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붉은 참혹상
written by: 규피덴셜
state: 공유, 배포 xX
nick: 테라규, 감성, 씨규빠, 타라, 베긔, 체리펀치, 소라빵, 코알라, 모닝콜, 찹쌀떡, 뇨뇽
붉은 참혹상 -08-
사관 학교 앞에 우뚝 서서 학교를 바라보고 있자니 설레서 도저히 걸음을 스스로 옮기기란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성규가 한 걸음 정도 사관학교를 향해 발걸음을 떼고 나서야 제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이상민 대령이었다. 문득 열 두살 때에 할머니와 티비로 이상민 대령의 취임식을 보면서 군인이 될 거라고 다짐했던 그 날이 떠오르면서 이상민 대령 앞에 서 있는 자신이 스스로 뿌듯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자랑스럽게 서서는 웃음을 보였더니 따라서 웃어보이던 이상민 대령은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성규군 오셨구만.”
“아, 안녕하세요.”
이상민 대령이 오고 한참 뒤에서야 카메라와 기자들이 몰려들어서는 저를 비추는 것에 잠시 당황했더니 이상민 대령님이 제 어깨를 붙잡고서는 카메라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하시는 데에 혹여나 카메라 앞에서 하품을 하면 안 되었기에 가끔 숨이 넘어갈 뻔한 것을 겨우 모면했다.
“당황했구만 이 친구. 아하하하, 어릴 적부터 군인이 되기를 꿈꿔 왔으며 벨름 제국의 장단점을 저에게 모두 설명해주었고 그로 분석까지 해내며 저를 설득시킨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여러분. 이 아이야말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는 열심히 카메라 앞에서 저가 홍단의 왕관을 훔친 범인이 종혁 형이라는 것을 알리러 갔을 때 말한 전력들과 장단점들을 말하면서 모든 것이 제 머리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약간은 뿌듯해지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을까 싶어서 최대한 그렇지 않은 척을 했다. 조금은 무뚝뚝하게 보이려나 싶어 입꼬리를 올려보려 해도 무뚝뚝해보이는 것이 뿌듯해서 웃음을 참지 못하는 표정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것이었다. 나같이 어린 놈이 들어오기 힘들다던 사관학교에 그깟 말빨에 먹혀서는 낙하산 탄 꼬라지를 누구도 좋아할 리 없었다.
그렇게 되어 결국 지금은 아파트도 하나 새로 얻었고 그 곳에 가구들도 훈련병 형들의 도움으로 다 옮기고 후에야 티비를 켤 수 있었다. 깨끗한 화장실에서 제법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느낌은 정말이지 몸이 사르르 녹을 것만 같았다. 샤워를 다 하고 갑자기 몸에 닿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고 수건으로 요란스럽게 털고 나서야 성규는 부르르 떨리던 몸을 진정 시킬 수가 있었다. 그렇게 다 씻고서는 침대 위로 올라가 티비를 보자 뉴스에 제 얼굴이 나오는 듯 싶어서 집중했다.
「현재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는 인피니투스의 사관학교에 열 다섯 살 소년이 입학을 하게 되어 요즘 핫 이슈입니다. 이 소년은 성적도 매우 좋은 편이었다고 하는데요? 어떤 이유에서부터 사관학교에 빨리 입학할 수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게 보이자 성규는 뭐가 또 웃기다고 티비에 자신이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기해서 킥킥거렸다. 스스로 '저게 뭐야'하면서 비난하기도 하고 또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기까지 하며 혼자 난리법석을 떠는 식으로 티비를 보았다. 이상민 대령님이 직접 내 인터뷰를 거둬주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샤워도 했겠다 시원한 느낌과 함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들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만 같았다.
「예, 귀여운 소년인 것 같은데요. 현재 벨름 제국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한가요? 알아봐주시죠.」
「네, 저는 현재 벨름 제국의 백성들이 주로 이용하는 사이트에 들어와서 반응을 보고 있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열 다섯 살의 소년을 더 지지해주는 느낌인데요. 한 네티즌은 소년을 보고 '이런 인재가 나왔어야 했다'라는 댓글을, 또 다른 네티즌은 '낙하산인가? 하지만 이상민 대령이 직접 뽑았다니까'라는 댓글을, 어떤 네티즌은 '저런 비상한 두뇌를 가진 소년이라면 세금도 아깝지 않다'라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얼떨떨한 느낌의 성규는 벙쪄서는 티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낙하산이어서 욕 먹을 줄로만 알았는데 백성들에게 탐탁지 않은 존재로 남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 전략과 벨름 제국에 대해서 말을 함으로써 내가 인정을 받은 거구나. 성규는 칭찬 받은 느낌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항상 현실적인 시점에서 칭찬을 해주면 해줬지 받은 적은 많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규는 왠지 의욕이 차올랐다. 처음부터 이렇게 운이 좋게 들어와서 사람들에게 인정까지 받다니 나는 정말 행운아인가봐. 차오르는 의욕에 공부도 시험도 놓치지 않을거라 다짐하고 다짐했다. 누구보다 뒤쳐지지 않는 세계 1위의 대령이 되고야 말거라고. 대령이 되어서 이상민 대령 못지 않은 전투력과 내 모든 스킬을 보여내고 말 것이라고. 성규는 생각했다.
성규는 뿌듯함도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지고야 말았다. 내가 이만큼 온 데에는 종혁이 형의 희생이 필요했다. 서인국 훈련병의 도움이 필요했고, 김명수과 진호 선배의 자극이 필요했다. 내게 딱 한 가지 필요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 하나가 있었다면? 남우현이 귀찮을 정도로 쫓아다녔던 것, 나를 겁탈하려고 했던 그 남우현 하나 피하러 온 것은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에 오지 않았다면 오늘 또 무슨 일을 당했을 지 모르는 일이니.
'딩동ㅡ' 소리에 성규는 폭신한 침대 위로 눕혀져 있던 자신의 몸을 들어올려 낑낑거리면서 문까지 어서 뛰어갔다. 내가 귀찮아서 상대를 오래 서 있게할 순 없으니까 말이다. 당연 이상민 대령님일 거라고 생각한 나의 뒷통수를 똑똑 두드리는 인물은 다름아닌 김명수였다. 혹시 김명수도 이 학교에 들어오게 된거야? 뉴스에선 그런 말 없었는데.
“왜 내 얼굴 보니까 표정이 썩냐, 김성규.”
“아니거든.”
“손님이 왔으면 대접을 해줘야 될 것 아냐.”
뉘예, 성규는 목을 쭉 냬빼고서는 입술을 삐쭉거리며 명수를 노려보았다. 항상 왕인 것처럼 대장인 것처럼 행동하던 김명수가 지금은 또 우리 집에 와 놓고선 손님 대접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정말이지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사관학교에 들어온 첫 날부터 김명수 때문에 기분 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한 손님 취급을 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냥 가져온 음료수 한 잔 정도에 불과하지만. 나에게 김명수란 존재에게 주는 대접으로 음료수 한 잔 정도면 정말이지 너무 많이 줘서 칭찬을 받아야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관학교 들어오니까 좋냐? 티비 보니까 아주 얼굴에 꽃이 폈더만?”
음료수를 주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음료수 마시면서도 끝까지 저를 못 비꼬아서 안달인 것마냥 실실 웃어대는 꼴이 점점 성규의 화를 돋구는 듯 했지만 성규는 크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그 화를 풀기로 했다.
“왜 왔냐. 별 일 없으면 좀 꺼져줄래.”
“남우현 오늘 자퇴한 거 아냐.”
“뭐?”
“너한테 잘못한 일이 있는데… 뭐랬더라. 너한테 용서해달라고 빌지도 못했는데 너가 사관학교 와버려서 오늘 학교에서 울고 막 난리 났었어. 사내 새끼가 찌질하게 너 같은 새끼 한 명 간 게 뭐 대수라고.”
물론 우현이가 걱정이 아예 안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걱정되는 마음이 있기는 있되, 그 때의 기억이 더 이상 예전처럼 우현이를 챙겨주고 싶은 마음을 잃게 했을 뿐이었다. 김명수의 말 뽄새는 충분히 성규의 화를 돋굴 만 했지만서도 틀린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 같은 새끼 한 명 죽은 것도 아니고 사관학교로 학교만 옮겨갔을 뿐인데 거 참 비극적인 아이구만. 성규는 그렇게 언짢은 표정을 지어가면서 명수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자 갑자기 웃으면서 성규에게 흥미롭다는 듯이 말을 걸려는 명수의 행동에 성규는 약간 어색하다고 느꼈다. 김명수가 적어도 나에게는 웃으면서 말을 걸거나 하는 일은 별로 하지 않았으니.
“우현이가 나한테 부탁하더라. 이 편지 가져다 주라고?”
내놔. 빠르게 손으로 낚아채려 했지만 역시나 승자는 김명수였다. 홱 옆으로 돌려 낚아챈 편지를 쥐고 있던 명수는 웃으면서 성규를 쳐다보았다.
“근데 내가 좀 읽어봤어.”
성규는 두려움에 떨었다. 혹시나 만약 혹시나 우현이가 그 때 그 일에 대해서 혹시나 편지에 언급이라도 했다면 말이다. 김명수 이 자식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런지는 뻔했고, 그 후로 또 무슨 말을 할 지도 뻔했다. 그렇게 편지를 내밀어주는 명수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움켜잡아 천천히 편지를 빼내고선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꽤 충격이라는 표정이네? 우현이가 뭘 했길래 말야.”
「형, 안녕요. 잘 지내시죠?
나 오늘 학교 자퇴하려고요.
형이 없는 등교길은 등교길 같지도 않아.
형 그 때 밤에는 저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려던 마음은 없었어요, 정말.
근데 나 형 진짜 좋아해요.
미안하지만 더 좋아하려고요.」
지우개로 무엇을 썼다 지웠는지 여러번 썼다 지운 흔적에 알아볼 수도 없는 글씨 자국과 지우개로 지우면서 하얗게 색이 빠지고 꼬깃꼬깃 구겨져 있는 편지를 겨우 펴서 곳고 바르게 쓰여져 있는 글씨체를 보면서 약간 명수가 눈치를 챘을까 싶어 성규는 시선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서 눈치를 보았다. 명수는 흥미롭다는 듯이 성규를 쳐다보았지만 성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는 높게 들어올린 채로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고 우현이 준 쪽지를 갈기갈기 찢어내었다.
“별 거 아냐. 우현이랑 잠깐 싸웠어, 어제.”
“그러셔?”
눈썹을 들었다 올리는 명수의 행동에 성규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우현의 쪽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내듯이 세게 흩뿌렸다. 그렇게 명수는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고서는 현관으로 향했다. 뭐 이렇게 갑자기 가는 건가 싶어 현관으로 배웅을 하러 나갔다.
“저거 주려고 온거야?”
“어.”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명수의 뒷모습을 눈으로 계속 훑고 있자니 저 멀리에서 명수 옆으로 따라붙는 남자가 있기에 성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예상이 맞다면, 저 뒷모습의 기운 없는 남자는 우현이 분명했으니까.
*
“오종혁 훈련병은 이상민 대령의 명령으로 군생활에 복귀한다.”
종혁이 훈련복을 입고 밖으로 천천히 걸음하는 사이에 건물 내외로 김명근 대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보고 수근거리는 게 틀림 없었다. 어쩌면 고문형보다 더 힘든 벌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상민 대령은 내가 이런 꼴을 당하기를 바랬던 것일까?
아, 티비를 안 끄고 나왔던가? 아닌가? 종혁은 아직 훈련장까지 가야하는 시간이 1시간이나 남았음에도 일찍 나온 것이라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켜져 있던 티비 안에 보이는 인물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설마? 아니길 바랬지만 확실히 그 사람은 김성규와 이상민 대령이었다. 그리고 자막에 쓰여있던 '홍단의 왕관을 찾아낸 15살 소년 사관학교에 입학하다.'
“뭐야, 씨발… 성규가 어떻게 알고 그걸.”
종혁은 태연스럽게 성규를 옆에 세워놓고 어깨동무를 한 채로 말하는 상민의 태도를 집중해서 노려보았다.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면서 좋기도 한 지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성규의 모습도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닥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성규가 내가 홍단의 왕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나저나 저거 15살 애를 사관학교에 들이는 걸 보니까 다른 꿍꿍이가 있는데, 분명. 이상민은 또라이가 틀림 없다. 종혁은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