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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젠장! 나 오토바이 걸렸어! 아 그래서 키 압수당했어."
"내가 너 그럴줄 알았다 새끼야. 니네 엄마 눈치가 어디 그냥 눈치냐."
"그거 사느라 진짜 3년을 꼬박 개거지처럼 살았는데...."
운동장 한 켠에서 몸을 푸는 도중 종인은 그렇게 말하고 온갖 짜증이란 짜증은 다 부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찬열은 그런 종인을 한 두번 보는것도 아니였기에 그저 지겹다는 표정을 지은채 다리를 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찬열은 백현이란 아이가 생각났다.
얼마 전 미술부 선생님 심부름으로 미술부에 들렀던 찬열의 눈을 사로잡은것이 바로 변백현이였다.
생긴 것 만큼이나 단정하게 앉아서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백현의 모습은 그날 처음 봤는데도 계속 잊혀지지가 않았다.
"야, 김종인."
"왜 이새끼야."
"너 혹시 미술부에 변백현이라는애 아냐?"
"아. 그 벙어리? 걔가 왜?"
아무생각없이 벙어리라 내뱉은 저의 말에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놀란 표정을 지은채 바라보는 찬열을 종인은 그것도 몰랐냐는듯 흘겼다.
"걔 말 못해?"
"응. 걔 전학오고나서 엄청 유명했는데 그것때문에."
"왜? 선천적인거냐 후천적인거냐?"
"아 씨발, 내가 걔 친구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별걸 다 묻고앉았네. 궁금하면 니가 가서 직접 물어봐라."
어느샌가 제 옆에 다가와서 귀찮을 정도로 물어대는 찬열을 종인은 손사레를 치며 떨궈냈다.
'수업시간에 쳐 자지나말고 관심 좀 가져라'라는 핀잔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않았다.
그래서 아까 그렇게 물었는데도 대답하지 않은거구나.
찬열은 그제서야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목소리가 없다니.목소리가 있다면 분명 얼굴만큼이나 예쁘고 단정할텐데.
저 주변에서 그런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찬열은 조금 신기하기도 했고 호기심도 생겼다.
그리고 백현이 어떤 아이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 아들. 밥 한톨 남기지 말고 싹싹 비워야해!! ]
백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닫았다.
벌써 19살이나 먹은 아들한테 하는 소리가 고작 밥 남기지말고 다 먹어-라니.다섯살난 유치원생도 아니고.
이제 그만 엄마의 저런 도가 지나친 걱정은 좀 졸업했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사실 오늘도 백현은 점심을 걸렀다.
혼자먹는 점심은 맛이 없었다. 전학오고 난 후 한번도 급식실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는 백현이였다.
갑자기 경수가 보고싶어졌다. 백현은 괜스레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의 벤치는 조금 한산했다. 봄이라 그런지 제법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백현이 벤치 뒤로 등을 따악 붙여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을때 무언가가 슥 하고 튀어나와 흠칫 놀랐다.
백현이 놀란 가슴을 채 쓸어내기도 전에 봄바람같은 온화한 목소리가 백현의 귓가에 와닿았다.
"이쁜아, 여기서 혼자 뭐해!"
이틀전 계단에서 보았던 그 학생이였다. 분명 박찬열이라는 이름을 가졌던것 같았다.
개구지게 웃는 모습이 눈이 부셨다. 찬열의 뒤로 반사되는 햇빛때문인지 아닌건지 백현은 구분할 수 없었지만,
그저 아주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한줄기 빛. 왜 찬열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를 향해 한치의 망설임없이 바로 마주해오는 빛. 그건 분명 어떠한 섬광같은것이였다.
찬열은 어느새 백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운동을 하고 온 건지 운동복차림에 이미 땀범벅이였다.
"아~ 오늘 연습경기 졌어. 젠장. 다 이긴 게임이였는데."
그렇게 푸념을 늘어뜨리며 제 무릎을 아쉬운듯 탁 하고 소리나게 내리치는 찬열을 백현은 말끔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제가 말 못하는 벙어리인지 알고도 저러는걸까. 분명 모르는게 틀림 없었다.
알면 이렇게 말도 못하는 벙어리한테 살갑게 굴어 줄 리가 없었다.
이틀 전에도 미술부냐 아니냐 대뜸 물어오던 찬열이였으니. 만약 저가 벙어리인걸 알고 나면
'아,재수없어'하고 뭐 이런게 다 있냐는 듯한 그 냉정한 표정을 보게 될 것이였다.
한 두번이 아니였다. 다들 그랬다. 다들 벙어리인것을 알기 전과 후의 저를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
백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찬열은 놀란 눈을 하더니 그런 백현의 손목을 낚아채 잡아끌었다.
"야, 뻘쭘하게 사람 오자마자 그렇게 가버리기냐."
"..................."
백현은 찬열에게 꼭 붙들린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백현의 움직임에 따라 찬열의 손아귀힘이 조금씩 풀어지다 이내 떨어져나갔다.
방금까지 찬열이 잡고있던 손목 언저리는 찬열의 온기가 사라지자 마자 금새 서늘해졌다.
"오늘 점심이 뭐였지. 난 점심 구경도 못했다. 배고파 죽겠네"
"................."
"근데 나한텐 이게 있지."
그렇게 말하며 찬열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꺼내어들었다. 초코바였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껍질을 벗기더니 이내 반을 뚝 하고 잘라내었다.
초코바가 갈라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반 부서진 초코바를 찬열이 나란히 재 보더니 작은 쪽을 백현에게 건넸다.
"먹어. 넌 나보다 작으니까 내가 큰 거."
"...................."
찬열이 내민 초코바를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백현이 한참동안 고민하는 사이에
찬열은 제 손만 내려다보고 있는 백현의 얼굴을 스윽 훝더니 피식 웃었다.
"야, 삐졌냐? 알았어,알았어. 그럼 니가 큰 거 먹어."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큰 쪽을 백현의 앞으로 불쑥 들이미는 찬열의 모습에 백현은 그만 슬쩍 웃음이 났다.
조금 발갛게 상기된 백현의 볼과 예쁘게 접히는 반달같은 눈이 찬열의 마음에 박혔다.
찬열은 한참이나 넋을 놓고 그런 백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찬열의 손에 들린 초코바를 건네받은 백현이 한입 베어물며 그런 찬열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너는 안 먹어?' 라고 묻고있는 듯 해 찬열은 재빨리 초코바를 한번에 입 안으로 털어넣었다.
오늘따라 초코바가 더욱 달았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으니까 찬열은 어색해서 죽을 지경이였다.
뒷정리가 끝난 후 교실로 돌아가는 중에 혼자 앉아있는 백현을 발견하자마자,
뭔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의 다리는 이미 그아이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단순하게 가서 아는체 하고 말을 걸긴 걸었는데 또 백현이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아 찬열은 꽤 고심하고 있는 중이였다.
제 키보다 한뼘은 더 작은 백현을 슬쩍 내려다 보니 입술을 오물거리며 잘도 먹고 있었다.
먹지도 않고 금새 일어나 가버릴줄 알았는데 의외로 백현은 찬열의 친절에 호응하고 있었다.
찬열이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그 때 찬열과 백현이 앉아있는 벤치앞을 종인이 요란스레 뛰어가다 찬열을 발견하곤 불렀다.
"얌마, 너 거기서 뭐하냐! 빨리와, 코치님 지금 엄청 빡돌았어. 집합하래!"
종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벌써 저만치 뛰어가고 있는 중이였고
찬열은 종인의 말을 듣자마자 '아이씨~' 하며 인상을 있는대로 찡그렸다.
분명 오늘 옆학교와 연습시합에 져서 그런게 분명했다.
또 코치의 그 악명높은 기합을 받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축구고 뭐고 다 귀찮아지는 찬열이였다.
찬열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가야겠다. 운동장 100바퀴 돌아서 나 쓰러졌단 소식 듣거든, 병문안은 와 줘라."
찬열은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아까 종인이 뛰어갔던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백현은 한참이나 찬열이 뛰어간 곳을 바라보았다. 참 신기한녀석이다.
저는 대답도 안하는데 찬열은 혼자서 말도 잘하고 장난도 잘 친다.
이틀전에 처음 본 사이였지만 마치 오래 알고지낸 친구처럼 친근한 찬열에게 백현은 자꾸만 눈이 갔다.
백현은 제 손에 들린 찬열이 건네고 간 초코바를 내려다 보았다.
아직 고맙단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는걸 백현은 그제서야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