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 다정한 흔적들
" 호석이형 돌아온 기념으로 태형이가 링겔주 하나 말겠습니당! "
테이블 정중앙에 앉은 태형이 잔뜩 신이 난 듯 어깨까지 들썩이며 절반쯤 남은 소주와 매화주의 입구를 맞붙였다. 맞붙은 입구에서 매화주가 소주병으로 콸콸 쏟아졌다.
태형아 살살하자. 태형의 옆에 앉아있는 호석이 만류했지만, 왜요,저거 완전 맛있는데. 여주의 왼쪽에 앉아있는 지민이 태형을 거들었다.
그에 다들 적당히 마셔. 여주의 오른쪽에 있는 남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 그래. 적당히 해. "
한 대 맞기 전에.
여주는 뒷말을 꾹 삼키며 말했다. 이미 술이 잔뜩 들어간 태형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헤헤, 웃곤 링겔주 만드는데 여념이 없었다.
맞은편 태형의 옆에 있는 호석이 흘끔 저를 바라보는 걸 느꼈다. 여주는 그 시선을 느끼며 울분을 삼켰다. 진짜 되는 게 없어.
마음같아선 호석의 손을 잡고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 하고 싶었다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목 끝까지 채운 셔츠 안에 있던 그 상처를, 일주일간 연락도 없이 사라졌던 그 이유를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어쩐지 호석만 보면 고장이 나는 듯한 제 마음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호석과 단 둘이 이야기하기 위해 현관문을 나서려던 순간,
" 혀엉!!!!!! "
태형의 부름에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다급히 달려와 호석을 안으며 여주에게 도끼눈을 한 태형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다같이 술을 마시자며 고래고래 목청을 높였다.
" 링겔주 완성! 다들 잔 주세용 "
그게 이 결과물이었다. 어느 덧 테이블 한 켠에 쌓인 많은 소주병들과 맥주병들, 바닥을 보인 안주들, 이미 눈이 절반쯤은 가버린 지민과 태형.
그 사이에 이성을 놓지 않고 있는 남준과 태형의 성화를 못이겨 받아주고 있는 호석. 그리고 짜게 식어가고 있는 자신.
" 누나 모해요. 잔 주세여. "
대꾸않고 있으려니 지민이 제 앞에 놓인 잔과 남준의 잔을 쓸어 태형 앞에 밀었다. 태형은 쪼로록 술을 따르며 행복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티냈다.
원샤앗, 기분좋게 말하는 태형을 가만히 보던 여주는 한숨을 푹 뱉곤 그대로 술잔을 입으로 털어넣었다. 그래, 오늘은 모두를 위해 참자.
사실 따지고 보면 호석이 돌아온 건 비단 저뿐만 아니라 모든 하메에게도 경사였다. 게다가 호석이 없는 내내 눈물 쏙 뺐던 태형이 아니었던가.
여주는 호석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거들떠 본 적 없었던 하메들의 얼굴을 살폈다. 모두의 얼굴에 즐거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호석의 덕이었다.
가만 떠올려보면, 쉐어하우스는 호석의 크고 작은 흔적들이 가득했다.
아침마다 가지런히 정돈되어있던 신발장, 당번이 깜빡해도 매일같이 말끔했던 설거지와 빨래, 새벽같이 술을 마시고 온 하메의 방문에 걸려있던 숙취음료,
간식비가 없어도 채워지던 간식창고.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호석의 다정이 담긴 일상의 순간순간들.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아도 꾸준히 제 애정을 담았던 호석의 조각들이 가득했다.
여주는 그의 부재 속에서 다시 한 번 호석이 어떤 사람인지를 깨달았다.
언제나 한결같이 다정한 사람, 매일 안부를 묻는 사람, 호의를 더 큰 애정으로 보답하는 사람, 누구보다 노력하는 사람,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
죽을만큼 노력하지 않으면 버려질 거야.
언젠가 호석이 그런말을 했던 게 기억났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뒷통수 맞고 돌아와 꾸짖었더니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말하던 , 꼭 누군가에게 버려질 것이라 확신하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기어코 울지 않던, 그 날의 정호석.
여주는 그 날의 호석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안도했는지에 대해.
네가 없던 짧은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의 안부를 물었는지에 대해. 너를 너 자체로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그리고, 그리고...
여주는 문득 뭉클해져서 남은 소주를 털어마셨다. 아. 취한다. 혼잣말을 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평소처럼 취한 건 아니었지만 뜬금없이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다.
그 때 제가 더 성숙했더라면 어땠을까. 적어도 꿀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껌뻑이다가 더 상처를 안고 돌아가는 호석의 뒷모습만 바보같이 쳐다보고 있진 않았겠지.
왜 그런 말을 하냐며 한대 칠 수도 있었을 텐데. 강제로라도 제 앞에 앉혀서 묵혀둔 이야기를 꺼내게 했을텐데.
어쩐지 가슴 한 켠이 쿡쿡 쑤셨다. 이제서야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우스웠다.
여주는 사이 태형이 새로 시킨 소주뚜껑을 땄다. 몇 잔 더 마시면 이 마음이 좀 내려갈까 싶었다. 그 때 건너의 호석이 몸을 숙여 제 술잔을 낚아챘다.
" 그만 마셔. "
나 별로 안마셨는데. 여주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호석은 아랑곳않고 들고있던 소주병마저 낚아채곤 태형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 이것까지만 마시고 일어나자. 늦었어. "
호석의 말에 태형도 막병! 소주를 따르며 기분좋게 대답했다. 아깐 한도끝도없이 김태형에게 맞춰줄 것 같더니. 호석의 태도가 꽤 단호했다.
여주는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술기운이 올라와서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통에 깜빡 잠이 든 사이, 남은 하메들끼리 소주를 털어마시고나서야 술자리가 파했다.
***
" 2차 갈 김남준 형님 구합니다~~~~ "
어느덧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여주 기준에서는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매일 꼭두새벽까지 달리고 오는 태형과 지민에게는 매우 이른 시간이었다.
둘은 각자 남준과 호석을 끌어안고 2차를 가자고 조르는 모양새였다. 구석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진 여주는 왕따 당하는 듯한 느낌에 기분이 묘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졸랐어도 안갈 셈이었으니까.
평소였다면 따라서 갈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좀 상태가 메롱이었다. 어젯밤 윤기 일때문에 머리가 내내 아프기도 했고, 그 이후에 데인 화상도 술때문에 몸이 달아올라서인지 욱씬거렸다.
어차피 오늘 호석과 진지하게 단 둘이 이야기하기는 글렀으니 얼른 집에서라도 쉬고 싶었다.
" 그래, 알았어. 간다, 가. 그니까 좀 떨어져봐. "
지민의 땡깡에 두손두발 다 든 남준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남준에게 거의 업히듯 매달려있던 지민이 가뿐히 땅에 착지하며 오늘 형 끝까지 우리랑 가는 거에요! 신나서 말했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좀 떨어져있는 여주에게 시선을 꽂았다.
지민이 누나아, 입을 여는 순간 안가. 여주가 답했다. 그럴줄 알았어요. 지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럴 때 진짜 삐져서 뒤끝작렬하는 태형과는 달리 지민은 이런 쪽에 꽤 쿨한 편이었다. 남준에게 매달린 것도 그저 같이 놀자는 제스처였을 뿐 단호하게 거절하면 금방 단념하곤 저들끼리 놀러갈 애였다.
그 뒤끝작렬하시는 김태형은 호석에게 착 붙어있었다. 그에 합세하듯 지민까지 달려갔다. 정호석 오늘 오지게 마시겠네.
여주는 자꾸 내려오는 눈꺼풀을 지그시 누르며 남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덜미가 불긋한 게 남준 또한 꽤 취한 듯 했다.
" 오빠 목 엄청 빨개요. "
" ... "
" 지금 취한 거 아니에요? "
" ...아마. "
" 별 일이네요. 오빠 2차까지 가는 일 별로 없잖아요. "
졸음도 물리칠 겸 가볍게 말을 건넸다. 요근래 하반기 취업준비로 바빴던 남준은 회식은 커녕 학과행사도 참여하는 일이 드물었다. 쉐어하우스에서 있는 술자리도 잠깐 함께하다가 곧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 때마다 태형과 지민의 볼멘소리가 따라왔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여주의 물음에 열기를 식히던 남준의 시선이 부딪혀왔다. 다정함이 섞인 눈이었다.
...응? 다정함? 여주는 눈을 꿈뻑 크게 감았다 뜨며 정신을 붙잡았다. 다시 바라보니 평소의 남준이었다. 남준은 후, 취기어린 숨을 뱉으며 대답했다.
" 호석이가 너한테 먼저 연락했어. "
" ...네? "
" 오늘 온다고 했던 연락. 나한테 먼저 한 거 아니었다고. "
제가 물어본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답을 늘어놓는 남준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여주는 의미를 알 수 없었다.
" 그러니까, 그런 걸로 울지마. "
" ...네? "
" 내 앞에서 울지 말라고. "
꼭 누구 보는 것 같으니까.
남준은 명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마지막 혼잣말을 짓이겼다. 항상 다정했던 남준에게서 처음 듣는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여주가 알 수 없는 말에 물음으로 되받아치려는 순간 남준이 하메들이 있는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 얘들아! 호석이 놔줘. 여주 혼자 보낼 순 없잖아. "
평소처럼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연한 얼굴의 여주를 등지고 남준이 셋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둘을 떼어내고 여주쪽으로 호석의 등을 밀었다.
한참 시달리다 떠밀려 온 호석이 여주 앞에 섰다. 호석이 가까이 다가오자 의뭉스럽던 남준의 모습이 순식간에 달아나고 눈 앞이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조심히 들어가, 태형과 지민을 양 옆에 낀 채 멀어지는 남준의 목소리가 너머에서 멀어졌다.
소란스럽던 하메들이 사라지니 적막이 둘 사이를 갈랐다.
호석의 뒤로 비춰진 가로등이 유난히 밝았다. 때문인지 꽤 서늘한 날씨였지만 춥지 않았다. 서늘하면서 맑은 가을밤의 냄새. 여주는 그 향을 크게 들이마시곤 히, 웃었다. 마주하고 있던 호석도 덩달아 웃으며 말했다.
" 그럼 갈까? "
# 아무것도 없는 아이
" ...방금 뭐라고 했어? "
탁, 희주가 잡고 있던 커피잔을 던지듯 내려놨다. 유리테이블과의 마찰음이 카페의 전체를 울린 통에 매장 안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따라왔지만, 희주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제 맞은 편에 무심한 얼굴로 앉아있는 윤기만이 또렷하게 보일 뿐이었다.
" 그만하자 우리. "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희주에 반해 윤기는 응당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이 그렇듯 지나치게 침착하고 차분했다.
연애의 끝은 가장 먼저 감정을 정리한 사람이 단호하고 정돈된 태도를 보이는 법이었으니까. 이별은 둘이 하는 건데, 항상 한쪽만 유리한 게임이었다.
헤어지자고. 윤기는 마지막 말을 덧붙이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평소보다 더 텁텁하고 쓴 맛이 혀 끝을 맴돌았다.
" 몇주간 연락없더니 고작 낸 결론이 그거야? "
" ... "
" 너 진짜 나쁜 새끼인 거 알지. "
희주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할 거면 각오해둬야 할거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한 뒤로 몇주만에 본 얼굴이었다.
그 짧지 않은 기간동안 전화도 제대로 받지 않던 윤기였다. 매번 돌아오는 메시지는 생각을 정리해야겠다면서, 나중에 얼굴을 보자는 내용뿐이었다.
기다리다 지친 와중 친구 핸드폰을 빌려서 겨우 연결된 첫 통화는 김여주가 받은데다 지금은 저보다 김여주가 중요하다는 윤기의 말로 끝났다.
사람을 이렇게 참담하게 만들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윤기는 제게 잔인했다.
" 왜. 나랑 헤어지면 김여주한테 돌아가려고? "
" 걔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
넘겨짚지마. 윤기의 표정이 차갑게 굳으며 경고하듯 말했다. 여주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표정을 지으면서 상관이 없다고? 기가 찬 듯 희주가 조소를 날렸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처음엔 동기가 소개팅하는 상대가 제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소리에 솔깃했던 것 뿐이었다.
동창이면 잘 알고 있지 않냐며 알아달라는 동기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민윤기였다. 그 이름을 희주는 단번에 기억해냈다.
항상 옆반에서 김여주와 꼭 붙어다니던 얼굴 반반한 남자애. 세상만사 귀찮은 표정과 태도로 다니면서 김여주 일이라면 뭐든 발벗고 나선다던 애.
같은 반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음악 선생님의 총애를 받던 애라서 드문드문 얼굴을 마주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윤기는 제게 관심이 없었고, 희주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 무렵 김여주와 기어코 사귀었다가 깨졌다는 소식을 건너 들었던 차였다. 희주는 동기를 향해 말했다.
내가 갈게.
그렇게 시작했던 사이였고, 연애를 하면서도 주도권을 윤기에게 주는 일은 없었다. 까칠할 것 같던 윤기는 의외로 다정다감한 면이 있었고 무심하면서도 배려심이 깊은 애였다.
그 행동에 특별한 애정을 느끼진 못했지만 지금껏 만났던 남자들 중에 가장 편해서 감정을 숨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처음엔 적당히 만나다 김여주와의 사이를 멀게 하고 헤어질 생각이었는데, 갈 수록 감정이 깊어진 건 희주의 편이었다.
" 날 사랑하긴 했니? "
희주의 물음에 윤기는 침묵했다. 그런 걸 했었던가. 희주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특별했지만 그걸 사랑이라고 표현하기엔 지나치게 가벼웠다.
결국 이별을 말하는 지금도 마음 한 구석 아프지 않은 걸 보면 희주가 말한 사랑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여주와는 달랐다.
윤기에겐 여주에게 이별을 고했던 그 날은 내내 운 기억뿐이었다. 작업실 문을 잠궈놓고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쥐어뜯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윤기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건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입혔다는 것이었다. 또, 조바심과 이기심으로 시작했던 관계를 끝내 제 손으로 망쳤다는 것.
당시의 감정에 대해 이름 붙여본 적 없지만, 그 감정은 명백히 사랑이었다. 사랑해서 더 닿고 싶고, 만지고 싶고,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제 감정일 뿐이었고, 여주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차악을 선택한 것이 이별이었다.
일방적인 이별통보 이후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마주한 여주 앞에서 윤기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가장했다.
마음고생을 했는지 핼쑥해진 여주의 얼굴을 쓰다듬고 안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아냈다. 그리곤 바로 어제 본 것처럼, 마치 몇달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물었다.
밥은 먹었어?
여주가 기숙사에서 나오게 됐다는 소식에 곧바로 쉐어하우스를 이야기했던 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 제 실수였다.
마침 석진이 어학연수를 나간다는 건 핑계였다. 원래 그 자리는 석진의 후배가 들어오기로 구두약속이 되어 있었으니까.
여주는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이가 많지 않기에 집을 구하는 게 어려울 거란 걸 윤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본능적으로 여주가 들어오길 바랐을 뿐이었다.
여주가 쉐어하우스에 입주하고나서야 윤기는 제 실수를 깨달았다. 매일같이 집에서도 마주치는 여주의 모습은 끊임없이 윤기를 괴롭혔고, 조금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른 여자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평소엔 나가지도 않던 동기모임에 나가고, 가끔 여자동기나 후배가 부르면 마지못해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수많은 시도 끝, 그 종착지가 희주였다. 자신이 모르는 여주의 열아홉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가끔은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스로가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결국 착각이었지만.
" 미안해. "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진심으로 미안한 건지 스스로 반문하진 않았다. 그저 상대에게 차리는 마지막 예의였다.
적막 끝에 희주가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
" ...그 땐 정호석이더니 이번엔 너야? "
" 정호석이 여기서 왜 나와. "
" 김여주는 정말 끝까지, "
나한테서 모든 걸 빼앗아가. 뒷말을 꾹 삼킨 희주는 그대로 일어섰다. 그리고 이제 애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똑같이 돌려줄게. "
" ... "
" 네가 나한테 잔인하게 군 만큼. "
대답없이 복잡한 표정을 짓는 윤기를 바라보다 희주는 뒤돌아섰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더이상 이런 일로 울고 싶진 않았다.
김여주때문에, 김여주가 제게 빼앗은 것때문에 우는 일은 더이상 없어야 했다.
그게 희주에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
대전 희망 보육원.
희주는 성인이 되서도 그 시절의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 저를 버리고 간 엄마가 지은 '이주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때.
갓난 아기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라온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이가 어느정도 큰 이후에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희주는 후자의 경우였다.
사업이 망해 파산한 부모는 결국 끝까지 희주를 책임지지 못했고, 희주는 머리가 어느 정도 자란 여섯 살의 나이에 보육원에 맡겨졌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 곳에서 자란 아이들과는 달리 부모의 사업이 잘될 때 나름 사립 유치원까지 다녔던 희주에게 보육원은 낯선 세상이었다.
오늘은 내 것이었던 장난감이 내일은 다른 아이의 것이 되고, 어렵게 친해진 아이가 있어도 갑작스레 입양이 되어 사라지기도 했다.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던 곳에서 희주는 지독하게 외로웠다. 그 시절 희주의 꿈은 오로지 좋은 집안에 빨리 입양되는 것 뿐이었다.
" 주은아. 나랑 놀래? "
하늘이 높고 맑았던 초가을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모두가 뒹굴며 놀고 있는 운동장 구석에서 무념히 하늘을 바라보던 희주의 앞에 어떤 여자애가 나타났다.
보육원에서 처음 보는 리본 삔을 양쪽에 예쁘게 꽂고 단정한 원피스를 입은 아이였다. 나이는 저와 비슷한 것 같았는데, 좀 특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이였다. 정갈한 옷차림에 비해 피부는 탄데다가 이곳 저곳에 상처가 많았다. 머리도 삐죽삐죽 튀어나온 게 꼭 제 나이또래 남자애들처럼 노는 말괄량이 같았다.
" 싫어. "
그래서 단박에 거절의사를 표현했다. 같이 놀아봤자 피곤한 아이인 것 같았으니까.
단호한 의사에 여자애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난 너랑 놀고 싶은데. 되도 않는 말을 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니 여자애는 헤, 바보같이 웃었다.
이렇게 까칠하게 굴면 보통 애들은 금방 시무룩해져서 다른 아이들을 찾곤 했는데, 여자애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막무가내인 애였다.
" 내 말 못들었어? 싫다니까. "
" 여기서 동갑은 너랑 호석이밖에 없단 말야. "
" 뭐? "
" 호석이도 너랑 같이 놀고 싶대. 우리 셋이 놀자. "
남자애가 여자애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희주는 그 얼굴을 알았다. 보육원 교사들이 수근거리던 애였다.
불쌍하다며 교사들의 동정을 한 몸에 받는 애. 무슨 사정으로 다시 보육원에 돌아왔다던데, 그 사정까지 알고 싶진 않았다.
세상 모든 우울을 씹어 삼킨 듯한 얼굴의 호석을 보니 희주는 더 함께 놀기가 거북해졌다. 하지만 희주가 다시 거절하기도 전에 여자애는 덥썩 제 손을 잡더니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야, 야! 당황한 희주가 부르자 여자애가 말했다.
" 너네랑 놀려고 나 부루마블 가져왔단 말이야. 같이 가자! "
구김살 없이 마냥 햇살같았던 아이.
그 애의 이름은 김여주였다.
***
보육원에 얼마 없던 여섯살의 아이들은 금세 친해졌다. 처음엔 만사 까칠하게 굴던 희주였지만, 매일 찾아와 비글처럼 구는 여주에게 저도 모르는 새 스며들었다. 함께 일곱살이 되던 때까지도 호석은 말 수도 적고 내성적인 애였지만 여주와 함께 노는 사이에 그 모습이 익숙해질 만큼 가까워졌다.
그리고 희주는 그런 호석을 좋아하게 됐다. 이상한 일이었다. 제게 먼저 말을 거는 일도, 둘만 노는 일도 없었지만 어쩐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희주는 알게 모르게 입양을 미뤄왔다. 희주는 똑부러지고 예쁜 아이였기에 몇 번의 입양기회가 있었지만, 그 때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입양을 피했다.
호석과 함께 있는 시간이, 그리고 여주와 함께 있는 시간이 사라지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 김여주. 너 원장님 딸이었어? "
하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식사시간, 보육교사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던 희주는 여주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까.
꼭 보육원 아이처럼 굴던 여주는 원장님의 딸이었다. 지난 1년간 단 한번도 제게 말한 적 없던 이야기였다.
여주를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 왜 말안했어? "
" 아니...난 그냥... "
" 내가 불쌍해서? "
" 아니야! 그런거 아냐 주은아. "
" 그럼 뭔데? "
" 난 그냥...엄마가 같이 놀라고 해서... "
여주의 눈에 눈물이 맺혔지만, 희주는 극심한 모멸감과 분노에 차올랐다. 동정심. 결국엔 동정심에서 기인된 행동이었다. 여주의 모든 것이.
처음부터 보육원에선 볼 수 없는 옷차림이 이상했는데. 그 때 알았어야 했다. 차라리 그 때 알았더라면 이렇게 마음을 열진 않았을 텐데.
다신 나랑 얘기할 생각하지마. 희주는 그 날 이후 여주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니, 여주가 저를 피해준 쪽에 가까웠던가. 이따금씩 호석과 함께 있는 여주를 봤지만, 먼저 피한 건 여주쪽이었다. 그 때마다 미안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희주는 그게 우스웠다. 처음부터 저를 동정했던 애였으니까.
그 무렵부터 희주는 호석을 찾아가는 일이 많아졌다. 여주가 호석을 찾기 전에 일찍이 먼저 호석 곁에 머물렀다. 서로 별 말을 주고 받진 않았지만 희주는 그 침묵이 좋았다.
알게 모르게 둘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선생님들에게 예쁨을 받기 위해 궂은 일에 먼저 손을 들고, 그 행동에 생색내지 않았다.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꾹 참는 법을 배웠다. 쉽게 감정을 들키거나 나쁜 모습을 보이면 미움을 받으니까. 어쩌면 한 번 버려진 아이들의 공통점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 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나이였다. 희주는 그 전에 호석에게 고백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아주 어린 나이였지만 제 감정에 솔직했던 희주였으니까.
" 나 여주가 좋아. "
하지만 가차없이 돌아온 대답은 여주를 좋아한다는 말이었다.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것 같았다. 우리를 동정하는 그 김여주를 좋아한다니. 여주를. 내가 아닌, 여주를.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신이기에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해 여주는 제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단정한 원피스, 예쁜 머리띠, 반짝이는 구두, 안정적인 가정, 인자한 원장님, 그리고 호석의 마음까지.
분노는 공연히 여주에게로 향했다. 김여주는 제게서 모든걸 빼앗아가는 것만 같았다.
***
" 주은아. 호석이 어딨어? 어디갔어? "
여덟살이 되던 해였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호석이 사라졌다. 그 사실을 맨 처음 알게 된 희주 또한 모든 이들에게 물었지만 다들 함구하고 있었다.
다음날 교사들이 있는 휴게실에서 몰래 엿듣기론 급작스럽게 입양이 된 모양이었다. 그 사정이 복잡해보였지만 어린 희주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어렸던 호석에게도 어쩔 수 없던 부분이었을 테다. 그걸 알고 있던 희주는 다음날 호석을 다급하게 찾는 여주에게 말했다.
" 너 미워해서 나갔어. "
" ...뭐? "
" 호석이도 나처럼 네가 속인 게 화났던 거야. "
말을 잇지 못하고 방울방울 눈물을 떨구는 여주를 향해 희주는 다시 한 번 말했다.
" 호석이가 나한테만 말해줬어. 네가 너무 미워서 나간대. "
그러니까 다신 찾지 말래.
희주는 픽 웃곤 그대로 여주의 곁을 지나갔다.
제게서 모든 걸 빼앗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는 아이의 유일한 복수였다.
# 지금의 우리
호프집에서 쉐어하우스까지는 대략 걸어서 이십분 정도가 걸렸다. 오분정도 걷다보면 큰 대로변을 벗어나 가로등이 몇 없는 골목을 지나가야 했다.
오늘은 길목 사이사이에 친절한 달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가늠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만큼 비춰주는 달빛이 평소보다 밝았다.
어제는 달이 저를 잠도 들지 못하게 괴롭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오늘은 꼭 호석이 돌아온 걸 환영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주는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호석을 바라봤다. 터벅터벅, 걷는 발걸음 소리가 평소보다 느렸다. 술기운에 느려진 제 걸음 속도에 맞춘 호석의 배려였다.
어젯밤 저를 혼란스럽게 했던 윤기의 모습도, 의뭉스럽던 남준의 말도 전부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질 만큼 안온했다. 그게 신기했다.
어제만해도 여주의 머리를 아프게 했던 일들이, 호석이 제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게 해결된 것처럼 느껴졌다. 꼭 제가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기둥같았다. 불과 몇 달전만해도 그 기둥은 다른 사람의 몫이었는데.
여주는 가만히 호석을 바라보다 의식적으로 고개를 올렸다. 순간 이상하게도 호석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왠지 마음이 간지럽고 옥죄어 오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이미 제 손은 호석의 뺨 위에 닿아 있을 것이었다.
" 속 괜찮아? "
숨을 돌리고 가을공기를 느끼고 있을 무렵 곁에서 호석이 물었다.
" 많이 안마셨잖아. "
" 소주 마셨잖아. 소주에 약하면서. "
" 치. 내가 먹으면 얼마나 먹었다고. "
" 마지막엔 아주 병째로 마실 작정인 것 같던데. "
여주는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평소처럼 잔소리하는 호석의 목소리가 퍽이나 다정했다.
" 넌 두 병도 넘게 마셨잖아. "
" 그거야, "
" 그것도 김태형 맞춰주느라. "
" ...내가 마시고 싶어서 마신거야. 맞춰준 거 아니야. "
" 너 주량 내가 뻔히 알거든? "
" 난 멀쩡하잖아. "
" 거짓말. "
여주가 시선을 맞추며 우뚝 멈춰섰다. 여주의 걸음에 맞추던 호석도 덩달아 멈춰섰다.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호석을 가만히 뜯어보던 여주는 마음에 안든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너 가만 있어봐. 그리곤 천천히 호석과의 거리를 좁혔다.
여주의 얼굴이 한걸음 두걸음 가까워지자 당황한 호석은 여주야, 여주야, 이름을 부르며 뒷걸음질 쳤지만 여주는 아랑곳않고 다가왔다.
더이상 물러설 곳 없이 담벼락에 부딪히자 여주와 호석 사이엔 바람 하나 지나갈 틈 없이 가까워졌다.
당황한 호석의 시선이 정처없이 방황했지만, 여주는 전혀 신경쓰지 않으며 저보다 한참 큰 호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 좀 가만 있어보라니까. "
그리곤 그대로 호석의 가슴께에 머리를 묻었다. 흡, 숨을 들이킨 호석의 온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든 손은 그대로 주먹을 쥔 채였다.
가까운 여주에게서 포근한 향기가 났다. 아침햇살을 닮은 맑고 고운. 그래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쩌면 어린 날의 두근거림을 전부 합쳐도 안될 만큼 세차게 뛰었다. 어쩔 작정으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건 좀 위험했다.
품에서 느껴지는 여주의 간질간질한 숨소리가 머리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호석은 눈을 질끈 감으며 주먹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머릿속이 거의 전쟁통인 호석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주는 품에서 말했다.
" 너 취하면 심장 엄청 빨리 뛰잖아. "
쿵쿵, 예상대로 호석의 심장은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지난번 거나하게 취한 호석을 데리고 왔던 날 여주는 호석이 취하면 얼마나 심장고동이 빨라지는 지 알 수 있었다.
내, 내가 언제. 짐짓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호석을 향해 여주가 고개를 들었다. 품에서 올려다 본 호석의 목덜미가 희미한 달빛을 받는 와중에도 붉었다.
" 너 지난번에 완전 취했던 날. 내가 다 들었거든? "
" 완전 취했던 날? "
" 어어. 정국이가 나 불렀던 날 있잖아. "
" ...전정국? "
" 야. 어떻게 그 땔 기억 못할 수가 있어. 그 날이잖아. "
네가 나한테 키스한 날.
여주가 마지막 문장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었다. 그저 호석에게 단단히 일러줄 요량이었다.
앞으론 절대 다른사람한테 맞추려고 과음하지 말라고. 심장 빨리 뛰는 건 다 몸에 술이 안받아서라고.
하지만 짐짓 모른 체하는 호석이 얄미워 자신이 확실히 알고 있다는 걸 피력하려던 것 뿐이었다.
명백한 실언이었다. 다음날 취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호석을 보고 여주는 이 비밀을 무덤까지 묻어두려고 했었다.
윤기가 눈치 챈 건 예상 외의 일이었지만 그럭저럭 잘 묻어뒀다고 여겼다. 그런데 제 입으로, 그것도 아주 명확하게 말해버리다니. 여주의 얼굴에 큰 낭패감이 떠올랐다.
호석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꿈 속에서 여주가 나타나 그 이름을 하염없이 불렀던 날이 있었다.
어리던 날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매일같이 그리던 얼굴을 한 여주가 제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닿고 싶어 손을 뻗었지만, 여주의 모습이 흐릿한 잔상과 함께 희미해졌다.
꼭 옛날처럼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것만 같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다급히 여주에게 입을 맞췄다. 따스하게 닿던 감촉이 꿈결 속에서도 생생하게 느껴져왔다.
멀어지지 말라고, 사라지지 말라고, 함께 있어달라고 호석은 애원하며 아이처럼 여주의 입술을 찾았다. 숨을 고르기 위해 입술이 떼어질 때마다 여주의 모습이 흐려졌다.
제 끈질긴 애원에도 여주는 점차 희미하게 사라져갔고, 결국 흔적도 없는 공허 속에서 호석은 한참을 울었다.
눈을 떴을 때는 제 침대 위였다. 꿈은 실제처럼 생생했지만 그건 결국 허상에 불과하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중천에 뜬 해는 잔인하게 뜨거웠다.
그게 여름방학즈음의 일이었다. 정말, 꿈이라고 생각했었다.
누구처럼 술 취해서 키스나 하는 그딴 짓 안해 난.
불현듯 윤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날 이후 여주가 저를 피했던 건 전부 그 이유때문이었다. 죄악감이 가슴을 납덩이처럼 내려앉게 만들었다.
너무 소중해서 한치도 건드릴 수 없던 애였다. 쥐면 사라질까 불면 날아갈까, 오랜 시간을 돌아 곁에 도착했음에도 매순간순간이 불안했던 아이였다.
윤기에게 남은 감정때문에 아파했던 여주에게 제가 한 행동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저를 위해 여주가 비밀을 지키며 무던히 애썼을 시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호석은 제 품에 있던 여주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도저히 눈을 바라볼 수가 없어 시선을 떨군채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 몰랐어. ...꿈이라고만 생각했어. "
" ...아니, 그게. "
" 미안해. "
정말 미안해. 할 말이 많았는데, 정작 해줄 수 있는 말이 고작 이것뿐이었다. 호석은 아직 욱씬거리는 목덜미의 통증을 느꼈다.
겨우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주를 힘들게 하는 건 제 자신이었다.
먼저 들어가. 호석은 불과 몇십미터 떨어진 쉐어하우스를 등지고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떨어졌을까, 등 뒤에서 여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정호석! "
우다다 달려온 여주가 다급하게 호석의 어깨를 잡았다. 반동에 몸이 돌아간 호석이 토끼눈으로 여주를 바라봤다. 숨을 고르던 여주가 입을 앙 다물었다.
그리곤 결심한 듯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 가지마. 사과할 일 아니야. "
그러니까... 여주가 말 끝을 흐렸다. 기껏 비장하게 잡아놓고선, 막상 대놓고 말하려니 온 몸에 열이 달아오르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 날의 기억을 또렷하게 증언할 수 있는건 저뿐이었다. 순식간에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짓곤 제게 사과하는 호석을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이렇게 또 멀어지려고 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굳게 결심하고 뛰어왔는데. 도저히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뛰어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꼭 고백하기 전 사람처럼.
" 거부할 수 있었어. 그런데도 안한 건 나야. "
호석의 눈을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귀도 뜨거운 게 열기에 머릿속까지 익는 것 같았다.
호석은 가만히 내려다보며 여주를 기다렸다. 하, 한숨인지 모를 숨을 뱉은 여주가 여전히 시선을 땅에 고정시킨 채 말했다.
" 싫지 않았어. 솔직히, ...아쉬웠어. "
...더 닿고 싶었어.
잠깐 머뭇하던 여주가 작게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호석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고개를 들 용기가 없었다. 이렇게 내면을 그대로 내비춘 건 처음이었다. 몹시 부끄러웠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그 날의 제가 어떤 감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호석을 누구보다 원했다. 그게 아주 본능적인 감정에 기인한 마음이라고 해도.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여주는 시선을 땅에 고정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호석의 시선이 매우 따가운 것 같았다.
혹시 날 싫어하게 된 건 아닐까. 변태로 생각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마지막 말들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이었다.
여주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어떻게든 마지막 문장에 대한 해명을 해야했다.
" 아니. 그게... "
" 그럼 지금은. "
머릿 속에서 떠다니는 단어들을 조합하고 있는 사이, 호석이 말했다. 어? 불현듯 고개를 드니 꼭 심연처럼 깊어진 눈의 호석이 보였다.
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가로등 아래를 부유하는 먼지들도, 선선히 불어오는 가을바람도, 드문드문 하늘을 수놓으며 반짝이던 별들도.
빠질 것처럼 깊어진 호석의 눈동자를 마주하던 여주는 뺨에 닿아오는 온기에 숨을 멈췄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마치 가장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따스했다.
안개처럼 모호했던 제 마음이 이제야 비로소 선연해졌다. 두근두근, 세차게 뛰는 제 가슴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느리게 제 뺨을 쓸어내리며 다시 한 번 묻는 듯한 호석을 잠시 바라보던 여주가 대답했다.
" 지금도. "
둘의 시선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친절한 달빛이 스며든 골목, 시작하는 연인의 첫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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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정말정말정말 오랜만에 뵙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머리부터 박고 시작하겠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혐생때문에 글을 너무오랫동안 쓰지 못했어요ㅠㅠㅠㅠ
오랜만에 찾아온 글인데 희주의 서사가 극 초반부에 길게 서술되어 마음이 어쩐지 불편하실 수는 있지만,
다음 편부터 제대로 밝혀질 호석의 과거사가 시작되어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답니다ㅠㅠ
냥댕은 제가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기에, 꼭 완결을 낼 작품이에요!
이제 혐생이 좀 여유가 생긴 터라, 앞으로는 지금보다 덜 기다릴 수 있도록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그나저나...브금 너모 좋지 않나요 여러분???!!! 저 브금덕에 과몰입하면서 마지막 장면을 썼답니다...ㅎㅎ!
제가 쓸 때 느낀 설렘을 온전히 느끼셨길 바라며,
그럼 다음 화에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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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은 이번화까지도 받겠습니다!!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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