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lection #08 ------------------------------------------------------------------------
하루, 또 하루 의미를 주든 말든 시간은 흘러가는 법이다. 그 흐름을 안타까워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기보다는, 나는 이미 틀렸어 포기하고 주저앉기보다는 그 속에서 재빠르게 헤쳐나가는 법을 야매로라도 배워야 하는 게 바로 삶이란 거다. 첫사랑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해도 시간은 별 상관없다는 듯이 흐른다. 오늘이라는 이름을 달고 24시간의 하루하루가 변함없이 다가오고 내가 아픔에 허덕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내 우편함에는 고지서가 쌓이고, 집세 내는 날은 다가오니까.
작년 가을 그랜드 오픈이라고 시끌시끌했던 회사 앞 대형 서점 카페에서 나는 멍하니 책을 펼쳐놓고 밖을 구경했다. 매일 저 도로변을 걸을 줄만 알았지, 이렇게 몇층 위로 올라와 내려다 볼 여유도 없이 살아왔었구나 나는. 헐벗은 나뭇가지들 사이사이를 스치며 차가운 겨울바람이 휭휭 잔가지들을 흔들었다. 서울에도 눈이 왔을까? 내 기분도 모르고 저 혼자만 예쁜 하늘이 도심에 긴 빛을 뿌렸다. 진한 빛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바쁘고 차가운 표정으로 거리를 걸어다녔다. 낮에 보는 서울은 이런 느낌이지.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잿빛 그늘을 만들며 서로가 서로를 낯설어하는 풍경이 익숙한, 북적이지만 혼자인 곳. 낯부끄러운 사연도 굳이 나눌 필요 없는 외로운 도시. 내 맘 속이 지옥과 천국을 오간다해도 이 도시 사람 어느하나 나에겐 관심이 없겠지. 사람들 속에, 많다고 생각되는 숫자들 속에 섞여있을 땐 나 스스로가 참 초라한 것 같다.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차라리 밤의 서울이 더 좋다. 까만 밤에 가려 불빛만을 비춰주니까. 서로의 사연을 야경으로 감춘 채. 서로가 서로의 야경이 되고 서로의 달빛이 되어주면서 그렇게 의도치않게 서로의 위로가 되어주는. 끝없이 이어져 있는 가로등 불빛들이 자세히보면 각자의 영역에서 외따로 서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가 다 고독한 거다. 종류도 느낌도 정도도 다르지만 분명히 각자의 외로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외로움, 고독감 이런 거 다 괜찮아. 우울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비참한 느낌만 들지 않으면, 그 정도의 외로움이면 성공한거다. 질낮은 우울감으로 나를 병들게 하고 싶지 않다.
시선을 테이블로 내렸다. 펼쳐놓은 책은 열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커피는 이미 바닥을 보이는데. 커피를 한 잔 더 사려고 북카페 안 커피 매장을 찾았다. 여기가 커피 맛집인가. 서점 안에 있는 카페인데 웬만한 커피 가게보다 사람이 많았다. 정신없이 커피를 내리던 알바생이 커피를 내오다가 바로 내 앞에서 엎고 말았다. 뜨거운 커피가 그녀의 소매로 젖어드는데 얼룩보다 화상이 더 걱정되었다.
"죄송합니다. 금방 다시 만들어 드릴께요"
"괜찮아요. 천천히 해요. 손부터 봐요."
당황해 쩔쩔매는 알바생을 보면서 나는 딱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뒤에서 일을 돕던 남자알바생이 손을 바꿔 바로 상황을 수습했다.
"여기 커피요."
커피 홀더에 서점 쿠폰이 세 개 붙어 있었다. 음? 하고 쳐다보니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인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서요. 이거 서점에서 책 사실 때 쓰세요"
사투리가 살짝 섞인 말투가 귀여웠다. 서울 온 지 얼마 안됐나보구나. 종점할머니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생각을 접으려하는데 쉽지 않다.
"고마워요. 수고해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둘이 툭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니 맘대로 쿠폰을 막 주면 어떻게 해?!"
"어허. 도와줬더니만 뭐라하고..."
"주임님이 쿠폰 다 세 본단 말야~ 넌 왜 네 타임도 아닌데 나와서 오지랖이야아"
"내가 했다 해라~ 손 좀 보자. 괜찮나? 데이진 않았어?!"
딱 봐도 사랑 싸움 같아 미소가 커피향처럼 번졌다. 좋을 때다.
"태국가서 잠만자고 오셨어요? 하나도 안타셨네요?"
그녀는 변한없이 이쁜 미소로 나를 반기고 있었다.
"저 여기 쿠폰 많이 있어요. 뭐 갖고싶은 책 있으면 말씀하세요, 대리님 책 좋아하시잖아요."
"내가 책 좋아하는거 어떻게 알았어?"
"딱 보면 알죠. 말하는게 다른데."
"어떻게 다른데?"
"가끔씩 대리님의 말은 뭔가 명언같기도하고 싯구절 같기도 하고. 약간 구어체 느낌이랄까...."
"그게 뭐야, 좋다는거야 나쁘다는거야?"
"멋있다는거죠."
"좋다는 거네."
그녀를 따라 서점으로 올라가 책들을 훑었다. 바닥까지 쌓여있는 책들이 눈이 밟혔다.
"제가 선배 취향으로 골라볼까요?"
"내 취향?"
그녀가 들고 온 책을 보았다.
".... "
"이미 갖고 있는 표정인데.... 역시 그렇죠?"
"갖고 있기야 하지.."
"흐음... 그런데 이건 무슨 내용이에요? 유명해서 제목은 잘 아는데... 이거 주인공 이름이잖아요. 이름은 이쁘다. 데미안."
"음... 간략히 설명하자면 우정과 멘토... 뭐 그런거지."
"음? 그럼 대리님과 저 같은 사이네요?"
"우리가?"
"아닌가? 제 사수시잖아요"
헤헤. 책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기 이렇게 수다스러운 캐릭터였나?'
"대리님이 그러셨잖아요. 사랑하면 닮는다고. 우리 오빠 닮아 성격이 바뀌어가나봐요."
나는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모습에서 과거의 내가 보였다.
"그래서 대리님 여행은 잘 하고 오신거에요?"
"글쎄..."
"재미 없었나 본데. 표정이 영 별로에요"
떠오르려는 생각을 억누르려 말을 돌렸다.
"나는 고장난 시계를 가지고 있었던 거 같아.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서 발만 동동구르는 초침이 안쓰러운. 고칠 수도 없고 더이상 쓸모도 없는데, 예뻐서 그냥 지니고 있던 거. 제 아무리 고장난 시계라고 해도, 하루에 두번 정도는 시간이 맞으니까. 난 그래서 미련을 못 버렸나봐."
"그런데요?"
"이번에 여행 다녀오다가 잃어버렸어. 아끼던 건데. 그래서 기분이 좀 별루야."
"어쩌다가..."
"추억에 너무 젖어서, 추억을 잃어버렸어."
".....묘하네요"
"뭐가?"
"행복해보이는데 슬퍼보여요. 이상해요."
"뭐야 그게..."
"대리님 따라 해봤어요."
"나 따라서?"
"대리님은 가끔 말을 너무 어렵게 해요. 좋은 말 같은데, 이해하는데는 오래 걸려요"
"내가 그래?"
"네. 그래도 좋은 말들이니까, 다 기억해둘래요. 언젠가는 이해할 날이 오겠죠 뭐."
"자긴 내가 그렇게 좋아?"
웃자고 한 농담인데 그녀는 방긋- 웃어보였다. 언제부턴가 웃음이 유난히 늘어난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의레 건내는 미소가 아니라 진심을 다해 그녀가 웃고 있다고 느껴졌다.
"네! 저는 대리님처럼 되고 싶어요. 이렇게 같이 지내고, 또 대리님이 좋아하는 책도 같이 읽고... 그렇게 대리님 좀 따라하다보면 닮아가지 않을까요? "
그녀가 책을 들어보이면서 내게 웃음을 흘렸다.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제가 좀 의기소침하고... 좀... 자신도 없고 그런 편인데. 대리님은 늘 열심히 사시잖아요. 아니다 싶으면 막 항변하실 줄도 알고. 그래서 손해도 보시는거 잘 알아요. 그래도 -전 그래서 대리님이 좋아요. 아, 좋아하는게 아니라 존경하는건가? 아무튼요, 나도 저런 당당한 커리어우먼이 되겠다! 막 이런 의욕도 생기고..."
"내가 그래?"
"네, 근데 또 츤데레처럼 사람 챙겨줄 줄도 아시고. 처음엔 저도 대리님처럼 되고 싶었는데, 대리님 따라하기는 너무 능력에 부치고..."
"..........."
"그래도 제가 대리님한테 도움이 되면 좀 좋을텐데요. 이렇게 기분 별로고 하실때 기분 전환도 같이 하고 그러면 좀 풀리고..."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다가, 나는 갑자기 한 방 머리를 얻어맞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속에 미친듯이 밀려오는 생각들을 떨쳐버리려고 고개를 숙였다. 당황한 내 눈빛을 그녀에게 들킬까봐 급하게 말을 이었다.
"자기는 이미 충분히 위로가 되어주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까지는 안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그래도 뭐"
"대리님은 친절하고 잘 해주시는데, 뭔가 벽이 느껴져서요. 그냥 그래요..."
그녀는 최대한 상냥하게 내게 말해주고 있는데, 나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아렸다.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조금씩 정리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픽, 한숨처럼 웃음이 터졌다.
데미안이 떠나가면서 남겨진 싱클레어는 다시 데미안이 되고, 그렇게 그는 또 다른 싱클레어를 만나고....
"대리님이, 그만 안두신거 너무 좋은데... 그러면 전 대리님하고 친구 못하는거에요?"
"아.. 그거.... "
나는 이 순진한 직장후배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고민스러워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뒷머리를 헝끄러뜨리며 겸연쩍게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에게 저런 습관이 생긴 건. 그녀에게 저런 습관을 붙여준 건, 나였을까 그녀의 새로운 남자친구 일까.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대리님 책 더 보세요~ 제가 사드릴께요. 공짜쿠폰이지만 생색 좀 내보게요..."
"자기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나 자기 되게 좋아해. "
그녀가 미소를 띄우는데, 그게 왜 서운해보이는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 것만 같았다
"한대리 동문이라고 전화번호 가르쳐 달라는데 혹시나 해서 안가르쳐주고 번호만 받았어. 아는 사람이면 연락하고. "
"이름이 뭔데요?"
"김...남준?"
"...."
"동창들 통해서 알음알음 직장 알아냈나봐. 자기 전화번호 모르는거 보니까 혹시나해서."
포스트잇에 적힌 번호를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래, 이 방법이 옳은거지. 그랬으면 나는 길고도 짧은 3일을 추억에 젖어 추억을 잃는 일 따위 겪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나는 행복하면서도 슬퍼보이는 표정같은 건 짓지 않을 수 있었을 지도. 낯선 번호를 테이블매트 아래로 숨기고 바로 모니터를 켰다. 쉬는 동안 밀린 일이 산더미였다. 낙하산처럼 툭 떨어져 사고만 치던 직원은 또 다른 대형사고를 친 뒤 일더미를 남겨놓고 다른 부서로 사라져버렸고, 그 쪽에서도 역시 누군가가 나처럼 힘들어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누군가가 겪을 힘듬이 연상되어 안쓰러웠다.
"밥은 드시면서 하셔야죠. 벌써 7시에요"
"엥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이러다 오늘도 야근하시겠어요. "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거 회사에서 알아주나 몰라..."
"두고 봐요, 이번에 승진 먼저하는건 대리님이 될거에요, 분명히."
그녀가 사온 수제 햄버거세트를 받아들었다.
"이것도 자기 남친님이 쏘아올린 쿠폰인가"
그녀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참 선배님 쉬는 동안 선배 찾는 전화 여러 번 왔는데. "
"누가 나를 찾아?"
"선배 동창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선배 어머님도 전화하셨었고... 동생분도."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어두운 표정을 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여행 전 서운함을 비추던 그녀가 떠올랐다.
"통화 했어. 동생이 한국들어온다고 해서..."
"동생분 외국사세요? 어디요?"
"중국에 유학 갔는데... 공부는 안하고 사고만 치고 돌아다니면서 돈만 버리고 있다가 안되겠는지 이번에 들어 올 모양이더라고. 사연이 길어. "
내가 코를 찡그리며 말을 대충 끝내자, 그녀는 눈치를 보다 다시 대화를 이었다.
"대리님 휴가 낸 것도 말 안하고 혼자 훌쩍 떠나신 거 같던데. 맞죠"
"...........응."
"아니, 그런데 여행하면서 사람이 연락이 안되면 어떻게 해요? 그거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게 걱정하는 건데..."
"응? 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그건 정말 하면 안돼요."
그녀 답지 않게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다그치는 모습이 낯설었다. 사람은 누구나 낯선 내면을 가지고 있다더니. 아니다, 낯설은 모습은 아니다. 필요한 말은- 해야하는 말은 상대에게 미움받더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마음을 크게 먹고 말 끝에 힘을 주던 어느 시절의 내가 보였다.
"알았어. 안 그럴께."
내가 장난치듯 그녀의 팔짱을 껴도, 그녀는 표정을 쉽게 못 풀었다.
"대리님 진짜로 그러지 마세요. 알았죠?"
내가 몇 번이나 장난을 치며 웃어주고 나서야, 그녀는 웃음을 보였다. 그녀의 웃음을 보고서야 나는 마음이 놓였다. .............뭐지, 갑자기 뭔가 바뀐 것 같은 이 느낌은?
"자기야. 내일 시간되면 나랑 집보러 다닐래? "
"내일은 오빠랑 약속이 있긴한데. 무슨일인데요?"
"그럼 혼자가지 뭐.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지금보다는 큰 집으로 가고 싶어서..."
"아, 이사가시게요?"
"응. 고시원은 내가 살 곳이 아닌거같아"
"고시원이요?!"
"응."
"대리님 고시원에서 사셨다고요?"
"응. 집 나와서 얼마전에 고시원 들어가봤는데 어우 못살겠더라."
"왜 ... 진짜 집에 무슨 일 있었어요?"
"아 뭐 .... 그냥 이것저것...이야기하자면 길어서..."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대리님은 진짜 엉뚱한 거 같아요"
"내가?"
"네... 상상을 못하겠어요..."
"내가 좀 매력있지. "
"그러게요... ㅎㅎㅎ"
그녀가 재빨리 휴대폰을 훑었다.
"우리 오피스텔도 괜찮긴한데. 대리님한테 좋을지 모르겠어요."
"자기 집 좋아?"
"네, 주인아줌마 번호 드릴까요? 오피스텔이긴한데 방 따로 거실 따로여서 구조가 잘 빠졌어요. 아, 아예 구경할 겸 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드실래요?"
"응? 자기 집?"
"네 와서 함 보시고... 맘에 안들면 내일 같이 방보러 다녀요."
"아냐 자기 약속있다고 했잖아."
"까짓거 약속 미루면 되죠."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자기 남자친구 너무 막 생각하면 나중에 후회한다."
"이 정도는 이해해 줄거에요! 제가 대리님 이야기 종종했거든요."
나의 싱클레어. 그녀의 해맑은 미소에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 지겨운데 익숙해서 그립다는 말이 이젠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대리님... 진짜로 여행하다 무슨일 있으셨어요? 진짜 시계 잃어버리신 거에요?"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럼 저랑 돌아다니는 김에 시계도 새로 장만해요. 더 예쁜 걸로."
오늘 직장 동료를 한 명 잃었다. 하지만 어떠하랴, 이렇게 이쁘고 착한 친구를 얻었는데.
"자기 어디야? 나 거의 다 왔는데"
-금방 도착해요. 아, 나 가게 간판 보인다. 대리님은요?
"나야 지금 들어와 앉아있지."
-알겠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딸랑.
가게 문이 열리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 붙었다. 익숙한 얼굴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잘.... 지냈어요?"
".........."
나의 싱클레어는 쥐뿔. 직장에서 친구 만들지 마, 나중에 후회한다. 내가 말해놓고 내가 그 말에 뒤통수를 맞다니.
"그 후배분 안된다고 했는데 내가 부탁했어요. 그 친구한테 화내지 말아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이죠."
"아직도 나한테 화 많이 났나보네"
".........."
조금 망설이다가,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종점할머니 때문에....."
여전히 무채색으로 몸을 휘감은 그는 조금 수척해져 있었다.
".....돌아가셨어요."
"네?!"
놀라서 나도 모르게 그에게 한 발 다가섰다.
"어...어떻게... 왜요?"
"소라씨 하룻밤 재워주고 나서는 정류장에 더 이상 안나가셨어요. 대신 이제는 손녀딸이 집에 있다고 계속 착각하시더라고요. 빈 집 빈 방에 자꾸 불을 때우시기도하고, 위험해서... 치매가 점점 심해지는 거 같아서 가족들이 요양병원에 모셨는데. 며칠 전 돌아가셨어요. 갑자기 환경이 바뀌면 그렇게 적응을 못하기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
"그래도 마지막에 손녀딸 챙겼다고 좋아하시면서 가셨대요. 가족들이 고마워했어요. 소라씨 얼굴 한 번 보고 싶다고 해서 발인도 미루고 5일장 치룬다고 해서. 너무 급해서요."
맞은 건 한참 전 인데, 등짝에 붉은 손자국도 사라진지 오래인데- 할머니에게 맞은 자리가 갑자기 후끈거리며 아파왔다.
"할머니... 뵈러 같이 갈래요? "
곱게 단장한 영정 사진 속 할머니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달랑 3일을 같이 보내고 하룻밤 같이 잤을 뿐인데, 버스정류장에 따라나와 눈꼬리에 눈물부터 달고 계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잘 터지지도 않던 2G휴대폰을 꼭 쥐고 있던 곱은 손가락도. 꼬부라진 등으로 티비에 나오던 자연인처럼 내게 산길을 안내해주시던 뒷 모습도. 내가 사는 고시원 냉장고에 들어가자마자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곶감도.
-할미 기다린다?
손 안에 쥐어진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며 할머니의 말을 곱씹는데, 옆에 다가와 털썩 주저앉은 그가 내 잔으로 손을 뻗었다.
"흑기사 이번엔 제대로 해줄께요."
"괜찮은데...."
"바로 가야하잖아요. 휴가 쓴 지 얼마 안됐는데 또 반차 내고 오느라 눈치보였을텐데. 내일 오후에 출근이랬죠?"
다정한 목소리가 여전하다.
"나한테 설명할 시간은 줘야죠. 대신 술 마셔줄테니까 제 소원 들어주세요."
-너무 감정 묵히면, 나중엔 풀고 싶어도 못풀어.
할머니는 이렇게 떠나실 걸 알고 계셨던 걸까. 마음이 아렸다.
-사람 인연을 어찌 하룻밤 말다툼으로 다 끊어.
손 끝에 힘을 뺐다. 같이 지내는 네 번의 밤 중 세 번은 술과 함께라니, 특이한 인연이긴 하네.
"어이구 남준이 후배도 왔네. 여기 한잔 받아요"
"아, 이 친구 조금 있다가 서울 가야 해서요.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
"응 그래? 아쉽네. 받은 셈 쳐요 그럼. "
장례식장이어서 그런가. 최씨아저씨는 별 다른 권유 없이 뒤돌아섰다. 그는 내 손에서 가져간 소주잔 안에 남은 술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볼에 힘을 주며 눈썹을 찡그리는 그를 보면서, 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술 이렇게 마셔도 되요?"
"음?"
"큰 수술도 하고... 몸 안 좋은거 아니에요?"
그가 다시 본 이후 처음으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 걱정해주는거에요?"
"아니... 모르면 몰랐지 어떻게 걱정이 안 돼요. 술 이렇게 마셔도 되는지...."
"괜찮아요. 이 잔이 막 잔이야. 이 정도하고 이제 우리 일어나요."
"그래도 돼요?"
"사실 아까 들어오기 전에 이장님하고 최씨 아저씨한테 귀뜸했지. 병원가야한다고 뻥 좀쳤더니 바로 술잔 걷어가시더라구요. 더는 안 권하실거야."
"....거짓말맞죠? 진짜로 병원에 가는 건..."
"아유, 이제 완전 건강해요. 괜히 말했네."
저녁 7시. 10년 가까이 변하지 않았던 버스시간표가 그 사이 바뀌었을리도 없는데. 나는 버스 시간표만 쳐다보았다. 너무 일찍 나왔나.
"소라씨."
옆 자리에서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라씨, 저기 봐요."
그가 가리키는 곳은 하늘이었다. 밤하늘. 천천히 고개를 든 나는 깜짝 놀랐다. 언젠가 들었던 말처럼, 진짜로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것 처럼 커다란 달이 산 등성이에 걸려 있었다. 이렇게 크고 선명한 달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계속 내린 눈 때문이었을까, 3일이나 이 곳에 머물렀는데. 이렇게 훤한 달을 왜 여지껏 못 본 거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달빛이 비춰주는 산길을, 익숙한 방향으로 나있는 그 길을 천천히 뒷걸음으로 올라서며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와요."
나는 계속 앉은 자리에서 그를 쳐다보았다.
"이리 와요. 소라씨.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산 속의 달이 이렇게 밝게 구석구석을 비춰준다는 것을 여지껏 몰랐다. 운동장 맞은 편 두개의 산에 보이는 나무가 몇 개인지 다 셀 수 있을 것도 같고, 산 아래 검게 물든 집들의 지붕 색깔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커다란 달이 잔잔한 빛을 뿌리며 개울가 얼음 속으로 흘러가는 물소리까지도 모두 비춰주고 있는 것 같았다. 제 몸 주위를 비추느라 바빠서 동그랗게 빛을 머금고 어둠 속에 둥둥 떠있는 도시의 가로등과는 달리, 은은한 산 속의 달빛은 공기 중에 골고루 내려 앉아 운동장 끝에 서 있는 그의 얼굴에 지는 그림자 속 작은 표정까지 자세히 비춰주었다.
"...소원, 들어 줄 거죠?"
푸르스름하게 물들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어린 시절 이 곳에 서서 저 커다란 달에게 손을 뻗었을 그를 상상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요."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요."
"소라씨 힘든 삶의 끝에서 시작된 방황이, 내 방황의 끝이 되게 해줘서 고맙고........ 미안해요. 이건 진심이에요."
내가 어떻게 그의 방황을 끝나게 해줬다는 걸까.
"내가 어려서 공부를 좀 잘했어요 자랑같지만."
알만했다. 심장이 멈출 정도로 큰 수술을 겪고도 제 나이보다 더 어린 나이에 대학교에 들어갔지 않았는가. 명석했을 그의 어린 시절이 저절로 상상이 되었다.
"어쨌든 이것저것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을 좀 하며 열심히 살았었죠. 그게 제가 아프고나서 .... 더 큰 아쉬움이 남아서 내게 신경을 모두 쏟아부으시게 된거에요. 지나치게 과열된 모습으로. 나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고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교에도 들어갔어요. 큰 사고로 사경을 헤매던 자식이, 그렇게 병상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채우려고 독학으로 월반에 월반을 거듭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주었으니 부모님은 점점 더 내게 기대를 하셨죠. 하지만 그 즈음에는 나도 지칠대로 지쳐버려서 전에 말했던 그 기울어진 시소 위에서 내려가고 싶어 애쓰고 있었어요. 그러는 동안 어느샌가 그 녀석은 내가 부모님의 모든 양분을 빨아먹은 사람인 것처럼, 음지에서 나를 원수처럼 노려보고 있었던 거죠."
"나도 억울한 거에요. 나에게도 사정이 있었잖아요. 나도 내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 한 건데. 그게 그 녀석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됐다는게 너무 미안하고 또 화가 났어요. 그리고 나의 상황에도 지쳤고."
"10년 넘게 내 의지대로 살지를 못했어요. 아프고 난 다음부터는 더 심해졌는데, 병상에 갖히기 전부터도 그랬어요. 나는 그냥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유리창에 비치는 야경을 보면서 속으로 꿈만 키운거죠. 너무 답답해서 무작정 병원을 뛰쳐나간 적이 있었어요. 정신차려보니 이곳이었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도, 집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하면서 공부에 파고 들어도. 여기서 본 저 커다란 달이 내 방 창문에 매일 밤 보이는 거예요. 그 뒤로 계속. 이미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방황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달빛이 파랗게 나를 비추는데...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다 싶었어요. 부모님 꿈에 맞춰서 살 자신이 없어졌어요. "
"마음이 시드니까 몸도 따라 아프더라고요. 끝난 줄 알았던 병상 생활이 또 시작된거예요. 건강을 담보로 부모님을 설득하는 시간도 힘들었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부모님은 두 손드셨고, 그렇게 편입 준비를 하다가 어느 날 학교에 들렀는데..... 사람들이 전부 나를 알아보더라고요. 나는 학교에 나갔던 적이 거의 없었는데. "
" 내가 지루한 병상에 누워서 끊임없이 읽어댔던 책들이, 쉴새없이 들었던 음악들이, 또 내가 그곳에서 탈출해서 몰래 겪고 돌아온 작은 일탈들이, 그렇게 내 안식처를 찾아가며 녀석과 나눴던 이야기들이 전부 흘러들어가 있더라고요. 내가 했던 말들, 내가 했던 행동들, 내가 부모님의 기대 속에 갇혀서 꿈만 꾸던 일들이 이미 그 녀석의 삶이 되어 있었어요. 그때도 몰랐어요. 녀석이 나를 미워하면서 한 편으로는 왜그렇게 나를 흉내냈을까. 왜 내 삶을 훔치듯 살았을까. 그래놓고 갑자기 사라진 건 또 뭘까. 나에게 들켜서일까. 처음엔 화도 나고... 그렇게 내 방황에 녀석이 보탬이 되어버린거죠. 시간이 흐르니까 궁금해지더군요. 나를 흉내낸 그애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나보다도 더 나의 꿈처럼 살고 있었던 그 녀석도 부러웠고. 미안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하고. "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그게 질투라는 걸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소라씨, 그거 알아요?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는거.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죠."
그가, 진짜 김남준이 나를 쳐다보았다.
" 사랑과 미움은 결국 같은 말이에요. "
-사랑하면 닮는다더라.
언젠가 선배가, 아니 가짜 김남준이.....아니면 진짜보다 더 진짜같았던 김남준이 취중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소라씨를 만나고나서 나는 더이상 그녀석한테 미안하지 않을 작정이에요."
"네?"
"나도 그 녀석을 질투하게 되었으니까, 이젠 쌤쌤이죠."
"왜요?"
"궁금하니까."
"뭐가요?"
"그 녀석이, 내 흉내를 내면서 소라씨와 어떤 추억을 쌓았을까."
"..........."
"지금보다 더 어렸을 소라씨는 어땠을까. 지금보다 더 사랑스러웠을까. 지금보다 더 안쓰러웠을까. 마냥 보듬어만주고 싶은 사람을 그 녀석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쳐다봤을까."
"뭐, 뭐 그냥 후배였겠죠. 고백해보기도 전에 차이고 끝났는데요."
그는 말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봐요?"
"그 녀석이 왜 사라졌는지 알 것 같기도 해요"
"왜 그랬대요?"
그는 대답 대신 짧게 웃었다.
"어찌되었던, 나는 소라씨에게도 더 이상 사과하지 않을거에요."
"........에!?"
생각과는 다른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와서 나도 모르게 불쑥, 마음 속의 말이 튀어나왔다.
"처음엔 당황했죠. 집 앞 운동장에서 어떤 여자가 뛰노는데.... 이 자식이 하다하다 이젠 내 여자취향까지 따라 했던건가."
그는 더이상 내 기억 속 선배가 아닌데, 나는 아직도 그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좋았어요. 단순히 외형의 취향 문제가 아니라. 같이 음악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감하고, 같이 요리를 하고 술 잔을 기울이며 속 깊은 이야기도 하고, 난로 앞에 마주 누워 잠들기도 하고, 같이 누워서 좋아하는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이 산골짜기 어딘가에 내가 잃어버린 시계가 있다는 걸 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서 발만 동동구르는 초침이 안쓰러운. 고칠 수도 없고 더이상 쓸모도 없는데, 예뻐서 그냥 지니고 있던. 그 낡은 시계가 정확히 어디있는 지도 모르겠는데, 아직도 난 그 시계의 초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데..."
그는 내 소매 끝에 슬쩍, 자신의 손 끝을 갖다 댔다.
"우리는 옷깃도 안스치고 서로 알기 전부터 인연이 되어 있었는데."
나는 물끄러미 그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려면 도대체 얼마나 억겹의 인연이 우리의 전생에 쌓여있어야 할까요?"
언젠가 선배가, 가짜 김남준이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우리의 인연에 대해서.
-사람의 인연이란 게 원래 그런거야.
선녀의 비단 옷에 다 닳아 없어진 커다란 바위. 닳아 없어지면서, 제 깎이는 살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다 닳아 사라지기 전에 무서워 어디론가 숨어 버리진 않았을까. .....누군가처럼.
"나는, 그래서 사과하지 않을거에요. 그 키스는 내 진심이니까. 오해받고 싶지 않아요, 내 진심."
낯설게 다가왔던 그의 행동들, 묘하게 나를 내려다 보던 표정들을 떠올렸다. 음악을 틀어주며 웃음을 선물하던 그의 어색했던 어깨 춤, 집 앞 낮은 돌계단에서 미끄러지던 나를 잡아 안고 그가 짓던 미소, 취중에 내게 입 맞추고나서 당황해하던 눈빛. 그의 집을 나서려는 날 다급히 잡아끌던 그의 손.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안식처에 나를 주저앉히고 싶었던 그의 마음. 그건 그냥 그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바로 지금 처럼.
".......알겠어요."
"화... 풀어주는거에요?"
좋아해서 따라하면서도 결국 마음 한 번 제대로 고백하지 못했던 어려운 선배는, 진짜 김남준이 아니었다.
-아니, 언젠가는 말하겠지. 그럼 그때 내가 너의 인연이 되지 않을까.
"네, 남준씨 진심 오해 안 할게요."
복잡한 마음으로 유리창에 싯귀를 적는 대신 나를 궁금해하던 남자. 잘하지도 못하는 칼질을 하며 어설픈 요리에 도전해주던 남자. 내가 그 팔에 기대어 읽던 책을 건냈을 때 웃으며 소설의 뒷 페이지를 읽어주던 남자. 인연에 대해 설명하며 벽을 만드는 대신 내 옷깃에 자신의 소매끝을 맞추는 남자. 진짜 김남준. 그가 환한 웃음을 띄웠다. 오랜만에 보는 보조개가 반가웠다. 더 이상 그의 얼굴 위로 낯선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뭐, 조금 야한 위로 정도로 받아들일게요."
"아니, 그건........제가 그게, 이런 적이 처음이니까..."
"처음이라니, 그렇게 잘.... 잘하더니"
"뭐무머뭐뭘 잘했는데."
"무슨 소리에요 완전 선수였는데."
"서..서..선 선수라니."
"차 시간 됐어요, 내려 가요."
"그러는 소라씨는 내가 선수인지 잘 하는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데요?"
"아... 그거야..."
"아 맞다,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고, 첫키스도 아니라고 그랬었지 참."
버스에 올라타고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그 나이 먹도록 처음인 게 자랑이에요?"
"처음이라니 누가 처음이야, 소라씨와 나의 처음. 그 소리였지"
"와 역시 그렇지 선수 맞다니까"
"무슨 소리 키쓰 딱 한 번에 알아채는거보면 선수는 소라씨구만. 이야, 내가 깜빡 속을 뻔 했어"
"아니, 이야기가 왜 그리로 튀어요?"
"먼저 그 쪽으로 튕긴 건 소라씨잖아요"
"우와, 김남준씨 진짜 똑똑하시네요. 기억력 짱이다."
"그렇죠 제가 겁나 한똑똑하죠. 소라씨도 만만치 않은데요?"
"그 쪽만큼 이성적이기야 하겠어요?!"
"아 거 되게 시끄럽네. 좀 조용히 합시다-"
흘깃흘깃 이쪽으로 시선을 주던 버스기사님이 결국 역정을 냈다.
"죄송합니다."
그가 머슥하게 사과를 하고나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마찬가지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돌리기가 무색하게 내 어깨 위로 그가 팔을 둘렀다.
"뭡니까, 겁나 이성적인 김남준씨."
"뭐긴 뭡니까. 전생에 억겹의 인연으로 맺어진 한소라씨가 내 인연이 정말 맞는가 확인 하는 중이죠."
"있잖아요, 내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획 돌리는데 쵹, 뭔가 익숙한 게 다시 와서 짧게 부딪혔다. 씨익, 초승달같은 눈꼬리가 가늘게 휘면서 눈밑의 애교살을 불리는 게 보였다.
"뭐예요"
눈을 세모꼴로 뜨고 위로 아래로 훑는데 그가 어깨에 두른 팔로 나를 가까이 당기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그렇게 잘했어요?"
궁금해서 묻는 표정이 아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휙 돌리며 중얼거렸다.
"뭐야... 진짜 야해."
그의 손이 내 뒤통수로 올라오더니 돌아간 내 고개를 다시 마주보게 돌렸다. 눈썹에 힘을 줄 때마다 보이던 이마의 긴 주름세개가 보였다. 그 밑의 가름한 눈매, 장난끼 가득찬 눈동자, 보조개 옆 입꼬리가 벌어지면서 가지런한 치아가 보인다.
"야한 거 더 해줄 수도 있는데...."
아아 웃고싶지 않다. 웃고싶지 않다. 웃으면 지는거다아.....
"변태."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가 변태인게 정상이지."
"똑똑한데다가 이성적이고 혈기까지 왕성해서 좋..."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쯔쯔... 기사님이 백미러로 이쪽을 보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김남준이 헤맸을 낯선 산골짜기를, 가짜 김남준이 들려주었던 그 산골짜기를,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 내가 흘러들어왔던 이 산골짜기를 달빛이 버스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고운 빛을 뿌리는 커다란 달을 향해, 나는 또다시 끝도 없이 둥실 떠올랐다. 그가 오랫동안 내려두었던 닻을 끌어올리며. 이 골짜기를 하얗게 덮고 있던 눈이 녹아 봄이 올 때쯤, 우리는 서로의 안식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닻을 내려주고, 다시 올려주면서. 아마도,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귀절을 쓰면 한 귀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편지/ 김남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