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나의 여름에게
w.뷔타운
01
"시발."
헛웃음과 함께 뱉어진 거친 욕설에 담벼락에 기대 서 있던 여주의 시선이 돌아간다. 검은색 반팔 티 위로 풀어 헤쳐진 반팔 셔츠가 옅은 바람에 살짝 휘날렸다. 짜증과 무표정 그 어디쯤의 얼굴로 대문을 쳐다보던 태형도 느껴지는 노골적인 눈길에 여주를 한 번 돌아본다.
뭘 봐. 태형의 눈빛은 꼭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바람 맞았나."
"뭐?"
"혼잣말이었는데. 여행 온 사람치고는 기분이 더러워 보이길래, 같이 오기로 한 여친한테 바람이라도 맞았나해서."
어깨를 으쓱이며 별 일 아니라는 듯 무례한 말을 서슴없이 뱉는 여주의 행동에 그렇지 않아도 매서운 태형의 눈이 더욱 차갑게 굳어지는가 싶다가도 이내 받아쳐주기 조차 싫은 얼굴로 대문을 열고 들어가버린다.
"김여주, 안들어가고 여기서 뭐 해."
"너 기다렸잖아."
"먼저 들어가있지 새삼스럽게 무슨. 빨리 들어와, 더운데 왜 그러고 있었어."
다정한 지민의 손길이 여주를 집 안으로 이끌자 태형이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옆 집에 머물렀던 눈길이 그제서야 거둬진다. 어째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함부로 뱉었는지 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옆에서 봐도 조각같은 외모를 정면으로 마주한다면 어떨까, 눈이라도 마주보려고 그랬었나.
들어오자마자 지민이 사온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입 안 가득 얼음을 채운 채 지민의 무릎 위로 머리를 뉘인다.
"보충 수업 언제부터지?"
"오늘부터."
"오늘? …그걸 왜 이제 말해?"
"너 안간다며. 가려고?"
"그건 그냥 한 말이고, 당연히 가야지 바보야."
아래서 올려다보며 제 볼을 꼬집는 손길을 지민은 아무렇지 않게 떼어놓고는 어깨를 으쓱인다. 내일부터 가지 뭐.
지민의 마음 편한 소리에 허, 하고 헛웃음을 치는 여주의 입에서 이내 새로운 주제가 나온다. 실은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던.
"옆에 할머니 댁에 누가 왔더라. 봤어?"
"그래? 못봤는데, 왜?"
"그냥."
"그냥?"
"아니 그냥. 아까 너 기다리다가 봤거든. 우리 또래 같길래."
두 팔로 땅을 짚은 채 젖혀져 있던 지민의 몸이 바로 세워진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그렇다고."
여주를 내려보는 지민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 들어찼다. 본인의 일이 아니고서야 세상의 무엇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산지 오래되었다. 그런 김여주가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이를 굳이 지민에게 먼저 언급하는 일은 놀라운 일이었다. 옆 집과 맞닿아있는 창으로 시선이 자연스레 닿는다.
"나가자 박지민."
몸을 일으키는 여주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파에 걸쳐져 있던 바람막이를 들고 따라나서는 지민에 여주가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더워죽겠는데, 바람막이는 왜? 지민을 보며 신발을 신느라 휘청거리는 여주를 잡아주며 신발을 고르는 듯 한참을 신발장을 보던 지민이 파란색 컨버스를 꺼내들며 웃어보인다.
"바닷바람 춥다고 징징거릴거잖아 또."
지민을 가만히 보다가 따라서 웃는 얼굴이 어쩐지 짠해보인다. 박지민이랑 그만 놀아야겠다, 날 너무 잘 아네 이제. 장난처럼 웅얼거리고는 지민에게서 한 발 정도 앞서 걷는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관광의 섬 제주도에서 드물게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바다였다.
한적함은 고요함을 만들고 고요함은 외로움을 만들기 마련이었다. 외로움이 한 가득 차오를때면 여주는 이 곳을 찾았다. 한적한 이 곳에서 마음껏 외로워하다가 마음이 비워져야만 돌아설 수 있었다. 지독한 모순. 차오르는게 없는 마음이라 외로움이 자꾸만 빈 자리에 차올랐는데 외로움까지 다 비워내야만 살아낼 힘을 얻었다.
"보고싶어."
"…."
"너무 너무 보고싶어."
끝도 없이 넓은 바다, 그 속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을까.
어린 시절 유리병에 담아 띄워 보낸 편지, 수영을 하다 잃어버린 소중한 물건들, 바닷 속 깊이 소리쳐 떨쳐낸 누군가의 울분, 혹은
절대 떠올라서는 안되는 비밀들.
"지민아 나."
"응."
"나 오늘 이상한 사람 봤어,"
저녁이라 조금씩 불기 시작하는 바람에 지민이 말 없이 여주의 어깨 위로 바람막이를 걸쳐준다. 꽉 쥐어진 주먹이 여주의 마음 속 깊은 혼란과 긴장감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여주와 지민의 뒤로 점점 가까워져오는 발걸음 소리에 돌아 본 지민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진다. 아, 저 사람이구나. 다음 말을 듣지 않아도 그 얼굴을 본 순간 알 수 밖에 없었다. 아까 여주가 말했던 옆집 사람, 지금 여주가 말하려는 이상한 사람에 대해서.
"이상하게 겹쳐보여."
"그래, 그러네."
뜬금없는 지민의 동조에 여주도 몸을 돌려 지민을, 그리고 그를 차례로 본다.
차가운 눈매, 크고 오똑한 코, 일자로 굳어진 입, 까만 피부색과 유독 남자다운 턱선까지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남자가 자꾸 우리가 잃은 소중함과 겹쳐져 눈을 뗄 수가 없었던거였다.
"또 너냐."
여주를 슬쩍 보고는 무심하게 말을 뱉은 입에는 어느새 담배가 물린다.
변백현도 좋아했었지 독하고 숨 막히는 그것. 그렇게 안생겨서는 담배를 즐겨 했던 그와는 달리 불을 붙히는 모습까지도 어쩜 저렇게 잘 어울린다.
"사연 있어?"
"…"
"원래 바다라는 곳이 그렇잖아. 추억보다는 사연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거든 사실."
"없는데 그딴거."
"그럼 왜 우는데."
어느덧 짧아진 담배를 대충 지져버리고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태형이 여주를 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되게 닮았거든 너."
"그딴거 모르겠고, 그냥 아는 척 좀 해보고 싶은거면 그만 좀 하ㅈ…"
"근데 눈물 한 방울 안흘리고 우는거, 그게 제일 똑같다 마음 아프게."
지민이 여주의 팔을 가볍게 잡는다. 생각하는 것을 말로 뱉어야 직성이 풀리는 여주의 성격을 자제시키려 생긴 습관 같은 것이었다. 지민이 팔을 잡아오면 여주는 말을 멈췄다.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보고싶었어."
지민의 만류에도 말을 뱉은 것은 백현이 사라진 그 때 그 이후로 처음이었다.
어떻게 그래 내가. 어떻게 마음이 놓여져.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그 애를 겹쳐봐. 변백현이 나한테 어떤 존재였는데,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는 우리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미소를 지으며 저를 보던 그 얼굴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을 하던 입술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여주를 보는 시선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올곧은 진심만으로 가득 차 있었던 순간. 우리가 죽는다면 그때서야 너를 품에 가득 안고 사랑한다 말하겠다는 그 진심은 그가 죽어서야 여주에게 가 닿았다.
인생은 늘 그렇고, 사랑 역시도 타이밍 이었을 뿐이다. 그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에, 이 바다에 추억이 아닌 사연을 내게 떠맡긴 채 너는 가버렸고, 나는 그 마지막 순간도 아니 그 남은 껍데기 조차도 안아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너를 보내야 했다.
"나 여기 죽으러 왔어."
그 말을 하던 그의 눈빛은 분명 그에게서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태형을 본 이래 태형은 늘 그 때 그의 눈을 하고 위태롭게 서있었다. 그래서 한 순간도 김태형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고.
"그러니까 나한테 호기심, 관심 뭐 그딴 쓸데없는 어떤 감정도 가지려들지마."
*
여름이니까, !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