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지만 괜찮아
w.1억
첫날은 꽤 힘들었다. 알아야 할 것들이 왜 이렇게나 많은지. 그래도 잘 챙겨주셔서 다행이기는 한데.
오늘 하루는 일보다는 이재욱이 계속 신경쓰였다.
왜 하필이면 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마주치는 걸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회사야.
마주치기 싫었고, 그 애가 불편하다.
회사가 끝나고 회사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어섰다. 앉을 곳이라곤 별로 없는 작은 카페는 분위기가 참 좋았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어..'하고 나를 보는 카페 사장은 꽤 젊었다.
사장은 내가 들어오자, 블라인드를 쳤고.. 나는 당황해서는 나를 지나쳐 가는 사장에게 말한다.
"문 닫았어요?.."
"그러려고 했는데요. 그쪽 까지만 받을게요."
"…아, 죄송해요. 제가 하필 이 때 들어와서."
"괜찮아요."
"…어."
어떤 거 주문하지..한참 서서 메뉴를 보고 있으면, 키가 한참 큰 남자는 나를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웃는 게 아니라 웃는상인 건가?
근데 키는 이재욱만하네..
"…음 잠시만요."
"천천히 주문하세요. 저 바빠서 일찍 닫는 거 아닌데."
"아, 그래요? 그럼.. 잠깐.."
"ㅎㅎ네."
"핫초코 하나 주세요!.."
결제를 하고 나서 서서 카페 구경을 하는데. 참 심플하다 생각했다. 아, 나는 이런 거 좋더라.
되게 잘 꾸며놨다..심플하게.
핫초코를 받고 나가려는데 하필이면 또 비가 온다.
이재욱과 마지막일 때와 같이. 재수없게 오랜만에 이재욱과 마주친 날에도 비가 온다.
버스 정류장까지 조금만 뛰면 되려나.. 싶어서 한참 서있다가 나가려고 하니, 사장이 내게 다가오며 말한다.
"우산꽂이에 우산 있는 거 쓰고 가세요."
"…네? 그래도 돼요?"
"다음에 갖두 주시면 되죠."
"감사합니다."
갑자기 심장이 콕콕 아파와서 심장부근에 손을 올린 채로 살짝 인상을 쓰자, 남자가 내게 묻는다.
"왜 그래요..?"
그리는 카페에 앉아있고, 효섭은 미지근한 물이 담긴 컵을 그리에게 건네주며 맞은편에 앉는다.
그리가 가방에서 약을 꺼내 약을 먹고선 효섭과 눈이 마주치자 어설프게 웃었고, 효섭은 그런 그리를 보고 웃는다.
"웃는 거 되게 예뻐요."
"…아니에요!"
"남자친구 있어요?"
"네?"
"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오해는...ㅎ.."
"…아픈데 어떻게 연애를 하겠어요."
"아픈 거랑, 연애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누구를 사랑할 자격도 없는 것 같고."
"그리씨는 사랑 받을 자격도 있고, 사랑할 자격도 있는데요."
"왜 그렇게 생각 해요?"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사랑에 자격이 있어야 되나.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 하는 거지."
"전 아프잖아요."
"아픈 게 왜요? 난 오히려 아프다니까 더 신경 쓰이고 마음이 가는데."
그리는 사랑의 대해 처음으로 들어보는 따듯한 말에 감동을 받은 듯 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살풋 웃으며 고개 숙여 핫초코를 마시자, 효섭은 그런 그리를 바라보다 아직도 구슬구슬 내리는 비를 본다.
아픈 사람은 티가 안 나는구나. 전혀 몰랐네.
"근데요. 아픈 거 사람들한테 말 안 해요. 오래 알고 지내야 할 사람들한텐 더 그러구요. 그게 더 편하더라구요."
"이렇게 선을 그어버리시네요.. 뭐 저는 오래 알고 지낼 사람이 아니라서 알려준 거예요? 그냥 스쳐 지나갈 인연이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닌데.."
"진짜 그리씨 비밀 알게 돼서 나름 친해진 것 같아서 좋았는데. 막 선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닌.."
"그럼 오래 알고 지낼 거예요?"
"…네."
"대답이 좀 느렸는데."
"네!"
"약속해요. 매일 매일 카페 오는 걸로."
"…네."
"약속."
둘은 손가락을 걸었고, 효섭은 항상 웃는 얼굴이다. 효섭이 웃어보이자, 그리도 어색하게 따라 웃어준다.
"서주임님."
"어.. 자는 거 아니고. 생각하는 거야."
"…이 프로그램 오류 뜬 것 같아서요."
"오류?"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술냄새 풍기는 서주임은 오류 떴다는 내 말에 느긋느긋하게 의자를 끌고 내 옆으로 붙더니 확인을 해준다.
"야씨 키보드 아무거나 누르지 마. 잘못하면 이거 다 날라간다."
"…네."
"근데 넌 햇빛도 안 보고 사냐?"
"네?"
"피부가 왜 이래? 하얗다 못해 투명하다. 야.."
"하하.."
햇빛 잘 안 보기는 하지.. 나갈 일도 없고.. 어제 알려준대로 이번에 있다는 작은 프로젝트를 천천히 작업하는데.
괜히 힐끔 서주임을 보게 됐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서주임이 멀뚱히 나를 본다.
서주임을 빤히 한참 바라보자, 서주임이 뻘쭘한지 '왜?'하는데..
"…서주임님이 저보다 더 하얀 것 같은데요."
"…야잇.. 아니야. 무슨 얘는.."
"……."
"빨리 작업이나 해."
"네."
점심시간까지 쉬지도 않고, 옆에서 알려주는대로 다 했더니 너무 힘이 들었다. 눈도 아프고..
또 어제 멤버 그대로 밥을 먹는데. 혹시라도 이재욱을 마주칠까 눈치를 보았다. 마주치기 싫다.
"근데 그리 진짜 너무 내 스타일이야. 우리 회사에 또라이 많으니까 남자 조심해."
"…또라이요?"
"막 대뜸 사귀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회식 때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
"…아!"
"오구 기여워엉엉."
"작년에는 회식 때 옆테이블 자리 잡고 앉아서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고서.. 술취한 여자분 데려간 남자도 있었어."
"…허어, 정말요?"
"응. 그냥 우리 옆에만 있으면 돼. 우리 다 취해서 뻗어도 소희가 너 챙겨줄 걸?"
"저요? 어! 그래 내가 있잖아. 그리 베이비!"
"…ㅎㅎ감사합니다."
"근데 우리 정대리님이 최고야. 취해도 멀쩡하거든 무서운 분이셔.. 취해도 우리 챙겨준다고 정신 바짝 차리고 그런다?"
"회식 때 한소희랑 같이 앉지 마라? 쟤 개 될 때까지 마시게 한다."
분위기는 너무 좋다. 항상 나만 보면 불쌍하게 보는 사람들 밖에 없었는데.
너무 너무 소소한 일상 같아서 그게 너무 좋았다.
낯을 가리는 나에게도 계속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에게 너무 고마울 뿐이다.
앞에선 또 티격태격 싸우는 서주임과 한주임을 보며 나는 내 옆에 앉아있는 정대리에게 물었다.
"되게 얼굴만 보면 싸우시는 것 같아요."
"응? 아, 친한 거지. 둘이 나이도 한살밖에 차이 안 나기도 하고.."
"아, 나이가.."
"서주임이 스물여덟, 한주임이 스물일곱."
"…그럼 정대리님은.."
"나? 나이 좀 있어."
"……."
"서른셋."
"네??"
"너무 크게 놀라는 거 아니야?"
"전혀 안 그래 보이셔서."
"내가 좀 동안이야."
"아.."
생각보다 되게 뻔뻔하시네.. 근데 뭐 맞는 얘기니까.
"아까 부장님이 오늘 회식이라던데. 들었어? 아까 너 없었지?"
"…어,네!"
"부장님이 인턴도 들어왔겠다~ 회식하자~ 하셨거든."
"아,네."
"근데 주변에 살아?"
"네. 버스타고 두정거장 정도!"
"되게 가깝네.."
아직도 투닥거리는 주임님들을 보며 살짝- 웃으면 정대리가 날 따라 그 둘을 보더니 곧 내게 말한다.
"점점 익숙해질 걸?"
익숙해지고 싶었다. 평범한 것에 대해 말이다.
밥을 다 먹고나서 카페에 가자는 말에 나는 약을 먹어야해서 바로 회사로 간다고 했다.
그런 나를 붙잡은 건 한주임님이었지만 모두 알겠다며 보내주었다.
회사에 들어서서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을까.
익숙한 냄새가 났다. 항상 너에게 향수처럼 나던 사람 냄새.
그치만 나는 여유롭게 너와 함께 엘레베이터를 기다리고, 같이 탈 생각이 없었다.
그냥 계단으로 가야겠단 생각에 한발자국 걸으면, 네가 말한다.
"네가 타고 가. 내가 계단으로 갈테니까."
너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고갤 돌려 너를 잠깐 보았을 때, 너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는 내가 아닌 바닥을 보고 있었고.. 곧 발걸음을 옮겨 내게서 멀어진다.
"……."
이젠 내가 아닌, 네가 도망을 쳤다.
너의 목소리는 더 좋아졌고, 더 잘생겨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그 때의 껄끄러움을 잊지 못 하고, 상황에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네가 너무 밉고, 불편하다.
하필이면 회식 자리에 이재욱이 있는 팀도 같이 있었다. 워낙 두 팀이서 프로젝트를 같이 맡기 때문에 자주 회식을 한다고 했다.
"어? 뭐야 원래 재욱이가 찐찐 막내였는데. 진짜 막내 들어왔네?"
"……."
이재욱이 나를 한 번 보고선 다른 곳을 보았고, 그 옆에 있는 이도현이란 사람은 이재욱이랑 꽤 친한 듯 계속 얘기를 나눈다.
우리 부장님이 자기소개 그런 건 하지 말라고 했고.
내가 술을 꺾어서 3번이나 마셨더니 내 옆에 있는 서주임이 말한다.
"진짜 못 마시나보네.. 무슨 세 번을 꺾어마시냐? 이거 아~까 채워준 건데."
"어.. 제가 많이 마실 수가 없어서요."
"어디 아프냐? 너도 어디 아프면 정대리님 처럼 물 채워서 마셔."
"……"
맞은편에 앉은 정대리를 보았다. 옆에 팀중에 정대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자꾸만 그 여직원분이 말을 걸었고, 정대리님이 간단하게 대답만 해준다.
나는 일부러 고갤 돌리지 않았다. 이재욱이랑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먹기싫으면 티 안 나게 찔끔 찔끔 먹어-"
한주임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고, 나는 속으로 착한분이라 생각하며 '네'하고 대답을 했다.
"아, 아니에요. 정말 제가 다음에 시간 내서.. 선물 사줄게요."
"됐어. 어떻게 애가 놀러갔으면 선물을 줘야지.. 나는 항상 너 챙겨주는데."
너는 행복해보였다. 나와는 다르게.
"난 집사람이 빨리 오라고 불러서~ 먼저 간다잉? 적당히 마시다 내일 회사에서 보자."
우리 부장은 장난끼 넘치는 친근한 분이다. 우리에게 간다하고 손을 설렁 설렁 흔들면 모두가 인사를 한다.
그럼 또 설렁설렁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가 담배를 입에 문다.
"…아, 정말요?"
네가 밉고싶었다. 근데 계속 네가 신경이 쓰였다.
조금 밉지만, 그래도 잘 지내서 다행이란 생각은 들었다. 난 악역은 안 되나보다.
"근데요 정대리님은 술 안 좋아하세요?"
"술? 좋아하지!"
"…괴로우시겠다."
"ㅋㅋㅋㅎㅎ 그래도 못 마시는 거면 어쩔 수 없지. 다 나으면 왕창 마실 거야. 마시고 죽어야지."
"…어디 다치셨는데요?"
"얼마 전에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손목에 금갔었거든. 완전 부었어 ㅎㅎ..밴드만 차도 된다고 해서. 티 하나도 안 나지?"
"네.. 가끔은 푸세요?"
"응."
"어디요?"
정대리가 아픈 손을 보여준다. 그럼 나는 그 손을 한참 바라보며 아.. 하고 인상을 썼다.
"근데 넌 술을 아예 안 마셔본 거야?"
"아, 아니요. 부모님이랑.. 그리고 대학 다닐 때.. 딱 두 번이요! 뭐 한잔밖에 안 마시긴 했지만."
"술을 안 좋아하기도 하고.. 잘 안 받나?"
"음..,네."
"하긴 뭐 술 좋아해서 좋을 거 없지. 소희를 봐. 맨날 회사 끝나면 술 콜? 콜? 막 이런다니까."
"근데 잘 안마셔주잖아요. 정대리님이. 무슨 백 번을 졸라도 다 싫다고 해?"
"매일 마시자 하는데 어떡해."
"그럼 마셔야죠!"
"너 그러다 간 다 상한다."
"이미 다 상했을 듯 해요. 하.. 우리 그리 베이비도 술 못 마시니까.. 난 계속 서주임이랑 마셔야 되네요.
아니다 아니다! 우리 베이비 술 늘어야지!"
술 늘어야 한다며 박수를 치는 한주임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같이 박수를 쳤다.
나도 그러고 싶네요.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셔서 취하고 난리가 났고..
옆팀에 과장이란 사람은 신나서 막 떠들다가 곧 담배를 피러 나가서 없는 서주임의 빈자리에 앉아서 내게 술잔을 들이민다.
"짠."
취한 게 보였다. 딸꾹질까지 하는 과장의 말에 나는 급히 소주잔을 들고 잔을 부딪혔고.. 꿀꺽- 한모금 마시니 과장이.
"다 마셔야지이!"
하며 큰 소리를 쳤다. 정색을 하다가도 또 방긋- 웃는 과장이 조금은 무서웠다. 그 말에 나는 당장 벌컥벌컥.. 다 마셨고.
또 잔을 채워준 과장이 '짠'하고 외친다. 많이 마시면 안 되는데..
마시지 않고 가만히 과장을 바라보면, 과장이 나를 한참 바라보다 말한다.
"인턴이이~ 과장이 주는데! 받아먹어야지! 왜 안 마시고 쳐다보고이찌. 나는 여자라고 안 봐주능데~~"
"또 시작이구만 저 아저씨."
"저.. 신과장님.. 인턴이 아까 체했었거든요. 그래서 술을 ㅁ.."
"과장님 저랑..하시죠...!"
이재욱의 말에 아 그르까? 하고 바로 이재욱 옆으로 향하는 과장은 단순했다.
근데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이제와서 나를 챙겨주는 걸까.
술을 다 마신 분위기였고.. 정신도 없고 술을 마시니 숨도 벅차서 가게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길고양이를 만지고 있는데.
누군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뒤돌아 확인해보면 이재욱이었다.
담배를 주머니 안에서 꺼내들다 말고 나를 보자마자 바로 넣은 너는 또 내 눈을 피했다.
난 그럼 너를 신경 쓰지 않고.. 고양이를 만졌고, 곧 너는 목소리를 내었다.
"잘 지냈냐."
잘 지냈냐는 너의 말에 제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궁금해졌다.
"이번에는 누가 챙겨달라고 했는데."
"뭐?"
"누가 챙겨달라고 해서 챙겨주는 거 아니었어?"
"…그런 거 아냐."
"…그럼 왜."
일어나서 너를 보았다. 여전히 너는 나보다 훨씬 키가 컸고. 너는 나를 내려다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면 당장 해봐. 나는 너의 목소리가 아닌 , 대답이 듣고 싶었다.
"나 때문에 아파서 입원하고, 전학 간 거냐."
대답을 해야 되는데 뭐라 대답을 해야 되는지 고민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너를 올려다보면, 너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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컹..스..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