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w. 옥수수소세지
Q. 첫 만남이 별로였나 보네요.
"아 뭐, 전 좋았는데 이분은 그랬나 봐요."
"웃기지 마. 우리 둘 다 서로 싫어했잖아.
몽글몽글한 로맨스 요소 하나도 없었어요, 단 일 프로도."
"당신이 내 로맨슨데 몽글몽글이 다 무슨 소용이지?"
"똥 싸네 진짜.
으휴 정말... 너무 싫다... 왜 저러지 진짜?!"
EP. 01: 부부의 세계
아내가 출근한 뒤, 남편의 하루 일과를 살펴볼까요?
구석구석 청소를 하며 환기를 시키다가도 날씨는 왜 이렇게 좋고 난리야라며 투덜투덜,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가도 재밌는 것 하나 안 한다며 투덜투덜, 빨래를 개다가도 이번에 새로 산 섬유 유연제 향이 별로라며 투덜투덜. 오늘 남편의 하루는 그저 시무룩한 입술을 삐쭉 내민 채로 서서히 저물어 가네요.
분명 아침에 두 분이 같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기발랄하고 달달하던 공기가 이토록 축축 쳐지고 지루해지다니요.
주딱지... 힘을 내요...
분량 뽑아야죠...
"어떻게 점심 이후로 연락 한 번이 없냐."
핸드폰에 꿀을 발라 놓았는지 오늘 하루종일 틈만나면 화면을 확인하던 남편. 이번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그득하네요.
집에 아내가 없을 때에는 번번히 식사를 거르다, 간혹 정말 허기가 질 때 매번 따듯한 차나 가벼운 군것질로 끼니를 대신하는 남편이에요. 아내에게 들키는 날에는 늘 잔소리 테러공격을 당하면서도 쉬이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죠.
그냥, ㅇㅇ 없으면 입맛도 없더라구요.
그런데 참 신기하네요.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입맛과 사랑은 별개 아닌가요..?
저희는 정말 잘 모르겠어요.
[ 남편 맘마 꼭 챙겨 먹어야 돼 ]
혹여나 오늘도 굶을 남편이 걱정 되어 점심 때 보낸 짧은 문자를 끝으로 깜깜무소식인 아내. 작업 중에는 그 어떠한 연락을 받는 것도 싫어하는 아내를 배려해 그저 곤히 기다리다 간간히 오는 문자에 꼬박꼬박 칼답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남편이에요. 사진작가와 배우. 다르다면 다르지만 또 비슷하기도 한 분야의 일을 하는지라 섬세함을 요구하는 감성적인 직업 특성상 때때로 예민해지는 게 당연한 것을 알고 각자의 선에서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으려 암암리에 만든 부부간의 규칙이랄까요. 이런 게 바로 어른들의 사랑인 거겠죠?
물론 연애 초반에야 이런 문제로 자주 다투곤 했지만 이제는 끈끈한 부부의 이름으로 서로를 믿고, 사랑하며 또 배려하고 이해ㅎ,
"아.. 언제 와아.. 겁나 보고싶네."
정정 할게요. 그닥 이해심이 깊으신 건 아닌 것 같아요.
벽에 걸린 시계 한 번 본 것 뿐인데 집에서 혼자 드라마 한 편을 찍으시네요. 누가 월드 배우 아니랄까 봐...
겨우 반나절 못 본 것 뿐인데 꼴값, 유난이시네요.
♫-
어라? 타이밍 좀 보세요! 그 넓은 소파를 두고 마룻바닥에 대자로 누워 축 쳐져있던 남편에게 단비를 선사하는 멜로디예요. 벨소리가 채 한 번을 다 울리기 전에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는 남편의 얼굴에 오늘 처음으로 미소가 띄였어요.
"여보세요!"
- 어우, 깜짝아. 뭐야, 핸드폰 하고 있었구나.
"응, 자기 연락 기다리고 있었어."
- 나 촬영 끝. 이제 퇴근하려구.
"응. 운전 조심해서 와. 마중 나갈까?"
- 그럴래? 근데 여보, 나 맥주가 마시고 싶어.
"안주는 뭘로 준비해 놓을까요, 사모님."
- 여기 근처에 유명한 피자 가게 하나가 있다길래
자기랑 먹을려고 이미 포장 주문 해뒀지이!
"잘했네.
그럼 내가 요 앞 편의점에서 맥주 사고 기다리면 되겠다."
- 완전 좋아용. 곧 봐요.
"네, 사랑해요."
핸드폰에 꿀 발라 놓은 거 맞네요. 간결한 통화가 끝나고도 한참을 화면을 내려다봅니다. 괜시리 달큰했던 대화도 모자라 남편의 수줍은 저 미소 좀 보세요. 볼 빨간 사춘기 소녀들도 저렇게는 안 웃을 거 같아요.
그렇게도 좋을까요?
"수고했어요."
"보고싶었어요."
"나도. 안 힘들었어?"
"괜찮았어."
저희도 나름 성격 좋다는 소리 많이 듣는데, 정말 더이상은 못 하겠네요.
아침 10시경 출근을 하고 저녁 6시 즈음에 주택가로 들어온 차 한 대를 기준으로 이 부부는 약 여덟 시간을 떨어져 있었죠. 신혼인 거 다 감안하고 본다고 해도 조금 너무한다고 생각이 들어요.
주차를 한 아내의 운전석까지 쫄래쫄래 달려가 차 문을 열어주던 남편의 표정, 다들 못 보셨죠? 웬 이산가족 상봉하는 줄 알았어요. 차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아내는 그대로 남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또 자연스럽게 아내의 허리에 팔을 감은 남편은 그렇게 딱 달라붙어 아직까지 떨어질 줄을 모르네요.
서로의 품에서 웅얼웅얼.
후... 이러니 성이 안 나고 배기나요.
카메라가 돌아가면 뭐하냐구요 그 아무도 신경쓰지를 않는데. 전 스태프들도 처음에야 괜히 어디다 시선을 두어야하는지 의문을 가지며 당황했지만, 벌써 내성이 생긴 것인지 지금은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져 꽁냥꽁냥 거리는 부부를 그저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아니 흐뭇하긴 한데... 닭털이 왜 서울 한복판에서 날리냐구요. 솔로로서 보기 힘들어요.
"맞다, 자기야. 나 거기서 누구 만난 줄 알아?"
"누구?"
"이주호."
"...내가 아는 이주호? 걔가 왜."
아내의 나긋한 목소리를 타고 의문의 남성의 이름이 흘러나올 때부터 표정이 그닥 밝지는 못 했는데 그 이름이 이주호라는 것을 인식하자 남편은 눈에 띄게 당황한 채 미간에 주름 하나를 더 추가했어요. 살짝 떨어진 품에서 마주하게 된 남편의 표정을 꼼꼼히 읽고선 이게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눈짓으로 남편의 허리를 두어 번 다독이는 아내예요.
일단 아내가 달래니 한 번 참아는 보겠는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제 눈썹을 살살 긁네요. 상당히 언짢다는 뜻입니다.
대체 이주호 군은 누구죠?
"우리 밥 사준다고 연락하라더라."
그리고 정적.
이 부부를 관찰하며 오디오가 이렇게 고요히 비워지기는 저 두 분이 잘 때 빼고 또 처음이네요. 심지어 잠에 들었을 때가 더 시끄러운 거 같아요.
옆 좌석에 있는 가방을 챙기려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내와는 달리 남편은 홀로 얼음땡 놀이 중입니다. 어이가 없기를 이토록 짝이 없는 경우는 또 처음이라 제 나름 이 상황을 납득해 보려 두 눈을 꿈뻑이다가도 도무지 유교 사상이 뿌리채 뽑힌 미스터리 그 분의 행동이 모든 상식의 선을 벗어난 건지 결국 짜증을 억누르려 이를 꽉 문 남편이 낯설만큼 차갑게 내리깐 목소리로 말해요.
"연락을 왜 해.. 그리고 따로 밥을 왜 사는데. 그 새끼가."
저런. 아무래도 심각한 것 같은데... 카메라 철수 할까요?
그런데 아내는 왜 이리 천하태평인 거죠?! 남편은 화가 꽤나 많이 난 거 같은데요. 물론 아내 분께 화를 내는 일이 지극히 드문데다 아주 간혹 화를 낼 때의 모습 마저 아기사자를 닮아 마냥 귀엽기만 하다는 콩깍지 씌인 답변은 솔직히 ㅇㅇ 씨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 같아요.
저희가 무섭다구요.
바지에 지릴 것 같은데 이거 정상 아니잖아요.
눈치없이 여전히 해맑은 미소를 짓던 아내 분은 차에서 피자를 꺼내며 아주 발랄하게 대답을 하십니다.
"주호 오빠,"
"이주호."
"어- 그래 이주호. 결혼한대."
"..어?"
"오늘 간 피자 가게에서 만났어.
아내 될 분이 임신이신데 거기 피자가 먹고 싶으시다고."
베시시 번지는 눈웃음에 고개까지 갸웃. 화났엉?
아. 저희가 장담하는데 저 애교에 남편은 이미 80%는 풀렸어요. 얼씨구나. 지금 입꼬리 씰룩씰룩 거리는 거 보이시죠?
아주 예리하게 그걸 놓칠 새라 봐- 별 일 아니지? 라고 재차 확인하며 남편의 볼에 뽀뽀를 하네요. 왜 안 하나 했어요. 게임 끝이네요. 후... 오래 화도 못 낼 거였는데 괜히 걱정했어요. 남편도 꼭 데리고 오라며 청첩장까지 받았다고 말하는 아내 덕에 아까의 오해는 아마 전부 풀린 거 같아요.
각자 맥주와 피자를 들고 남은 나머지 손을 꼭 잡은 채 나름 앙증맞았던(?) 남편의 질투폭팔 해프닝은 꽤나 시시하게 막을 내립니다.
"참 속도 없으시네요. 전남친 청첩장까지 다 받아 오시고."
"뭐 어때? 난 이미 더 잘난 남자랑 결혼까지 했는데."
"그 잘난 남자 속은? 다 뒤집어 엎으셔도 괜찮고?"
"자기야, 근데 있지.. 아무리 싫어도 우린 가야 해."
"왜."
"걔 덕분에 너란 남자를 만날 수 있었잖아.
따지고 보면 걔가 우리 은인이라고."
"은인은 무슨... 똥 싸네.
말도 안 되는 소리할 거면 이쁜 짓 하지 마."
정말이지.. 두 분 공중파 방송에서 자꾸 뭘 싸요?!
그나저나 아내의 주접력도 만만치 않군요.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맞는 말인가 봐요.
*
두 분의 첫 만남이 궁금하시겠죠?
그 날은 아주 추운 어느 겨울 날이었어요.
아직 그 해의 첫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쌩쌩 부는 칼바람이 며칠 째 지속되던 이 찌뿌둥한 날씨가 곧 하얗게 세상을 물들일 것이란 걸 알려주었죠.
"솔직히 나는 조금 빡칠 듯."
"안 빡치는 게 더 이상하지.
남친이라는 작자가 매번 저렇게 데이트를 자기 스케줄 겹치게 잡는데."
"저 분이 레알 보살인 거야."
"..."
오늘 화보 촬영장의 주인공 주지훈 씨예요.
새로운 의상으로 갈아입은 후 본격적인 촬영에 임하기 전 머리와 화장을 수정 받고 있어요. 오오- 역시 모델 짬빠 어디 안 가나 봐요. 여기가 바로 극락, 아아. 죄송. 되게 멋지네요! 그나저나 아까부터 자꾸 어디를 그리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죠? 지훈 씨의 시선의 끝을 따라가 볼까요?
어머! ㅇㅇㅇ 씨네요!
차디 찬 바람에 장미빛으로 물든 두 볼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듭니다. 티끌 하나 없이 투명한 제 피부와 닮은 새하얀 패딩 속에 푸욱 파인 채 촬영장 구석에 앉아 보이는 뾰루퉁한 표정이 묘하게 매력적이네요.
지훈 씨의 시선은 아마 지금도 괜히 제 핸드폰에 신경질을 내는 여자에게 고정되어있네요. ㅇㅇ 씨는 지훈 씨가 바라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예요.
그리고 아까 주변 스태프들의 수근거림으로 보아하니 이 자그마한 여인은 현재 사진작가님의 애인이 되겠죠? 암요- 약속을 겹치게 잡는 건 그 누구에게라도 예의가 아니죠. 남친이 잘못했네요, 얼마나 잘 웃으시는 분인데요.
짜증날만 해요.
막바지 촬영은 꽤 길었던 것 같아요.
모니터까지 완벽하게 끝내고 퇴근할 준비를 위해 긴 다리를 휘적이며 대기실로 들어가려던 참이에요. 정말 마지막이라며 다시 한 번 이유없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그녀를 또 훔쳐봅니다. 다음 스케줄이 있다며 저를 재촉하는 매니저가 아니었다면 아마 한참을 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그녀를 바라봤을 거예요.
이런이런- 주지훈 씨, 누가 아내 바보 아니랄까 봐,
첫 눈에 아주 제대로 뿅 반했었네요!
"형, 제가 전화하면 나오세요."
"...어? 어어. 그래."
차를 대기시켜 놓겠다며 밖으로 향한 방해꾼이 사라지자 어김없이 그의 시선이 쫒아 헤매는 건 ㅇㅇ 씨입니다.
나름 좀 소심한 편이라 괜히 그녀의 근처만 하염없이 서성이다 아주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 드디어 그녀의 곁으로 다가섭니다. 아직까지 어수선하기만한 세트장 속 오로지 그녀 하나만 빼고 모든 게 흐릿하게 보였대요. 주변에서 들리우는 모든 소음들이 아늑해지고 가까워질수록 저를 매혹하는 깔끔한 비누향이 속을 울렁였지만 그냥 꼭 그래야만 했다고 해요.
말 한 번 못 건다면 정말 후회할 것 같았다고요.
살면서 그렇게 용기 낸 건 처음이라고.
주딱지 화이팅!
"옆에 앉아도 돼요?"
롸? 장난합니까? 지금 그거 하나 묻겠다고 이 난리부르스를..?
왜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네 진짜. 답답합니다 정말.
"...하."
읭? ㅇㅇ 씨는 또 어디가요?!
인상을 쓴 채 아무 말 없이 주지훈 씨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ㅇㅇ 씨는 불쾌한 듯 아예 자리를 옮겨 버리네요. 아니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설마 지금... 주지훈 씨 고백도 전에 까인 건가요?
와하... 제가 다 민망해요. 이렇게 차일 수도 있군요. 신박한데요!
"..."
당혹스럽기는 저도 마찬가지인지 넋이 나간 채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쪽을 바라봅니다. 혹여나 제게서 불쾌한 냄새가 나는 건지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아 보는데 냄새는 무슨. 오늘 향수 광고예요.
우디한 머스크 향 밖에 나지 않는다구요.
아니 그나저나 잠시만요- 이게 끝?!
이게 정말 두 분의 첫 만남이라구요?
우리가 아는 그 잉꼬부부가요?
EPILOGUE.
Q. 왜 그러셨어요?
"아- 이건 제 실수.
전 그날 그 질문을 여기 앉아도 돼요? 로 들었어요.
난 많은 자리들 중 굳이 여기 앉아야 하니 저리로 꺼지라는 소리로 듣고 우와- 연예인 병도 이런 연예인 병이 없다 싶어서 그냥 제가 자리를 옮겼죠."
"예에- 누님의 깜찍한 실수 덕에 전 그날 집에 가서 샤워를 세 시간 했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Q. 그럼 두 분... 설마 바람?
"저는 뭐 예."
"아이고오! 예- 같은 소리하네!!!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가 다시 만난 건 몇 달 후예요.
그때는 이미 헤어진 상태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