릴 틈도 없이 윤기는 빠른 걸음으로 간호사를 따라나섰다. 여주는 망연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무리 가족처럼 지냈다곤 해도...진짜 저렇게 친오빠처럼 굴면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여주는 떨쳐내듯 핸드폰을 들었다. 경황이 없어서 확인하지 못한 핸드폰에는 하메들의 단톡이 쌓여있었다. 다들 아침에서야 확인한 듯 했다.
[헐 왜 갑자기 대전이에여?] 6:30 AM
[누나 괜찮아요?] 6:32 AM
[여주 무슨 일 있어?] 8:25 AM
[엄마한테 일이 생겨가지고. 괜춘괜춘]
여주는 간단히 답장하곤 새벽에 제가 보낸 메세지에 아직 지워지지 않은 1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호석이었다. 분명히 어젯밤에 돌아오겠다고, 제게 어디를 가자고 약속하던 애였다. 다른 건 몰라도 약속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는 호석이었기에 여주는 마음 한 켠이 선득해졌다. 제가 보낸 개인메세지도 아직 읽지 않은 상태였다. 아침에 보았던 가라앉은 얼굴의 호석이 자꾸만 눈 앞에 아른거렸다.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여주는 호석의 연락두절이 어쩐지 그 아버지란 사람때문인 것 같아서 분노가 치밀었다. 이번에도 상처난 얼굴로 돌아온다면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착해빠진 호석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여주는 지금 가장 힘들 호석의 곁에 제가 있어주지 못하는 게 가장 속상했다.
전화 걸어도 될까. 여주는 혼잣말을 흘리며 호석의 번호를 눌렀다. 수화음이 길게 늘어지다 끊어질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길 반복했다. 애가 타서 여주는 괜히 입안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하지만 끝내 호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주는 점멸하는 호석의 번호를 바라봤다. 이렇게 걱정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모두가 알고 있는 이 번호에 전화를 거는 일 뿐이었다. 실질적으로 호석에게 닿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황망했다.
'지잉'
그 때 옆자리 의자에 놓여져있는 윤기 핸드폰이 울렸다.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였다. 아무리 윤기의 핸드폰이라곤 해도 함부로 받을 수 없었기에 여주는 제 핸드폰을 내려놓고 진동이 멈추길 기다렸다. 하지만 전화가 끊어지면 곧바로 걸려오는 게 다섯번 이상 반복되자, 여주는 간단히 상황만 말해주자는 생각으로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작게 말하려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전화너머로 들려왔다.
" 야. 민윤기. 내 번호는 안받더니 모르는 번호는 받네? "
박희주였다.
" 얘기를 그딴식으로 끝내고 연락도 안받으면 어쩌잔거야? "
" ... "
" 야, 민윤기. 입이 있으면 말해봐. "
" ... "
" 야, "
" 윤기 잠깐 어디 갔어. "
" ...김여주? "
너머 희주의 목소리가 굳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 니가 왜 민윤기 전활 받아? "
" ...곧 돌아올테니까 좀이따 다시 전화해. "
" 씨발, 니가 왜 받냐고 이 전화를! "
기어코 희주의 목소리가 커졌다. 여주는 눈을 꼭 감고 숨을 골랐다. 제겐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은 인간이었지만, 윤기에겐 여자친구였다.
" 일이 있어서 잠깐 윤기가 어딜 가서 그래. "
" 어디서 거짓말이야. 이 시간에? 지랄하고 있네. 너네 어디야. 모텔이니? "
" 그런거 아니야. "
" 전여친이라고 민윤기가 한번 대달라고 하든? '
" 뭐? "
" 그 발정난 새끼가 너한테 자자고 했냐고 묻잖아 지금! "
여주는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이 상황을 오해한다고 했더라도, 제가 아닌 윤기에게 향한 단어가 너무나도 저급했다. 여주는 이를 바득 갈며 말했다.
" 말 함부로 하지마. "
" 하, 왜? 네가 먼저 꼬리쳤어? "
" ...적당히 하랬어. "
" 니가 사귈 때 안잔 게 이제 와서 아쉬웠니? "
" 박희주! "
끝내 여주의 언성도 커졌다. 분노가 치밀어 핸드폰을 지탱하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차분히 상황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윤기를 어떻게 보면 이딴 가정을 하고, 이딴 말을 내뱉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건너에서 씩씩 숨을 몰아쉬고 있는 희주에게 욕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친구로서 간섭할 수 없는 선이 있었다. 여주는 그 선을 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숨을 고르며 무언갈 말하려던 순간, 누군가가 제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다.
" 나한테 말해. "
윤기였다. 주위를 신경 쓸 정신이 없었기에 가까이 다가온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윤기는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제 손을 꼭 잡은 채로 전화를 받았다. 굳은 얼굴이었다.
" 시간 가지자는게 다른 여자랑 잔다는 거였어? "
" 그런 거 아냐. "
" 김여주랑 짜고 나 엿 먹이는 거야 지금? "
" ...나중에 얘기해. "
" 장난쳐!? 나 네 여자친구야. 지금 뭐가 중요한 지 몰라? "
숨 쉴 틈 없이 반복되는 말싸움에 희주의 발악섞인 물음을 끝으로 적막이 찾아왔다. 순간 무게를 가진 모든 것들이 가라앉은 듯 고요한 가운데 윤기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 ...나한텐 지금 김여주가 중요해. "
여주를 잡은 윤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며칠만인지요!!!
오늘도 윤기 이야기뿐이네요..!!
앞으로 호석이 시점 과거도 풀리겠지만,
오늘 윤기의 경우에는 고여있던 제 생애를 이끌어준 최초의 구원이 여주였다는 점이 가장 중요해요.
또한 여주에게 있어서 윤기는 너무나도 큰 존재라는 것도? (친구를 떠나서 가족이상이라는 거!)
사실 저는요...요즘 어남땡이 자주 흔들려요...
사실 나냥댕은 결말을 내고 쓰기 시작한 글이 아니었기에...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ㅠㅡㅠ
그리구 갈 수록 과몰입이 되다보니 여주를 둘로 나눠서 하나씩 가지게 하고싶고 그러네요 끕ㅜ
어쨌튼, 어남땡 확정까지 저와 열심히 달려주시길 기원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
+ 이번화까지 암호닉을 받습니다.
[신청하시는 암호닉] 암호닉 신청합니다!
이런 식으로 써주시면 됩니다!!!
14화에서 신청해주신 분은 중복으로 안해주셔도 돼요! 16화때 14~15화에 신청된 암호닉을 추가할 예정입니다.
암호닉명단 (10화기준) |
연꽃 / 느낌표 / 흩어지게해 / 빙빙 / 티백 / 찰떡쿠키 / 한결 / 청포도 / 사탕 / 토마토 / 김김이 / 어남윤 / 하얀설탕 / 복숭아 / 사삼공 / 만두 / 어남석 / 수박바 / 콩나물 / 고앵이 / 흑슈가 / 참새쨍 / 블루 / 콩이 / 순 / 윤꼬꼬 / 키딩미 / 가든 / 뷰뱌 / 불면증 / 보금자리 / 푸름 / 딸기 / 해결 / 프리지아 / 무럭무럭 / 도리도리 / 유니 / 봄 / 해강 / 율무차 / 토미 / 싱글벙글 / 감자탕 / 서콩이 / 달빛주스 / 새싹이 / 1218 / 가지 / 여나 / 예그리나 / 소우주 / 댕댕(4화) / 하꼬 / 밍밍이 / 솜사탕 / 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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