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
# 스캔들
그야말로 평범한 주말의 저녁이었다.
요즘 취업과 썸으로 바쁜 남준을 제외한 하메들은 각자 주말의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개강첫주라서 동기들과 내내 달리던 지민과 태형이 숙취로 작은 쇼파에 엉겨붙어 뻗어 있었고, 윤기와 호석은 여주의 곁에 딱 붙어있었다. 좀 쉬겠다고 쇼파에 앉으면, 둘은 귀신같이 달라붙었다. 무릎베개를 하고 있는 윤기는 고양이처럼 몸을 만 채, 호석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티비를 보고 있었다. 족히 남자 넷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쇼파인데도 .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의식하지 않을래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거리였다. 티비에선 예능인들이 달리며 숨 막히는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여주는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집중할만하면 느껴지는 둘의 체온과 숨결때문에.
처음엔 윤기를 보면서 설렘사할 것만 같았지만 몇번이고 반복되니 이젠 좀 성가시기 시작한 여주였다. 나름 집인데 이렇게 불편해서야. 조만간 대책을 강구해야할 것 같았다.
여주는 제 무릎에 누워있는 윤기의 이마를 보곤, 어쩐지 장난을 치고 싶어서 그 위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좀 귀찮게 굴면 일어날까 싶기도 했고. 윤기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느리게 고개를 돌려 제 얼굴을 쳐다봤다.
( -ㅅ- )
딱 이모티콘같은 얼굴을 하며 윤기가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초등학생때부터 자기 마음에 안들면 꼭 이런 얼굴을 하는 윤기였다. 그러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을 제지하진 않았다. 그냥 버티다가 짜증나면 일어나서 자리를 피하곤 했다. 마치 고양이처럼.
여주는 푹 웃으며 그 이마 위를 손가락으로 더 건드렸다. 매끈하고 하얀 윤기의 이마가 말랑말랑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마만 봐도 심장이 벌렁거리더니 이제는 직접 만져도 괜찮은 게 정말 미련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았다. 여주는 그저 지금 윤기와 장난을 치고 싶을 뿐이었다. 마냥 친구였던 전처럼.
" 고마해라. "
문질문질하는 여주의 손가락이 더 집요해지자 윤기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시룬뎁. 여주는 깐족거리며 윤기의 볼까지 건드리기 시작했다. 제법 통통한 볼살에 손가락이 푹푹 파묻혔다. 여주가 킥킥대자 윤기의 입이 앙 다물어지며 그 손가락을 잡았다. 작은 여주의 손가락이 윤기의 큰 손에 휙 감겨왔다.
열기가 순식간에 퍼져서 여주는 좀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제 손을 잡고 무심하게 내리는 윤기의 행동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망할, 아직 미련이 다 가시진 않은 모양이었다.
" 나도 놀아줘. "
별안간 호석의 목소리였다. 언제 어깨에 턱을 괴고 있었는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다가 볼에 입술이 닿을 뻔했다. 여주는 흠칫 놀라서 어깨를 푸닥거렸다.
" 설레게 왜 그래. "
호석이 싱긋 웃었다. 여주는 코를 찡그리며 호석을 바라봤다.
요근래 호석이 능글맞게 구는 일이 잦아진 것 같았다. 고백 이야기도 그랬고, 충동적으로 상철에게 여자친구 드립을 친 이후에도 호석은 돌아오는 길 내내 여친, 여친, 그런 호칭을 불러대고 민망함에 얼굴이 새빨개진 제 볼을 만지면서 그래서 그 때 좋아한다고 고백한거야? 미친 소리도 해댔다. 아악, 소리지르며 도망친 건 여주의 몫이었다. 여주는 결국 그 날밤 밤잠을 설쳤다. 제 이불을 뻥뻥 차면서.
지금도 자기가 가깝게 턱을 괴는 바람에 벌어진 미수사건인데도, 호석은 민망해하는 저를 놀리고 있었다. 어쩐지 분한 마음에 여주는 눈알을 데구르 굴렸다. 사이, 이상하게 새빨개진 호석의 귀가 제 시야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지난번에도 귓볼을 만지니까 얼굴이 달아올라선 도망쳤던 것 같기도 했다.
여주는 쒸익대며 그 귓볼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 그럼 더 설레게 해줄까? "
오랑캐는 오랑캐로 잡는, 말그대로 이이제이 전법이었다.
저를 민망하게 만들 속셈이라면 똑같이 해주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여주는 호석의 귓볼을 살살 만지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호석이 훅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호석의 얼굴이 달아올라있었다. 얘는 상대가 누구라도 이러나. 여주는 이상한 불쾌감이 들었다.
그 때 좀비처럼 일어나서 핸드폰을 뒤적거리던 지민이 토끼눈이 됐다.
" 누나 호석이형이랑 사겨요!!!!??????? "
그 소리에 모든 하메의 시선이 지민에게로 향했다. 여주도 호석의 귓볼을 잡은 채 고개를 돌려 지민을 봤다.
" 뭔 소리야. "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윤기였다. 윤기는 쥐고 있던 리모컨을 테이블에 던지며 몸을 일으켜 위협적인 눈으로 지민을 봤다. 지민은 아니, 이거 봐봐요. 제 핸드폰을 윤기에게 건넸다.
지민의 핸드폰을 받아든 윤기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갔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태형도 벌떡 일어나 윤기 옆에 붙어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 헐...진짜 둘이 사겨요? "
" 아 뭔데 갑자기. "
" 학교 대숲 누나랑 형 얘기로 도배됐는데요? "
태형의 말에 여주가 벌떡 일어나 윤기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가로챘다. 화면 안에는 학교 대숲 페이지에 도배되어있는 호석의 이름이 보였다.
[ 무용학과 ㅈㅎㅅ 여친 있나요? ]
[ ㅎㅅ선배 여친 생겼대요ㅠㅠㅠ ]
[ 댄동 ㅈㅎㅅ 여친 실환가요? ]
[ ㅈㅎㅅ 선배릠...많이 사랑했읍니다... ]
[ 댄동 ㅈㅎㅅ 영화과랑 사귄다는 거 진짜에요? ]
[ ㅈㅎㅅ 여친 주작임 암튼 주작임 ]
보통 플러팅류의 글이 올라오면 많아봐야 댓글이 열개정도인데에 반해, 호석에 관련된 글 중 가장 댓글이 많이 달린 건 사십개가 넘어갔다.
[ 댄동 지인피셜 영화과 18 ㄱㅇㅈ랑 사귐 술자리에서 공개했다고 함. 둘이 성사철 듣는 것만 봐도 ㄹㅇ임 ]
그 중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댓글엔 답댓이 우수수 달려있었다. 행회 그만돌려라, 결론 땅땅, 등등 아마도 호석에게 연심을 품었을 제 친구를 태그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여주는 머릿 속이 온통 새하얘진 기분이었다. 그대로 술자리에 가면 분명히 고생할 호석이 눈에 보여서 억지로라도 보내지 않으려고 홧김에 한 대답이 어마어마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호석이 인기가 많은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여주는 댓글에 버젓이 있는 제 이름의 초성이 소름돋았다. 하지만 그것보단 오히려 호석이 곤란해진 것 같아서 여주는 제 어깨에 턱을 괸 채 함께 확인하던 호석을 바라봤다. 그러자 호석이 왜? 다정하게 물었다.
" ...미안해서. "
" 뭐가? "
" 나때문에 곤란해졌잖아. "
" 전혀. "
단호한 호석의 대답이었지만 왠지 미안해서 여주의 고개가 가라앉았다. 호석은 난 좋은데. 작게 속삭이며 그런 여주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 진짜 둘이 사귀는 거에요? "
사이 지민이 가까이 다가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럴리가 있냐! 여주는 그런 지민의 팔을 아프지 않게 치며 답했다. 지민은 아아, 엄살부리며 의아한 듯 말했다.
" 근데 이런 소문이 왜 퍼졌지? "
" ... "
" 헐. 목격담도 있네. "
의아해하는 지민의 뒤로 화면을 정독하던 태형이 나지막히 말했다.
" 여름방학에 우리 쉐하 근처 골목에서 둘이 안고 있었다고... "
말 끝을 흐리는 태형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잔뜩 의심스러운 듯 여주와 호석을 번갈아봤다.
여주는 등이 섬짓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 그런 날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쉐하 환영회날, 윤기에 대한 미련으로 호석을 탓하며 울었던 그 날. 잊고 싶었던 찌질한 기억에 여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 요즘 둘 기류가 이상하긴 했는데. "
태형이 고개까지 갸웃하며 한층 더 의심스러워하자, 여주는 으르렁댔다.
" 주글래 진짜. "
" 진짜 아니에요? "
" 말이 되냐. 완전 가짜뉴스지! "
" 근데 전부 거짓말이라기엔 좀 이상한데. 한꺼번에 게시물이 올라온 것도 그렇고. "
" ...아니이. "
" 우리 몰래 사귀는 거 아니죠? "
" 아니라잖아. "
집요해지는 지민의 질문에 여주가 고개를 휘젓기도 전에 윤기가 끼어들어왔다. 윤기는 태형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빼앗곤 화면을 꺼버렸다.
" 얘넨 안사겨. 내가 알아. "
그리곤 지민에게 핸드폰을 던졌다. 얼떨결에 제 핸드폰을 받아든 지민의 얼굴이 벙쪘다.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 사이 태형이 윤기에게 물었다. 윤기가 느리게 여주의 얼굴에 시선을 내렸다.
" 그렇지, "
윤기가 묻자 여주는 잠깐 눈동자를 굴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앞으로도 그럴 거고. "
단언하듯 윤기가 뒷말을 이었다. 그에 끄덕이던 여주의 고개가 천천히 멈췄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윤기의 목소리가 마치, 명확한 제 대답을 확인하려는 것만 같아서 여주는 곧바로 답할 수 없었다. 물론 윤기의 말대로 그럴리 없었다. 호석과 사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여주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윤기의 시선이 한층 깊어졌다. 얼른 대답하라는 듯이.
" 그건 아무도 모르지. "
하지만 호석의 대답이 더 빨랐다. 의중을 알 수 없이 모호한 대답을 한 호석이 윤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윤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어떻게 단언할 수 있어, 남녀사이를. "
" ... "
" 그건 네가 더 잘 알텐데. "
민윤기.
호석이 낮게 윤기의 이름을 불렀다. 윤기의 시선이 날카롭게 호석과 부딪혔다.
#이기적이어야만 하는
" 나 여주 좋아해. "
호석은 그 날을 후회했다. 아주 오랫동안.
*
작년 연말이었다.
같은 학교에 합격한 지민과 태형이 직접 축하파티를 열었다. 쉐하 송별회는 그를 위한 보기 좋은 껍데기였을 뿐이었다. 그 자리는 온전히 지민과 태형만을 위한 자리였으니까.
고삐 뿔린 망아지마냥 술을 마셔대는 지민과 태형을 챙기느라 호석은 취기가 만연하게 뻗어있었다. 하지만 먼저 자리를 뜬 석진과 남준, 애초에 여주외엔 누군갈 챙기지 않는 윤기를 대신하기 위해서 호석은 아득해져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제 주량도 모르고 날뛰다가 결국은 뻗어버린 둘을 겨우겨우 제 침대위에 올려놓고, 호석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베란다에 나갔다.
한겨울의 칼바람이 뼛 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지만, 그게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해주는 것 같았다. 호석은 눈을 반쯤 감고 미리 나와있던 윤기의 옆에 앉았다.
" 나 여주 좋아해. "
그리고 한참의 적막 뒤에 나온 건 그런 말이었다. 감히 꺼낼 수 없었던,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제 속에 담아두고 있던.
제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윤기의 얼굴에선 당혹감이 어렸다.
" 고백하려고. 조만간. "
취기에 무심코 한 말이 아니었기에, 호석은 더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시선이 가늘어진 윤기도 결국은 진심을 알아챈 듯 작게 숨을 뱉었다.
중학교때부터 둘은 서로를 잘 알았다. 가끔 또래 아이들같이 장난은 쳐도 서로를 대하는 마음과 대화에선 한 치의 거짓이 없다는 걸.
겉으로 보기에 외향적이고 활달한 호석과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윤기는 극과 극의 인간이었지만, 의외로 둘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상처입은 짐승은 서로를 알아본댔던가. 아무에게나 털어놓을 수 없는 깊은 상처가 있는 둘은 그를 감추는 방법이 달랐을 뿐 궁극적으로 같은 정서를 공유했다.
그랬기에 호석도, 윤기도 서로의 곁이 편했다. 서로의 앞에선 애써 감추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저 서로가 거기에 있음을 공유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게 위안이 되었던 적도 많았고.
호석의 흔들리지 않는 눈빛 속에선 저 멀리 산허리에 걸려있는 보름달이 꽉 차 있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둘을 비추고 있는 보름달은 꼭 여주를 떠올리게 했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어서 방황하고 있을 때면 나타나 제 앞을 밝혀주는 빛.
호석에겐 그게 유일한 구원이었고, 아마 윤기에게도 그랬을 것이었다.
" ...그런걸 왜 말하냐. "
한참을 침묵하던 윤기가 무겁게 입을 뗐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뚝뚝 묻어났다. 생각치도 못한 이야기였을테니까.
둘은 비슷한 구석이 많았지만, 이럴 때 보면 윤기는 제 감정을 어찌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와도 같았다. 살기위해 제 본성과 감정을 억누르는 법을 배웠던 호석과는 많이 달랐다. 몇 번이고 제 감정과 마주할 일이 많았던 호석에 비해, 윤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의 증거이기도 했다.
윤기의 곁엔 항상 여주가 있었으니까.
" 너는 알아야 될 것 같아서. "
제 대답에 한층 탁해진 윤기의 눈동자를 본 호석은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그 눈에선 짐작일 뿐이었던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여주에 대한 명백한 사랑.
호석은 아주 오래전부터 여주를 향한 윤기의 애정이 친구이상의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일찍이 사랑을 깨우친 사람의 유일한 특권이었다. 누군가의 눈에서 사랑을 알아볼 수 있는.
하필 윤기의 그 상대가 여주라는 것이 호석에겐 지독한 운명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최소 인생 2회차, 애어른 소리를 들었던 윤기는 사실 제 감정에 아주 서툰 사람이었다.
저를 보는 눈에서 어딘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마저도 출처를 찾지 못해 갈피를 못잡는 것이 호석에게는 보였다.
페어플레이. 그딴 단어를 좋아하진 않지만, 호석은 도저히 그런 윤기를 두고 여주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감정의 크기로 따지자면 여주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지만, 호석에게도 윤기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제 사랑이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길 바랐으니까.
*
[ 호서가 ]
[ 크ㅡㄴㅇ릴 남 ]
[ 미늉기가 나보고 사귀재ㅠㅠㅠㅠㅠㅠㅠ ]
그 다음날 시골에서 올라온다던 여주가 윤기를 만나고 보내온 메시지였다.
호석은 곧바로 전화를 걸려고했지만, 이어 빠르게 올라오는 여주의 메시지에 모든 행동이 멈췄다.
[ 일단 윤기가 한달만 사귀자고 함 ]
[ ㅁㅊ 진짜 무승ㄴ 일이야 ]
호석은 깨달았다. 제 기회를 빼앗겼다는 걸.
*
고작 한달이라고 했던 여주와 윤기의 연애는 어느덧 세달을 넘어가고 있었다.
종종 둘을 보기 위해 쉐하 근처에 놀러오던 여주는 더이상 찾아오지 않았고, 가끔 학교에서도 마주칠 때마저도 윤기와 함께이거나 윤기를 만나러 가야한다며 잠깐 얼굴보는 게 전부였다. 어디있냐고 물으면 꼭 셋 중 하나였다. 학교, 기숙사, 윤기 작업실.
매일같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메시지도 뜸해졌고 고민이 생기면 걸려오던 전화도 한 통 오지 않았다.
연애를 시작하면 주변에 소홀해지는 친구들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였다. 많은 친구들이 그렇게 제 곁을 떠나갔다가 돌아오길 반복했지만, 호석에게 여주의 부재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매일밤 꾸는 악몽 속에선 윤기와 여주의 인영이 보였고, 호석은 자주 아팠다.
갑자기 면역력이 떨어진 것 같다며 하메들이 걱정해주었지만 호석은 알았다. 몸이 아닌 가슴이 아파서 앓는 병이라는 걸.
평생을 꿈꿔오던 여주의 곁에는 윤기가 있었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처음엔 윤기가 징그럽다며 질색하던 여주도 어느덧 익숙해진 듯 윤기를 바라보는 눈에서 애정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차라리 그걸 몰랐다면 더 나았을까. 곁에서 행복해보이는 여주가 눈물겹게 예뻐서 호석은 윤기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제가 빠진 둘의 사이에선 나날이 사랑이 움텄고, 호석은 꼭 버려진 것처럼 그 주변을 맴돌았다.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점점 비좁아졌다.
그 무렵부터 호석은 모든 걸 잊기 위해 온 몸을 혹사시켰다.
여주에게 받지 못하는 사랑을 채우는 일은 불가능했지만, 또다시 헌신적으로 좋은 사람인 척 하면 껍데기일 뿐인 사랑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
공부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전부 댄스동아리에 전념했던 탓에 호석은 이런 저런 대회에서 큰 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를 이끌었던 호석이 많은 이들 속에 각인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학교 대숲과 에타에서는 매일같이 호석의 이름이 올라왔고, 그 사이 여학우들의 고백도 수차례 받았다. 거짓으로 상처줄 수 없었기에 전부 거절했지만.
매일 울리는 전화는 술자리가 대부분이었지만, 호석은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왁자지껄한 그 순간에는 정말 잠깐잠깐씩 제 상처를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 수록 호석은 공허해지는 순간이 잦아졌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건 필사적으로 지어낸 제 탈을 향한 것이었다.
결국 제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호석에겐 억겁같은 후회와 번민의 시간이었다.
*
" 야, 정호석. 너 진짜 그르케 사는 거 아니다아 "
여주가 쉐어하우스에 들어온 지 이주정도가 지난 즈음이었다. 별안간 어디서 술을 마시고 온 건지 품에 빈 맥주 피처통을 안고 여주가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비틀거리는 걸음에 걱정되서 호석이 달려나가니, 여주는 그 손을 뿌리치며 째릿 호석을 노려봤다. 왜 또, 호석이 웃으며 대꾸하자 여주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 이 누나가 속상해 지금 "
" 왜. "
" 쒸...모른 척 하냐 "
다시 한 번 여주가 호석을 째려보다가, 아 머리아퍼. 눈을 찡그리며 그대로 머리통을 호석의 가슴팍에 박았다.
윤기가 소개팅을 다녀오고 나서부터 여주는 틈만 나면 호석을 노려봤다. 쒸익대며 저를 도와주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 여주 그랬어, 장난스럽게 넘어가던 호석이었다. 쉐하 환영회가 있던 날에도 펑펑 울던 여주에게 구태여 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저 안아주기만 했을 뿐. 호석은 미안하단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
미안하지 않았으니까.
" 미늉기 또 안들어와써? "
" 응. 좀 늦는대. "
" 망할 놈!!! "
호석의 가슴팍에서 머리를 거칠게 도리질하던 여주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다정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는 호석을 빤히 보던 여주는 코를 훌쩍이더니 원망스러운 듯 말했다.
" 다 너때문이야. "
" ... "
" 네가 그 때 소개팅 가라고만 안했어도, 바람만 안 넣었어도. "
" ... "
" 그래서 너 겁나 미운데. 미워할 수가 없어. 그게 제일 빡쳐 "
" 우리 여주 많이 취했네. "
" ...그 눈 진짜 어떻게 할 수 없냐. 진짜 멜로눈깔...짜증나아 "
투정어린 여주의 말에 호석이 푸스스 웃음이 터졌다. 얘 이렇게 귀여워서 어쩌지, 호석은 작게 혼잣말하며 가까이 붙어있는 여주의 이마를 쓸었다.
아, 졸려. 여주는 그 손길을 신경쓰지도 않는 듯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곤 호석에게 온 몸을 쏟았다. 취기가 돌면 잠이 드는 여주였기에 이 정도 주사는 익숙했다.
호석은 다른 손으로 무게중심이 쏟아진 여주의 허리를 단단하게 잡고 조심스럽게 제 품에 있는 그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주의 반듯하고 동그란 이마가 예뻤다. 불현듯 입맞춤을 하고 싶을만큼.
" ... "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는 여주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호석은 홀린 듯 가까이 다가갔다. 그 때 여주가 게슴츠레 눈을 반쯤 떴다. 들켰나, 호석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왔다. 하지만 여주는 전혀 모르는 듯 눈을 꿈뻑꿈뻑 뜨더니 나른하게 말했다.
" 호석아. "
" ...응. "
" 호석아. "
" 응. "
" 호석아. "
여주가 반복해서 호석을 불렀다. 호석은 가슴을 추스리며 부지런히 그 부름에 답했다.
제 이름을 부르는 여주의 눈동자에선 아주 아득해진 그 날의 아이가 겹쳐보였다. 너도 그 날의 나를 찾고 있을까. 호석은 묻고 싶었다.
여주는 한참을 호석을 부르더니, 다시 눈을 감고 호석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 품에서 말했다.
" ...왠지 너 이름 부를 때 이상한 거 알아? "
" 뭐가? "
" 너는 여기있는데. "
" ... "
" 자꾸 없어질 것만 같고 그래. "
그 말을 끝으로 여주는 다시 새근새근 호석의 품에서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가슴으로 스며드는 여주의 숨이 호석은 벅찼다.
나 여기있어. 다신 어디 안가. 들리지 않을 대답을 돌려주며 여주를 세게 안았다. 언젠가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호석은 그 말들을 제 가슴속에 잘 여투어두었다.
오랜 시간을 돌아 겨우 찾아온 기회였다.
윤기도 여주도 서로에게 미련을 떨치지 못한 사실을 알았지만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그게 설령 윤기와 친구사이로 다신 돌아갈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해도 괜찮았다. 더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호석은 더이상 제 사랑 앞에서 이타적일 수 없었다.
지나치게 헌신적이고 이타적이어야만 했던 제 껍데기같은 삶과는 달리,
사랑은 지독하게 이기적이어야만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에.
***
갈수록 풀어야 하는 이야기가 산더미군요...
윤기 과거도 호서기 과거도 희주얘기도 나와야 하는데ㅋㅋㅋ...
잠깐 스포하자면 오늘 마지막 파트는 호서기 과거에 대한 복선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찡긋)
또 금방 찾아올게요. 설연휴 재미있게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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