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들끓는
" ...네가 왜 거기서 나와. "
여주의 방문을 열고 나온 윤기에게 호석의 낮은 목소리가 꽂혔다.
윤기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호석을 바라봤다. 호석의 얼굴에선 짙게 깔린 질투와 초조함이 만연했다. 이제 윤기의 시야 속에선 그런 감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던걸까, 윤기는 심기가 뒤틀렸다. 꿈결에서 호석의 이름을 부르던 여주에게 충동적으로 입맞춤을 하곤 또다시 죄책감에 하염없이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겨우 방에서 나온 윤기였다.
" 취해서 재웠어. "
윤기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감추며 답했다. 그 대답에 어두워지는 호석의 낯빛이 보였다.
" ...태형이 카톡으론 들어온 지 꽤 된 것 같은데. "
호석이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 물었다. 저를 보내고 단체방에 톡을 보낸 건가. 하긴, 집에 돌아오는 길을 한참 돌아 오기도 했고 여주의 방에 머물렀던 시간도 꽤 됐었다.
" 그랬나. "
" ... "
하지만 호석에게 구태여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윤기와 여주만이 공유하는 시간이었으니까. 제 3자가 끼어들 틈 없는.
윤기는 더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무심하게 말했다. 호석이 그 의중을 눈치채고 입을 잘근 깨물었다. 명백한 초조함이었다.
윤기는 그런 호석의 얼굴을 뜯어보다, 다시 휘몰아치는 투기에 신경질적이게 눈을 감았다. 여주가 무의식 중에서도 호석의 이름을 부른 게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지난 날 저를 충동에 빠지게 했던 그 순간에도 여주는 제 이름을 부르던 애였다. 여주의 삶 속에서 가장 오래도록 굳건한 무게를 지니고 있을 이름은, 오롯이 저 뿐이었는데.
그랬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윤기는 답답해진 가슴께를 지긋이 눌렀다. 대책없이 흘러넘치고 굽이쳐서, 어떻게 감당해야 좋을지 모를 감정이었다.
눈 앞의 호석에게 강한 분노가 일었다. 질투심보다 더 격앙적인 감정이었다.
" 걱정하지마.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
" ... "
" 누구처럼, "
그래서, 그 검고 추악한 감정의 격랑 속에서 윤기의 입술이 엉망으로 떼어졌다.
" 술 취해서 키스나 하는 그딴 짓 안해 난. "
그 말에 호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윤기는 호석을 흘기며 그 곁을 지나쳐 갔다.
*
'쾅'
" ...미친새끼. "
윤기는 방문을 닫고, 자조적인 욕을 뱉으며 그 벽에 기댔다.
심장이 쿵쿵 빠른 속도로 뛰었다. 평소의 두근거림과는 다른 것이었다. 죄책감과 스스로의 환멸감에서 비롯되는 떨림이었다.
들끓는 투기에 멋대로 뱉은 말은 그대로 저에게 돌아와 가슴에 쿡쿡 박혀왔다. 제 말에 창백하게 굳어가던 호석의 얼굴이 유난히 선명했다. 얄궃게도 그 위에 겹쳐지는 잠든 여주의 얼굴에 작게 실소가 터졌다.
비겁한 새끼.
" 누가 누굴. "
윤기는 마른세수를 하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대로 걸어가 그대로 누웠다. 마주하는 천장이 검었다.
어둠이 싫었기에 보통 잠에 들 때 스탠드를 끄지 않고 잠에 드는 윤기였지만, 오늘만큼은 켤 수 없을 것 같았다. 불을 켜면 낱낱이 보일 제 모습을 조우하는 것이 두려웠으니까.
이렇게 스스로가 경멸스럽고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윤기의 귓가에선 여주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뒤엉켜 돌아다녔다.
어린 시절의 그 아이로부터 시작된 목소리는 꿈결 속에서도 호석의 이름을 부르던 여주의 목소리로 멍울졌다.
마치 그게 결말인 것처럼 더이상 이어지지 않는 여주의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는 적막 속에서 흐릿하게 사라져갔다.
style="text-align: center;">
# 안아줄래? 안아줄게.
[ 금일 예정되었던 <성과 사랑의 철학> 수업은 교수님의 개인사정으로 인하여 휴강입니다. 보강일정은 추후 공지하겠습니다. -교양학부 ]
어쩐지 일어나는데 유별나게 눈부시다 했지, 여주는 싱글벙글 웃으며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창가에 들이치는 해가 기깔나게 맑았다. 평일엔 늦잠자는 건 꿈도 못꿀 시간표였기에 개강하고나선 반강제적으로 바른생활 어린이가 되어야 했던 여주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늦잠을 잤더니 휴강공지라니. 이런 횡재가 따로 없었다. 개꿀. 여주는 쾌재를 부르며 그대로 이불 속에 몸을 욱여넣었다.
" 우욱... "
하지만 곧이어 밀려오는 토기에 몸을 그대로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울렁거림에 돌이켜보니 어젯밤 소주를 두병 넘게 마셨던 것도 같았다.
그게 아마 전정국 김태형의 존나 쓸데없는 자존심싸움때문이었던가. 결국 누가 이겼는지 기억이 안나는 걸 보니 중간에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으윽. 머리아파. 여주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좀비처럼 침대를 벗어났다. 오랜만에 평일 오후의 여유를 좀 느껴보려했건만 이미 어마무시한 숙취부터가 글러먹은 듯 했다.
일단은 찬물을 마시면서 속이라도 달랠 요량으로 여주는 방을 나섰다.
" ... "
그리고 방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건 호석이었다. 주방이랑 제 방이 가까이 붙어있다곤 해도, 이 정도면 문 앞에 붙어있던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호석이 서있었다. 여주는 한걸음 떨어져서 호석을 바라봤다. 웃고 있는 게 기본값인 호석이 오늘은 어쩐지 한껏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 ...왜그래. 무슨 일 있어? "
그래서 의문보단 걱정이 앞섰다. 여주는 다시 가까이 다가가서 호석을 살폈다. 저를 내려다보는 호석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잠겨있었다.
호석은 한참 입술을 달싹이더니 제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손목을 전부 감싼 호석의 큰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 여주야. "
" 응. "
" ... "
정적이 흘렀다. 여주는 점점 짙어져가는 호석의 눈을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 무슨 일 있지, 너. "
" ... "
" 나한테도 말 못할 일이야? "
걱정스러운 마음에 여주의 말끝이 내려갔다. 괜히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가라앉은 호석의 얼굴이 꼭 가슴에 맺혀서 쿡쿡 쑤셔왔다.
말해봐, 뭔데. 여주는 다른 손으로 호석의 손을 덮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호석은 그런 여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느리게 입을 뗐다.
" 오늘 밤에, 시간 돼? "
" 오늘? "
" 응. "
여주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지방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하는 것 말곤 딱히 약속이 없었다.
" 그럼 오늘 나랑 어디 좀 가줄래? 데리러 올게. "
" 밤에? "
" 응. "
" 지금은 안돼? "
" ...오늘 아버지가 부르셨어. "
아, 호석의 입에서 아버지란 이름을 듣는 순간 여주는 탄식이 나왔다. 그 반응에 옅게 웃으며 호석이 말했다.
" 괜찮아. 저녁만 먹고 돌아올 거야. "
" 안가면 안돼? "
" ...응. "
여주는 입술을 내밀며 호석을 바라봤다. 정말로, 보내기가 싫었다. 여러 경험으로 쌓인 직감이었다. 이렇게 보내면 후회할 것만 같은.
하지만 앞의 호석은 꽤 단호한 얼굴이었다. 의지를 꺾을 수 없어보여서 여주는 불퉁한 얼굴로 물었다.
" 그럼 밤에는 오는거지? "
" 응. 저녁약속이니까. "
" 그럼 약속해. "
여주는 새끼손가락을 들이밀었다. 호석이 얼떨떨하게 제 새끼손가락을 걸자 여주는 약속, 도장, 복사, 코팅. 순식간에 코팅까지 야무지게 하곤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약속했다? 딱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늦으면 죽어. "
그 모습에 굳어있던 호석도 푸스스 웃었다.
" 진짜 왜 그렇게 귀여워, 여주야. "
아 뭐야, 귀엽다는 말에 아연실색한 여주가 호석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쳤다. 하지만 호석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여주를 바라봤다.
" 오늘밤에 꼭 데리러 올게. "
" ...근데 어디 갈건데? "
" 비밀. "
" 야, 다른 애들도 갈거면 말해줘야지. 박지민 김태형 걔네가 순순히 따라오겠, "
" 우리 둘이서만 갈거야. "
어? 당연히 쉐하 식구들과 어딘가 가는 걸로 생각했던 여주는 벙쪘다. 다시 한 번 곱씹어보니 다같이 간다는 얘기는 없었지만, 다른 날도 있는데 굳이, 밤에, 단 둘이...?
그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여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러니까 다른 애들한텐 비밀이야. "
호석은 여주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곤, 그대로 여주를 지나쳐 현관으로 향했다. 여주는 무슨 소린지 생각에 빠졌다가 신발장을 여는 소리에 깨듯 후다닥 현관문 앞으로 달려갔다. 신발을 꺼내려던 호석이 다급하게 달려오는 여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주는 숨을 크게 들이마쉬곤, 양팔을 넓게 뻗었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호석을 향해 여주가 말했다.
" 안겨! "
" ...뭐? "
" 원래 누군가한테 안기면, 그 사람 기를 나눠받을 수 있대. "
여전히 어리둥절한 호석을 향해 여주는 싱긋 웃었다.
" 내 기 좀 나눠줄게. 그니까 기 죽지 말고 다녀와. "
" ... "
" 안아줄게. 얼른 안겨. "
얼른 안기라는 듯 여주가 짧은 팔을 휘적거렸다. 그런 여주를 보는 호석에게서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꽉 맺혀있던 긴장이 탁 풀린 듯한 기분에 호석은 무거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곤 그대로 다가가 여주를 안았다. 안긴 품이 작았지만 단단했다. 호석은 여주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 다녀올게. "
응, 잘다녀와. 여주는 제게 안긴 호석의 등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마침 현관문에 들이치는 초가을의 따스한 햇살이 둘을 포근히 감싸안았다.
*
완전무결해보이는 사람에게도 숨기지 못하는 여린 곳이 있다. 작은 스침에도 큰 상처를 입어서 울컥울컥 피가 쏟아지는.
구김없이 사랑만 받고 자랐을 것만 같은 호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때, 매일 제 집 앞을 찾아오던 호석이 학교까지 빠졌던 적이 있었다.
이미 수시로 대학을 붙었기에 더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는 애들도 있었지만, 호석은 겨우 그런 이유로 학교를 빠질 애가 아니었다.
그래서 혼자 학교에 있는 내내 여주는 불안했다. 안그래도 윤기가 돌아오면 저를 버릴 거라는 말을 한 뒤로 과도하게 밝은 모습만 보이던 호석이었으니까.
제가 보낸 메시지에는 내내 1이 사라지지 않았고, 가끔 마주치는 호석의 친구들에게도 그 이유를 물었지만 모르겠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그게 정말 별다른 이유없이 학교를 빠지는 호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인지, 아니면 여주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이유여서 침묵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집요하게 물어본 결과 나온 거라곤, 전날 호석의 아버지가 직접 학교에 찾아왔다는 목격담 뿐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로 열흘이 지났다. 그 날은 호석이 없는 틈을 타 희주의 괴롭힘이 더 심해졌기에 일찍 집을 나선 날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서 골목에 접어드는데, 익숙한 형체가 여주의 시야에 들어왔다.
" 우리 여주 잘 지냈어? "
호석이었다. 열흘내내 가슴에 뭔가 턱 걸린 것처럼 저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여주는 빠른 걸음으로 호석에게 다가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호석의 얼굴이 더 가슴이 답답하게 들어차왔다.
비로소 그 앞에 다다랐을 때, 호석은 여전히 해사한 얼굴이었다. 빌어먹게도.
여주는 공연히 화가 나서 그 가슴께를 퍽퍽, 쳤다. 점점 격해지는 구타에도 호석은 가만히 그런 여주를 받아주고 있었다. 여전히 다정하고 예쁜 얼굴이었다.
" 내가 어떻게 잘 지내, 내가, 내가 어떻게. "
울분이 차올라서 의미없는 말만이 반복됐다. 내내 연락없었던 호석을 걱정하면서도,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호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초라했던 여주였다. 제겐 이미 덜어낼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호석은 멀었다. 이렇게 별안간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도 어제 본 사람처럼 구는 호석에게선 결코 닿지 못할 거리감이 느껴졌다.
호석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화 풀릴 때까지 더 때려도 되는데. "
태연한 호석의 목소리에 여주는 발끈해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거란 제 예상과는 달리 호석은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여주는 그 얼굴을 뜯어보다가 호석의 왼쪽 눈두덩이가 희미하게 푸른 색으로 부어오른 걸 발견했다. 여주는 놀라서 무의식중에 그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 손길에 호석은 당황스러운 듯 한 걸음 물러섰지만 여주는 더 집요하게 호석의 얼굴을 살폈다.
눈두덩이가 부어오른 것뿐만 아니라 입술도 살짝 터져있었고, 목에도 희미한 생채기들이 있었다. 평소에 셔츠단추 2~3개는 풀고 다니던 호석이 오늘따라 목끝까지 단추를 채운 것도 어딘가 이상했다. 당혹이 어린 호석의 눈동자를 빤히 보던 여주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 이거 다 뭐야. "
" ... "
"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17대 1로 싸웠다고 하면 "
" ... "
" ...안믿어줄거지? "
호석은 끝말을 흐리며 애써 웃었지만, 그를 마주하는 여주의 얼굴은 더 차가워졌다.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듯 내내 울렁이고 복잡하던 속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어, 여주는 단호하게 대답하며 호석의 손을 바라봤다. 손에도 미처 사라지지 않은 상처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있었다. 명백한 폭행의 흔적이었다. 온 몸이 떨렸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 누구야. "
" ... "
" 누가 그랬어. "
" 알면 다쳐요. "
" ...장난칠래? "
" 진짠데. "
제 굳은 얼굴에도, 호석은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진지하게 뭔갈 말해보려하면 장난식으로 웃어넘겨버리는.
여주는 호석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그 악력에 아픈 듯 호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여주야. 나 좀 아픈데. "
" 아파? 겨우 이걸로? "
" ... "
" 연락 한 번 없이 열흘간 너 기다린 사람은 어땠을 거 같아. "
" ... "
" 그래놓고.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선 상처투성이인 널 보는 난 어떨 것 같아. "
" ... "
" 누가 그랬는지 말할 때까지 안놔줘. "
여주는 쥔 손에 더 세게 힘을 줬다. 다른 건 몰라도 체력검사 때 악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여주였다. 물론 저보다 훨씬 덩치가 큰 호석이 마음만 먹으면 뿌리칠 수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듣고 싶었다. 왜 이렇게 상처투성인지. 누가 그랬는지. 지난 열흘간 무슨 일이 있던 건지.
호석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다가 결국은 윽,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잠시 시선을 내리니 호석의 손목에도 붉은 흉터가 있었다. 속상한 마음에 여주의 시야가 흐려졌다. 끝끝내 눈물이 똑,똑, 호석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 호석아. 나 너한테 친구 맞아? "
" 무슨 소리야. "
" 나한테 왜 그렇게 멀게 대해? "
" ... "
" 그런 것도 말할 수 없는 사이야, 우리? "
손에 힘을 풀며 다시 한 번, 호석의 손목은 여전히 붉었다. 여주는 서러움이 복받쳤다. 연락 한 번도 없었던 지난 열흘에 대해 물을 수도 없는 사이였을까, 우리는.
가슴이 저릿했다. 윤기가 제 곁을 비운 사이 그 공백을 꼭꼭 채워줬던 호석이, 이젠 제 인생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이다지도 무거웠다. 그런데도 언제고 떠날 것만 같이 멀게 대하는 호석이 미웠다.
여주는 눈물을 거칠게 훔치며 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호석의 시선을 피했다. 잠시간 둘 사이에 흐르던 적막을 깬 건 호석이었다.
" ...아버지. "
" ... "
" 아버지가 그랬어. "
예상치 못한 답에 여주는 다시 차오른 눈물은 닦지도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처연한 얼굴의 호석이 어딘가 아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아버지가 때렸어. "
" ... "
" 어쩌다보니 얼굴까지 맞아서, 가라앉을 때까지 못나왔어. 핸드폰도 뺏기고. "
" ... "
" 말했잖아. 다친다니까. "
호석은 다시 해사하게 웃으며 여주의 눈물을 닦아냈다. 여주는 그런 호석의 눈동자를 피할 수도 없었다. 처음 듣는 호석의 이야기가, 너무 가슴아팠다.
아이들 말마따나 부족함없이 자란 부잣집 도련님, 구김없이 사랑만 받은 아이. 그렇게만 생각해왔던 여주였으니까.
그것도 모르고 제게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며 투정을 부린 것이었다. 제 상처만 생각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못된 투정.
여주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모르겠어서 입술을 달싹였다. 사과를 해야할까, 위로를 해야할까. 그래야 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 ...나 좀 안아줄래? "
그런 두서없는 고민들이 머릿 속에 왕왕대는 사이, 호석이 물었다. 마주한 호석의 눈동자는 따뜻했지만 짙었다.
여주는 망설임없이 그 품을 꼭 안았다. 저보다 훨씬 큰 호석이었기에 안기는 모양새였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여주는 호석의 등을 두 팔로 감싸안곤 옅게 토닥였다.
맞닿은 호석의 품에서 달큰한 과일향과 함께 쿵쿵, 빠르게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 보고싶었어 여주야. "
그렇게 말하며 두 팔로 제 몸을 더 끌어당기는 호석의 목소리가 어쩐지 젖은 것 같아서 여주는 더 호석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여주는 더 빠르게 뛰어오는 호석의 심장소리를 제 귓가에 새겼다.
겨우 아버지 이야기 하나로 호석이 홀로 상처와 맞서고 있었을 순간들을 가늠할 순 없었지만, 그럼에도 여주는 이 품을 절대 놓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정말 호석이 제 곁을 멀리 떠나버릴지라도.
#정리, 각성
[ 저랑 지미니 오늘 늦어용 ]
[ 태형이 어제 늦게까지 달렸다며 ]
[ 어제는 어제! 오늘은 오늘! ]
[ 적당히 마셔 ]
[ 넵 알겟숨돠 ]
[ 아 그리고 나도 오늘 늦어 ]
[ 엥 남주니형은 왜여? ]
[ 애들은 몰라도 돼 ]
[ 뭐얼까 정말 모르겠네에~( ͡° ͜ʖ ͡°) ( ͡° ͜ʖ ͡°) ( ͡° ͜ʖ ͡°) ( ͡° ͜ʖ ͡°) ( ͡° ͜ʖ ͡°) ] 10:41PM
으윽...연이은 카톡소리에 여주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잠에서 깼다. 눈을 반쯤 뜬 채 핸드폰 화면을 보니 태형과 남준이 늦는다며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여주는 다 죽어가는 몰골로 소파에서 일어나 시계와 창밖을 둘러봤다. 이미 한참 늦은 밤이었다. 낮에 호석을 보내고 숙취때문에 저녁까지 고생하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오늘 작업미팅을 늦게까지 한다며 여명을 쥐어주고 나간 윤기덕에 좀 나아졌나 싶었는데, 여전히 숙취가 심했다. 하기사 어제 치사량급으로 마셨으니 정상일리가 없었다.
이 상태로 어딜 나갈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호석이 밤에 데리러 온댔는데.
" 옷이라도 갈아입어야겠다. "
여주는 비틀비틀 일어나 제 방에서 옷들을 살폈다. 호석이 힘주어 '둘이서만 갈 데가 있다'고 한 말이 영 마음에 걸려있었다. 그게 어째, 평소에 입고다니는 것처럼 추리닝에 박시한 반팔티셔츠를 입고 가는 곳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옷장에서 입을 만한 옷들을 추려내는데 애석하게도 죄다 후줄근한 옷들뿐이었다. 아무리 편한 옷이 좋다곤 해도 좀 심한 수준이었다. 어쩌다 가끔 격식을 차릴만한 곳은 아빠를 따라 가는 곳들뿐이었으니, 본가에 있는 원피스와 한 벌의 정장이 전부였다. 진짜 심하다, 김여주. 여주는 작게 혼잣말을 하며 못마땅한 얼굴로 옷장을 헤집다가, 마침 손에 걸린 옷을 꺼내들었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였다. 무릎기장까지 오는, 평소엔 절대로 입지않는 연보라색의 꽃무늬가 그려진 원피스.
이게 대체 제 옷장에 왜 있는지 가늠하던 여주는 문득 지난 봄날을 떠올리곤 아, 작게 탄식했다.
' ...헤어질까. 우리. '
차마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 말이 선연하게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그래, 그러고보니. 간만의 만남이었기에 여주는 생전 입지 않던 원피스까지 사서 입고 작업실에 갔더랬다.
손수 준비한 선물을 한가득 들고 언덕길에 위치한 작업실에 꾸역꾸역 올라갔는데 결국 들은 건 헤어지잔 말이었다.
여주는 원피스와 함께 옷장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선물들을 꺼냈다. 지금 보니 조악한 수준으로 만든 향초, 섬유향수와 함께 뭘 그리 열심히 썼는지 길고 긴 편지 한장이 들어있었다.
윤기야, 사실 네가 처음에 사귀자는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미친. 여주는 작게 소리내어 그 편지를 읽어내다가 욕지거리를 뱉었다.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연애편지였다. 대략 처음엔 아무 감정이 없었다가 이젠 널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는데, 끝이 화룡점정이었다.
' 너를 정말 사랑하는 여자친구 여주로부터 '
편지에 꾹꾹 적혀있는 글씨에서 애정이 들끓었다. 드문드문 그려넣은 하트도 참 삐뚤빼뚤한 게, 못봐줄 정도였다.
짓궂은 장난처럼 시작되었던 연애 속에서 언제쯤부터 사랑이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주는 윤기를 사랑했다. 낮에는 항상 피곤해하던 윤기에게 제 무릎을 내어주던 순간에도, 평소처럼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도, 서로 편한 침묵을 공유하는 순간에도, 저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하릴없이 마음을 내어주었다. 절대 변치 않을 거라 생각하던 우정이 시나브로 사랑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 덕에 아직까지도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긴 윤기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했지만.
어떻게 이딴 편지를 줄 생각을 했지, 여주는 몸서리를 치며 편지를 고이접어 옷장에 다시 처박았다. 순간 수치심에 찢어버릴까도 했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어쩐지 지우고 싶지 않은 제 어린날의 추억같았다. 불과 몇개월의 저인데도 참 애틋했다.
아마, 지금보다 훨씬 나이를 더 먹고 머리도 새하얗게 변하면 그 때는 윤기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그 땐 그랬지, 하며 아무렇지 않게 장난처럼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 때 윤기의 곁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여주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곁에 있는 윤기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무뎌질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있는 윤기에겐 아마 이 편지는 평생 전달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여주의 마음 한 켠을 어지럽히는 질문도 영원히 묻어둬야했다.
그 때, 너는 나를 정말 사랑했느냐고.
여주는 후, 작게 숨을 뱉곤 옷장문을 닫았다. 꺼낸 원피스를 살펴보니 팔쪽이 조금 구겨지긴 했지만 입을만한 정도는 됐다. 윤기의 취향을 빼다박은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니, 여지껏 가슴 속에 남아있는 미련의 껍데기들이 잘근잘근 발에 밟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여주는 오늘까지만 입고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밤 윤기의 등에서 이제는 정말 제 감정을 정리하기로 작정했으니까.
*
새벽 한시. 나름 옷을 차려입은게 무색하게도 호석은 연락이 없었다.
언제와? 새벽에 와? 연이어 메세지를 보내도 좀처럼 확인하질 않았다. 별안간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날 이후 호석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따로 들은 적은 없었지만, 추측컨대 상당히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인물이 분명했다. 엄마의 말마따나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라는 말을 맹신하는 여주로서는 아직까지도 연락없는 호석에 대한 걱정이 그 아버지란 인물에 대한 원망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못된 사람 밑에서 밝고 착하게 자란 호석이 대견할 정도였다. 아이는 부모를 닮는다던데. 호석만큼은 예외인 모양이었다.
여주는 무사한 호석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아버지와의 약속이란 말에 민폐일까봐 전화까진 안했지만, 도통 불안했다.
♪♪
그 때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 그것도 02가 아닌 042로 시작되는 대전지역번호였다. 대전이면 엄마의 보육원이 있는 곳이었다. 불현듯 불안한 직감이 스쳤다.
" 여보세요 "
" 이여진님 보호자분 되십니까? "
" 네? 네,네. 맞는데요. "
" 현재 교통사고로 인해 이여진님 병원 이송중입니다. "
그리고, 그 직감은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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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으로 향하는 ktx는 다섯시가 첫출발이었다. 연락을 받자마자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는데, 곧바로 출발하는 차가 없어 여주는 기차를 예매한 채 대합실에서 마냥 시간을 떼우고 있었다. 병원에선 큰 사고가 아니기에 경미한 부상에 대한 수술만 진행하면 된다고 했지만, 여전히 여주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거니와, 해외에 나가있는 아빠를 대신해 보호자 노릇을 해야한다는 부담감이 맞물려 불안한 마음이 가중됐다. 여주의 머릿 속에서 떠오르는 교통사고의 장면들은 죄다 피칠갑을 한 끔찍한 장면들 뿐이었다. 경황이 없어서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묻지 못해서 더 불안했다.
마음같아선 누군가를 불러서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역력했지만, 호석은 연락이 되지 않았고 윤기도 늦은 밤 다른 작곡가와 중요한 곡 작업중이라는 말을 남긴 후 연락이 없었다. 머리를 쥐어짜내도 도저히 부를 사람이 없어서 여주는 쉐하 단톡방에 일이 있어서 급하게 대전 내려간다는 한 마디만 남긴 채 택시에 몸을 싣었다. 역에 거의 다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제 메세지를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기에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윤기는 원래 작업중에 메세지를 잘 확인하지 않는 타입이어서 걱정하지 않았지만 호석은 확인즉시 달려올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구태여 엄마의 사고때문이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괜히 호석에게 마음의 짐을 주기는 싫었다.
어느덧 시간은 네시반을 훌쩍 넘었다. 여주는 기차를 타기 위해 주섬주섬 백팩을 챙겨들었다. 그 때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며칠간 엄마의 곁을 지켜야했기에 간단히 챙기려던 짐이 꽤 무거워서 여주는 백팩을 힘겹게 들어올리며 발신인이 누군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급한 일이 뭔데. "
그 사이 흘러내리는 백팩을 추스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여주는 건너의 상대가 누군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후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머니 사고 났잖아. "
" 뭐? "
" 왜 나한테 전화 안했어. "
" 아니, 그게. "
" 같이 가. "
" 아냐. 나 지금 첫차 타고 갈 거야. 걱정하지 마. "
" 혼자 안보내. "
" ...어? "
어쩐지 전화기 건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묘하게 등 뒤에서 중첩되는 것 같아 여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 분명히 말했어. 혼자 안보낸다고. "
그 뒤에, 땀에 흠뻑 젖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윤기가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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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생을 살다가 조금 뒤늦게 왔습니다!!!
이번회차가 지지부진하게 쓰여서 정말 힘들었네요...ㅠ.ㅜ
오늘은 윤기 시점으로 시작해서 윤기로 끝난 회차군요!
융기...직진시작인가../?/??//ㅎㅎㅎㅎㅎ그건 저도 모르겠서용ㅎㅎㅎㅎ
모쪼록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길 바라요 :->
다음화는 이번보다 더 빠르게 찾아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당!
+ 이번화에서 암호닉을 받습니다.
[신청하시는 암호닉] 암호닉 신청합니다!
이런 식으로 써주시면 됩니다!!!
암호닉명단 <10화 기준> |
연꽃 / 느낌표 / 흩어지게해 / 빙빙 / 티백 / 찰떡쿠키 / 한결 / 청포도 / 사탕 / 토마토 / 김김이 / 어남윤 / 하얀설탕 / 복숭아 / 사삼공 / 만두 / 어남석 / 수박바 / 콩나물 / 고앵이 / 흑슈가 / 참새쨍 / 블루 / 콩이 / 순 / 윤꼬꼬 / 키딩미 / 가든 / 뷰뱌 / 불면증 / 보금자리 / 푸름 / 딸기 / 해결 / 프리지아 / 무럭무럭 / 도리도리 / 유니 / 봄 / 해강 / 율무차 / 토미 / 싱글벙글 / 감자탕 / 서콩이 / 달빛주스 / 새싹이 / 1218 / 가지 / 여나 / 예그리나 / 소우주 / 댕댕(4화) / 하꼬 / 밍밍이 / 솜사탕 / 쪼꼬
녹차맛콜라 / 눈꽃 / 빙구 / 문라이트 / 인간망개 / 냥냥냥 / 호박고구마 / 보라빛 / 목칼석 / 뽀뽀 / 몬지 / 꾸욱 / 하늘보리 / 대깨홉 / 매생이 / 진이 / 꾸꾸 / 어남홉 / 경이 / 망개한팟찌밍 / 쭈 / 보라돌이 / 프레쉬 / 탈지 / 바바 / 콜라덕후 / 초콜릿무스 / 허니몽 / 주야 / 밤볼 / 몽블랑 / 마망 / 노가리 / 다람쥐 / 토마토 / 망개구름 / 코튼 / 슈비 / 새벽 / 푸른밤 / 은블리 / 여보세요 / 베비 / 스윗하트 / 뚜루뚜루 / 루꼴라 / 포도 / 댕댕 / 봄봄 / 꾸물 / 여름겨울 / 니드 / 건대꿀주먹 / 개브라고 / 콩콩이 / 반달 / 키친타올 / 고엽 / 몽이 / 자몽킥 / 보라곰 / 뚱백꽃 / 보금자리 / 민데일리 / 초코마루 / 핏치핏치 / 낙원 / 에인젤 / 방람둥이 / 1004 / 두근두근 / 소망이 / 제헙 / 하랑 / 붕어빵 / 매생봉봉 / 진진 / 나나 / 미니미즈 / 미내용 / 망개팟 / 뉴뉴꼬 / 구름둥둥 / 망개떡 / 보라보라해 / 젲제 / 냥댕쫑 / 연탄이콩 / 모윤 / 병뚜껑 / 그먕 / 아흥흥 / 치킨너겟 / 끄적 / 알롱지 / 마르살라 / 콩알 / 둘다 / 뚜꾸리 / 호뿌 / 0210 / 홍옥 / 댕누 / 맛집인절미 / 연어덮밥 / 월 / 슙체리 / 콩순이 / 악마 / 모도리 / 정정 / 슝슝12 / 루시아 / 코딩미 / 두유망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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