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트/현성]
자존심
W. jh23
내가 생각해도 조금은 당돌한 대답이었다. 그렇가 외도를 해놓곤 예전부터 사귀고 있었다고 누구보다 확신에 차서 대답한 나의 태도는 조금 골 때렸지만, 아무래도 김성규는 내 대답에 감동한 것처럼 보였다. 작은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사라지지 못하고 결국 무릎을 적시고 있었다. 안방 바닥에 앉아있던 김성규가 제 눈을 마구 비벼댔다. 아, 쪽팔려……. 하긴, 김성규가 내 앞에서 이렇게 자주 운 적이 없었으니까. 소위 잘 나가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면 '다시는 눈물 흘리지 않도록 해줄게.' 따위의 말을 날렸겠지만, 이것은 현실이고, 그래서. 나는 그저 내 손등으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주었다. 이것만 봐도 김성규는 참 착한 사람이었다. 사소한 말에 감동 받아 어쩔 줄 모르는. 아마 우리가 알콩달콩한 사이었다면 분명 일기장에 적어두었을 것이었다. 따뜻했던 밥이 다 식어가는 것 같아 억지로 수저를 쥐어주었더니 그제서야 조금씩 움직이는 팔이 앙상하다. 다 말라가는 나뭇가지 같아 반찬을 얹어주었더니 먹지 못하다가, 눈물 범벅인 얼굴로 조금 웃어보이곤 그것을 힘겹게 입 안에 넣었다. 이 장면 역시 근 육 개월만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비틀어진 빵만 먹었던 김성규가 밥을 먹는다는 것은 역사적인 일이었다. 새 모이마냥 적은 양에도 한참을 씹는 김성규를 빤히 보자 눈동자를 가만 두지 못하고 도로록 굴리다가, 끝내는 고개를 숙인다. 이렇게 표정을 숨기지 못하던 김성규가 아니었는데. 입맛을 다시곤 다시 반찬을 올려주자 그 무게에 잠깐 휘청하며 앞을 본다. 얼른 먹어ㅡ 내 조곤조곤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앙,하는 모습이 참 귀엽고 예쁘다. 사랑스러운 나의 애인. 창문으론 아침 햇살이 밝아오고 있었다. 마치 우리의 미래 같은 모습이었다. 내 멋대로 상상한 것이지만 어쨌든 기분 좋은 아침, 기분 좋은 미래. 이대로라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간만에 느껴보는 설레임에 한참이나 밥을 곱씹던 김성규의 볼을 잡아당겨 입술을 갖다대었더니 푸드덕거리며 어쩔 줄 몰라한다. 괜히 머쓱해져 떠온 물을 던지듯 건네주니 황급히 받아들곤 꿀꺽꿀꺽 마시는데 왜 이리 웃기고 속상하고 하여튼 복잡한지. 볼에 구운 소세지 색깔이 물들었다. 그것이 귀여워 쿡 찌르니 다리를 올려 슬금슬금 옆으로 도망가려는 태세를 취한다. 아 됐어, 밥이나 먹어ㅡ 소세지를 올려주곤 퉁명스럽게 말하는 내 눈치를 보며 정말 밥만 먹는 김성규의 애교 아닌 애교에 또 껌뻑 넘어갈 뻔했다. 쾌감보단 그저, 애틋하고 슬프고 아련했던 모닝섹스완 반대의 분위기에 묘해져 옆모습을 한참 바라보자 피하는 것인지 내 눈을 보지 않는다. 그래도 밥 잘 먹는 모습에 내가 다 뿌듯해져 기분만은 좋다. 며칠 간 밥을 먹지 않아 힘들었을 텐데도 애를 쓰는 모습이 참 기특하고, 대견스럽다.
"……이제 그만 먹을래."
"왜. 더 먹지 그래. 너 먹은 것도 없잖아."
"속 아파."
아프다는 말에 별 수 없어 상을 정리하고 나오는데 이제서야 느껴지는 시선. 상을 들고 뒤를 볼 수 없어 부엌에 나와 하나씩 정리하는데 바스락거리는 발걸음이 들린다. 왜 쫓아나왔나 싶어 나오는데 어딘가 표정이 좋지 않다. 반찬통을 냉장고에 넣으면서 턱짓하니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해온다.
"설거지는 내가 하게 해줘."
"……너 허리도 아플테고, 속도 아프다며. 그냥 쉬……"
"너한테 빚지기 싫어."
말할 때 종종 텀을 두곤 했던 김성규였다. 그러나, 빚지기 싫다는 말과 함께 나오는 단호한 표정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밝게만 보였던 우리의 미래에 조금 금이 가는 태도였다. 부러 콧노래를 부르며 애써 무시하자 성큼성큼 다가와 직접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어이없는 태도에 뭐하는 것이냐고 묻자, 왜 또 표정이 좋지 않은건데. 나는 김성규에게 좀 더 잘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 예쁜 얼굴과 마음에 충분히 상처를 입혔고, 그래서, 예전으로 돌어갈 수 있도록 내가 더 신경을 써야했다. 그 와중에 김성규의 '빚'이라는 단어는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밥 한 번 차려준 것을 빚으로 여기는 김성규의 태도는 마치 우리가 연인이 아니라 무슨 계약 관계인 것처럼 느끼게 했기 때문이었다. 고무장갑을 낀 김성규의 팔을 잡자 가벼운 몸 때문에 팔랑거리며 무너질 것 같았다. 이래놓고 무슨 설거지를 한다고. 한숨을 푹 쉬고 안방을 가리키자 왜 이럴 때 고집을 부리는지.
"내가 할게. 너 들어가서 쉬라니까."
"……싫어."
"또 왜.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내 말에도 김성규는 입술을 꾹 깨물곤 고개를 저었다. 너 아프다며, 응? 그럼 아침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저녁은 너가 해. 그럼 됐네ㅡ 어차피 저녁 설거지도 내가 할 참이었지만 대충 달래려는 심산으로 그렇게 말했더니, 그렇게 하면 넘어갈 줄 알았던 김성규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끝내 내 말을 무시하고 익숙한 자세로 수세미를 찾는 김성규가 안쓰럽고 안타까워서 또 한숨. 내 머릿 속은 김성규의 태도와 '빚'이라는 단어로 꽉 채워져있었다. 밥 잘 먹고 무슨 오기일까. 나는 끝까지 김성규 옆에 붙어있었다. 달그락거리며 몇 개 안 되는 그릇을 벅벅 문질러닦는 그것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제 딴엔 빚으로 느껴졌을 그 식사를 갚기 위해 열심히 설거지를 하는 김성규는 여전히 입술을 꾹 깨문 채였다. 나도 지지않고 입술을 꾹 물곤, 꽤 오래 걸리는 싱크대 안을 보았다.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김성규는 자꾸만 그릇을 놓쳐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러다 다치려고ㅡ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간 걱정과 함께 끝난 설거지 후에 분위기는 완전 엉망이었다. 마치 내가 반성한 후 김성규와 첫 대면했을 때처럼 어색해진 공기에 김성규가 참지 못하고 손의 물기를 대충 닦은 채 황급히 안방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나도 그 뒤를 쫓아 침대에 앉아있는 김성규 앞으로 다가가 섰다.
"밥 잘 먹고, 나한테 화났어?"
김성규가 싫거나 밉거나 혹은 화가 나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마땅히 내가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한 김성규의 태도가 조금 신경 쓰였을 뿐이다. 김성규의 노예가 되어도 모자랄 판에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선 김성규의 몸도 걱정되었고. 속이 쓰려 밥도 다 먹지 못한 판에 굳이 집안일을 하겠다고 나선 김성규의 의도가 궁금했을 뿐이다. 왜 그랬어ㅡ 다시 한 번 묻는 내 얼굴을 본 김성규가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들을 권리가 있었다. 어느 정도 내 지위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아직도 못난 애인이긴 하지만. 아예 김성규 옆에 앉아 손을 확 잡아버렸다. 물기 어린 손을 내 몸에 문질러 닦게하자 불편한지 약간 힘을 주어 빼내려해도 애써 모른 척. 말해주면 안 돼?ㅡ 내 말에 그제서야 나를 보는 얼굴이 또 왜 이렇게 불안해. 손을 슬그머니 빼내고 볼을 잡고 속상한 얼굴을 보이자 그것이 싫었나보다.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려다 바닥에 떨어질까 허리를 안았더니 내 어깨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곤 한 마디 한 마디 해주는데, 참……나도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 내 생각은 김성규의 발 끝에도 못 온다는 것을 알게 해준 말이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너무나 많은 의미를 반영하느라 머리도 아플 법 했을텐데. 귓가에 꽂히는 말들이 애석할 정도.
"……너한테 빚지기 싫다구 했잖아."
"뭐가 빚인데. 내가 밥 차려준게 빚이야?"
"……나중에, 혹시나……"
"응."
"네가 여자 만나러 갔을 때……"
"……"
"네가 나한테 해준 게 많으면……"
"……"
"따지지도 못할테니까……."
그래서 공평하게 하고싶었어.
이제 사랑을 공평하게 하려는 김성규의 태도는 정말……. 내가 자초한 일이라 화를 낼 수조차 없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내 외도까지 걱정할 김성규의 머리는 얼마나 복잡했을까. 내 품에 안겨 불안함을 토로하는 나의 애인, 성규야. 조그맣게 불러본 이름에 김성규가 흠칫 떨며 나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믿음이 없는 애인을 안는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김성규는 용감했다. 나를 꽉 안고……미안하다고……. 널 못 믿어서가 아니라……그냥……내가 불안해서……미안해. 내게 신뢰를 주지 않은 것은 김성규가 아니라, 신뢰를 받고도 버렸던 내 태도였다. 자꾸만 자책하고 속앓이를 하는 김성규의 몸을 꽉 끌어안고 뒤로 천천히 눕자 절로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되버린 김성규가 축 처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식사를 하고서도 이렇게 가볍다니. 김성규의 등을 토닥이자 기분이 묘한지 내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잔잔한 노래라도 불러주고 싶은 분위기. 내 생각만 해서 미안해……. 내 말에 김성규가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바보, 너도 바보고 나도 바보다. 뱉지 못한 말을 심장에 꾹 담아놓고 그저, 천천히, 위로하는 것처럼 등을 쓰다듬어내렸다. 속에 얹혔을 음식을 내려주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믿음을 주고 싶었던 게 목적이었다. 엉거주춤한 자세가 힘든지 내 위에서 내려와 천장을 보는 자세로 누운 김성규가 이불 속으로 숨어버렸다. 김성규가 들어간 이불을 보다가, 나도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눈만 빼꼼히 내민 김성규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더니 아예 베개에 얼굴을 숨긴다.
"얼굴."
"……"
"얼굴 보여줘. 빨리."
눈, 코, 그리고 입술. 천천히 이불을 내리는 틈을 타 입술에 그대로 입맞춤했다. 좋다, 좋아ㅡ 꽤나 호탕한 말에 내 옆구리에 입술을 댄다. 옆구리를 타고 김성규의 웃는 모습이 그려졌다. 팔을 뻗어 탕탕 내려치자 조그만 토끼처럼 올라와 팔을 베고, 그리고, 웃는지 우는지 애매한 얼굴.
"만약, 사랑을 재는 저울이 있다고 쳐보자. 그 동안의 무게를 쟀는데, 한 쪽이 너무 기울어졌어.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
"너 말대로라면 저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 쪽에 좀 더 사랑을 두어야겠지. 그래야 균형이 맞고 공평하니까. 그치? 내 말 맞지?"
김성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 말대로 공평하려면, 내가 너한테 더 잘해야 돼. 무슨 말인지 알겠어?"
"……"
"나도 공평하게 해줄게."
안 그래도 자존심 셌던 김성규에게 한 쪽으로 기운 저울은 자존심 상할테니까.
한 마디 덧붙였다. 김성규의 눈이 또 붉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김성규의 눈물샘은 몇 백개쯤 되는 것 같다. 팔베개를 하고도 나를 보지 않는 김성규의 허리에 반대편 손을 턱하니 걸쳤다. 예전부터 사귀던 애인이니까 이 정도 스킨십은 할 수 있잖아, 아니야?ㅡ 내 말에 흔들리는 뒷통수. 싫음 말고ㅡ 은근슬쩍 손을 빼자 나를 보더니, 다시 내 손을 잡고 제 허리에 걸치게 한다. 그 모습이 귀엽고 웃겨서 입꼬리를 올렸더니 쫓아오는 말.
"……공평하게 해준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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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11 올리고 처음 들어오는 인티!! 두둠칫!! 저번글에 답글 다 못달아드려서 죄송해요 잉잉ㅠㅠ 시간나는대로 달러가겠슴다!!!!!!!!!!!!! 오늘도 부디 구독료의 가치가 있으시길 바랄게요ㅠㅠS2
암호닉, 댓글, 신알신 모두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헤헷s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