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이야기 : 여주가 밖에서 술 퍼먹음,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 안나는데 배켠 졸화냄..여주 쫄아서 일단 기는 중.
"병원 일 힘들어?"
내가 대답이 없자 백현이가 한숨을 쉬며 물어왔어. 나는 백현이한테 병원일이 힘들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 한 적은 사실 없어. 왜냐하면, 힘들어도 나보단 백현이가 더 힘든 게 당연하고 내가 힘들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선수쳐서 케어해주곤 했으니까. 이번에도 할 대답이 없어서 나는 입을 꾸욱 다물었어.
"힘들면..병원 관둬."
"..어?"
"일이랑 안 맞고, 몸 힘들고, 그래서 그러는 거면 일 관두라고."
백현이는 늘 내가 병원 일을 관두길 바래왔을거야. 물론 직접적으로 말 한 적은 없었지만 내가 병원에서 일한다는 사실 자체를 백현이는 아니꼬워했거든. 그래도 백현이는 내 일이니까 한 번도 터치한 적이 없었지.
"나 하나만 해도 힘들어."
"..."
"이제 너 감싸고 도는 거 못하겠으니까."
"..."
"자꾸 신경쓰이게 할 거면 일 그만해."
ㅡ
오늘 아침 외과병동은 분위기가 굉장히 쎄했어. 일단 항상 스테이션에 와서 기분 좋은 인사로 분위기를 띄우던 백현이가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나는 표정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잔뜩 굳은 얼굴로 모니터 앞을 떠나지 않았어. 그리고 눈치가 굉장히 빠른 보미는 이런 기운을 눈치채고 조용조용 행동하는 중이었어.
"오늘 변백현 선생이 무슨 일이 있나.."
그 때 들리는 수선생님의 목소리에 내가 뒤를 돌아봤어.
"김간, 집에 안 좋은 일 있어요?"
"..네?"
"인상 한 번 안 찌푸리는 선생이, 인턴을 혼내네."
"아.."
"저 인턴선생이 답답하긴 하죠. 이 때까지 웃어주던 변선생이 대단한거지."
백현이도 평소처럼 감정관리가 잘 안되는 모양이었어. 수선생님이 고개를 갸웃하며 왜그러지, 하시는 말씀에 괜히 내가 종인이에게 미안해지는 기분이었지. 근데 종인이는 정말 백현이를 만나서 천만다행이지 다른 레지던트 만났으면 벌써 작살났어. 내가 병원에서 인턴을 몇명이나 봤는데. 종인이정도면 벌써 차트가 날아가서 머리를 때리고 떨어졌어야 할 급이야.
"좋은 아침입니다."
그 때 스테이션에 백현이가 나타났고 형식적으로 건네는 인사에 스테이션에 있던 사람들이 인사를 받았어. 나는 여전히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고개를 들지도 않았지. 예전 같았으면 이제 나에게 차트를 건넬 차례인데,
"윤선생님, 오늘 차트요."
"아..? 아, 네!"
백현이는 나를 지나쳐 뒤에서 약품을 챙겨담던 보미에게 차트를 건넸어. 보미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지.
"늦어서 미안해요."
시간을 확인하니 평소보다 이십분 정도 늦었어. 그렇게 백현이는 쌩하니 스테이션을 나가버렸고 보미는 슬쩍슬쩍 내 눈치를 봤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었지, 사적인 일을 공적인 곳에 끌고 들어오는 일. 그치만 백번천번 내가 잘못한 일이기에 백현이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어.
"쌤, 산과에서 전화왔는데요?!"
그 때 보미가 전화를 내게 건넸고 웬 산과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어.
"산과?"
산과에서 전화 올 일이 없는데, 그것도 나한테 개인적으로. 간 일이 없으니..
어리둥절한 채로 나는 전화를 건네받았고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간호사의 말에 그제야 이유를 알아차렸어. 저번 주에 있었던 건강검진에서 내가 산부인과 진료만 받지 못했었거든.
"쌤, 왜요? 왜요?!"
보미는 뭔가 엄청난 소식을 듣고 싶은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나는 김빠지게 웃었어.
"저번 주 건강검진 누락된 거 받으러 오라고."
내 말에 보미가 아, 하고 살짝은 실망스러운 눈빛을 내보였어. 아침회진까지 잠깐 시간이 난 걸 틈타 나는 산부인과로 뛰어내려갔어. 건강검진 하나도 여유롭게 받지 못하는게 참 안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아직 진료가 시작되지 않은 건강검진 센터는 한산했고 내 이름을 접수한 후 대기하는 시간도 없이 난 검진실로 들어갔어.
"초음파 먼저 할게요."
아랫배에 닿는 차가운 젤이 굉장히 찝찝하다고 생각하며 초음파 화면을 힐끗힐끗 들여다봤어. 화면을 옆에서 봐서 그런지 제대로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그냥 누워버렸는데, 평소보다 아랫배를 더 꾹꾹 누르는 느낌에 뭔가 불안해져오기 시작했어. 자궁에 혹이라도 생긴건가, 안그래도 요즘 유독 피곤하고 몸이 축축 쳐지긴 했는데.
"간호사쌤-,"
내가 눈을 동글동글 굴리고 있을 즈음 담당 의사가 밖에 있는 간호사를 불렀고 내 긴장감은 극대화됐지.
"네, 쌤."
"이 분 차트 좀 가져다 주세요."
차트가 넘어가는 소리가 사락사락 들리고, 간호사는 나가고. 나는 재촉도 못하고 침만 꼴깍 삼키고 있는데..
"여기 간호사로 계신다면서요,"
의사가 바람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어. 긴장한 나는 네, 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지.
"여기 보니까, 남편분은 여기 레지던트로 있고."
백현이 이야기까지 나옴으로써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했지. 아, 이제 끝장이 났구나.
"거 참, 쉽지 않으셨을텐데."
여느 환자를 대하듯 환하게 웃으며 임신 소식을 알리려는 담당의사의 얼굴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어.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4주네요. 축하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그 검사실을 나왔는지, 의사가 내게 무슨 말을 건넸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어. 내 머리속은 온통 내 막막한 앞길 뿐이었어. 대부분 여자들은 임신사실을 알고 나서 기쁨의 눈물이라든지, 감격의 눈물이라든지, 그런 걸 흘리면서 좋아하던데 나는 이게 무슨 감정인지 짐작이 잘 가지 않았어. 일단 원치 않았던 임신은 확실했고 그래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도 확실했어.
그렇게 아무 정신없이 외과 병동으로 올라와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어. 삼분 정도 있으면 아침 회진이 시작될 거고, 아침부터 바쁘게 여기저기 뛰어다닌 백현이가 올라오겠지.
"김간, 좋은 아침입니다. 갈까요?"
백현이 담당 교수님의 목소리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어. 그 새 삼분이 넘게 흘렀구나. 뒤에서 차트에 시선을 박고 있는 백현이를 한 번 흘끗 쳐다본 후 나도 차트를 챙겨 교수님 뒤를 따라갔어.
"안미영 환자, 주치의?"
여느 때 처럼 주치의를 찾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어. 평소같았으면 빛의 속도로 튀어나와야 할 대답이 오늘은 어색한 침묵만 이어졌어.
"정신 안 차려, 안미영 환자 주치의 누구야?"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낮게 깔리는 교수님의 목소리에 내가 얼른 차트를 확인했어, 아, 백현이야.
백현이를 슬쩍 쳐다봤더니 애가 완전 넋이 나가서 멍하니 차트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 그러니까, 차트의 글씨를 읽는 게 아닌 그냥 시선만 차트에 둘 뿐 정신은 벌써 병원 밖에 있었지. 팔꿈치로 살짝 쳐보았지만 미동도 없었고 괜히 나만 애가 타 발을 동동 굴렀어.
결국 교수님이 침대 앞에 달린 카드를 확인하셨고 거기에 적힌 백현이 이름을 보시더니 백현이를 향해 조용히 말하셨어.
"변백현, 나가."
그 말도 백현이는 듣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는데 교수님이 내게 눈짓을 보내셔.
결국 내가 백현이 팔을 잡아 흔들었고 백현이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번쩍 들었어.
"네, 교수님."
"나가."
백현이는 상황판단을 한 듯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병실을 나갔어. 처음보는 백현이의 모습에 나 또한 눈을 도륵도륵 굴리며 교수님의 눈치를 봤어.
그렇게 분위기가 확 다운 되어버린 아침 회진이 끝나고 서둘러 백현이를 찾아 나섰어. 일단 스테이션에는 없었고,
"보미야, 백현이 여기 들렀어?"
"네, 아뇨? 회진 방금 끝난 거 아니에요?"
아예 스테이션에 들르지도 않았으면, 의국에 갔나..
빠르게 의국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보았지만 백현이는 없었고 종인이도 백현이를 보지 못했다고 했어.
"어디갔지, 종인아 너 정말 몰라?"
"..네, 잘 모르겠는데.."
"진짜?"
"..아,"
하지만 다그치는 내 목소리에 종인이의 표정은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어갔어. 언젠가 백현이가 한 번 말했던 게 기억났어. 종인이는 뭔가 잘못하거나 숨길 때면 얼굴에 확연하게 표가 난다고.
"급해서 그래, 어디야?"
"..옥상 올라가는 야외 계단에, 계실거예요.."
종인이의 말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옥상을 향해 다시 뛰었어. 숨이 턱까지 차오를 즈음 나는 야외계단으로 통하는 유리문을 벌컥 열었고 그 소리에 흰 가운을 입고 있는 백현이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어.
"백현아,"
백현이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그대로 정지 상태가 된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나는 백현이 손에 들린 담배와 그 앞에 서너개 즈음 떨어져있는 담배꽁초들을 보아야했지. 내가 백현이 손에 끼워진 담배를 향해 손을 뻗을 때까지 백현이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어.
"너, 내가 이렇게 하면."
그렇게 손을 뻗은 나는 그대로 백현이 손에서 담배를 빼내어 손에 움켜쥐었어.
"야!"
"그러면 그만 할래?"
"손, 손! 뭐하는 거야!"
불씨가 남아있어 손바닥이 뜨거워졌어. 백현이는 그제야 언성을 높이며 내 손을 억지로 쥐어펴냈어. 뭉그러진 담배가 바닥으로 톡 떨어졌고 빠르게 내 손바닥을 털어낸 백현이는 제 가운으로 내 손바닥을 감쌌어.
"..너 뭐해. 지금 나랑 뭐하자는거야?"
백현이가 내 가디건 주머니에서 거즈를 꺼내 살짝 데어있는 손바닥에 대고 잡아 이끌었어. 백현이가 이끄는 대로 야외계단을 빠져나갔고 백현이는 그대로 처치실로 향했어.
화상연고를 찾아내 익숙하게 바르고 자그마한 밴드로 마무리를 한 백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어.
"어제 한 말 욱해서 한 거 아니야."
어제 한 말이라면 일을 그만 두라고 한 그 말이겠지.
"내 일에 방해 돼. 신경쓰여."
내 고개가 점점 바닥으로 향했어.
"언제 내 말을 들은 적이 있었겠냐만은,"
"..."
"부탁할게, 생각해봐."
그 말을 끝으로 백현이는 처치실을 홀로 나가버렸어. 백현이가 나를 두고 혼자 저렇게 나가버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내겐 생소한 느낌이었고 무슨 이유에선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어. 그저 끝없는 무력감에 빠지고 있었지. 백현이 일에 내가 방해가 된다는 소리를 들었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내가 병원을 그만 두어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기는 것일거야. 조금 더 지나면 내가 일을 하는 것이 병원에 폐가 되는 그런 날이 오겠지. 그 때 유일하게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백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것 조차 무너졌던거야.
-5층 검진센터 앞 CPR, CPR. 5층 검진센터 앞 CP..
그 때 한쪽 구석에 달린 스피커에서 급한 목소리가 나와 울려퍼졌고 나는 반사적으로 베드에서 일어나 계단을 뛰어내려갔어. 내려가면서도 생각했어. 평소에 쉬려고하면 응급터지고 앉으려고 하면 씨피알 터지고 한다고 심통부렸었는데 이렇게 또 터져주는 건 나름 괜찮은 것 같다고.
"선생님! 여기요!"
6층이 외과병동이었고 5층에서 환자가 나왔으니 아마 외과에서 내려온 의료진이 제일 빨랐을거야. 그 중에도 내가 첫번째였던 건지 검진센터 직원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나는 바로 그 쪽을 향해 뛰어갔지.
"삼 분 전에 쓰러지셨고 방금 심전도 검사 받으시고 나오셨어요."
"경정맥 확인 됐구요, 호흡 없습니다. 심폐소생술 시작할게요."
시피알을 몇번이나 쳤는지 이젠 기계처럼 나오는 멘트를 치고 바로 손을 모아 심장 압박을 시작했어. 아까 백현이가 발라준 밴드가 너덜너덜거리다 결국 떨어져나가고 손바닥이 짓눌리느라 다쳤던 부분이 쓰라렸어.
"아, 왜 이렇게 안오시지.."
내 앞에 있던 검진센터 직원은 발을 동동 굴렀고 나는 땀이 줄줄 흐를 지경에 이르렀어. 그 때 내 뒤에서 누가 소리를 빽 질르며 내 손을 낚아채는 바람에 나는 뒤로 휙 나가떨어져버렸어.
"어머, 선생님!!!"
땀을 손으로 훔치며 얼굴을 확인했더니 아까 검진을 받을 때 있었던 산과 간호사야.
"병원에서 일하시는 분이 이러시면 어떡해요!!"
그 간호사가 나를 내치자마자 다른 흰 가운이 와서 시피알을 치기 시작했고 나는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어.
"조심해야 되는 거 알면서!! 괜찮으세요?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정말 직업정신이 투철한 간호사라고 생각하며, 나는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지.
"아랫배 당기거나, 그러진 않구요? 아시겠지만 저렇게 힘쓰는 거 아직 하시면 안돼요. 무거운 것도 들지말라고 하는 시기에..저기서 보고 얼마나 놀랐는 지 알아요?"
네, 알아요. 하며 헤헤 웃는 내 옆에 쪼그리고 앉은 간호사가 잔소리를 퍼부었어. 괜찮다고 말하며 옷을 털고 일어나려하는데, 내 앞에 익숙한 크록스 두 개가 나타났어.
"어,"
나는 당황스러움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백현이를 올려다봤지.
"백현이네."
별 시덥지 않은 말을 하면서 하하, 어색하게 웃는 나를 백현이는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어. 알았을까? 눈치 챘을까. 언제부터 들었을까.
ㅡ
아아.. 이놈의 지각 습성..
날이 더운거랑 키보드 잡기 싫은 거랑 관련이 있으려나요. 하하.
암호닉은 아직 받지 않아요ㅠㅠ 정리하기가 힘들어서..그래서..그래요..(솔직)
개강이 다가오니 개강병에 걸리려고 그러네요. 다들 더위 조심하세요!
아 그리고 하도 텀이 넓어서 이전이야기 기억 안나신다는 분들이 많더라구요ㅠㅠ그래서 이전이야기 넣었어요ㅠㅠ이건 무슨 주말 드라마도 아니고ㅠㅠ엉엉. 반성할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