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lection #03 ------------------------------------------------------------------------
"거봐~ 내가 서울서 온 여자친구 있을 거라 했지"
"아... 네, 종점할머니 말이 맞았네요"
아까 종점에서 만난 할머니였다. 선배가 내게 귓속말로 설명해주었다.
"아까 집에 올라오다가 할머니 만났거든. 여자친구가 찾아왔다셔서 무슨 소리가 했더니...."
"아하... 근데 이름이 종점할머니에요? "
"맨날 종점에서 손녀분 기다리셔서... "
"아하...."
단박에 수긍하는 나를 뒤로하고 선배는 종점할머니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런데 할머니 무슨 일이세요."
"친구도 왔는데 뭐 먹을거나 있겠어. 라면 아니면 과자쪼가리만 잔뜩 있겄지. 이거 좀 먹으라고-"
"아유 할머니도 차암..."
선배는 말로는 만류면서 얼른 두 손을 벌려 할머니가 내미는 보따리를 받았다.
"찬거리 조금 챙기는 김에 고구마도 가져 왔어. 곶감하고, 사과 몇 알도 가져왔고. 식혜 먹을려?"
"아유 뭘 이렇게...."
커다란 보자기 위에 바리바리 잔뜩 싸놓은 음식들 밑으로 반찬통이 보였다.
"저번에 김치 담근 게 너무 잘 돼서 그것도 맛보라고 가져왔어."
어라, 없던 김치가 생겨버렸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배를 쳐다보았고 선배는 다시 당황한 듯 턱을 쓸었다.
"어유 뭐 이런 것까지..."
"우리 김장할 때 와서 도와줬자네- 보답이지 보답."
"돕기는요 뭐, 손이 더 갔죠"
"하긴, 총각이 도와준다고 손 댔다가 아작 낸 배추가 몇 포기여"
"잘됐네요. 선배 김치볶음밥 이걸로 만들면 되겠다."
"어이구, 뭔 김치볶음밥이여. 김치 볶다가 집 태우려고."
"아녜요 할머니. 할머니가 몰라서 그러시는데 선배 요리 되게 잘해요”
"잘하긴, 저번에 짜파구리인가 짜파라치인가 뭔 라면 끓여준다 그러다가 냄비 채 태워 버렸구만."
내가 시선을 돌리자 긁적긁적. 선배는 계속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이구 이거 주방에 먼지 봐라. 이래서 어디 사람이 먹고 살겠어."
마치 자기 집인 양 주방으로 들어선 할머니는 이리저리 휘저으며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할머니 뒤를 쫓아다니며 어설프게 손을 올렸다 내렸다 안절부절하는 선배를 따라, 나도 어정쩡하게 할머니를 돕는 시늉을 했다.
"아주 마을에 허우대 멀쩡하니 건실한 총각 왔다고 좋아했드만 어찌 그리 덜렁대는지. 콩 터는거 도와준다고 하고는 콩알까지 죄다 부숴 놓질 않나, 비닐하우스 씌우는 거 도와준다고 하고는 철대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다 휘어놓지를 않나, 아니 나중엔 김장 항아리 뭍는 거 도와준다고 나섰다가 삽자루까지 부수더라니까."
나는 조용히 선배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친척분이세요?"
"아니. 그냥 동네 할머니셔"
"근데 되게.... 선배 잘 아는 거 처럼 말씀하시네요"
".....잘 아시는 편인 거 같아. 다 사실이거든. "
웃음이 픽 터졌다.
"내가 도움도 많이 받고 있고... 할머니네 김치 진짜 맛있거든.“
끄덕끄덕. 그러다 또 문득 궁금증 하나가 더 생겼다.
"강원도 산골인데 왜 저 아랫지방 사투리를 쓰시는거죠?"
"아 그거... 할머니가 그쪽에서 시집오셨대."
"아하..."
"지금은 많이 나아진거래. 처음에 시집오셨을 때는 말이 안통했다고 하더라"
"크크큭"
"뭘 그렇게 숭숭대!? "
인상을 쓰는 할머니를 보며 선배와 나는 동시에 두 손을 흔들고 웃어보였다.
"아뇨 할머니, 아무말도 안했어요!"
"아무말도 안했어요"
"지랄... 그래서 뭐, 김치 볶은 게 먹고 싶은겨?"
당장이라도 요리를 해줄 것 처럼 팔을 걷어붙이던 할머니는 별안간 벼락 맞은 표정을 했다.
"어이쿠, 내가 먹을거만 주고 간다고 하고선 깜빡했어! 나 버스정류장가야 되는디ㅡ"
"할머니, 잠깐만요-"
"우리 손녀 온다고 그랬어. 빨리 가봐야 혀"
"할머니-"
선배가 급하게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할머니가 선배의 손길에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려? 빨리 말해 나 시간 없어"
선배는 잠시 말을 머뭇거리다가 목도리를 들고 나와 할머니 목에 휘휘 둘러 곱게 매주었다.
"추운데 이렇게 얇게 입고 오셨어요? 제 목도리라도 하고 가세요"
"잉? 아이구 괜찮은디"
"아니에요. 이거 하고 가세요. 맛있는 것도 많이 갖다 주셨는데."
"젊은이가 요즘 사람 답지 않게 참 참해. 내가 그래서 잘 챙겨주는 겨.”
할머니는 두 손으로 선배의 뺨을 쓰다듬었다. 더듬거리는 할머니의 손에 맡겨진 선배의 얼굴 위로 안쓰러운 미소가 번졌다.
“잘 놀다 가요 아가씨"
어정쩡하게 두 손을 앞으로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홍길동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할머니가 두고 간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쳐다보는 선배의 표정이 뭔가 심각해보였다.
"안 좋은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행운인가."
무슨 소린가 싶어 테이블 위와 선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할머니 손녀딸은 삼 년 전에 사고로 죽었거든.”
“아...”
선배는 작게 한숨을 쉰 뒤 음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치매가 오면서 점점 기억을 잃어가셔서... 저렇게 손녀딸이 놀러 오던 시절 어딘가에 시간이 멈춰져 계신 거야."
버스정류장에서 휴대폰을 내밀던 할머니의 차가운 손가락이 떠올랐다. 좀 더 따스히 만져주지 못한게 미안해졌다.
"알 필요 없는 것을 굳이 알려주는 것도 상처가 될까 싶어서... 할머니가 저러실 때마다 고민이 돼."
"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알려주지 않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그럴까?"
"네... 할머니의 세상을 굳이 깨뜨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지금 행복해 보이시는데요."
선배의 집으로 안내해주던 할머니의 곱은 등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눈 덮힌 산길을 거침없이 내딛던 옹골찬 걸음걸이. 그 뒤를 따라 조심조심 걸어왔던 나.
"그렇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살면 참 좋을 거야."
아까 가게에서 할머니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던 아줌마가 떠올랐다.
"선배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천천히 내게로 향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선배의 그런 점이 참 좋았어요.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사람. 커다란 산인데도 산세가 거칠지 않아서 등산오는 사람이 힘들지 않고, 깊은 바다인데도 파도가 부드러워 마음 놓고 수영할 수 있는.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게 얼마나 고마운지 선배는 모를거에요. 선배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참 많이 노력했던 거 같아요. "
선배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에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니?"
"네."
"그래서, 너는 그런 사람이 되었니?"
"...."
선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서 말을 멈췄다. 꼭 못 본 만큼의 세월이 선배의 얼굴로 내려앉아, 그렇게 조금 더 어른이 된 표정을 한 선배가 여전히 낯설게 서 있었다.
"사는 게 생각 같지는 않더라고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쉽지가 않아요"
뭔가 변명같은 대답이 스스로 부끄러워져서 다시 선배의 눈길을 피해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 선배 눈이 와요."
안그래도 하얗던 세상이 점점 더 하얗게 덮여져 가고 있었다. 뿌얘진 하늘이 미친 듯이 퍼붓는 함박눈 때문에.
"우와, 이런 거 진짜 간만에 보는 거 같아요!"
"저번에 서울에도 첫눈 펑펑 왔다더만"
"거긴 펑펑 쏟아지긴 해도 이렇게 이쁘게 쌓이지는 않잖아요, 우와-"
나는 신나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아까까지만 해도 추위에 바짝 얼어버린 하늘이 안간힘을 쓰며 긴 햇빛을 진하게 뿌리고 있었는데 결국 한겨울 추위가 이겨버린 모양이었다.
"우와, 이거 잘 뭉치는 눈이에요, 눈사람 만들어도 되겠어요!"
"뭐라도 입고 놀아- 그렇게 입고 밖에 있으면 감기 걸려"
선배는 그대로 현관 앞에 기대서서 팔짱을 끼고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또다시 익숙한 그 모습에 코끝이 시렸다.
-옷 잘 챙겨입고 다녀. 그렇게 입고 밖에 있으면 감기 걸려.
학과사무실 앞에서 꼭 저렇게 팔짱을 끼고 익숙한 미소를 띄며 내게 마지막 인사를 했었다. 그것이 내게 건낸 마지막 말이 될 거란 걸 그때는 몰랐었다.
-알바 끝나고 꼭 와. 자리 늦게까지 갈 것 같다. 아이구 징한 녀석들.
그자리에 늦게라도 갔어야 했을까. 선배가 군대 간다고 마지막 송별회 하던 날 - 누구보다 가고 싶었는데 나는 결국 알바 핑계를 대며 가지 못했다. 조심스레 걱정스런 인사를 건네면서도, 결코 그 학과사무실 불빛 밖으로는 발을 떼지 않았던 선배. 그런 선배를 향해 내가 실수할까 봐. 술 먹고 펑펑 울면서 붙잡을까봐. 이미 내 마음은 누가 봐도 티가 났는데. 어쩌면 선배도 알지 모르는데. 알 듯 말 듯 모른 척 하고 싶은 말들만 늘어놓으며 여전히 그 자리인 선배 때문에, 그렇게 끝까지 고백하지 못했었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나는 이 가슴의 통증이 부끄러워 결정적인 순간에는 꼭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렇게나 티나게 쫓아다녔으면서. 당연했다. 처음이니까. 이렇게 가슴이 뛰어본 적이 처음이니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라서. 그냥 다 좋고 그냥 다 부끄러워서. 나는 방법을 몰랐다. 부끄러웠던 기억들을 똘똘 뭉쳐 다 없애 버리고 싶다. 손 끝이 시려 왔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커다란 눈사람을 기어코 만들어 내고나서야 나의 눈놀이는 겨우 끝이 났다.
눈사람 하나가 다 완성되는 동안, 이리저리 창안에서 움직이는 선배의 모습을 간간이 돌아보았다. 한참을 열중하다가 뒤돌아보면 선배는 창가에 앉아서 턱을 괴고 나를 구경하며 미소 지어주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안되겠는지 선배는 커다란 롱패딩을 꺼내들고 운동장으로 따라 나왔다.
"그러다 진짜 감기 걸린다니까"
"다 됐어요, 짜쟌“
선배는 손가락을 턱밑으로 대고 내가 만든 눈사람을 감상했다.
"근데 눈사람이 되게 날씬하네."
"아... 이거 선밴데?"
"응?"
"눈도 작고, 여기 입꼬리도 뿅뿅 웃고 있고, 그리고 여기... 보조개도 뿅뿅. "
"...너무 안닮았는데?"
"어두워서 안보이는거 아니에요?"
"그러게 그러고보니 해가 벌써 다 졌네.."
"여긴 산이라서 해가 빨리지나? 지금 몇 시...."
앗차. 버스시간!!!!! 나는 재빨리 손목시계를 보았다. 6시 20분. 헉;;;
"막차시간 7신데, 저 큰일났어요!!! 저 빨리 가야해요"
"어? 어 그래;;"
나는 재빨리 선배의 집으로 뛰어갔다. 선배도 내 뒤를 따라왔다.
"조심해 돌계단 미끄러우니까"
"걱정마....."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발이 미끌거렸다. 뒤따라오던 선배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뒹굴뻔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조심스레 자세를 잡는데 다시 한 번 몸이 기우뚱거렸고, 선배는 뒤에서 그대로 나를 잡아 안았다. 허리 안쪽으로 나를 감싸 안는 선배의 긴 팔이 느껴졌다.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는 두유 한 개, 율무차 한 잔. 배는 쑥 꺼져있었고, 나는 나름 마른 편에 속하는데도 저절로 숨을 들이쉬었다. 흡-. 내가 배에 힘주는 것을 느꼈는지 선배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어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열려있는 현관문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결 고운 얼굴을 따라 흘렀다. 입가 옆으로 쏙 들어간 보조개가 눈에 들어왔다. 가느다란 눈, 작고 선명한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배가 이렇게 생겼었지... 싶었으면서도 뭔가 낯설었다. 아까부터 왜 계속계속 선배가 낯설까 생각하다가 세월의 흐름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내가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렇게나 재잘대며 쫓아다녔으면서도 부끄러움 탓에 제대로 선배를 가까이서 마주 본 적은 실상 많이 없었다. 이렇게 대놓고 정면으로. 제 아무리 다정스러웠어도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도 선배와 나 사이에는 꼭 테이블 하나 정도의 거리가 있었고, 어쩌다 그 선을 넘어와 내 어깨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도 늘 조심스레 툭툭... 그게 다였다.
이미 어두워진 하늘에선 쉬지않고 눈이 내렸다. 계속 같은 자세로 있어서인가 선배의 머리카락과 콧등으로 눈송이가 내려 앉아 자리를 잡고 조금씩 제 부피를 늘렸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눈을 털어냈다. 선배도 그제야 우리가 부동자세로 한참을 서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선배는 재빨리 나를 내려놓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조심하랬지, 내가..."
"고마워요 선배."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아쉬움도 잠시, 나는 재빨리 방안으로 들어가 옷가지를 챙겨입고 가방을 들었다. 선배가 재빨리 내 캐리어를 잡아 끌고 나를 따라나섰다. 정신없이 내려 뛰다 보니 다행히 7시 전에 종점에 도착했다. 소복히 눈이 쌓여가는 버스정류장에서, 나는 아쉬움에 버스시간표만 계속 쳐다보았다.
"선배 고마워요. 갑작스럽게 왔는데 반가워해 줘서"
"아냐, 찾아와줘서 고마워"
"선배 여기 계속 계실거에요?"
"응? 응. 아마 당분간..."
"그럼 저 다시 와도 돼요?"
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버렸다. 선배는 난처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할 말을 못찾고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가, 가방을 쳐다보다가,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선배의 침묵에 나도 발 아래로 시선을 떨구는데 그사이 눈이 더 내려서 어느새 눈은 내 발목을 덮기 시작했다.
"음, 저기...."
선배가 결심한 듯이 입을 떼는 순간이었다.
"아이구!! 저기 사람 있었구만!"
저 아래 슈퍼의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슈퍼아줌마가 이 쪽을 향해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 순간, 불현듯 든 불길한 생각에 고개를 번쩍 들었는데 선배도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똑같이 고개를 번쩍 들고 나와 눈을 맞췄다.
"서... 선배 설마..."
"저 아래 아래 집에서 연락 왔는데 눈 때문에 길이 끊겼대! 오늘 밤에 못나갈텐데 어떻게 하나?! 큰일이네”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