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lection 프롤로그 ------------------------------------------------------------------------
강원도 어디에서는 눈이 내린다고 하던데. 모여 사는 사람들의 온기가 날씨를 녹인걸까. 서울은 눈 대신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빗물에 번지는 창밖의 야경을 쳐다보았다. 하나 둘 별빛처럼 번져가는 야경이 새삼 이뻐 보였다.
똑똑.
"커피드세요 대리님."
"음? 자기는 퇴근 안해?"
"며칠 소홀한 거 열심히 채우는 중입니다. 대리님 도와드릴려구요."
"내가 이래서 자기를 이뻐하는거야"
"헤헤.."
헤헤라니. 이 친구가 이렇게 웃기도 하네? 톤알못도 한 눈에 알아볼만큼 뽀얀 쿨톤의 피부를 가진 직장 후배는 누구나, 특히 웬만한 남자라면 시선을 한 두 번 씩 줄 만한 이쁘고 늘씬한 외모와 다르게 성격은 정말 순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특히 얼마 전까지 -자신이 그렇게 이쁘다는 걸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우울하고 조용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는 게 가장 신기한 사람이었다. 저 외모라면 명함도 몇 번 받았을텐데 왜 여지껏 모르고 살았을까. 연예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 쇼핑몰 피팅 모델 정도는 껌일텐데. 나 같으면 당장 한다... 하아... 불공평한 세상. 아무튼 그러했던 그녀가 이렇게 수더분하게 말을 터고 애교섞인 미소를 먼저 건내기도 하다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커피를 건네는 그녀의 오른손에서 반짝이는 반지가 보였다. 아하... 역시 여자는 사랑을 해야 해. 아니 사랑을 받아야 해. 그래야 이뻐져.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야 멋있어지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해 주는 남자를 만나야 이뻐진다고 하더라. 나도 누군가를 멋진 남자로 만들어준 적도 있을테고, 누군가를 만나 이뻐졌던 순간들도 있었을텐데. 이젠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그녀의 반짝임을 부러워하면서 씁쓸하게 커피나 마실 뿐.
"오늘도 야근이지 뭐..."
"대리님은 일을 너무 많이 하시는 거 같아요."
"대리라는 자리가 원래 그런 자리야. 일은 겁나게 하는데 실속은 없는 자리."
고개를 돌려 창밖의 야경으로 시선을 다시 주었다. 한강변을 따라 유성처럼 흐르는 자동차의 불빛과 오렌지빛 가로등이 새삼 반짝거리며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그 뒤에 산맥처럼 자리한 도시의 야경. 저렇게 이뻐 봤자 부질없지. 저 불빛 전부 누군가의 야근일테니까. 뒤바뀐 낮과 밤을 불평하며 검은 시간의 흐름을 버텨내야 할 나이트 근무일테고. 저 야경 속 크고 작은 불빛 하나하나,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고단함을 그 속에 가득 채운 채 나처럼 이렇게 서 있겠지. 인생이란 원래 그런거야. 멀리서보면 희극, 가까이보면 비극. 뭐 그런거.
그럼에도 참 이중적이다. 밤늦게까지 고단한 불빛으로 가득 찬 도시가 이렇게 아름다울 일인가. 얼른 퇴근하고 싶어졌다. 늦은 밤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이 은하수처럼 흐르는 도로변을 혼자서 전세내 듯 걸어가고 싶다. 아, 비가 와서 발이 다 젖을라나. 택시를 타야할까. 여기서부터 집까지 택시비가 얼마나 나올까. 낭만에 젖을 새도 없이 팍팍한 삶이 파고 든다. 고단하고 힘든 삶이 아름다운 이유를 모르겠다. 뭔가 공평한데 잔인하고 양면적이다. 모두 일에 치여 힘들게 밤을 낮처럼 밝히며 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편히 쉬지 못하는 지친 삶 덕에 오히려 안전하고 볼거리가 많은 신기한 도시. 한강 다리 근처에서 불빛 하나하나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을 야경을 감상하며 술 한잔 하고 싶은 밤이다. 비내리는 겨울 밤, 부침개에 막걸리가 딱이지. 아니면 따뜻한 오뎅탕에 소주도 좋고.
"자기 일 끝나고 약속 있어? 끝나고 한 잔 할래?"
"아... 오빠가 데리러 온다고 해서..."
미안한 듯 머뭇거리는 그녀를 도와라도 주듯이 때마침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떴다. 당황한 얼굴 위로 바로 반가운 웃음이 번진 걸 보니 알만하다. 언젠가 그녀가 심하게 아파서 조퇴하고 간 날, 그녀의 남자친구라고 찾아왔던 남자가 떠올랐다. 훤칠한 외모로 회사 여직원들을 한참이나 숭숭거리게 했던.
"그놈의 휴대폰은 아직도 운명 안하셨나. 시도 때도 없이 울리더니 제법 강철체력이야."
"아 대리님~ 그만 놀려요~"
"남자친구?"
"네. 헤헤.."
아냐 세상은 공평한 거야. 그래 잘생기고 이쁜 것들끼리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라고 해. 하아.... 커피가 쓰다
"쉬엄쉬엄해도 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한꺼번에 다 끝내려고 하세요. 이 프로젝트 과장님이 여유두고 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빨리 끝내놓고 못다 쓴 휴가 좀 써보려고. 좀 길게... 무전여행이라도 갈까 생각 중이야."
"무전여행이요?!"
"응."
"대리님이 무전여행이요?!"
"왜 그렇게 놀라?"
"안..안어울리시는거 같아서..."
"내가 왜 무전여행이랑 안 어울려?"
"대리님은 뭔가... 패키지 여행이라든가... "
"뭐야, 내가 어르신이란 거야?"
"아뇨 그게 아니고..."
생긴 건 쌩하니 차도녀처럼 이쁘게 생겨서는 역대급으로 순해터진 직장 후배는 언제나 놀리는 맛이 있다.
"대리님은 뭔가 칼 같고 정확하시잖아요. 상황판단도 빠르고.."
"내가 차갑다는 소리지?"
"아뇨~ 그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무계획 이런 여행보다는... "
그녀는 당황한 듯 커피를 마시며 눈을 내리깔다가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물어왔다.
"그런데 대리님, 여름에 휴가 안쓰긴 하셨던거 같은데... 길게 내려면 얼마나 쉬시게요?"
"나 그만두려고."
"네!?"
그녀가 땡그래진 눈으로 얼음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땡‘하고 어깨를 쳐주고 싶었다.
"왜요 대리님, 안돼요 대리님"
"안되긴 뭐가 안돼"
"대리님 가시면 어떻게 해요"
"나도 지쳐서 더이상은 못하겠다."
"그래도 대리님..."
이렇게 이쁜 애가 이렇게 불쌍한 표정으로 매달리는데, 같은 여자라도 마음이 흔들리는 게 정상이지.
" 몸도 좀 안 좋고, 여름에 휴가 안 쓴 거랑 연차 남은 거 합쳐서 병가신청 좀 길게 낼 거야. 안된다고 하면 사표 쓰고."
".........그래서 되면 그만 안두시는거에요?"
"해줄지를 모르겠지만. 코딱지만한 회사라고 월급도 거지같으면서 뭐 이렇게 따지는지."
"그건 그래요..."
"아 몰라 이제 나도 두손 두발 다 들었어..."
"근데 만약 되도 대리님 찍히는 거 아니에요? 과장님도 휴가 길게 쓰신 적이 없는데"
"나 이미 찍혀있는 거 아니었나?"
"그건 대리님이 바른 소리를 잘하시고 하시니까... 대신 일도 잘하시니까 다들 인정해주잖아요"
"그건 칭찬이 아니야...... "
사회생활이란 게 그렇다. 특히 한국사회에선. 일 잘하고 못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한가. 윗사람에게 싸뱌싸뱌 잘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 특히나 이런 작은 회사에선. 적당히 잘난 사람들에게 자존심과 명예는 목숨만큼 중요한 것이어서 나름의 직급을 가진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회식 자리에서 끊임없이 상기시켜드리면서 아부해야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굴러가기만 하면 되는 회사. 사실 그건 잘난 게 아니다. 모자란 것이지. 눈가리고 아웅하는 거지. 이건 아니라고 지적하다가 모난 돌이라고 되려 욕먹는 것. 왜 일 안한 사람은 내버려 두고 그걸 지적하는 사람이 욕을 먹는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일보다 샤바샤바가 중요한 인간들이 미뤄두고 혹은 엉뚱하게 저질러놓은 일들까지 떠맡으며 점점 속에 화가 쌓여만 간다. 사실 가장 모자란 건 이런 직장에서 저런 인간들 밑에서 돈 받고 일하는 마찬가지로 능력 없는 나란 존재. 이따위 회사인데도 때려치면 다시 골라 들어갈 데라는 게 다 고만고만하다는 게 더 슬프다.
"대리님, 이번에 새로 스카웃되어 온 대리님 때문이죠. 아니, 한팀에 대리가 둘이라는 게 말이 되나. "
"왜 안돼. "
"아니....우리가 뭐 대기업 이런데도 아니고..."
"몰라 그런 인간들 따위. 여기가 뭐 실력보는데니- 알음알음 낙하산 천국이지."
"직장 땜에 열 받아서 무전여행 가시려는거에요? 아니면 엎어진 김에 쉬어가겠다 그런 맘이세요?"
"모르겠어........ 그냥 좀... 이것 저것 ... 집안 일도 있고 너무 지쳤어..."
"집에 무슨 일 있어요?"
"그냥..."
"곤란한 거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손끝으로 컵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다시 눈치를 살폈다. 말 끝에 서운함이 뭍어 있었다.
"오빠가 하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거 같아요."
"오빠? 남자친구?"
"네."
"뭔데?"
"좋아하는 사람이 기대기만 해도 고마워진다는 말이요."
가지런한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가 부러웠다. 그래 이쁘고 잘생긴 것들끼리 다 해라 다해.
"자기 나 좋아해?"
"네. 저 대리님 좋아요. 진짜로... 그만 안두셨음 좋겠어요"
강아지 같은 눈으로 쳐다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언젠가의 나도 저랬겠지.
"자기야. 내가 팁 하나 줄까"
"무슨 팁이요?"
"직장에선 친구 사귀는거 아니야."
"왜요?"
"나중에 후회한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미래에 내 모습이 보이는 거 같아 나는 마음이 씁쓸해졌다.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그녀의 권유를 뿌리치고 나는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향했다. 딱 봐도 이제 사귀기 시작한 달달한 커플 틈에 끼여서 차를 얻어타며 눈치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급하게 집을 나와 지내고 있는 고시원 생활을 그녀에게 보일 자신도 없었다.
다행히 비는 어느 정도 그쳐서 우산을 쓰고 걸으면 적당히 물기를 피할만큼은 되었다. 눈 대신 비가 내리는 중이라서 그런가, 추위도 아침보다는 한풀 꺽여 있고, 우산 들기가 조금 귀찮지만, 그럭저럭 걷기엔 딱 좋은 밤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멍하니 생각을 풀어놓고 실컷 걷는 것. 그리고 그 길 끝이 퇴근 후 도착할 내 집이라는 것. 이 만큼 좋은게 또 어디있는가. 보도블럭 모양에 따라 발걸음을 맞추며, 나는 그렇게 원하던 도시의 불빛 대신 내 낡은 구두끝을 보며 하릴없이 걸었다.
살짝 발끝이 아파 올 즈음 도착한 집앞 편의점에서 캔맥주 몇 개를 사들고 좁은 고시원으로 들어섰다. 안 그래도 좁은 방안이 아직도 정리 안 된 상자들로 꽉 차있어 보일러를 안돌렸는데도 별로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 끝 책상 위에 노트북과 함께 쌓인 작은 상자들을 보았다. 음악을 들으며 걸어왔던 마음이 허무하게 한숨이 포옥 새나왔다. 다시 생각이 복잡해져서 나는 상자 속에 흰 티에 청바지, 빨간운동화 하나 달랑 신고 누워있는 인형들을 쓰다듬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안식처가 필요하다.
"아이고ㅡ 우리 애기들 춥겠네."
야근을 마다하지 않고 모든 일을 자처하며 열심히 돈을 모으고, 월급의 절반 이상을 쏟아부으며 적금을 들고, 그렇게 악착같이 열심히 살아온 내가 유일하게 하는 과소비가 바로 이 인형들이었다. 나의 위안. 나의 소중한 안식처.
처음엔 우연히 내가 좋아하던 연예인과 닮은꼴로 유명한 구체관절인형을 보고 이뻐하며 사진부터 모으다보니 실제 취미로 이어졌고, 이젠 그 좋아했던 연예인은 기억에도 희미할 만큼 구관 아이들을 사 모으고 키우며 마음을 달래는 게 취미가 되어버렸다. 신비로운 눈동자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두근거렸고 이쁜 옷, 가발 하나 하나 새로 사입히고 꾸며줄 땐 내가 그리 이뻐지는 양 신이 났다. 에구 우리 이쁜 아기. 부모님은 나이도 많은 내가 쓸떼없이 비싸기만한 무서운 인형을 사 모은다며 야단치는 시늉을 했지만 오빠의 아이들이 와서 마구잡이로 흐트려 놓고 훔쳐가기까지 했을 때- 정말 집이 폭팔할 만큼 화를 낸 이후로 아예 본체를 안하셨다.
나 없을 때 계속 몰래몰래 집에 조카들을 들이고 자꾸 내 물건에 손대는 걸 알았을 때, 그때 바로 집을 나와버릴 걸.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그랬다면 이렇게 만기에 다다른 적금통장을 허무하게 빼앗기지도 않았을텐데. 나몰라라 하는 다른 형제들이, 살아오면서 뽑아온 엄마의 단물짠물 그 반의 반이라도 뱉어내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내가 이렇게 억울하고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눈물 한 바가지를 쏟아내며 하소연하던 엄마의 마음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내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그게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가족은 따뜻한 품이라고들 하는데 가족이 버겹고 힘든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바로 나처럼. 그나마 거지 같아도 꾸역꾸역 다음 달 약속된 날이면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월급이 들어올 통장은 안 빼앗긴 게 위안인가. 보험에, 연금, 저축에, 다달이 나가는 생활비를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만기에 다다른 적금은 손도 못 대보고 빼앗겼으니 거기 부을 돈 만큼의 여유는 조금 있겠구나. 직장은 다녀도 그만 안 다녀도 그만. 확 때려 치고 퇴직금으로 미친 척 여행이나 갔다 올까. 그러다 이 퇴직금마저 노릴지도 모를 가족들 생각이 들어 소름이 쫙 끼쳐 며칠 밤을 분한 맘에 잠을 못 이루다가, 결국 직장 근처에 방이랄 것도 없이 작은 고시원을 얻었다. 홧김에 나를 몰아넣은 거긴 하지만, 어짜피 짐도 별로 없어서 고시원이라고 딱히 나쁠 건 없어. 하고 위로해보아도 마음은 계속 쳐졌다. 이 좁은 고시원 방안에서 내 20대의 마지막 언덕들을 넘어가야하는 걸까. 이젠 방황을 끝내야 할 나이 즈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나이쯤이면 이제 나는 어렸을 적 꿈꿨던 인생의 방향을 따라 닦여진 길을 차분히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삶을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절의 나처럼 나는 아직도 내 미래가, 삶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을 떠나올 때 떨어뜨린 빵조각을 새들에게 빼앗긴 헨젤과 그레텔처럼. 그렇게 산 속을 헤메는 미아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좁은 고시원으로 방을 옮기면서 짐을 있는 대로 줄이는 수밖에 없었지만 목숨같이 아끼던 아이들은 결국 팔지 못했다. 그래도 이것저것 전부 다 정리한답시고 직접 만들고 혹은 일이주일 점심을 굶어가며 사 모은 이쁜 옷들과 혹시나싶어 여분으로 사놓은 파츠들과 이것저것 레어템들을 함께 묶어 내놓으니 구매댓글이 주루룩 마하의 속도로 달렸다. 우리 애기들, 이제 진짜로 티 하나에 바지 한 벌. 단벌 신사들이 되어버렸네. 아끼고 아끼던 옷들 소품들 전부 정리해서 택배로 부쳐 보내고 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불쌍한 우리 아이들, 좋은- 부자 엄마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게 애들도 입양 보내야하나?
아이들을 담아둔 상자에서 손을 떼고, 침대에 맥없이 주저앉아 멍하니 창 밖의 야경을 쳐다보았다. 워낙 작은 방이라 창문도 액자걸어놓은 것처럼 작아서, 그 안에 보이는 야경도 참 초라했다. 저 작은 불빛 속에, 나와 같은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외로움이 있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고통을 짊어지고 산다고, 부피는 달라도 질량은 같은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나는 그 말을 위안 삼아 잘 살기 위해 정말 노력해왔다. 하지만 이럴 때면 정말 세상이 미웠다. 직장은 직장에서 대로 힘들고, 집안에서는 집안에서 대로 힘들었다. 어줍잖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살아온 덕분인가 이럴 때 훅 털어놓고 하소연할 누군가도 없다. 세상이 나만 미워하는 것 같다. 모든 게 지겨워졌다.
세상에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서러운 맘에 다시 한 번 좁은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둘러볼 필요도 없이 한눈에 담기는 작은 방안에 바닥 가득 자리한 상자들이 보였다. 계절별 옷 모아두던 상자가 두개. 학창시절부터 모아두었던 잡동사니와 책들이 들어있던 상자가 세 개. 전부 다섯 상자가 다였다. 나이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 쌓아둔 추억이 겨우 다섯상자가 다였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쓰레기봉투에 이것저것 다 정리해서 버리고, 버려야 할 오래된 책들을 노끈으로 튼튼히 묶어 밖으로 내어 놓았다. 그러다 몇 권의 일기와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잘 쓰지도 않는 일기를 꼬박꼬박 썼었네... 싶어 버릴까 말까 하던 마음으로 고민을 하다가 내용물을 보고 결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꼬물꼬물 먼지가 움직여 그림자가 생기나 싶어보았더니 너무 작고 가느다래서 투명하다시피한 거미가 책 모서리를 따라 비틀비틀 거리며 걸어다녔다. 매정하게 녀석을 휴지로 잡아 죽인 후 먼지를 털어내고 촤라락 펼쳐 들었다. 가장 먼저 집어든 것은 두툼한 회색 벨벳커버를 씌운 다이어리였다. 손 끝에 뭍은 먼지를 털어내자니 뭔가 익숙한 향이 공기를 타고 올라왔다. 첫장을 펼치자마자 코팅된 채로 어정쩡하게 말라버린 장미꽃이 보였다. 이게 뭐지? 내가 이런 짓도 했었군, 하고 페이지를 넘겼다.
비 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선물하세요-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비오던 날인가, 학과 사무실에 사다놓았던 장미꽃다발이 떠올랐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었지? 돈 아깝게.
- 예쁘다. 장미꽃을 보니 이젠 여름이구나.
꽃이 놓여진 학과 사무실에서 환하게 웃어주던 선배. 아, 남준 선배가 있었구나. 거기, 꽃이 놓여있던 자리에.
김남준.
그 이름 하나에 잊혀져 있던 기억들이 봇물 터지듯 밀려왔다.
-중국 태산에 엄청나게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선녀의 얇은 비단옷으로 스치듯 문질러서 그 큰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겁'이라고 한대. 그런 시간이 수없이 쌓이면 억겁이 되는 거지.
-그래서요?
-그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나는 너에게 다 말해줄 수 있을거야.
-결론은 말 안해주겠다는 거네!
-사람의 인연이란 게 원래 그런거야.
-선배는 저랑 아무 인연도 아니란 건가요?
-아니, 언젠가는 말하겠지. 그럼 그때 내가 너의 인연이 되지 않을까.
심장이 저릿저릿해서 숨을 못 쉴 것 같아 괴롭다가도- 그 느낌이 너무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하게 만들었던 사람.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못 이뤄도 폭신한 구름 속에서 뒹굴던 것처럼 아침 7시면 눈이 번쩍 떠지게 만들던 사람. 저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걷다가, 아껴쓰던 용돈을 결국 장미꽃 한다발 사는데 탕진하게 만들었던 사람. 그 사람이 보라고 일부러 꽃을 사다가 학과사무실 안에 곱게 꽂아두곤 했었다.
-목적없이 무작정, 훌쩍 떠나는 게 좋아. 낯선 곳 낯선 버스정류장에서 낯선 번호의 버스를 기다리는 거. 그만큼 불안하면서도 설레는 게 없더라고. 안 어울리는 두 단어가 심장 안에서 부딪히는 느낌이 좋아. 사실, 세상 모든 것들이 양면적 모습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어. 누구나 낯선 내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무작정 떠나는 작은 여행 속에도 세상 모든 것에 존재하는 양가적 진실이 숨어있다는 게 멋있지 않니?
오래된 mp3가 낡은 이어폰에 둘둘 말려져 상자 안에 함께 들어있었다.
-그렇게 낯선 곳에서 음악을 듣다 보면, 그 때 그 음악이 내 인생의 배경음악으로 한 곡 추가되는 거야. 음악만큼 멋진 여행의 동반자는 없어. 여행, 그리고 음악. 버스 밖의 낯선 풍경들. 안식처가 저절로 여러 개로 자가분열 되는 거지. 안식처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나머지 뒷정리를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안에 내 스무 살 무렵의 설렘이 가득 들어있었다는 걸 왜 그동안 잊고 살았던 걸까. 습기를 먹어 둥그렇게 휘어진 두꺼운 표지를 억지로 두 손으로 꾹꾹 눌러 닫은 후에도 그때의 그 푸르른 설렘이 되살아나 마음이 시려왔다. 한참을 읽어보다가 또 한 장 페이지를 앞으로 되돌려 읽다가. 그렇게 나는 밤을 거의 새우고 새볔녁에야 설잠이 얼핏 들었다.
-운동장 한가운데 서면 바로 앞에 커다란 산 두 개가 보여. 오른쪽 산은 좀 낮고 왼쪽 산은 조금 더 높고. 거짓말처럼 반은 침엽수 반은 활엽수라서 색도 다르고 산이 참 특이했어. 그 밑으로는 얇은 개울이 흐르고. 집 댓개가 옹기종이 모여있었고. 그 산골짜기 사이로 달이 떠오르면서 그렇게 산 아래 골짜기 마을을 비추는데 -그 흔한 가로등 불빛 하나 없이도 달빛 별빛이 집 하나하나를 비춰주는데- 순간 이게 현실 같지가 않더라고. ....그런 곳에서 살고 싶더라. 평생 살진 못하더라도.. 잠시 잠깐 안식처가 필요한 때가 오면, 정말 너무 힘들 때가 오면, 이 모든 기계음 다 놓아두고. 훌훌 떠나서... 모든 거 다 잊고 그 곳에서 쉬고 싶어... 좀 게을러 보일 수도 있는데. 뭐 어때. 달콤한 게으름이란 말도 있잖아.
꿈을 꾸었다. 한겨울 깊은 산속에서 어둠을 친구 삼아 길을 헤매는 꿈.
-나를 찾아가는 길은 방황이 아니지, 그냥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한 과정인거야.
그 속에서 헤매는 나에게 달빛처럼 다가온 선배의 목소리. 언젠가부터 내 삶에서도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던 소설 속 데미안 같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걱정 마. 네가 찾아오면 언제든 위로해 줄께.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