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원룸에서 하루종일 웃고 떠들던 그 시간처럼, 그와 그녀는 아직 웃고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마음의 응어리를 품고있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이 좋았다.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 세상에 둘만 남은 것처럼 창밖에는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져내렸다.
쾅-
유독 큰 천둥소리 하나에 그녀가 놀라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려했다. 품에 안자마자 그녀가 밀쳐냈지만.
“잠깐 놀란 거야. 호들갑 떨지마.”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난 그냥 네가 놀라서...”
“나한테 다정하게 굴지마.”
둘은 각각 다른 이유로 얼굴에 열기가 올라왔다. 그녀는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떨어져 눈물을 참으려 노력했다. 그를 밀어냈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억울했다. 순수한 호의가 수작질로 매도당했다. 아무리 우리가 헤어졌어도 그녀가 나에게 이렇게 매정할 수는 없다. 몇 년이나 지났지만 너는 항상 나한테 이런 식이구나. 그녀의 인생을 다 줄 것처럼 기대면서 정작 그가 손을 뻗으면 그를 버리고 도망간다.
“너는 왜 맨날 이런식이야? 왜 나한테만 그렇게 박하게 구는건데?”
“넌 항상 거짓말만 하잖아.”
“내가?”
“안좋아한다고 해놓고 좋아하고. 하늘에 별이랑 달 다 따준다고 해놓고 안따주고.”
“그럼 김여주 너는 왜 편지 안보냈는데?”
“안썼으니까 안보냈지.”
“우리 이제 거짓말은 그만하고 좀 솔직해지면 안돼?”
“그래. 어떤 게 솔직한 건데? 애써 뼈빠지게 일한 회사가 이제 곧 망하는 거? 아직도 남자 보는 눈 없어서 맨날 뒷통수 맞고 우는 거? 재현아, 이거 봐. 솔직하니까 내가 너무 초라하잖아.”
“하나도 안초라해. 여주야, 왜 항상 가장 불행한 선택지만 고르는거야? 힘들면 나한테 연락했어야지. 기댔어야지...너는 왜...”
그가 군대에서 아픈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녀도 아팠다. 하나뿐인 버팀목을 나라에 빼앗긴 그녀는 계속해서 넘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졸업을 했지만 졸업식에는 가지 않았다. 학교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그녀를 걸레짝 취급했으니까. 남자들은 하룻밤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질을 걸기 바빴고, 여자들은 그녀에게 말도 붙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없는 졸업식은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제 몸 하나 간수하기 위해서, 졸업을 하자마자 취업을 하고 돈을 벌어야했다. 월급을 더 많이 주는 곳, 복지가 좋은 곳보다는 지금 당장 나를 뽑아주는 회사가 필요했고, 결국 그저그런 회사에 급하게 취직을 했다. 그녀의 사수는 그녀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구박을 하곤했다.
그런 그녀의 사회생활의 초입에서 그가 군에서 보낸 편지를 기다리는 것이 하루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꼰대같은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며 오늘 우체통에 편지가 왔을까, 안왔을까? 왔으면 좋겠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편지를 기다렸다. 그에게 마음을 정리하라 얘기했지만 그가 답장도 없을 편지를 2년 내내 보내준 것에 그녀는 꽤나 감동했다. 길고도 짧은 그녀의 인생에서 만나왔던 수많은 사람 중 변하지 않을 사람은 그 뿐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렇게나 우직한 그 사람이라면, 거지같은 내 인생에 꽃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겠다.
그녀도 그에게 항상 편지를 썼다. 편지봉투에 우표가 붙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가 손을 한 번만 더 내밀어준다면 이 수많은 편지들과 함께 마음을 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항상 사랑에 목메어 살았지만, 여전히 사랑이란 감정은 어려웠고, 사랑을 전하는 방법을 몰라 서툴렀다. 말년 휴가를 나온 그의 눈빛이 어느새 달라진 것을 그저 군대에서 철이 들어 변한 것이라고 단순히 짚어넘겼다. 그가 전역하는 날만을 기다리며 이 편지들을 전해줄 순간에 감동받을 그의 얼굴을 날마다 상상했다.
재현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쩌면 너무 감동받아서 울어버릴지도 몰라. 휴지도 챙겨가야겠다.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던 그녀는 군부대에서 저벅저벅 걸어나오는 그를 보며, 제대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맨날 꿈에만 그리던 아름다운 사랑을 이뤄줄 정재현. 그가 곧 연인이 되어 사랑을 듬뿍 담은 눈빛으로 나를 봐주겠지 하는 생각에 들뜨는 기분은 감출 수 없었다.
“정재현!!”
“김여주! 너 회사는 어쩌고 여기까지 왔어?”
“큰 맘 먹고 연차냈지!”
“그래도... 피곤할텐데 집에서 기다리지.”
“누가 제대한 건데 당연히 마중 나와야지. 민간인 된 거 축하해!”
들떠있는 그녀와 다르게, 그는 차분했고 그저 덤덤하게 고맙다며 꽃다발을 건네들었다. 그래도 아무렴 어떤가. 기쁜 날이니까 상관없었다. 둘은 택시 정류장을 향해 나란히 걸으며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내 근황같은 건 안궁금해? 나도 물어봐줘!”
“음... 살이 더 빠졌네. 만나는 남자가 또 힘들게 해?”
그는 그녀에게 당연히 새 남자친구가 생겼을거라 확신하고 남자보는 눈이 고장난 그녀가 또 이상한 사람을 만나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 한껏 들뜬 그녀는 그런 그의 걱정을 여느때와 같이 귀여운 질투라고 넘겨짚었다.
“응? 뭐... 그런 편이지!”
“이번에는 어떤 사람인데?”
“그 사람은 말이야, 잘생겼어. 착해. 나한테 잘해줘.”
“나이는?”
“나랑 동갑이야!”
“그 사람한테 별이랑 달 따달라고 했어?”
“정재현 우주타령하는 건 여전하네? 음... 아직 안물어봤는데 아마 별 따는 시늉이라도 해줄걸?”
“응. 꼭 물어봐야돼. 나랑 약속한 거다?”
“지금 바로 물어볼까?”
“아니... 뭐... 당장 물어보라는 건 아니고...”
“재현아, 나한테 하늘에 별이랑 달 그런 거 따줄래?”
순간, 그가 지은 표정은 그녀가 몇날 며칠 상상했던 표정 중에 없었다. 조금은 당황스러운 표정. 그제서야 그녀는 아차 싶었다.
“아...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어.”
“안따줄거야?”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한 거 같아. 오래 기다리게 안할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어...”
“아니야! 내가 너무 예고없이 갑자기 그래서 놀랐지? 하하... 그럴 수 있어!”
“바로 답 못해줘서 미안해...”
그녀는 본인이 내뱉어버린 말을 후회했다. 가만히 있었더라면 우리의 관계는 어떤 식이더라도 계속 이어졌을텐데.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그녀가 어쩔 방법은 없었다. 기다려달라는 그를 기다릴 수밖에.
숨이 턱 막힐 것 같이 어색한 공기 속에 택시로 한 시간가량을 달려 집에 도착했다. 그는 곧장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고, 그녀는 그가 보기 전에 편지가 가득 담긴 선물상자를 캐리어에 숨겼다. 너무 초라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밀어냈으면서 뭘 기대했던 건지... 마음을 거절당할 때마다 그가 얼마나 아팠을지 이제야 실감이 났다. 그동안 그에게 못되게 굴어서 벌을 받는 것만 같았다.
긴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는 드라이기를 들고있는 그녀에게 아직 머리가 짧아서 괜찮다며 웃었다.
“아... 그러네...”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될 것 같아. 아마 밤새 마실거니까 기다리지말고. 푹 자. 내일 출근해야되잖아.”
냉장고 가득 그와의 저녁을 준비한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까만 비니를 쓰고 나서는 그를 바라만 봤다. 몇걸음만 걸어가면 저녁이라도 먹고가라고 그를 잡을 수 있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것 같이 멀고 아득해보여서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케이크, 고기반찬, 와인. 그를 위해 준비한 티가 나는 것들을 집 밖으로 내다버렸다. 내다버리려 한 것 중 와인만 도로 들고왔다. 이런 순간에도 쿨하지 못하게 와인 한 병이 아깝다는 게 너무 초라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난생처음 혼자 와인을 마시며 눈물 한바가지를 쏟아냈다.
그녀가 혼자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 잠이 들 동안, 그는 제대를 축하하는 친구들 무리에 섞어서 가식적인 웃음만 터트렸다. 제대주라며 술을 들이마신 건 그였지만, 그보단 그의 친구들이 먼저 맛탱이가 가버렸다. 취한 친구들을 모두 택시에 밀어넣고, 그는 혼자 남아 술잔을 기울였다.
밀어낼 때는 언제고, 어떻게 접은 마음인데 이제서야 곁을 내주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딱 잘라 거절할 수 없었던 이유가 아직 그녀에게 마음이 남아있어서인지, 소중한 관계를 잃고싶지 않아서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거절한다면 너는 어떻게 될까? 솔직히 그녀가 무너질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친구로도 보지 말자며 또 집을 나가겠지. 그럼 그녀는 혼자 어디로 향하게 될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원망보다는 걱정이 커졌다.
“그래.”
그가 내린 결론은 예스였다. 그는 그녀를 혼자 둘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녀니까. 다시 예전만큼 사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제 삶을 다 바쳐서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마음은 여전했기 때문에.
그가 해가 뜨기 시작하는 새벽에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있는 그녀가 보였다. 침대 옆에 앉아 자세히 들여다보니 배게에 남겨진 눈물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목이 메이고 가슴이 아려왔다. 작고 안쓰러운 눈 앞의 생명체를 안아주고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그녀 옆에 누워, 잠들어있는 그녀를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울려서 미안해... 그냥 내가 다 미안...”
그녀가 알람소리에 눈을 떴을 때, 저를 품에 안고 잠든 그가 보였다. 입영통지서가 날아온 그 다음날 아침이 오버랩되는 듯 했다. 그가 날숨을 뱉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알코올 냄새에 눈을 찡그리고 조용히 그 품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고백에 대한 긍정의 뜻인지, 술김에 바디필로우가 필요했던 건지, 그 행동의 의미를 생각하려다 그만뒀다. 이유가 어찌됐든 비참하다는 감정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너는 뭐든지 다 쉽구나. 순간 설렜던 제 자신이 한심해졌다. 계속해서 시끄러운 소음을 내고있는 핸드폰을 집어들어 알람을 껐다. 적막 속 홀로 잠들어있는 그의 얼굴은 평온해보였다. 아직 군인 티를 벗지못한 그의 까슬한 머리를 괜히 한 번 쓰다듬었다. 그래도 no라는 대답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는 그를 미워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사랑하고있었다.
그가 깨어나면 잔인한 말들로 그녀의 가슴에 못질을 할 것만 같아서, 그녀는 어느새 어깨를 훌쩍 넘긴 긴 머리를 다 말리지도 못한채 급하게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그녀는 하루종일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정도로 넋이 나가있었다. 그날따라 업무량도 적어 할일없이 멍을 때리기 일쑤였다. 폭풍이 오기 직전 하늘이 고요하듯이, 지극히 평화로운 하루가 흘러갈수록 그 하루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그녀는 불안해졌다. 피곤해 죽을 것만 같아도 자리가 나지 않아 맨날 서서 갔던 퇴근길 버스도, 웬일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편하게 앉아서 갔고, 한 번 신호를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건널 수 있는 사거리 횡단보도 역시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이런 게 운수 좋은 날인가 싶은 마음에 괜히 서글퍼졌다. 행운 총량의 법칙처럼, 이미 하루의 행운을 다 써버린 것만 같았다.
도살장에 억지로 끌려가는 소 처럼 터덜터덜 걸어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기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녀와 그의 생일을 합친 8자리 숫자를 다 누르기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아!! 깜짝이야!”
“아ㅎㅎㅎ 놀랐어? 얼른 보고싶어서 뛰어나왔는데.”
“뭐?”
“오늘 피곤했지? 고생 많았어.”
그는 문 앞에서 벙쪄있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는 그런 그녀에게 씩 웃어보였다.
“서프라이즈!”
“뭐하는 거야?”
“어제 고백 받고 바로 알겠다고 하기엔 내가 그동안 마음 고생을 좀 많이 해서! 괜히 한 번 튕겨봤는데, 많이 속상했어?”
“이씨... 뭐야!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엄청 질질 짰는데!”
“내가 꼭 행복하게 해줄게. 하늘에 별도 달도 다 따줄게! 이제 온 우주가 다 니꺼야 여주야.”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의 말을, 그녀는 철썩같이 믿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다섯 손가락에 꼽으라면 그 순간이 첫번째였을 것이다. 그는 서럽게 우는 그녀가 그칠 때까지 안고 토닥였다. 그 때 그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었나. 그건 사랑이었을까, 혹은 연민이었을까?
몇 달 정도는 정말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했다. 평일에는 그녀가 회사에 출근하고 주말에는 그가 토익학원을 다녀 제대로 된 데이트도 몇 번 못했지만, 매일 같이 밥을 먹고 매일 서로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스킨십이 많아진 것 이외에는 이전과 별다를 게 없었지만, 마냥 좋았다. 연인이 되었다고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둘은 이미 특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관계가 깨지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사소한 실금이 하나하나 그어지다 어느 순간 한계치를 넘어 산산조각이 난다.
“재현아 우리 주말에 여행이라도 갈까? 기차여행이나 제주도 어때?”
“아... 미안. 복학하자마자 졸업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당분간은 좀 힘들 거 같아.”
“아, 나도 그 때 엄청 바빴는데 내가 생각을 못했다. 미안.”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진짜 바쁜 건 넌데 맨날 나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에이, 여행이 뭐 별건가? 나는 집에서 하루종일 너랑 있는 것도 좋아.”
“이해해줘서 고마워 여주야. 종강하면 우리 하고싶은 거 전부 다 해보자.”
“응! 정재현 얼른 졸업했으면 좋겠다~ 정장입고 출근하는 거 보고싶어!”
그녀는 그의 말을 항상 곧이 곧대로 믿었다. 그가 곧 졸업만 하면 둘만의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큰 행복을 위해 잠시 눈 앞의 행복을 미루는 것이라고, 그래도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고 최면을 걸었다.
금이 간 그녀의 믿음이 산산조각 난 순간은 그 해 겨울의 초입,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날들 중 하나였다.
“재현아,우리 이사가자! 너 취직하면 우리 회사랑 너네 회사 딱 중간에 있는 집으로 가는거야. 나도 조금이지만 돈 좀 모았고...”
“여주야.”
“어? 왜? 이사가기 싫어? 여기 너무 정들었나?”
“나 대학원 갈거야.”
“뭐? 그런 얘기 한 적 없잖아.”
“옛날부터 생각은 하고있었어. 너가 너무 바빠보여서 얘기 못했는데 나 그래도 석사까지는 따고싶어.”
“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딱 2년. 석사 2년만 마치고 그 때 가자.”
“그래, 응원한다는 말부터 했어야되는데 싫은 소리부터 해서 미안해. 내가 요즘 너무 피곤해서 예민해졌나봐.”
애써 괜찮은 척 웃어 넘겼지만 그녀는 정말 괜찮지 않았다. 둘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고, 같이 무언가를 해보자는 말은 항상 그녀의 입에서 나왔고 그의 대답은 항상 나중에. 라는 통보였다. 친구, 연인, 그리고 가족이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남보다 못했다.
그의 인생에 나란 사람은 무엇일까? 옆에 있는 것이 너무 당연해서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 아니면 그저 떼어낼 수 없는 걸림돌?
그녀는 이미 깨진 신뢰를 숨기고 그의 옆에 머물렀다. 서운하다 말하면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것만 같아서.
대학원에 진학하겠다 말한 뒤로, 그는 졸업 전에도 실험실에 출근하며 잡일을 시작했다. 항상 그녀보다 늦게 퇴근했고 일주일에 세 번은 실험실 회식이라는 이유로 술을 진탕 마시고 새벽에 들어왔다. 그녀는 고생하는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미친듯이 서운했다. 그녀도 남들이 하는 평범한 연애처럼 남자친구와 데이트도 하고 여행도 가고싶었다. 취직을 하고 돈을 벌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결국 제자리걸음이었다.
“졸업 축하해”
그의 졸업식. 그녀는 누구보다 큰 꽃다발을 안고 그의 졸업을 축하하러 갔다.
“고마워. 졸업해도 학생인데 축하받는 게 좀 부끄럽기도 하네.”
금세 자란 머리를 왁스로 올리고 학사모를 쓴 그는 행복해보였다.
“어? 여주 맞지? 진짜 오랜만이다. 나 기억하지?”
그 옛날 술자리에서 만난 그의 친구가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하며 사진을 부탁했고 그녀는 흔쾌히 카메라를 들었다. 사진을 한 장, 두 장 찍기 시작하자 어느새 하나 둘 옆으로 온 그의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처음 말을 건 친구를 제외하고는 사진을 찍어달라, 고맙다 얘기도 없이 그녀를 사진기사 취급할 뿐이었다. 그녀는 언짢은 기분을 누르고 굳은 표정으로 셔터를 누를 뿐이었다.
“정재현! 오늘 끝나고 동기들끼리 뒤풀이 해야지?”
“아 당연하지. 내가 언제 빼는 거 봤어?”
“오오~ 그럼 끝나고 카톡할게!”
“어어. 너도 졸업 축하해!”
조용히 셔터를 누르던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진은 이미 충분히 찍은 것 같아서 그의 친구에게 카메라를 건네주고 조용히 구석에서 화를 삭혔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느낀 그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그녀를 살짝 안았다.
“나 뒤풀이 가지말까?”
“아니야. 잘 놀다 와.”
“화났어?”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뭐 잘못했으면 얼른 얘기해줘. 응?”
“내가 화났다고 안가면.”
“너가 싫어하면 안가.”
“그럼 내가 뭐가 돼 재현아. 그럼 누가봐도 나 때문에 안가는 건데.”
“안가도 괜찮아.”
“내가 싫다고! 하... 화내서 미안해. 근데 진짜 그런 거 아니니까 뒤풀이도 빠지지 말고 나때문에 뭐 안한다, 그런 얘기 하지마.”
“김여주.”
“나 피곤해서 먼저 갈게. 동기들이랑 잘 놀고, 나 일찍 잘테니까 늦게 들어와도 괜찮아.”
그녀는 어깨를 감싸고있던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온갖 잡생각이 몰려와 견딜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녀를 가장 아프게 한 기억은 집에서 혼자 외로이 축하한 그녀의 졸업식날의 기억이었다.
그녀의 졸업식도, 그의 졸업식도, 둘이 찍은 사진 한 장 없이 지나가버렸다.
둘의 연애는 그래도 어떻게든 지속됐다. 그녀는 매일 밤 사랑한다는 달콤한 속삭임을 들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항상 그의 사랑을 의심했다. 그에게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 알고싶지만 알고싶지 않았다. 그냥 흘러가는대로 살아가다보면 정말 행복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그는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점차 예민해졌다. 그녀에게 티를 내지 않았지만 스트레스로 인한 신경과민으로, 그녀가 조금 뒤척이기만 해도 잠에서 깨기 일쑤였고 그녀와 야식이라고 먹은 날에는 속이 더부룩해 그녀가 잠든 이후에 조용히 속을 게워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조용히 잠든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들 때까지 눈을 감고 밤 하늘의 별을 그렸다.
시간은 보통의 나날들을 지나 빠르게 흘러 그의 두 번째 졸업을 두 달 정도 앞두고있었다. 그의 대학원 실험실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있는 선배의 결혼식. 위계질서가 엄격한 대학원생이기 때문에 꼭 참석해야했고, 그는 당연하게 그녀와 동반했다. 언젠가 우리도 이렇게 결혼식을 올리겠지 생각하며 그는 조금 들떠있었다.
식장에 들어가기 직전, 뛰어다니던 어린 아이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그녀의 원피스자락에 엎어졌다. 그녀는 웃으며 놀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아? 내가 티슈를 챙겼나...”
“괜찮아. 화장실에서 대충 닦아내면 돼.”
“오늘 너무 예쁜데 속상하다.”
“먼저 식장 들어가서 인사드려! 얼른 이것 좀 수습하고 나도 들어갈게.”
“알겠어. 인사만 하고 앉아있을게.”
“응. 너 못찾을 거 같으면 전화할게.”
그녀가 화장실 세면대에서 아이스크림이 묻은 원피스를 조심스럽게 정리하고 있을 때, 한 여자가 들어와 그녀의 옆에서 손을 닦았다. 어쩐지 느껴지는 시선에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푹 숙이고 얼룩을 지웠다. 세면대 거울을 통해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여자가 피식 하는 웃음소리를 내자, 그녀가 힐끗 쳐다봤다.
“그쪽 정재현 여자친구, 맞죠?”
미소를 띤 얼굴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방금 전의 그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저 아세요?”
“와, 나였으면 쪽팔려서 못왔을텐데. 뭐... 듣던대로 예쁘장하긴 하네.”
“뭐라구요?”
“우리 과 동기들은 다 알아요. 정재현 꽃뱀한테 물렸다고 소문 쫙 났거든요.”
“허... 어디서 그런 헛소문이 났는지 모르겠는데 초면에 무례하시네요. ”
“헛소문은 무슨... 이 남자 저 남자 꼬리치고 다니면서 각 재다가 애써 마음 접은 애한테 들러붙은 거 다 아는데.”
“네?”
“재현이가 말은 안해도 뭐, 어떻게 꼬셨는지도 알만하고?”
“한 마디만 더 하면 그 입 찢어버릴거니까 헛소리 그만하시죠.”
“정재현 취향도 참...”
그 여자는 화장실을 나가면서도 그녀를 위 아래로 훑어봤다. 그 여자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커다란 구렁이가 몸을 휘감으며 옥죄는 듯했다.
끝이 없는 것 같이, 한없이 떨어지는 듯한 마음에 그녀는 두 손으로 양 뺨을 짝 소리가 나게 때리고 거울 속 본인을 노려봤다.
정신차려. 오늘은 티 내면 안돼. 저런 소리를 듣는 것도 다 네 업보야. 큰 행복을 감당하려면 이런 일도 있는거야. 이겨내야지.
근데, 지금 난 정말 행복한가?
그녀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을 떨쳐내고 식장에 들어가 그를 찾았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단번에 찾을 수 있을까 했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무색하게, 단번에 그가 앉은 자리를 찾았다. 조용히 그 옆에 앉으며 괜히 활짝 웃었다.
“정재현 진짜 잘생겼네. 누구 남자친구야?”
“김여주꺼.”
“같이 오길 잘했다. 나 없었으면 누가 납치했을 거 같아.”
“너도 나 없이 결혼식같은 거 가지마. 불안해.”
“진짜? 나 예뻐?”
“응. 예뻐.”
그는 사랑스러운 눈빛을 하고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억누른 화 때문인지 혹은 그녀가 제 뺨을 때린 것 때문인지 그녀의 뺨은 뜨거웠고, 느껴지는 열기에 그의 눈이 커졌다.
“너 어디 아파?”
“아니야.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너 여기 핏줄도 터졌어. 무슨 일 있었어?”
핏줄이 터졌다는 말에 놀라 가방 속 거울로 얼굴을 확인하니, 그녀의 하얀 얼굴에 미세하게 빨간 점들이 올라왔다.
“아... 결혼식장이니까 괜히 긴장돼서! 화장실에서 뺨 좀 때렸는데 너무 세게 쳤나봐.”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걱정하는 그에게 애써 웃음을 짓고 결혼식이 시작된다며 말을 돌렸다.
그녀는 행복한 신랑 신부를 보며 내내 집중할 수가 없었다.
“우리 과 동기들은 다 알아요. 정재현 꽃뱀한테 물렸다고 소문 쫙 났거든요.”
“헛소문은 무슨... 이 남자 저 남자 꼬리치고 다니면서 각 재다가 애써 마음 접은 애한테 들러붙은 거 다 아는데.”
그 뱀같은 말들이 머릿속을 휘감아서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혼식을 축하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몇명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녀는 고개를 똑바로 들 수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녀는 다시 홀로 남겨졌다. 결혼의 당사자는 이미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무슨 축하를 한다고 자기네들끼리 뒷풀이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대학원 군기랍시고 그를 빼앗아가는 대학원생들이야속했다. 오늘만큼은 혼자 남겨지고싶지 않았지만 그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혼자 터덜터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직 덜 지워진 원피스의 얼룩을 손으로 문지르며 울지 않기위해 이를 악 물었다.
그 날 그는 만취상태로 자정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우리 예쁜 여주! 안자고있었어?”
“술냄새...”
“으어... 여자친구가 너어무 예쁘다고 술 엄청 받아먹었어!”
“그랬어?”
“헤... 사랑해”
“재현아.”
“응?”
“우리 헤어지면, 다시는 보지말자.”
“안헤어지면 되지!”
“아니. 우리 헤어져. 나는 너랑 행복할 수 없을 거 같아. 나 없이도 잘 살아. 재현아.”
그녀는 미리 챙겨둔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그는 알딸딸한 정신으로 이미 닫힌 문을 멍하니 보다 잠들었다. 말도 안되는 꿈이라고 생각하며 하루를 끝냈다.
다음날, 그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없었다. 오래 전 그녀가 그랬듯이, 그녀는 또 예고없이 떠났다. 그가 그녀를 만나고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억울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이렇게 말도 없이 떠난 건지. 온 마음을 다 내비추며 사랑만 줬는데 돌아오는 건 상처뿐이었다. 몇 년째 똑같은 아픔을 돌려주는 그녀가 이제는 버거워졌다. 새 살이 돋아난 상처에 펄펄 끓는 물을 끼얹은 것 같이 아팠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를 붙잡을 자신도 없었다.
22살의 초입에 처음 만난 둘은 26살의 마지막에서 헤어졌다.
그녀가 떠나고 유일하게 집에 남은 그녀의 흔적은 낯선 상자 하나였다.
그마저도 있는 줄 모르고 지내다, 이삿짐을 챙기며 발견했다. 제 물건이 아니기에 그냥 버릴까 하다가 무엇이 들어있는지 몰라 열어봤다. 백 장은 족히 넘어보이는 편지봉투가 가득 담겨있었다. 처음 보는 편지들이었다. 봉투에는 보내는 이도, 받는 이도 적혀있지 않아서 결국 하나하나 뜯어 보았다.
오늘은 진짜 최악이었어 재현아. 김대리가 파일 날려먹고 나한테 뒤집어씌운 거 있지? 근데 그냥 죄송합니다 하고 말았어. 그럼 이제 미안해서라도 나 안갈굴 거 아니야. 이런 게 사회생활인가 싶기도 하고. 모르겠어. 보고싶다 재현아.
오늘은 설날이야! 어머님이 네가 휴가 못나와서 속상해하시길래 올해는 내가 떡국도 만들어드리고 안마도 해드리면서 네 효도 대신했다? 적적하셨는데 딸 생긴 것 같아서 좋으시대. 그러니까 걱정하지마. 너 없는 자리는 내가 잘 지키고있어. 보고싶다 재현아.
재현아 오늘 편지 받은 거 읽었는데말이야. 박병장은 제대 안해? 너한테 은근히 짬때리고 그러는 거 같은데 너한테 또 그러면 편지에 거북이랑 토끼를 그려. 그럼 내가 국방부에 신고할테니까! 아 진짜 웃기다. 편지 보내지도 않으면서 이런 소리를 다 하네.
재현아 오늘 영업팀 박대리님이 술 사준다고 막 나 꼬셨다? 옛날같았으면 좋다고 따라갔을텐데 그냥 남자친구 있다고 거짓말했어. 그리고 혼자 집에서 맥주 마시는데 오늘따라 더 보고싶다.
내가 한참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사람은 너밖에 없는 것 같아. 돈이랑 집 다 필요없어! 그냥 정재현이라는 사람이랑 평생 같이 살면 나같은 사람도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변하지 않을 사람은 너뿐이야 재현아. 너한테 이런 말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 친구로라도 평생 같이하고싶어서 그런 마음을 열심히 참았는데 이제는 못참을 만큼 너무 커져버렸어. 꿈에서 니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는데 꿈인 걸 알면서도 펑펑 울었어. 니가 나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그동안 모질게 대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너 전역하면 내가 꼭 고백할거야. 누구한테 먼저 고백하는 건 처음이라 서툴지도 몰라. 그래도 네가 웃으면서 받아줬으면 좋겠다. 보고싶어 재현아.
전해지지 않은 편지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눈물이 소나기처럼 주륵주륵 내렸다. 몇년 전의 편지로 그녀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떠나며 어떤 마음이었을지, 얼마나 아팠으면 떠나간 건지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너무 지쳐서 네가 보냈을 수많은 신호들을 지나쳤겠지. 애초에 네 마음이 너무 커서 내가 다 담을 수 없는 그릇이었을지도 몰라. 그런 너를 몰라줘서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왜 맨날 이렇게 도망만 가는거야? 힘들면 얘기하고 나한테 기대고! 그러면 안돼?”
“재현아.”
“나는 아직도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몰라. 그래도 네가 힘들어서 떠난 것 정도는 알아. 그 때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우린 헤어지지 않았을거야.”
항상 위태로운 그녀를 붙잡으려하면 모래를 잡듯이 손가락 사이로 바스러져 빠져나갔다. 잡히지 않는 그녀가 야속하면서도 그녀가 잡히지 않는 것이 다 제 탓인 것만 같아서 결국엔 저 자신을 탓하게된다. 조금 더 표현하고 한 번이라도 더 안아줄걸 하는 후회만 가득했다.
“네가 싫다고 말했으면 대학원도 안갔을거야. 나는 그냥... 네가 안정적인 삶을 원하니까... 능력있는 사람이 되고싶었어. 믿지 않겠지만 내 1순위는 항상 너였어.”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우리가 항상 서로에게 솔직했다면 영원히 사랑할 수 있었을까?
“I miss you.”
“나도... 보고싶었어. 정말로.”
“그래. 보고싶었어. 근데 내가 말한 뜻은... 내가 널 놓쳤다는 거야.”
“아...”
“내가 널 놓친거야. 하늘에 별도 달도 따주겠다는 남자를 내가 놓쳤어. 내가 널 믿지 못해서.”
“내가 줬던 마음이 부족했어?”
“너는 항상 과분한 마음을 줬어. 근데 나는 네가 준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 그저 연민일까봐... 불쌍한 나한테 자투리같은 마음을 적선해주는 거면 어쩌지? 덜컥 마음을 다 받았다가 네가 떠나버리면 나는 어떡하지? 항상 의심했고 불안했어. 나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너를 떠난거야.”
“한 번이라도 더 사랑한다고 말해줄걸...”
“네 탓이 아니야. 너를 만나는 동안, 내 행복은 온통 너였어. 내가 못난 사람이어서 미안해.”
“이럴거면 공항에서 아는 척도 하지말지... 나는... 내가 그 때 어떤 마음이었는데... 왜그랬어?”
“그냥... 운명같았어. 사실 나 너랑 헤어진 후에도 계속 제자리걸음이었거든? 그냥 마지막으로 얼굴 보고, 못난 마음 다 털어내라고 누군가 널 나한테 보내준 거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어.”
“그럼 나는? 난 아직 하나도 준비 안됐어.”
“끝까지 이기적이라 미안해. 아직 사랑이라는 마음이 남았다면, 나를 위해서 그냥 보내줘.”
“여주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널 잡아...”
“고마웠어. 내 이십대를 외롭지 않게 지켜줘서. 정재현이라는 사람이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거야.”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엉엉 우는 그를 더이상 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돌리고 황급히 일어섰다.
“아, 너랑 한 방에 더 못있겠다. 나 이제 나갈건데, 마지막으로 한 번 안아줄래?”
눈에 별같은 눈물이 맺힌채로 그녀는 또 마지막을 말했고, 그는 그녀를 와락 안고 남은 눈물을 모조리 쏟아냈다.
“이건 절대 마지막이 아니야. 우리는 또 운명처럼 우연히 마주칠 거고, 운명처럼 다시 사랑할거야.”
“잘 지내. 재현아.”
그녀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 잘 지내라는 말을 끝으로 뒤돌아서 그대로 방 문을 나갔다. 그도 더이상 그녀를 잡지 않았다.
그가 한숨 자고 일어난 후에 창밖을 보니, 언제 천둥번개가 쳤냐는 듯이 구름 한 점 없이 쨍쨍했다. 모든 것이 꿈만같았다. 비행기가 뜨지 않은 것도, 그녀를 만난 것도, 불과 몇시간 전의 일이 아주 오래 전의 기억처럼 아득했다.
짧은 외전, I Got You |
우연처럼, 운명처럼 낯선 타국에서 그를 만나고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망할 줄만 알았던 회사는 망하지도 않고 어찌저찌 계속 굴러갔다. 그녀가 삼십대에 들어서고 가장 처음 한 일은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었다. 그녀는 거지같은 회사를 때려쳤다. 쉼 없이 달려온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온전한 휴식을 만끽했다. 가끔 줄어드는 통장잔고를 보며 손톱을 물어뜯기도 했지만 그녀는 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까지 힘들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쉬면서 행복하기만 하는거야. 바쁜 일상 덕분에 이렇다할 취미도 없던 그녀는 매일같이 어느 카페에 출근도장을 찍으며 창가에 앉아 책을 읽었다. 이제 카페 직원도 그녀가 들어오면 메뉴를 묻지도 않고 카드만 받았다. 그녀는 그 날도 평소처럼 같은 음료를 들고 같은 자리에서 책을 읽었다. 온 신경을 책 속의 글귀에 집중해 카페에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드륵- 가까운 곳에서 의자가 끌리는 낯선 소음이 들자, 그녀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어?" "니가 그 때 이렇게 말했었지?" 말끔한 정장차림의 그가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말을 걸었다.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엔 온통 물음표가 가득했다. "일부러 찾은 건 아닌데, 지나가다 우연히. 누가 책 읽는 게 보여서." "그게 말이 돼?" "그럼 우연이 아니라 운명인가봐." "와..." "그래서 넌 지금 행복해?" 지금 행복하냐는 그의 뜬금없는 물음에,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이제서야 행복하다. "행복해지는 중이야." "그럼 더 행복해지는 거 어때?" "어떻게?" "내가 너한테 하늘에 별이랑 달을 따줄게. 김여주. 아직도 여전히 사랑해." 서툴고 아팠던 이십대가 지나간 그녀의 30에, 여전히 풋풋하고 예쁜, 한결같은 마음을 간직한 그를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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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이번 글도 끝이 났네요. 쓰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이 그냥 장편으로 쓸걸 이란 생각입니다ㅜㅠ 짧게 끝내려니까 생략된 부분이 많아서 아쉽네요 시작할 때는 열린 결말로 끝내려고 했는데 마음이 아파서 짧은 외전을 덧붙이고 나름 해피엔딩? 조금 닫힌 결말로 끝을 냈어요.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우리 모두 행복합시당 헿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