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 복잡한 감정
" 저기요. 영화과 김여주씨 맞죠? "
" 네. 그런데요. "
" 안녕하세요. 저 무용학과 19학번인데요. 호석선배 요즘 학교 안오시던데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
" ...죄송해요. 저도 연락이 안돼서. "
" 아...그러시구나. "
실례했습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가는 여학생이 시선 끝에서 멀어졌다. 여주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뒷켠에 있던 벤치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무념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빌어먹게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맑고 화창했다. 이제 초가을인가. 어느새 뺨을 간질이는 바람이 시원했다. 계절이 바뀌는 게 느껴져 새삼스러웠다. 마음이 이렇게 복잡한 와중에도 시간이 성큼성큼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곁에 있던 호석이 없는데도.
호석이 연락두절됐다. 지난주 금요일 오후에 아버지를 만나러 간 뒤로 감감무소식이었으니 성사철을 듣고 나온 지금, 정확히 일주일이었다. 호석과 사귄다는 풍문이 퍼진 이후에 종종 호석의 지인들은 여주에게 말을 걸어왔다. 대체로 연락이 되지 않는 호석에 대한 물음이었다. 어디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아픈 건 아닌지. 이미 제 머릿 속을 한참 휩쓸어간 물음을 건네오는 이들에게 여주가 해줄 말은 한가지 뿐이었다. 죄송해요. 저도 연락이 안돼서.
애석하게도 여주는 호석의 여자친구가 아니었고 종종 저에게 물어오는 이들과 비슷하거나 혹은 더 친밀하지 않은 사이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여주는 똑같은 답변을 돌려줄 때마다 가슴이 메일 듯 아팠다. 자신이 호석에게 특별하지 않은 존재라는 게 와닿았으니까. 겨우 친구 사이에 그런 서운함을 느끼는 게 스스로도 이상했지만, 그랬다. 종종 호석의 안부를 묻는 저들과 똑같은 무게만큼의 존재라는 게 속상했다. 그건 아마 오랜 시간동안 쌓아온 관계에 대한 치기어린 독점욕일까, 여주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감정보다는 호석에 대한 걱정이 훨씬 앞섰다. 특히 호석의 아버지가 연락두절의 가장 큰 원인일 것만 같았기에 더더욱 그랬다. 이름있는 중견기업의 외동아들이라는 것 말고는 호석의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여주였기에, 추측을 해보려 해도 도저히 되지 않았다. 지난 금요일 호석이 저를 바라보던 가라앉은 눈동자와 제게 할 말이 있다며 약속하던 그 얼굴이 내내 아른거렸지만, 정작 그 이면에 담긴 진심을 헤아리기엔 여주에게 호석은 멀었다. 지금마저도.
여주는 벤치에 머리를 기대며 메신저를 열었다. 호석의 연락이 끊긴 후 여주는 알림이 없는데도 메신저를 들어가는 일이 잦았다. 어쩌면 제 메세지를 확인하진 않았을까. 그런 기대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전처럼 답장을 받진 못해도 확인했다는 사실만 알아도 마음이 한결 놓일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얄궂게도 '1'은 사라지지 않은채였다. 여주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메신저를 나오려다가, 무의식적으로 호석의 프로필사진을 눌렀다.
언젠가 자신이 찍어줬던 사진이었다. 꽃이 화창한 걸 보니 봄인 듯 한데. 올해 봄에는 내내 윤기와 있었으니 작년 봄인 것 같았다.
별안간 갑자기 수목원에 가자고 졸라대서 단 둘이 수목원에 갔던 날이었다. 그 날도 아마 할 말이 있었다고 했던가. 하지만 정작 수목원에서 내내 호석은 여주의 사진만 찍어댔다. 우리 여주 예쁘다, 그런 말을 내내 달고 다니면서. 그에 부끄러웠던 여주는 호석에게서 카메라를 빼앗았다. 그리곤 저도 찍어주겠다며 딱 한 장 찍었는데, 그게 이 사진이었다. 어딘가 걸터앉아서 저를 귀엽다며 내려다봤었던 것 같은데, 찰나에 찍힌 사진에도 호석은 햇살같이 예뻤다.
윤기 없이 단 둘이 어딘가를 놀러가본 게 처음이라 여주는 그 날이 생경하면서도 즐거웠다. 호석이 워낙 사람을 잘 챙기고 즐겁게 해준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보낸 하루가 새삼스러웠다. 여주는 함께 돌아오던 버스에서 호석이 찍은 제 사진을 보며 말했다.
" 호석아. 너 여자친구 생기면 엄청 잘해줄 것 같아. "
" 응? "
" 그렇잖아. 친구한테도 이렇게 잘해주는데 여자친구는 어떻겠어. "
진심이었다. 뜬금없는 나들이었지만, 여주는 호석과 함께 보낸 하루가 아주 즐거웠으니까. 아무런 사심이 없는 사이도 이렇게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아마 호석이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은 더할나위 없이 행복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여주는 호석의 갤러리를 잔뜩 차지한 제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별 대꾸없이 빤히 저를 바라보는 호석을 봤다. 어쩐지 눈동자가 가라앉은 것 같았지만 여주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물었다.
" 호석아. 넌 왜 여자친구 안사귀어? "
윤기에겐 몇번이고 물어봤던 질문이었다. 중학생부터 고등학생을 건너 대학생이 될 때까지 윤기는 여주 곁에 항상 붙어다녔기에 이성이 많이 꼬이진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뒤에서 윤기를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애들이 있었다. 그 사실을 여주 또한 모르지 않았기에 몇번이고 윤기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지만, 윤기는 그 때마다 너 있는데 굳이 사귈 필요 있냐는 대답을 안겨줬다. 원체 이성에 관심이 없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살갑게 구는 게 익숙치 않은 애라 여주 또한 그 때마다 내가 평생 옆에 있어줘야겠네, 괜한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실 동시에 안도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성의 감정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인생의 절반정도를 함께 지내왔던 윤기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곁을 지키게 된다면 이름 모를 공허함과 상실감이 찾아올 것 같기 때문이었다. 윤기는 여주에게 있어서 친구를 넘어선 유대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호석의 경우는 좀 달랐다. 알게 된 햇수야 오래됐지만 정작 지금처럼 친밀해진 건 고3때부터였고, 그리 친하지 않았던 중학생때부터 호석은 인기가 많았다. 학창시절 통틀어 윤기를 마음에 둔 애가 고작해야 두세명정도였다면 호석은 열댓은 훨씬 넘을 것이었다. 학창시절 내내 같은 반이 아니었음에도 호석을 짝사랑하는 애가 여주의 반에도 한두명씩은 꼭 있었고, 고3때 호석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제게 호석을 좋아한다며 연애상담을 부탁한 친구들도 많았다. 그 때마다 여주가 호석과 가장 친한 친구라고 여겼는지 그의 취향과 이상형을 묻곤했지만, 여주는 속시원하게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호석의 이성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여주가 아는 바로는 호석은 단 한번도 누군가와 사귄 적이 없었고, 딱히 이성문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고등학생때까지는 입시에 집중하던 애들이 많았기에 그러려니 여겼지만, 대학입학 후에도 대숲이나 에타에 종종 호석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이성이 있었음에도 스캔들 하나 없는 호석이 의아하긴 했었다. 윤기의 말마따나 호석은 매번 개강파티, 엠티, 종강파티, 축제 등등 학교내의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고백을 받는다고 했다. 그리곤 그 때마다 여지없이 거절하고 돌아와선 괴로워한댔다. 착해빠진 정호석답게.
정작 제게는 그런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않는 호석이 내심 서운하긴 했지만, 여주는 순수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렇게 무수한 고백을 거절하면서까지 누군가를 사귀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진 않을까.
응? 여주는 대답을 보채듯 물었다. 호석은 그런 여주를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 넌 내가 여자친구 생겼으면 좋겠어? "
윤기에게 하던 것처럼 가볍게 물었는데, 호석은 생각보다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여주는 당황스러웠지만 내색않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호석에게 여자친구가 생긴다, 윤기 못지않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단순한 친구인 제게 하는 것보다 더 잘해주는 호석은 말 그대로 헌신에 가까운 모습이 되지 않을까. 그 상대가 누가 될 진 몰라도, 호석은 정말이지 괜찮은 남자친구가 될 것 같았다. 확실히 호석은 벤츠에 가까운 남자였다. 같은 여자 입장에서 봤을 때 절대로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 괜찮은 사람이면. "
여주는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곁에서 오랜 시간 지켜봐온 호석은 정말 흔치 않은 좋은 사람이었기에, 그에 못지 않은 좋은 사람이라면 친구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호석은 밝고 사랑만 가득한 사람이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아픈 구석이 있는 애였다. 그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보다 좋을 일은 없었다. 고작 친구일 뿐인 제가 해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호석에게 안겨줄 수 있을테니까. 그 때의 여주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호석에게 필요한 건 우정보다는 단단히 기댈 수 있는 사랑이란 걸. 종종 내면을 파고 들어갈 때마다 호석이 세운 벽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여주는 절대로 넘볼 수 없는 차원의 것이었다.
" 괜찮은 사람. "
여주의 대답을 다시 한 번 확인하듯 호석의 입가가 느리게 움직였다.
" 응. 그런 사람이면 너한테 좋을 것 같아. "
" ... "
" 그래서, 왜 안사귀는데? "
" ...왜일 것 같아. "
여주가 코를 찡그렸다. 답하길 꺼려하는 질문에 되묻는 버릇은 여전했다. 호석이 제게 또 벽을 세우고 있었다. 여주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종종 그런 호석에게 상처를 받았고, 그 날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루종일 허물없이 굴어놓고 또 다시 멀게 대하는 게 얄궂었다. 우린 겨우 이런 것도 못물어보는 사이였던가. 명백하게 그어진 선 앞에서 다시 한 번 호석과의 관계를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일은 몇번이나 겪었으면서도 때마다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여주가 호석에게 완전히 마음의 문을 연 건 아주 오래전 이야기였으니까.
섭섭함과 속상함에 여주는 호석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되는대로 대답했다.
" ...뭐. 따로 좋아하는 애가 있다던가. "
" 맞아. "
" ...어? "
여주가 시선을 들어 호석을 마주했다. 종일 따스하던 눈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 좋아하는 사람 있어. "
" ... "
" 아주 오래전부터. "
호석이 무언갈 말하려는 것처럼 뚫어질 듯 벙쪄있는 여주의 눈을 바라봤다. 여주는 그 다음 말을 가만히 기다렸지만, 순식간에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미소짓는 호석으로 인해 대답을 보챌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예상치 못했던 종류의 대답이라서 뭘 어디서부터 물어봐야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물어본다고 해서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여주는 호석의 대답을 곱씹으며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아주 오래전부터라. 의미심장하면서도 좀처럼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하나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결코 자신이 알 수 있는 범위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 호석이 매번 세우는 벽 너머에 있는 자신이 추측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그 사람은 호석의 선을 넘어 얼마나 가까이 있는 걸까. 호석은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내어주고 있을까.
어쩐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이상하게도.
여주는 그 날의 호석을 떠올리다가 마음이 가라앉았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일이었다. 스스로 상처받기 싫어서 그 이후 호석에겐 이성문제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으니까.
여주는 다시 한 번 사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별안간 프레임 밖의 자신을 바라보는 호석의 눈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호석은 항상 저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걸까. 지나치게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눈이었다. 마치 그게, 꼭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서 여주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얜 쓸데없이 이걸 프사로 해놔서. 여주는 작게 혼잣말하며 메신저를 나갔다. 아무래도 호석이 돌아오면 곧바로 프로필사진을 바꾸라고 해야할 것 같았다. 이렇게 사진만 봐도 가슴이 영 답답한 기분은 이상했으니까.
*
" 여주야. 너도 호석이 연락 받았어? "
" 죄송해요. 저도 연락이 안... "
쉐하에 들어오자마자 던져진 물음에 자동반사처럼 튀어나오는 대답을 잇던 여주가 멈칫한 채 남준을 바라봤다. 일주일 내내 지겹도록 들은 질문이었는데, '너도'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본 것이었다. 저 맥락은 분명히.
" 오빠 호석이한테 연락받았어요? "
" 응. 오늘. "
" ...아. "
" ...여주는 못받았어? "
급속도로 굳어가는 여주의 얼굴을 살피던 남준의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듯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여주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네, 짧게 대답했다. 어디서 흘러나온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마음 한 켠이 와르르 무너지는 참담함이 여주를 덮쳐왔다.
" 마침 애들 다 있었을 때여서, 다른 애들은 다 듣긴 했는데. "
" ... "
" 걱정하지 말라고. 곧 올 거래. "
" ... "
" ...너도 같이 있는 줄 알고 나한테 전화했나봐. 내가 여기서 제일 맏형이잖아. "
애써 위로하는 남준이 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여주는 그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자꾸만 꾸역꾸역 올라오는 울음을 밀어내며 말했다.
" ...다행이네요. "
" 여주야, "
" 저 피곤해서 좀 들어가볼게요. "
끝내 남준 앞에서 참고 있던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여주는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남준의 곁을 빠르게 스쳐지나 제 방에 들어와 문을 잠궜다.
숨이 목 끝에서 걸릴 정도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주는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내면서도, 스스로 왜 이렇게 서러운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눈물의 의미가 안도감에서 오는 것이었다면 자꾸만 울컥울컥하는 제 심정은 한참 이상했다. 어째서 저보다 남준이 먼저 연락받았다는 사실이 이다지도 속상한지 모를 일이었다. 객관적으로도 개별로 연락을 하는 것보단 쉐어하우스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사람에게 말하는 게 훨씬 나은 방법이란 걸 알면서도, 마음 한 켠이 이상했다. 이건 지독하게 유치한 감정이었다. 저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는 치기어린 욕심에서 비롯된.
아, 여주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머리가 지끈했다. 윤기에게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어째서 호석을 향해 마구 들끓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됐든, 호석의 얼굴을 마주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주는 잠잠한 제 핸드폰을 내려다보곤 금세 부은 눈가를 지긋이 눌렀다.
# 네 눈동자에 비춘 것
" 여주야. 이번주 분리수거 당번이지? 좀 부탁해. "
" 네엡. 다녀올게요. "
" 얼른 옷입어. "
" 엉? "
" 같이 가게. "
" 같이? "
" 나도 나가는 길이야. "
" 어제 늦게까지 작업해서 이제 잘거라며? "
" ...갑자기 살 게 생겼어. "
" ...??? "
*
" 누나. 찌개에 넣게 거기 있는 통조림 좀 따주세요. "
" 오키. "
" 줘. "
" 어? "
" 열어줄테니까 달라고. "
" 아니, 이거 오프너 있어서 그냥 따면 되는... "
" 잔말 말고. "
" ...???? "
*
" 김여주. 이거 찾아와야 됐던 거 맞지. "
" ...?? 그걸 왜 네가 갖고 왔어? "
" 오는 길에 있길래. "
" 세탁소가 이 시간까지 해? "
" ...오늘 늦게까지 하신다던데. "
" 그래? 아. 맞다. 너 작업실 갔다오는 길 아냐? "
" 어. "
" 작업실이랑 세탁소랑 정반대 방향이잖아. "
" ...지름길 있어. "
한참의 정적 후 대답한 윤기가 멋쩍은 듯 옷을 여주 품에 안기곤 그대로 제 방으로 향했다. 얼떨결에 옷을 품에 안은 여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한참을 서있었다.
최근, 민윤기가 이상했다. 정확히는 대전에 내려가던 그 순간부터 묘하게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평소에도 말없이 잘챙겨주는 편이긴 했지만 그 빈도수가 잦아졌고, 틈만 나면 저를 찾아내 말없이 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 때마다 자연스럽게 제 무릎을 차지하곤 했는데, 워낙 익숙한 행동이라 그러려니했지만 어쩐지 스킨쉽의 밀도가 전보다 짙어진 느낌이었다. 예컨대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어느새 찾아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새근새근 숨을 쉬다 가거나 거실에 나오면 느닷없이 안겨오기도 했다. 밤샘작업을 하다와서 피곤하다는 이유때문이었는데, 사귈 때 이외에는 하지 않던 행동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도 계속해서 대신 해주려 하거나 참견하는 일도 잦았다. 명백히 친구로서의 간섭은 아니었다.
어째서 마음을 정리하려고 굳게 다짐할 때마다 흔드는 지 모를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여주도 확실히 해둬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여전히 윤기를 향해 저급한 표현을 짓껄인 희주는 싫었지만 어찌됐든 아직까지 윤기의 여자친구였고, 저는 그저 친구일 뿐이었다. 지난 주 희주의 언행에 화가 나서 언성이 높아졌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오해를 받을만한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여자친구인 자신보다 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눈이 돌아갈만도 했다. 그 날 이후 희주는 여주에게도 몇번인가 전화를 걸었고, 매번 달라지는 번호마다 수신거부를 하던 여주였다.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해도 희주는 이해하려하지 않았기에 그게 최선이었다. 덕분에 여주는 더욱 윤기와 거리두는 일에 신경썼는데, 그 상대가 저 모양이니 말짱도루묵이었다.
여주는 받아든 옷을 옷장 안에 넣곤 그대로 윤기의 방문 앞에 섰다. 머릿 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대충은 정리했지만 막상 하려니 어딘가 불편했다. 문득 자의식과잉인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윤기는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오히려 제가 더 신경이 곤두서서 예민하게 구는 걸 수도 있었으니까. 윤기에게 불편한 말을 꺼낸 적이 도통 없었으니 더 께름칙했다. 여주가 문 앞에서 몇번이고 노크를 하려고 손목을 들었다가 내리길 반복하던 순간, 안쪽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 뭐하냐 여기서. "
" !!!! "
무방비 상태에서 윤기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여주는 히익, 숨을 삼켰다. 윤기는 가만히 제 얼굴을 살피더니 들어오려고? 물었다. 여주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윤기는 피식 웃더니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으응, 여주는 주춤거리며 윤기의 방에 들어섰다.
" 뭐 마실래. "
여주가 자연스레 침대에 걸터앉자 윤기가 문을 닫곤 그대로 미니 냉장고로 향했다. 항상 음료는 개인냉장고에 넣어두는 윤기였기에 방 한켠엔 윤기가 좋아하는 음료수들이 박스째 비축되어있었다. 여주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고개를 저었다. 여유롭게 음료수 마시며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얼떨결에 입성하긴 했지만 여기에 들어온 이상 제대로 할 말은 하고 가야했다. 평소엔 절대로 타인을 방에 들이지 않던 윤기의 규칙이나, 늦은 밤 남자방에 들어와있다는 사실은 전혀 의식조차 되지 않았다. 여주는 그저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었다. 그 때 자리로 돌아온 윤기가 여주의 손 위에 무언가를 얹었다. 묵직함에 무의식적으로 내려다보니 마카롱과 다쿠아즈같은 디저트가 예쁘게 포장되어있는 상자가 제 손에 들려있었다.
" 지난번에 맛있게 먹길래. "
" ... "
" 그 황치즌가, 그게 제일 맛있다던데. "
무심하게 말하는 윤기의 목소리에서 다정함이 뚝뚝 느껴졌다. 상자 안의 디저트는 결코 윤기 취향의 것들이 아니었다. 순전히 여주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만 가득 채워진 선물이었다. 아. 여주는 작게 탄식을 뱉었다. 이런 친절은 윤기에게 미련을 가질 때에도 원치 않던 것이었다.
여주가 상자를 들여다보며 한참 대답이 없자 윤기가 그 곁에 앉아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 ...마음에 안들어? "
" ... "
" 너 좋아한다는 거 남준이형이랑 애들한테, "
" 윤기야. "
" ...어. "
" 나 때문에 이런거 사오지마. "
" 뭐? "
여주는 후, 숨을 크게 뱉으며 상자를 구석에 몰아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혹스러운 듯 윤기의 시선이 여주를 집요하게 따라갔다. 여주는 굳게 마음먹고 윤기를 바라봤다.
" 이런 거 받고 싶지 않아. "
" ...왜. "
" 난 그냥 친구잖아. "
" 그게 무슨, "
" 너는 챙겨야할 여자친구가 있고. "
윤기가 무언갈 반박하기도 전에, 여주는 친구라는 단어로 선을 그었다. 그에 윤기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 나보다 너 여자친구 먼저 챙겨. 내가 좋아하는 거 남준오빠나 애들한테 물어보지 말고. "
" ... "
"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안겨오지도 말고, 틈만 나면 나 찾지도 말고. 과하게 나 챙겨주지도 말고. "
" ... "
" 너도 알지, 그거 친구로서 할 행동은 아닌거. "
" ... "
" 아무리 우리가 허물이 없다고 해도. 너 여자친구가 싫대잖아. 조심해야지. "
여주가 윤기를 향해 작게 웃었다. 도저히 시뮬레이션 되지 않던 상황이었기에 잔뜩 긴장했지만, 오히려 상상했던 것보다 차분하고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어 여주는 스스로도 놀라웠다. 전에는 윤기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때마다 가슴이 베일 듯 아팠는데, 이젠 정말 덤덤해진 것 같았다. 발 끝에 잘근잘근 밟히던 미련의 조각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여주는 잠시간의 정적을 깨고 정리하듯 말했다.
" 생각해서 챙겨주는 건 고마운데, 나 때문에 너희 관계 나빠지는 거 싫어. "
" ... "
" 너 희주 많이 사랑하잖아. "
" ... "
" 그러니까 우리 앞으로 적당히 거리두자 윤기야. "
여주는 후련한 얼굴로 윤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제 말을 한참 곱씹는 듯한 윤기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있었지만, 곧 제 말을 이해할 것이었다. 여주는 알 수 있었다. 윤기는 절대 이런 말로 서운해거나 속상해할 애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시 한 번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저보다 더 조심할 애였다. 윤기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애니까.
갈게. 여주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없는 윤기를 두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방문으로 향하려던 순간, 강한 힘에 의해 손목이 붙잡혔다.
" ...윤기야. "
짙은 색으로 가라앉은 윤기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무언갈 강하게 갈구하는 얼굴이었지만, 그 실체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처음보는 윤기의 얼굴이었다. 윤기의 숨소리만 들어도 모든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종류의 분노 어린 시선은 처음이었다.
손목에 점점 강하게 전해져오는 힘에 여주가 작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윤기는 아랑곳않고 여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느리게 입을 뗐다.
" 거리를 둬, 우리가. "
뭐? 알수 없는 말에 여주가 되묻는 순간 윤기가 강하게 여주의 손목을 제 쪽으로 끌었다. 강한 힘으로 인해 여주의 몸이 속절없이 침대를 향해 쏟아졌고,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윤기가 그 위를 올라탔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여주가 온 몸을 움찔거렸지만, 윤기가 여주의 다른 한 손을 움켜쥔 채 제압했다. 꼼짝없이 윤기의 품 안에 가둬진 꼴이 되자 여주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유를 물으려고 윤기를 바라봤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쏟아지는 윤기의 시선은 꼭 화마가 덮친 듯 뜨거웠다. 여주는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처음 본 윤기의 눈동자에 가득 차있는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 그런 거 못해. "
" 윤기야, "
" 너랑 거리두는 거 못한다고 했어. "
정염.
윤기의 눈동자에 정염이 들끓고 있었다.
그제서야 눈치 챈 여주가 무언갈 말하려했지만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치 사랑을 갈구하는 짐승처럼, 거칠게 입술을 맞춰오는 윤기에 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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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머가리 박고 시작합니다..!!!!!!
근 한달만에 찾아왔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크뷰ㅠㅠㅠㅠㅠㅠㅠㅠㅠ
혐생때문에 너무 늦게 찾아왔어요 미안해요ㅠㅠㅠㅠㅠㅠ
앞으로 연재텀은 정말,,,일주일에 한 번, 늦어도 2주 안엔 찾아오기로 약속...
연중 절대 아닙니다ㅠ.ㅜ 저는 완결까지 달릴거에요오
한달동안 대략적인 결말은 정해왔습니다! 그거슨 어남땡이 정해졌다는 소뤼,,,
이젠 정말 어남땡을 향해 달리는 일만 남았어요!!!! 삽질도 이제 적당히 하자 우리!!!!
다음화엔 드디어 호서기 다시 등장합니다!
다음화도 가능한 일찍 올 테니 기다려주세요!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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