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데려와
1.
수빈은 마을에서 몸집이 가장 컸어. 조용한 성격이라 막 눈에 띌 행동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었지만 수빈을 모르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어. 늑대들을 이끌 리더 부부의 막내아들이었거든. 근데 이미 누나하고 형이 하나씩 있는 마당에 수빈은 본인까지 리더 자리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어. 오히려 아주 관심이 없이 지냈어. 실제로도 관심이 없기도 했고 말이야. 마을 잡일이나 소소하게 도우면서 지냈지, 마을 대소사에 관여하고 마을 대관에서 회의하고 그런 건 오로지 누나와 형 그리고 부모님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은빛 늑대들은 설산 밑에서 지내는 터라 눈이 밀려내려 오지 않도록 늘 신경 써야 했어. 매년 누나와 형이 이 보수 작업에 번갈아 투입이 됐는데 정작 그 작업을 실행에 옮기는 건 수빈의 몫이었어. 마을 청년들을 데리고 일 년에 몇 번 정도 이뤄졌어.
그래도 누나하고 형도 선의의 경쟁 상대일 뿐 사이는 아주 좋았어. 얼마나 보기 좋은 남매야. 안 그래? 수빈은 지금 생활이 마음에 들었어. 골치 아픈 일 안 맡아도 되고 책임질 것도 없고 얼마나 편해. 수빈이 할 일은 적당한 시기 맞춰서 잘 결혼하는 거? 딱 이 정도.
2.
마을 사업으로 얼마 전에 누나가 도서관을 하나 지었어. 그냥 마을에 있는 아담한 크기의 도서관이었는데 미적 감각이 뛰어난 누나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았는지 전체적인 분위기부터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정말 좋았어. 누나와 형이 하는 일에는 최대한 말을 아끼던 수빈도 이번 도서관에 대해서는 넌지시 칭찬을 흘렸어. 누나가 되게 좋아하더라.
수빈은 누군가 본인을 찾을 때가 아니면 늘 도서관에 가 있었어. 책을 읽을 때도 있었고 다른 때에는 그저 그 분위기에 잠겨 자리만 우두커니 지키고 있을 때도 있었지. 주로 창가 쪽, 벽난로 열기가 적절하게 닿는 자리에 앉아서 책을 보거나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거나 소소하게 짧은
잠을 자곤 해. 맨 마지막에 도서관 문을 잠그는 것도 역시 수빈이고 말이야.
도서관을 나와서 달빛마저 얼릴 것 같은 추위에 몸을 한껏 웅크리고 큰 거리로 나와 대관을 지나쳐서 집으로 돌아갔어. 이따금씩 책 한두 권을 팔에 끼고 왔어.
3.
그런데 요즘 수빈의 자리에 누가 자꾸만 먼저 앉아있는 거 있지. 처음에 수빈은 아 저 자리가 나만 좋은 게 아니었나 보네 싶었는데 이제 거의 매일같이 자리를 빼앗기는 것 같은 거야. 수빈은 매일 언젠지도 모르는 일찍 도서관 '그' 자리에 앉아서 두꺼운 담요를 두르고 늘 뜨거운 유자차를 가져와서는 처음에는 책을 읽다 나중에는 창밖만 하염없이 보다 꾸벅꾸벅 졸더니 화들짝 깨어나서 다시 책 읽기를 반복하는 그 여자의 등만 보면서 다시 자리를 되찾으리라 이를 갈았어.
처음엔 도대체 언제 자리를 뜰까 하고 바라보던 게 점점 다른 게 눈에 들어왔어. 늘 무릎을 덮는 담요는 짙은 남색이었고 엄청 두꺼워 보였어. 오른쪽에는 항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병이 있었는데 그게 유자차라는 것도 이젠 알아. 허리까지 내려오는 푸른빛이 감도는 은빛 머리를 낮게 묶고 주로 여행기를 읽었어. 소매까지 덮는 품이 넉넉한 갈색 카디건을 입고 이따금씩 마른 기침을 두어 번씩 했어. 눈이 좋지 않은 건지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기도 했고.
몸이 안 좋은가
4.
여느 때처럼 수빈이 도서관에 갔어. 눈에 보이는 책 한 권을 대충 집어 들고 도서관 안쪽으로 들어갔어. 웬일인지 그 자리가 비어있었어. 한 번도 수빈보다 늦게 온 적이 없었는데. 수빈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자리 뒤에 앉았어. 항상 그 애를 지켜보던 그 자리가 이제는 더 편했어. 책을 읽다가도 눈이 제멋대로 움직여서 비어있는 그 자리로 향했어.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는데도 손끝 하나 보이지 않는 게 왜 이럴게 신경이 쓰이는지 수빈은 결국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던 책을 덮고 도서관 밖으로 나갔어. 도서관에 없으면 아마 밖에 있겠지. 싶은 마음에 무작정 움직인 거야. 수빈은 원래 충동적인 행동은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수빈은 제일 큰 길로 나왔어. 그리고 곧장 시장으로 갔지. 시장에는 늘 사람이 몰리니까 아마 그곳에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 그리고 이 눈밖에 없는 설산에 따로 뭐가 있겠어. 그나마 갈 곳이라곤 시장이 다였으니까. 수빈은 시장에 잘 가지 않는 편이었어. 일단 물욕이 그렇게 넘치는 편도 아니고 쇼핑을 즐기는 편도 아니기도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일단 마을 사람들이 본인에게 하는 말들이 너무 부담스러웠거든. 위에 말했다시피 수빈은 누나하고 형이 내리는 지령을 받아들고 그걸 그냥 실행에만 옮기는 쪽이었어. 가족 내에서도 종이 인형이 따로 없다고 놀림을 당했지만 그래도 타고난 하드웨어는 성능이 뛰어났거든. 본인이 그걸 갈고닦는 과정을 굉장히 싫어할 뿐이었지. 이를테면 운동이라던가 또 운동이라던가.
그러다 보니 마을 사람들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수빈이었지. 더 많이 얘기하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같이 움직이고. 아마 이 세 남매 중에서 가장 평판이 좋고 지지를 많이 받는 건 수빈일 거야. 그래서 시장 같은 데를 가면 꼭 한 소리씩 듣지. 왜 나서지를 않냐고. 막내가 대장 일하기에 아주 딱인데. 수빈은 그때마다 그냥 허허 웃으면서 빠져나갔지만 진짜 듣기 거북했어. 근데 그 여자애 하나 때문에 왔다니 좀 웃긴 일이야 그렇지?
5.
수빈은 시장에 가서도 그 여자애를 못 찾았어. 분명 있을 거라고 반은 확신하고 왔는데 어째 닮은 것 같은 얼굴 한 번 못 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어. 정말 이제 막 태어난 아기 늑대가 아니면 모르는 얼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 나타나니까 너무 궁금했어. 그런데 그 여자애가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도서관에 나오지 않는 거 있지. 수빈은 이제 정말 안되겠다 싶었어.
결국 그 애가 3일을 내리 도서관에 나오지 않자 수빈은 누나에게 물었어. 여자애니까 형보다는 누나가 더 잘 알겠다 싶었거든. 누나한테 그 애 인상착의를 설명했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키는 본인 가슴팍 정도 오는 것 같고 짙은 검정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고 하얗고 마른 애. 누나가 잘 모르는 것 같자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고 몸이 좀 아픈 것 같다는 말까지 덧붙였어. 누나는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엄지와 중지를 부딪혀 소리를 딱 냈어. 찻집 딸!
6.
누나가 걔를 어떻게 아냐고 묻길래 수빈은 도서관에서 만났다고 했어. 수빈의 말을 듣고 누나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 그 애가 책을 그렇게 좋아한대. 근데 몸이 많이 아픈가 봐. 지금 다시 병상 신세래. 이미 표정으로 말을 하는 수빈에 누나는 지체 없이 말을 꺼냈어. 원래부터 몸이 좀 안 좋아서 밖에 잘 못 나와서 친구도 없나 봐. 그래서 책을 그렇게 읽는데 찻집 아줌마 말로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안 좋긴 했는데 이제 연말이 되고 월동 준비할 때쯤 몸이 더 안 좋아져서 이맘때쯤에는 아예 앉아있지도 못한다더라. 너랑 또래라는데 내가 내일 병문안이라도 좀 가보려고. 너도 같이 갈래?
7.
수빈은 책 한 권이랑 꽃다발을 손에 들었어. 원래는 책만 들고 갈 생각이었는데 누나가 억지로 들게 시켰어. 누나의 뒤를 따라서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찻집에 갔어. 누나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작은 종소리가 울렸어. 수빈은 주변을 살피면서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갔어. 따뜻하고 아기자기했어. 찻집 주인아줌마는 누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맞았어. 누나는 들고 온 선물을 건넸지. 수빈은 그 뒤에 그냥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어. 주인아줌마는 수빈도 반갑게 맞아주셨어. 여자애가 어디 있는지 묻는 누나의 말에 주인아줌마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졌어. 찻집 안쪽으로 들어가자 새로 커다란 문이 나왔어. 그 문은 찻집하고 집을 연결해 주는 문이었어.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이 나왔거든. 그 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방 앞에 아줌마가 멈췄어. 아줌마가 문을 똑똑 두드리고 말했어. 어제 말한 손님 오셨어. 들어갈게.
앉아있지도 못한다는 누나의 말이 사실이었던 건지 그 애는 정말 누워서 끙끙 앓고 있었어. 아줌마는 그 애의 흰 털을 쓸어넘기면서 살살 흔들었지. 그 애가 눈을 힘겹게 떴어. 누나는 그냥 얼굴만 보러 가려던 거라며 굳이 깨우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그 애가 이미 눈을 떠서 자리에 앉았지. 그 애가 모습을 바꿨어, 이 간단한 것도 힘이 많이 드는지 숨을 몰아쉬더라. 누나는 별 얘기 안 했어. 그냥 안부 정도 묻고 몸이 괜찮아지면 도서관 관리를 맡기고 싶다 정도. 누나는 수빈을 남겨두고 잽싸게 방을 빠져나갔어. 수빈은 황당했지. 그래도 눈앞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려가며 겨우겨우 앉아있는 애를 더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어.
자주 읽는 것 같아 보이는 책이라고 생각해서 들고 왔어요...
책 읽는 거 좋아한다는 얘기 들어서...
책하고 꽃다발을 그 애의 침대 옆에 있는 협탁에 올려두고 바로 방을 빠져나왔어.
8.
연말은 누나, 형보다 수빈이 바쁜 시기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손볼 게 많았거든. 열두 달 중 마지막 두 달만 수빈이 일하는 기간이었지.
눈이 밀려 내려오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울타리 교체나 마을 사람들 집 보수 작업과 같은 월동 준비는 전부 수빈의 몫이었으니까.
몸 쓰는 걸 제일 싫어하는 데 한결같이 몸 쓰는 일만 하게 된 거야. 수빈이 직접 망치를 들고 두들기진 않지만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게 꽤 번거롭거든. 수빈은 울퉁불퉁하게 깎아놓은 연필을 몇 자루씩이나 챙기고 집을 나섰어. 오늘부터 시작이야.
9.
몇 년째 해온 일이라 이제 좀 익숙해진 건지 수빈은 막힘없이 준비를 잘 해 갔어. 현장파 수빈을 위해 종종 마을 사람들이 먹을 걸 나눠주기도 하는데 수빈은 처음에만 거절하다가 나중에 보면 두 볼 터지게 먹고 있더라. 오늘도 노랑 지붕 아줌마가 주신 빵을 먹으면서 멍 때리는 데 누가 저기... 하고 수빈을 부르는 거야. 수빈이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까 누가 수빈이 손에 막무가내로 뭔갈 엄청 많이 떠 넘겨주고 후다닥 가버린 거 있지. 하얀 뭔가가 손에 잔뜩 얹어주고 사라지니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확인을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지.
쿠키 몇 개가 들어있는 작은 봉지하고 전에 가져다줬던 책이었거든. 봉지 안에는 작은 메시지 카드가 들어있었어.
감사합니다. 힘이 되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다시 뵈면 좋겠습니다. 꼭 반납해 주세요.
10.
이제 월동 준비는 서서히 막바지에 다다랐어. 수빈도 이제 점점 시간이 생기기 시작했지. 수빈은 시간이 비자마자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어. 누나가 전에 말했던 제안을 수락한 모양인지 도서관 관리자 자리에 앉아있더라. 도서관을 들어가자마자 바로 보였어. 수빈이 들어오자 그 애는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 수빈은 그 반응에 당황했어. 서로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바라만 봤어. 그러다 수빈이 작은 목소리로 먼저 정적을 깼지.
저어... 책을 반납하러 왔는데...
아...! 그러시구나... 어... 잠시만요...
수빈은 처음으로 그 애의 목소리를 들었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낮고 깊은 목소리였어. 하얗고 작은 몸과는 잘 안 어울린다고 느껴졌긴 했지만. 그래도 계속 듣고 싶긴 하더라.
11.
수빈은 남는 시간에 무조건 도서관으로 갔어. 전에 좋아하던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다 그 애가 도서관을 닫을 시간이라고 알려주면 읽던 책을 빌려 집으로 돌아오는 게 하루 일과야. 도서관에 하루 종일 같이 있지만 정작 말은 한 번도 못 붙여봤어. 그냥 정말 정직하게 책만 읽다 왔거든. 수빈이라고 말을 안 걸고 싶겠어. 도대체 어떤 말을 할지 몰라서 책을 보는 척하며 늘 고민했는데 글쎄. 답이 잘 안 나오더라.
그러다 도서관이 정말 휑할 정도로 빈 날이 있었어. 그 애하고 수빈밖에 없던 날. 수빈은 이때가 말이라도 한 번 붙여볼 기회인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을 해. 이제 와서 그때 주신 쿠키 잘 먹었다고 하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었는데 그 애가 관리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수빈의 옆에 앉았어. 수빈은 신경 안 쓰는 척 보고 있다 깜짝 놀랐지. 자리에서 일어나길래 어디 가는 건가 싶었는데 설마 옆자리에 앉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때 쿠키 괜찮았나요?
사람도 없는데 괜히 소곤소곤 말하는 그 애 때문에 수빈은 몸을 조금 더 붙여야 했어. 잘 안 들렸거든. 그 애의 말을 듣고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어. 그리고 속삭였지.
아 저번에 주신 쿠키 맛있었어요. 감사해요.
수빈이 그 애가 혼잣말로 낮게 말하는 걸 들었어.
다행이다
11.
그 애가 말이라도 한 번 먼저 걸어준 게 큰 용기라도 된 건지 수빈도 먼저 다가가기 시작했어. 뻔하디 뻔한 날씨 얘기도 하고 이따금씩 책 얘기도 하고 말이야.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기다렸다 집 앞까지 바래다 주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어. 근데 수빈은 확실한 게 좋았어. 뭐든 확신을 가지지 않으면 잘 움직이지 않는 편이기도 했고.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았어 나쁠 건 없었지, 근데 수빈은 더 다가가고 싶었어. 그러려면 이 관계를 확실하게 해야 했고.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데 갑자기 그 애가 수빈의 손을 덥석 잡는 거야. 수빈의 왼손을 두 손으로 잡더니 살짝 끌어당겼어.
좋아해요... 더 좋아하고 싶어요 그래도 된다고 해주세요
선수를 뺏긴 수빈은 뭔가 허탈하면서도 그래도 기분이 좋아서 웃었어.
저도 좋아해요
그렇게 둘이 연인이 됐어. 마을에 몇 없는 어린 연인이었어.
12.
수빈의 부모님하고 누나, 형은 수빈이 그 애하고 손을 잡고 있는 걸 본 당일 무슨 잔치라도 열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어. 워낙 숫기가 없는 애라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거든. 그날 수빈이 집에 오자마자 수빈을 붙잡아 놓고 질문을 폭격기처럼 쏟아냈어. 수빈이 중간중간 귀가 빨개지면서 아무 대답도 못할 땐 되려 본인들이 더 설레서 난리였어. 그러다 그 애가 많이 아프다는 얘기도 슬쩍 물어보셨지. 걱정과는 다르게 수빈과 만나는 동안 그 애의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거든. 어쨌든 수빈하고 만나면 이곳저곳 다녀야 하고 먹는 걸 좋아하는 수빈 덕분에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게 되니까 살도 좀 오르고 체력도 늘게 된 거지. 이제 약도 거의 안 먹어도 될 정도고 전처럼 앓아누울 정도로 아프지도 않아. 수빈의 말을 들은 가족들은 걱정을 내려놓았지. 나중에 수빈이 닮은 아기 늑대 하나 정돈 볼 수 있겠구나 싶었으니까.
13.
우호적인 수빈의 가족들과는 달리 그 애의 가족은-가족이라고 해봤자 엄마밖에 없지만- 수빈을 달가워하지 않았어. 뭐 마을 이끄는 늑대의 아들이라는 건 좋지만 수빈은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막내잖아. 혹시 권력 다툼에 안 좋게 휘말리면 어쩌나, 우리 딸 고생만 시키는 거 아닌가, 매해 마을에서 궂은일이란 궂은일은 다 맡는다고 하던데 그렇게 일하면서 우리 딸하고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들 때문에. 수빈에게 들은 게 많아서 이미 그 가족들의 분위기가 그렇지 않다는 건 그 애도 잘 알고 있어. 수빈이 궂은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수도 없이 엄마를 설득해보려고 애썼는데 엄마는 그 애와 수빈의 관계가 더 깊어지는 걸 못 견디셨어. 잠깐 만나는 건 좋지만 평생을 약속하지 말라고 그 애가 수빈을 만나려고 준비할 때나 다녀오고 나서도 한참을 얘기하셨지. 근데 그 애는 엄마가 이렇게 반대하는 게 불안해서 이미 수빈하고 달빛 아래서 맹세까지 올렸어. 은빛 늑대의 상징인 달 아래서 하는 맹세는 절대 깰 수 없거든. 엄마에게 구태여 알리진 않았지만 수빈하고 이제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 없었어.
14.
그러다 그 애의 엄마가 전부 알아버렸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수빈이 오면 그 애를 집에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수빈을 돌려보냈어. 처음에 수빈은 그 애가 걱정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거야.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게 만드는 그 애 엄마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일주일 정도 보지 못하니까 정말 죽을 것 같은 수빈에 누나가 나서줬어. 도서관 일을 핑계로 그 애를 만나러 갔거든. 수빈의 편지를 들고 말이야. 수빈의 가족이라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했던 엄마도 도서관 일이라고 하니까 한 걸음 물러섰지. 누나가 방 안에 들어가자 책상에 엎드려서 숨죽여 울고 있는 그 애가 있는 거야. 누나는 깜짝 놀랐지. 그 애도 엄만 줄 알고 있었는데 수빈의 누나가 보이니까 잠깐 놀라더니 바로 누나를 잡고 빌었어. 한 번만 도와달라고 수빈이를 보게 해달라고 어머니가 저렇게까지 반대하실지 몰랐다고. 수빈의 누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어. 그 애에게 수빈이 쓴 편지를 전해주고 말했지. 한밤중에 창문을 두드릴게. 밑에 수빈이가 있을 거야. 창문을 타고 몰래 나가는 거 정도는 할 수 있지?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어. 누나는 휴지를 들고 그 애의 얼굴을 닦았어. 우리는 널 환영해. 원하면 도망쳐 와도 돼.
누나가 방을 나가고 그 애는 편지를 펼쳤어. 짧지만 수빈의 걱정이 고스란히 담긴 편지를 보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방의 창문으로 빠져나가겠다고 결심했지. 좀 높긴 하지만 밑에 눈이 쌓여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
15.
누나는 집에 가자마자 수빈을 잡고 말했어. 밤이 오면 그 애의 집으로 가. 그 애 방 창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그 애한테 거기로 빠져나오라고 했어.
누나의 말에 수빈이 금방 정신을 차렸어. 잠옷 차림으로 나올지 모르는 그 애를 위해 따뜻한 옷을 챙기고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어. 그리고 해가 지자마자 수빈은 곧장 그 애의 집으로 달렸지. 주변에 떨어진 작은 돌을 창문을 향해 던졌어. 그 애는 침대에 걸 터 앉아 창문만 바라보고 있었어. 돌들이 창문을 향해 날아오자 의자를 책상 위에 올리고 그 의자 위로 아슬아슬하게 올라가서 창문을 열었어.
수빈...!
수빈이 팔을 쭉 뻗자 그 애가 창문에서 뛰어내렸어. 수빈은 그 힘을 못 이겨 넘어지고 말았지만 괜찮아. 그 둘은 눈에 아주 안전하게 떨어졌거든.
16.
수빈은 재빨리 그 애에게 묻은 눈을 털어주고 가져온 옷을 입혔어. 옷에 둘둘 말린 그 애를 데리고 얼른 집으로 돌아왔지. 수빈의 집은 온 가족이 벽난로가 꺼지진 않을까 전전긍긍해 하고 있었어. 수빈과 그 애를 보는 순간 모두가 한시름을 놓았지. 그리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앨 반겼어. 환영한다면서. 그 애는 눈물 때문에 유난히 더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어.
누나와 엄마는 그 애를 얼른 따뜻한 물이 받아져 있는 욕조에 넣었어. 나오자마자 두꺼운 숄을 둘러주고 핫초코를 손에 쥐여주고 -마시멜로도 동동 띄웠어- 얼른 방 안으로 들여보냈지. 그리고 아침에 깨우러 갔는데 둘이 세상모르게 너무 잘 자고 있더라. 서로를 마주 본 채 새근새근.
17.
그 애의 집은 발칵 뒤집혔어. 아침 먹으라고 방에 가니까 메모 한 장만 남겨놓고 딸이 사라진 셈이니까. 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 전 그 사람을 따라가기로 이미 마음먹었어요. 죄송해요. 엄마는 완전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어. 엄마도 따지고 보면 수빈이 싫은 거 아니었어. 수빈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이 과연 수빈에게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해오고 있는 거지 수빈이라는 존재를 무시하는 건 아니었거든. 여긴 야생이야. 누가 뭐래도 약육강식이 제일 상위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안 그래도 약한 딸인데 수빈마저 약해봐. 둘은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18.
몇 번을 반복했나 몰라. 그 애가 집을 뛰쳐나오고 다시 집으로 이끌려가는 게. 그러던 중 그 애가 독한 감기에 걸려서 또 한참을 고생하기도 했어. 얇은 잠옷 차림으로 이 찬바람을 뚫고 시커먼 밤길을 헤치는 건 아무래도 독이 될 만했지. 그래서 수빈은 일부러 찾아가지 않은 날도 있었어. 아픈 사람을 이 추위를 뚫고 데려올 순 없잖아. 근데도 그 애는 한밤중에 태연하게 수빈의 집 문을 두드렸어. 수빈의 집과 꽤 거리가 있었지만 그 애는 늘 파자마 바람에 외투 하나 없이 지민의 집으로 달렸어. 차가운 바람에 볼은 빨개지고 손은 얼어붙고 몸이 달달 떨려도 수빈은 따뜻했으니까 수빈은 늘 따뜻하게 안아줬으니까 괜찮았어. 그 애가 추위에 떨지 않을까 그 애가 잠들고 나서도 옆에서 안절부절못했던 수빈이 있었기에 그 애의 감기는 기승을 부리지 않았어. 수빈은 이런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그 애의 부모님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 딸을 걱정하는 마음 잘 알고 있다고. 마냥 나약하게 있지만은 않을 거라고 그 애와,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나중에 생길 아이들 정도는 나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힘은 있다고. 제발 만나는 걸 허락해달라고. 더 이상 그 애가 추워하면서 문을 두드리는 걸 못 보겠다고. 제발 허락해달라고.
수빈의 진심 어린 말에 결국 부모님도 고개를 끄덕였어.
19.
둘은 보름달이 뜨는 날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서로가 되었어.
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행복했지.
20.
수빈은 이제 그 애와 단둘이 살 집을 마련했어. 그렇게 크진 못했지만 둘이 지내기에 더할 나위 없었어.
두 명이서 만들어가는 날이 얼마나 의미가 있었는지 몰라.
그리고 그 둘은 셋이 되었어. 아이를 가지기엔 몸이 너무 약하다는 의사의 말에 일찍이 아이는 미뤄두었던 둘의 일상에 커다란 기쁨으로 다가왔어.
21.
이제 불행이 찾아와야 할 때가 되었네. 끝없는 눈보라 너머에 산다는 회색 늑대 무리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어. 이미 마을을 이끌었던 부부와 누나와 형은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어. 오히려 한 발자국 빼고 있었던 수빈만 목숨을 구한 셈이야. 마을은 불이 나서 불바다처럼 보이는 건지 은색 늑대들의 피로 물들어 불바다처럼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어. 이제 남은 은색 늑대를 이끌어야 하는 건 자연스럽게 수빈의 몫이 되었어. 사냥철이라 집을 비우고 있던 수빈은 그 애의 생각에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지. 마을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회색 늑대들부터 해치워야 했어.
22.
그 애와 수빈이 사는 집은 마을 중앙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어. 사람들의 비명과 무언가 깨지고 무너지는 소음을 들은 그 애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어. 일단 짐을 챙겼어. 담요 하나랑 먹을 것들. 급하게 챙긴 짐을 메고 뒷문으로 집을 빠져나왔어. 마을은 이제 안전하지 못해. 설산을 넘어가야 했어. 설산 너머에 사는 붉은 늑대를 찾아가야 했어. 이제 조금씩 불러오는 배를 감싸 안고 설산으로 들어갔어.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을 아슬아슬하게 피했어. 문제는 이 모습을 회색 늑대가 봤다는 거야.
23.
발이 푹푹 빠지는 설산을 바삐 올랐어. 회색 늑대들도 그 뒤를 열심히 쫓았지. 누가 뒤에서 쫓아온다는 걸 알아차린 이후로 그 애는 쉴 수가 없었어. 낮에는 동굴에 숨죽여 있었어. 눈에 띄기라도 할까 빛이 비치는 곳엔 나가지도 않았지. 해가 지고 나면 그제서야 동굴을 슬며시 빠져나와 설산을 오르고 올랐어. 집에서 챙겨온 먹을거리를 정말 아끼고 아껴 먹었는데도 이제 남은 게 없었어. 이제 배가 고프면 눈을 퍼먹었어.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모닥불 하나 피우지 못했지. 매일같이 시린 배를 부여잡고 밤을 지새웠어. 수빈은 무사할까.
24.
수빈은 어렸을 때 한 번 들어보고 다시는 들지 않을 줄 알았던 칼을 꺼냈어. 급하게 찾아간 집은 아무도 없었어. 다치거나 죽은 늑대들 중엔 그 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 제발 살아서 어딘가로 도망갔을 거라고 믿는 중이었어.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테니까. 칼을 단단히 쥐고 회색 무리와 끝없이 칼부림을 해야 했어. 도대체 저 회색 늑대들은 언제까지 이곳에서 버티고 있을 생각인 걸까. 매일매일 피바람이 불었어. 저 늑대들이 없어져야 그 애를 찾을 수 있는데. 제발 무사하기를.
25.
얼마나 산을 오른 건지 벌써 해가 떠오르고 있었어. 얼른 빨리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할 텐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로 가야 안전하게 있을 수 있지?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무거운 몸으로 산을 오르니 세상이 핑핑 돌았어. 아, 안되는데.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되는데.
눈을 뜨니 조용히 타고 있는 벽난로가 보였어. 그 애가 쓰러졌던 곳은 설산 꼭대기에 사는 늑대들의 마을이었어. 험한 설산 위가 보금자리인 탓에 잘 알려진 게 없었어. 이런 늑대들이 살아있다는 것조차 아는 이가 몇 없었지. 산꼭대기 마을 초입에서 쓰러진 그 애를 발견한 사람들이 그 애의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이곳저곳에 긁힌 상처를 치료해 줬어. 정말 천만다행이었어. 그 애의 옆을 지키고 있던 할머니가 물었어. 이 험한 곳에 무슨 일로 오게 된 건지 말이야. 그 애는 자신을 돌봐준 할머니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질문에 답을 드렸어. 설산 아래에 사는 은색 늑대인데 회색 늑대들의 침입으로 마을이 쑥대밭이 되어서 도망치던 중이었다고.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어.
하마터면 애 떨어질 뻔했어.
엄마가 제 새끼를 지켜야지, 이렇게 픽픽 쓰러지면 둘 다 골로 가.
꽤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모든 게 와닿은 그 애가 한참을 울었어. 맞다. 나는 혼자가 아니지. 너무 나만 생각했구나. 미안해. 그리고 옆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가장 먼저 걱정해 줄 수빈의 얼굴이 가장 먼저 생각나서. 너무 보고 싶어서.
글이 너무 길어 업로드가 되지 않아 부득이 하게 두 편으로 나누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