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
한번의 실수로 생겨버린 아이, 그런 아이를 싫어하는 엄마.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온 나는 항상 외로웠다. 학교는 다니는 것만 못했고 나는 늘상 외로웠다. 헤어졌던 아빠는 연락이 없는데 엄마는 갑자기 나에게 새아빠와 오빠를 안겨주었다. "이 문을 열면 아빠와 오빠가 기다리고 있어. 인사 잘하고.알았지?" "응.엄마"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어 나에게 부담감만 심어주었다. 6자리 비밀번호가 눌러지고 이때까지 내가 살아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하게 넓은 공간이 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인자해보이는 나이든 남자 한명과 내 또래 쯤으로 생각되는 남자한명이 나란히 우리 앞에 섰다. "네가 00이니?이쁘게 생겼네. 오늘부터 우리 가족이 되었으니까 잘 부탁한다." 엄마가 내 앞에 서있는 이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지, 재력을 보고 재혼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불편했다. 외로움에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이런 단란한 네식구는 신물이 났다. "이 쪽은 네 오빠가 될 레이." 레이는 아저씨의 말이 끝나자 내 눈을 쳐다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나도 시선을 레이의 눈으로 맞추었다. 짧은 순간 이었지만 그 눈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나를 빤히 쳐다보고 아무말도 않자 아저씨는 민망한듯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는 우리를 들어오라하셨다. 넓은 집에서 살려는 생각을 하니 역설적으로 목이 죄여왔다. 단란한 네식구, 넓은 집. 나에겐 너무 적응되지 않았던 것이었고 적응하고 싶지도 않다. 외로움에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나에게는 밥이라고는 해주지 않는 엄마가 아저씨와 레이 앞에서 잘 보이고 싶었는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요리를 했다. 참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아저씨는 참 친절한 분이셨다. 요리보조를 자처하고는 도마위 양파를 탁.탁.탁. 썰고계셨다. 그 덕에 넓은 소파에는 레이와 나만 남게 되었다. 부엌에선 뭐가 그리 즐거우신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기가막혔다. 그래서 나도모르게 엄마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었나 보다. 행복해보이는 엄마에게 줬던 시선을 거두어 옆에 앉아있는 레이에게로 놓았다. 언제부터 나를 쳐다보았는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부드러운 눈빛 속에 묘한 눈빛이 더해진 느낌이었다. 레이와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나도모르게 쳐다보게 되었다. 그 눈을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다 알고있는 듯한 소름돋는 느낌과 함께 속에서 일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00아 레이야 밥 다됬으니까 얼른 와서 먹으렴~" 낯선 엄마의 살가운 목소리였다.
이런 생활도 잠시 엄마와 아저씨는 일 때문에 거의 중국에서 사셨다.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시고 아저씨는 가끔씩 나에게 메일을 보내왔다. 이를테면, 오빠와는 많이 친해졌니? 한국은 장마라던데. 감기걸리지 않게 몸조심 잘하렴. 형식적이게 보이겠지만 아저씨는 나에게 진심을 다해서 메일을 보낸 것 같았다. 당연히 엄마의 연락은 전혀 없었다. 엄마와 아저씨가 집에 없을 때면 넓은 집이 더 휑했다. 레이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말 할 이유도 없었고 기회도 없었다. 학교도 다른 시간에 가고 하교도 그렇고. 매일 밤늦게 들어오는 레이때문에 더 그랬다. 그렇게 안 볼 때는 모르다가 주말에 가끔씩 마주치기라도 하면 잊고 있었던 그 느낌이 다시 올라왔다. 속에서 무언가 일렁이는 이 느낌이. 낯선 남자라서 익숙치 않아 그런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내 마음을 깨닫기 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생일이 되었다. 열두시에 딱 맞추어 아저씨에게서 메일이 왔다. 내용은 평범했다. 생일축하한다. 한국에 돌아가면 멋진 선물을 해줄게.라는 식의. 핸드폰은 잠잠했다. 내 핸드폰에 저장되 있는 사람이라고는 엄마,아저씨,선생님... 당연했다. 생일이라고 뭐 특별한 건 없었다. 이 날짜에 내가 태어났다. 단지 그것 뿐이다. 한 두번 겪는 일도 아니고 18년을 그래왔다. 너무 익숙해져서, 더 슬펐다. 나는 정말 아무에게도 사랑받고 있지 않구나. 라는게 굳이 또 확인되었다. 마음 아프게. 똑똑.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집에 나 말고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서 도둑이라도 들어 온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무슨일이지? 의문을 품고 거실로 향했다. 탁자위에 새하얀 생크림 케잌이 올려져 있었다. 생일 초도 딱 맞았다. 불을 붙이고 있는 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또. 또 속에서 무언가 일렁거렸다. 아니 '무언가' 가 아니지. 레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일렁거렸다. 내 마음 속 바다는 평형을 찾지 못하고 미친듯이 파도 쳤다. 이리저리 내 마음 곳곳에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나를 아프게 했다. "이리와." 레이의 옆에 앉았다. 어둠속에서 빛나는 촛불을 한번, 옆에 앉아 있는 레이의 눈을 한번.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레이는 '사랑 하는' 이라는 단어의 앞,뒤로 긴 텀을 두어 노래를 불렀다. "사랑...하는 00의. 생일 축하 합니다." 레이가 노래를 불러주자 눈물이 눈에 가득 고였다. 이렇게 축하 받은 적이. 언제 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았다. 생일이라고 특별한 것 하나 없었었는데. 정말 울기 싫었는데. 철썩대던 파도가 어느샌가 내 눈까지 올라와 버려서. 할 수 없이...
우는 나의 곁으로 다가와 레이는 등을 토닥.토닥.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쓸어주고 토닥거려주었다. 이게 위로받는 느낌이구나. 이게 축하받는 느낌이구나. 언제 그랬는지 모르지만 다시 상기시켜졌다. 위로와 축하가.
어느정도 진정이 되자 레이는 나를 또 쳐다보았다. "레...아니 오빠..." "응.00아" "고마워....요.." 말을 해 본적이 없어서 어떻게 말해야 될지를 몰랐다. 오빠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탓일까 레이 앞에서 레이라고 말 할 뻔 했다. 반말을 해야할지 존댓말을 해야할지 쓸데없는 모든 것에 신경이쓰였다. 남매사이에 존댓말을 쓰는 경우가 있을리 없잖아. 레이는 눈을 살짝 휘어 웃어보였다. 바다가 또 파도쳤다. 아까보다 더 높은 파도가 쳤다. 철썩.철썩. 레이의 눈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궁금해. 무슨 생각으로 나를 보는지 궁금해. 왜 나를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지 궁금해. 계속 쳐다보다가는 내 속마음을 모두 말할 것 같아서 앞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갑자기, 볼에 어떤 마찰이 일어났다. 부드럽고 촉촉했다. 내 볼에 도장찍듯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아, 미안" 흐트러짐 없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과를 했다. 그리고 들어가 버렸다.
파도가. 파도가.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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