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 속을 헤매던 소년들
준회는 공부를 하러 독서실에 가 있을 테다. 그게 아니라면 편의점이나, 주유소나, 또는 음식점에서 으레 그 웃는 둥 마는 둥한 어설픈 표정으로 손님들을 대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나갔다 올게. 같이 못먹어줘서 미안해.'
미안해.
도대체 무엇이? 꼭 저처럼 단정하고 정갈한 세 글자가 콱콱 시야에 들어와 박힌다. 준회는 늘 내게 미안하다 했다. 입버릇처럼 쉽게 쉽게 꺼내어지던 말이었다. 사람의 목소리에서 온도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준회의 목소리에선 늘 잔잔한 온기가 묻어나왔다. 손을 뻗어 말소리를 움켜쥐면 따스한 잔재를 남긴 채 바스락 부서질 것만 같이.
―야. 괜찮아?
여럿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폭력을 당할 때 옆에서 잔뜩 인상을 구기던 남자애였다. 김지원. 단정한 이름. 반듯한 입술과 곧은 눈썹. 어울리지도 않게 자그마한 입술을 어물어물하더니 무심하게 툭. 던져지는 연고. 진환은 그저 동그란 눈만 치켜뜬 채 어리둥절해 할 뿐이다.
―송민호는 뭐든 금방 질려 해.
아무런 대답도 없이 눈만 껌뻑이는 제게로 머뭇머뭇 낮은 목소리가 와르르 쏟아진다. 조금만 지나면 너한테도 금방 흥미를 잃을거야. 점심시간인데 웬만하면 뒷처리 대충 하고 나와서 밥 먹어.
눈 앞에서 처참하게 쏟아져내리는 폭력을 목격한 사람 치고는 상당히 무덤덤한 말투였다. 텁텁한 창고의 공기 속에서 또렷하게 저를 바라보며 하는 말들의 의중을 진환은 알 길이 없다. 성의없이 더러운 바닥으로 던져진 연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꼼꼼히 운동화를 챙겨신은 두 발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준회는 아주 늦은 시간이 다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타박타박 맥아리 없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운 적요를 찢어내는 것이 반가워 언뜻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앙상하게 마른 몸과 피곤에 젖어 힘없는 눈매가 먼저 시야에 들어찼다. 허공에서 맞물리는 시선. 침대에 누워있는 날 마주한 준회는 이내 엉성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누가 봐도 잔뜩 지친 표정. 걱정 끼치는걸 싫어하는 준회는 웃어보이는 낯을 어거지로 끄집어낸다. 잿빛의 어스름.
"약 다 먹었지? 병원 같이 갈까?"
부드러운 음색이 공중을 부유한다. 약을 먹는 것을 그만둔다면 아마 곰팡이에 좀먹어가는 벽지처럼 내 병은 야금야금 목구멍에서부터 나를 한 톨도 남김없이 갉아먹을 것이다. 한낱 사라지는 먼지처럼 그렇게 없어지겠지. 그치만 어쩌면 준회에게 있어 그것이 더 편한 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회에게 기생충처럼 붙어 숨을 쉬는 내 모습이 끔찍하다. 질펀하고 끈적한 삶의 의지. 내가 너에게 있어 한없이 성가신 존재라는 사실이 격통처럼 가슴께를 꿰뚫는다. 뻐근한 감각.
준회는 완고한 뜻을 굽히지 않는다. 병원에 같이 가자. 학교 끝나면 같이 가.
나즈막한 목소리.
"오늘도 송민호가 불렀었어?"
"…."
김지원의 정갈한 얼굴이 내 쪽을 향해 있을 때면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움찔움찔 놀라게 된다. 꼭 허튼 생각은 말라는 듯한 저 반듯한 눈빛을 볼 때면 무언가에 크게 관통당한 듯 속 깊은 곳이 아렸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그랬다. 나는 다만 약하고 멍청할 뿐인데도.
"아프지 마."
커다란 손이 정수리께를 도닥였다. 김지원은 아무도 넘지 않았던, 넘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경계를 단숨에 부수어 버린다. 그게 김지원한텐 그렇게 쉬웠다. 김지원한테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렇다고 안 아픈 척 하지도 마."
시간이 멈춰버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 누가 이 진득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런 말을 건네었던 적이 있었나. 문득 작동이 멈춰버렸다고 생각한 누선이 찌릿찌릿하게 울렸다. 눈가로 뜨거운 것이 괴었다. 무뎌질 만큼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고통의 중압감들이 새삼 생경해졌다. 무뎌진대도 아픔은 아픔이었다. 김지원의 말이 고름이 맺히고 멍울져 엉망이 된 속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맵싸하게 아려오는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으로 꾹꾹 눌렀다. 울음을 눌러담는다. 터져나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 무서워서였다.
짓무른 눈가가 아렸다.
"너 지금 어디 갈 데 있어?"
동그란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산란하게 반짝인다. 가볍게 팔랑거리는 속눈썹이 나비같았다. 굴리면 도록도록 소리라도 날 듯한 고동색의 눈이 나를 꿰뚫는다.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갈 곳이라곤 갑갑하고 더러운 집 뿐이었다. 몸을 파는 엄마가 있는. 유일하게 변치 않는 나의 좁은 세계. 고독한 우주.
"나랑 어디 좀 가자."
침묵의 간극을 뭉근하게 찢어내는 부드러운 음색.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김지원의 얼굴이 쨍하게 빛났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여름 공기에 숨이 턱 막혔다. 어딘가 멍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허공에서 잡을 곳 없이 휘적거리는 내 팔목을 덥석 붙잡은 김지원이 난데없이 걸음을 빨리하더니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불볕같은 햇볕 속을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브가 태초의 사과를 크게 깨물었을 때 느꼈을 것만 같은 근원 모를 짜릿한 쾌감과 죄책감이 동시에 너울대며 앞을 가렸다.
바람에 가볍에 흩날리는 머리와, 김지원 특유의 따뜻한 체향과, 맞잡은 살결 사이로 스미는 온기. 현실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감각.
그 모든 것들.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배경으로 힘없이 늘어진, 아주 지친 몸뚱아리가 힘겹게 서 있었다. 준회였다. 아주 힘들고, 아주 슬픈 눈을 한 준회가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황급히 써내려갔을 글씨들처럼 마구 비틀리고 위태로운 모양새였다. 완연히 어둠에 먹혀들어간 마른 어깨가 안쓰러워 자꾸 목이 메였다. 준회의 눈에서 천둥이 치듯 우르릉, 무언가 잔뜩 우그러지다가 크게 내려앉는다. 준회의 품에는 빈 술병과, 쓰다 만 종이컵과, 새하얗게 늘어진 국화꽃이 몇 송이 들려있었다.
아, 오늘은 준회의 아버지가 죽은 날이었다.
"오늘은 밥을 못 해놨어."
준회의 어깨로 어둠이 치렁하게 내려앉는다. 무수하게 할 말이 많은 눈이 와르르 바스라졌다. 서러운 숨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꾹꾹 눌러담아 속으로 품고 있는 말을 꺼내지 못해 고작 저런 말 뿐이다. 어른어른한 물 그림자가 준회의 말간 얼굴에 어리는 것 같았다.
"…내년이 돼도, 밥은 못 해놓을 것 같아…."
파르락 떨리는 말. 먹먹함에 목이 메인다.
다음 해도, 그 다음 해에도 준회는 많이 아플 것이다. 그 날의 사고를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을 것이다. 눈을 뜨면 그 날의 재앙이 먹먹하게 쏟아지겠지. 우리는 아가미도, 날개도 없기에 기억의 물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 우리가 깊게, 아주 깊게 침잠하고 있었다.
빌어. 갇히는 거 무섭다고. 하지 말라고 빌빌 기어. 싫다고. 무섭다고.
성량 낮은 목소리가 화장실 안을 웅웅 울렸다. 으르렁거리며 낮게 씹어뱉는 말. 이래도 안 해? 철썩. 아찔한 파열음이 일었다. 뺨을 후려치는 손으로는 폭압스러운 악력이 실려있는 채였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아귀와 맞닿은 뺨에서 확확 열이 끼쳤다. 충격의 여파로 벽에 부딪친 척추께가 시큰했다. 우악스럽게 머리칼을 잡아채 뒤로 한껏 젖힌 송민호가 한 글자씩 씹어뱉었다. 말해. 빌어 보라고.
팽팽한 기류가 흘렀다. 맞부딪히는 시선. 먼저 시선을 떼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성취욕과 정복감에 점철되어진 송민호의 눈 속이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오만에 가득 차 여유를 부리며 지긋하게 웃어보이던 송민호는 없었다. 악에 받친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짓씹듯 속된 욕지기를 뱉어낸 송민호는 꾹 다물린 입매를 꿈틀거리다 좁은 화장실 칸 안에 나를 넣어두고 문을 쾅 닿았다. 송민호를 따르던 무리 중 한 명이 낄낄거리며 화장실 문 앞에 대걸레를 걸쳐 놓아 문을 열지 못하게 막아놓은 것도 순식간이었다. 목구멍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메마른 기침이 와르르 터졌다. 폐부 깊숙히 시린 한기가 몰려들었다.
매미가 우는 소리가 찌르르 귓가를 찔러왔다. 밖은 여름이고 뜨거운데 나만 시렸다.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추위가 서러워서 눈 앞이 한참을 뜨거웠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증식하는 균사처럼 마구잡이로 퍼져나가는 불안감. 가슴께로 커다란 추가 쾅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저녁을 정갈하게 차려놓은 뒤 작은 메모를 남겨두고 일을 갔을 준회였다. 유달리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에서 이질감이 들었다. 무언가를 크게 놓친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방 안을 이리저리 훑었다. 준회의 가방이 없었다. 준회가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던 새아버지의 사진이 담긴 액자들도 사라져 있었다. 정갈하게 개여진 준회의 옷가지들이 들어차 있던 낡은 옷장은 텅 비어 있었다. 몇 벌 되지 않는 내 옷가지들만 덩그러니 있는 채였다. 난잡해진 책상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구 휘저었다. 없었다. 아무런 메모도. 반듯한 글씨도. 그 어떤 흔적조차도.
준회가 집을 떠났다.
좁고 더러운 방을 끝내 혼자 나선 거였다.
"…김진환?"
의아한 목소리가 문득 귓가를 후벼팠다.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부터 웅웅 울려오는 목소리였다. 문득 고개를 드니 부옇게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쟁쟁한 네온사인 불빛이 여러 겹상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집이 있는 곳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시내 쪽일 것이라 막연하게 짐작했다. 시끌시끌하게 웃고 떠드는 제 또래의 아이들. 그 사이로 커다란 인영이 저를 향해 다가왔다. 위압적이고 단단한 몸. 맹수 같은 눈을 번들거리는.
송민호였다.
"너 꼴이 왜 그 모양이야."
무슨 말을, 어떤 말을 해야 되는 건지 몰랐지만서도 목구멍 안쪽을 콱콱하게 막고 있던 응어리를 토해내기 위해 겨우겨우 입을 뻐끔거렸다. 마구 구멍이 나고 뚝뚝 토막난 어휘들이 문장을 구성하지 못한 채 하나 둘 허공으로 흩어진다.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채 꾸역꾸역 뱉어지는 일련의 단어들 사이로 언뜻 울음기가 스몄다. 갈 곳이 없어. 집에는 이제, 못 가. 겨우겨우 쥐어짜내지는 의미있는 문장. 형형한 조명이 메마른 송민호의 얼굴 위로 어른어른 흔들린다. 송민호의 미간이 일순 어그러졌다. 무엇을 뜻하는 지는 알 수 없다.
"나 오늘 먼저 집 간다. 니들끼리 놀아."
김진환 넌 나 따라와.
붙잡힌 손목이 아팠다. 머리칼 사이로 얼핏설핏한 빛이 흘러들어왔다. 빛. 두려움은 분쇄되어진다. 콱 억눌려 속에서 썩어가고 있던 길고 희미한 울음이 터져나왔다.
![[iKON/준환] 심해 특별편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5/10/09/2/f911b79bc504a03d30b4ed574a877872.gif)
"너는 평생을 살아도 나를 알 수 없을거야."
내 발로 기어가지 않는 이상 아무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아. 나를 감싸고, 나를 껴안고, 나를 위로해주는 곳은 없어. 나는 불순물이야. 어디에도 낄 수 없어. 어디에도 누울 수 없어. 나는 오롯히 홀로 죽어가고 있는거야.
"…너는 나를 이해 못 해."
깨질 듯 위태로운 목소리. 시선이 교차한다. 송민호의 매서운 눈동자가 얕게 물너울쳤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iKON/준환] 심해 특별편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4111523/7c3f07748de059176bee08cdd14bc77d.gif)
"이 시간에 어딜 나가."
"…학교에 놓고 온게 있어서."
제발 나를 무시해. 대수롭지 않게 넘겨줘. 나를 신경 쓰지 마. 나를 놓아. 내게서 뒤돌아 서.
"…밤 늦었다. 조심해서 갔다 와."
시선조차 주지 않고 송민호의 등이 말했다. 고매한 어깨 선을 타고 흘러내린 송민호의 흰 셔츠를 잠시간 멍하니 바라보다 서둘러 걸음을 뗐다. 자박이는 걸음마다 뒷꿈치에 실린 망망한 불안감과 안도감이 합의점을 찾지 못한채 이지러지고 있었다. 무심하고 덤덤한 말투가 웅웅 귓바퀴를 따라 점멸했다.
"놓고 온게 이거야?"
기척도 없이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숨골이 확 조여졌다. 나른하게 공기를 부유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칼날이 되어 명치께를 가르고 헤집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가슴께가 가파르게 들썩였다. 등 뒤엔 송민호가 있었다. 어둠 속에 묻힌 채로 느릿느릿 따라왔을 걸 생각하니 소름이 쫙 돋았다. 송민호가 느적하게 고개를 들어올려 김지원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예민하게 변한 감각기관들이 날을 세우고 송민호의 행동을 헤아리고 있었다.
"저 새끼는 너한테 잘해주는 게 아냐. 죽은 지 여동생한테 못해준 걸 하고 있는 거지."
숨이 가늘게 멈춘다. 김지원이 건네었던 모든 말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귓가를 후려친 것처럼 멍멍했다. 속이 들끓었다.
"모든 친절엔 이유가 있다 그랬잖아. "
뭉그러지는 모든 기억들.
김지원의 집에 갔을 때 보았던 꽉 닫힌 방문을 기억한다. 김지원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여성스러웠던 컵과, 사소한 습관들과, 자상하고 다감했던 행동들과, 상냥했던 말투들을 기억한다. 내 미소를 가만가만 담았던 김지원의 눈을 기억한다. 여동생의 얘기를 할 때에만 미미하게 떨렸던 말 끝을. 끝내는 가르쳐 주지 않았던 그 이름을. 불분명하게 건네었던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을. 그 온기와 웃음을. 손길을.
김지원은 그동안 내게서 저의 죽은 여동생을 좇았던 거였다.
내가 김지원과 웃고, 울고, 얘기를 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 마다 그 애는 내가 아닌 여동생을 마주하고 있었다. 다시는 보지 못하는 여동생을 내게 투영해가며 저를 위로해 왔던 거였다. 김지원에게 나는 친한 친구 같은게 아니었다. 김지원에겐 내가 김진환이 아니었다. 죽은 여동생을 유일하게 담고 있는 주변인일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게 나의 의미였다.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이 자꾸만 처참하게 붕괴되고 있었다. 마지막 하나 남았던 끈이 허무하게 뚝 잘려져 버리자 내 밑에 남아있는 것은 흉측한 아귀를 벌린 채 철썩이고 있는 검은 바다 뿐이었다. 나를 김진환으로 대해주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모든 것의 종말이었다. 나는 이제 더이상 호흡을 하고 숨을 붙잡고 악착같이 살아나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맥아리 없이 축 쳐진 김지원의 어깨가 시야에 들어찼다 나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지원아.
너는, 누구를, 기다린거야?
준회야. 사실은 나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거야. 먼지처럼 잊혀지겠지. 내가 여기 있었다는 걸, 이 빈 집에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 있었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어. 나는 지금도 이렇게 무서운데, 우주에서는 또 얼마나 고독할까.
있지 준회야.
나 아주 오랫동안, 너를 보고 싶었어.
"그 집에 아직 볼 일이 남았니?"
무덤덤한 목소리가 잠잠히 빗소리에 잡아먹혔다. 타닥타닥 떨어지는 빗방울이 습기를 자아내 텅 빈 차체의 내부를 빙글빙글 순환했다. 익숙한 냄새가 콧잔등을 뱅뱅 맴돌았다. 준회의 커다란 손바닥으로 가는 비가 섞인 바람이 스몄다. 코 끝으로 가파르게 비 냄새가 스쳤다.
"네. 제일 중요한 일이요."
나는 내게 주어진 것들을 마무리 해야만 했다. 언젠가는 너와 함께 이 좁은 우주를 빠져나와 어디로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갈 거야. 그 때까지 내 손을 놓지 마. 나를 버리지 마. 나를 혼자 두고 떠나가지 마.
형.
나를, 나를 기다려 줘.
가쁜 숨이 차올랐다. 굴곡마다 음영으로 물든 얼굴이 세찬 빗물로 마구 뒤덮였다. 폭우였다. 구기듯 울음을 씹어삼키고 파들파들 떨리는 다리를 되는대로 마구 움직였다. 헤진 노끈처럼 얇은 숨이 저의 목덜미로 부서지는 순간 준회가 기도했다. 이내 미미한 진환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와작와작 씹혔다.
"…같이 가. 준회야…, 같이, 나만 두고 가지, 마…. 같이…"
그것이 제게 있어 복음과도 같다는 것을 깨달은 얼굴이 울음으로 마구 뭉개졌다. 너의 가슴 속에 난 금이 쩍쩍 갈라져 부서지는 것을 내가 왜 그대로 묵살하고 방치했을까. 너의 우주를 부수고 망가뜨리는 동안 도대체 왜 너 또한 같이 망가지고 부식되어 녹아내릴 것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왜 그것을 방관하며 너를 내 손으로 살해했을까. 내가 진정 원하던 건 너의 삶이었는데. 네가 사는 것이었는데. 언제까지나 살아 숨쉬는 너였는데.
"어디로? 형…, 어디로…?"
네가 원하는 낙원으로 너를 데려다 줄게. 나와 함께 나가는 거야. 너의 국가를. 궤적을. 너의 온 생生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 바다를.
"어디든…"
준회의 입 안으로 다시금 꺽꺽이는 울음이 마구 공명했다.
형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들. 견뎌내야 했던 시간들. 버텨내야만 했던 모든 끔찍한 것들이 공중에서 맴돌다 눈가에 늘러붙어 그대로 흘러내렸다. 희미하고 긴 울음이 터져나왔다. 형의 목소리에서 나던 지독한 비 냄새. 그 섬약한 목소리가 귓속을 빠져나가지 않고 뱅뱅 돌았다. 감은 눈으로 눈물이 터졌다.
아, 진환아.
제발 이대로는 나를 떠나지 말아줘. 제발 이대로 눈을 감지는 마. 제발, 제발…
나는 아직,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아.
진환아.
한번도 다정하게 불러주지 못한 이름이 퍼석한 기류 안으로 내려앉았다.
다만 나는 네가 간절했을 뿐이었는데.
속에 무언가 뜨끈한 덩어리가 얹힌 것 같다. 진환아. 다시 한 번 텁텁하게 부르튼 입술을 움직여 네 이름을 조음해 본다. 혀 끝에서 네 이름이 쓰게 맴돌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색색 미미한 숨결만이 우리 둘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었다.
꺽꺽이며 울리는 울음소리가 습자지에 물이 스며들 듯 차분하게 가라앉은 병실 안의 공기를 적셨다. 진환의 멀겋게 질린 얼굴이 희미해지는 시야 새로 보였다 사라졌다 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오열을 진배없이 쏟아냈다. 참회와도 같은 눈물이었다. 척추를 옹송그리며 너를 품에 넣으려고 악을 쓰던 죄악을 게워냈다. 나를 잊어. 나를 기억하지 마. 진환아. 그게 쓴소리 한번 하지 못하는 네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란 걸 알아. 그러니 나를, 네 기억 속의 나를 불태우고, 지워내고, 긁어내고, 찢어발겨서 전부 털어내버려.
그렇게 나를 잊어.
그렇게 나를 죽여. 나를 용서하지 마.
아, 그 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아주 작고, 희미하고, 옅은 소리였다. 목소리보단 울음소리에 가까운 흐느낌이었다. 물기 어린 음성이 귓바퀴를 따라 스몄고, 혈관 하나하나를 따라 측두엽으로 치닫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아, 잊고 있었던 내 이름과, 나의 가족과, 나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의 죽음과 이별.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짓밟았던 그 모든 극악의 상황들. 작은 방과, 침수되어가던 집과, 몰아치던 빗줄기와, 쏟아지던 바다. 손목을 울렁울렁 삼켰던 핏물과, 다 떨어져 가는 장판과, 누군가의 발이, 다가오던 걸음이, 바르르 떨리던 손 끝의 감각과 뜨겁고 너른 등이. 이내 부수어지던 빛. 역광. 야윈 어깨. 온기. 뜨거운 체온. 준회.
준회.
아. 준회야.
나 정말 너를 오랫동안 보고 싶었는데.
잊고 있었던 모든 것들. 그토록 절박하게 바랬던 모든 것들을 다시 붙잡을 때였다.
"이젠 나랑 같이 가자. 혼자 두지 않을게. 같이 가는거야. 같이…"
준회가 방백처럼 중얼거린다. 물기를 함뿍 머금은 눈 밑으로 시원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준회가 웃었다. 어설프던 미소는 온데간데 없는 온전하게 새하얀 웃음이 진환의 얼굴에 닿아 파스스 부서져 흩어졌다. 잔재하는 온기가 진환을 감쌌다. 가슴 어딘가가 가혹할 정도로 섬약하게 떨려왔다. 준회의 어깨 뒤로 부서지는 불빛이 언젠가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웠던 빛무리와 겹쳐진다. 여명. 새벽. 울먹이던 열여덟의 너. 작은 우주 속의 우리.
"어디로…?"
희끄무레한 얼굴로 진환이 물었다. 비는 더이상 내리지 않았다. 물너울치던 창 밖이 맑았다. 준회가 손을 내밀었다. 저릿한 손을 내밀어 그 손끝을 붙잡은 진환이 말갛게 따라 웃었다. 기다란 눈매가 찬찬히 접혔다.
너와 나를 뒤덮었던 바다가 찬찬히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 그토록 열망하던 우주의 함락이었다.
"어디든."
그리하여, 비로소 여름의 종말이었다.
*
안녕하세요 여러분 정새벽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거의 빙의글 수준이었던 심해 요약본+움짤이었어요!
외전은 민호 편은 구상이 끝났고, 지원이 편만 조금 더 생각해내면 큰 플롯은 짜지는 거니깐... 아마 차기작 연재 도중에 나올 것 같기도 해요^^... 헤헤
아! 그리고 오타수정 + 퇴고를 마친 본문을 모아 텍파로 만들어서 개인 블로그에 올려드리겠습니닷! 저는 원래 연재본보다는 완결본을 텍파로 읽는 거슬 조아하기 때무네^^..!!!!
아 그리고 음... 심해의 첫 구상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사는 소년과 내색은 안하지만 결핍된 곳이 많은 불온전한 소년의 조합을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답니다!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음) 그래서 결국엔 성장소설... 비스무리하게... 쓰는 것이 목표였어요. 서로의 결손된 부분을 서로가 조금씩 채워주면서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심해는 성장소설이라기엔 너무 어두침침하고 우울하죠? ㅎ... 싸이코는 아녜요^^! 그리고 저는 완전한 악역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기 때문에..ㅠㅠ 민호의 캐릭터를 구상할 때 첨엔 원래 더 악독하게 뿌요를 개롭히는 역할이었거든요! 예를 들면 진환이를 기다리는 지원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진환이와 붕가붕가(...) 하는 소리를 들려준다던가, 지원이가 보는 앞에서 진환이를 더 짓밟고 내리누르던가... 하는 것들 말이에요. 그치만 설정 상 민호는 아직 어리고 미성숙한 19쨜의 학생^^.. 이니까, 그리고 전 약간 어설프고 안타까워서 더 정이 가는 악역을 좋아하기 때무네... 민호의 악행들을 조금 줄이고 대신 진환이를 괴롭히고 더 가둘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많이 서술했습니다ㅎ... 쨌든 전 심해 속의 미노가 져아여... 완전한 악역이 아니라서ㅠㅠ 어딘가 퇴폐한 것 같은 모습.... 물불 안가리는 ㅆr7rGi★고딩의 치기어린 첫사랑은 넘나 존엄해요... 존엄하구요... ㅇㅏ 그리고 퇴고를 하다 깨달았는데 제가 애들 나이를 좀 잘못 썼더라구요^^ 노답ㅋㅋㅌㅋㅋㅋㅋㅋㅋㅋ 설정 상 진환이와 민호와 지오니의 나이는 열아홉, 주네의 나이는 열 여덟이에요! ㅋ... 쓰면서 헷ㅅ갈린 제 자신 애잔... 앗 그리고 외전은 민호 이야기는 플롯을 다 짠 상태에요ㅜㅜ 찌통 미노.... 흑흑... 지워니보단 민호 비중이 더 클 것 같다고 조심스레 예상해봅ㅁ니닷... 헤... 아마 10~11월 중으로는 쓸... 수 있겠죠..? ㅎ^^... 덕질에 과제까지 하려니 갱장히 바빠서 너무 슬프네요ㅠㅠㅠ 그치만 언젠간 꼭 외전으로 오고싶어요ㅠㅠ 지금껏 써봤던 글 중에 심해만큼 애착이 많이 가는 글도 없기에 마무리를 잘 해보려고 합니다!
아 그리고 차기작은 정말 고민 많이 했었는데 저능아 + 싸가지 고딩 / 왕천선을 비롯한 또라이들 사이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뿌요 / 스릴러 미궁게임 / 뱀파이어물 이렇게 여러 개 중에 택1 해서 오려고했는데^^... 제가 셤기간이 되면 밑도끝도 없이 자꾸 뭘 보거든요... 그리고 이번 시험기간에는 예전에 대충 봤었던 스킨스를 첨부터 제대로 보기 시작했는데... 보면서 감명 너무 심하게 받아서 결국 예정에는 1도 없던 영국물 먹은 주네와 진환이, 그리고 아마 사이드로는 바뱌? 를 연재하게 되었ㅅ읍니닷... 답없음...^^ 아직 구상을 다 끝내진 못했는데 이미 3편 까지 싸지른 상태구요... 흑... 시즌 1은 진환이와 주네 위주로, 시즌2는 한빈이와 바비 위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시즌제 없이 그냥 한번에 몰아서 찌찌파티를 할 것인지는... 좀더 고민을 해봐야 하는데.. 일단 전 당장 내일 전공과제+시험이 있고 화요일에 교양셤, 수욜에 전공 3D 과제와... 목요일엔 공통전공 시험이랑... 주말엔 교양시험이 있는덷... 왜 여기서 이러는지 의문..^^ 님아...;
일단은 시간 나는 대로 답글 달아드리러 찾아오겠습니다! 아마 담주부터 잠시나마 자유의 몸이 되니까 그 때 정말 감사한 분들에게 장문의 답글을 달아드리러 올게여 흑흑 답글 쓴느건 제 삶의 낙인데 셤 때무네 못쓰는거 넘나 슬픈것.... 아 그리고 밑에는 브금 정본데, 안타깝게도 제가 약간 생각이 없어서^^... 브금 저장소에서 10화 브금을 아무거나 들어보고 제일 괜찮은 걸 받고 나선 그대로 기억 순삭... 제목도 없더라구요ㅠㅠ 그래서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