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독자님께.
신제품 개발팀은 온통 난리법석이었다.
전날, 늦은 외근으로 점심 시간이 지나고서야 출근했던 우현을 제외하곤 모든 팀원들이 성규에게 몰려있었다. 팀장의 출근에도 기껏 목례로 반가움을 표시한 팀원들은 성규의 책상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웃음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성규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묻지 못하고 궁금함을 꾹꾹 눌러대던 우현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팀원들 모두 점심 식사를 함께 했는지 한 손엔 커피까지 들곤, 결국 우현 혼자 남게 되었다. 식사를 혼자 해야한다는 외로움보단, 역시 성규의 붉었던 얼굴과 팀원들의 해사한 미소, 그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구내 식당의 구석에 앉아 거친 손으로 의미없는 젓가락질만 반복하던 우현의 귀에 영업부 여사원 둘의 대화가 귀에 꽂혔다.
ㅡ주연이 축의금 얼마낼꺼야?
ㅡ글쎄, 10은 해야되지 않겠어?
ㅡ또 사내커플이 탄생하는구만.
ㅡ그니까. 게다가 연상연하 커플이잖아.
ㅡ신제품 개발팀 김성규 사원……되게 어리던데.
식판을 빤히 보던 우현의 귀에 성규의 이름이 들리자마자 저절로 멈춰진 젓가락질에, 대충 얼굴만 스쳐지나가던 여사원의 고개가 숙여졌다. 안녕하세요ㅡ 저도 모르게 여사원의 어깨를 돌려잡은 우현이 빠르게 뛰는 심장께를 부여잡고, 물었다. 김성규 사원 결혼해요? 비어가는 식당 내에 울려퍼진 목소리. 여사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셨어요? 김성규 사원 신제품 개발팀인데 왜 모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빠져나온 우현은 급하게 사무실을 열었다.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은 시끄러웠다. 우현의 등장과 함께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무거운 공기를 타고 질서를 찾았다. 차츰 제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보는 척하는 사원들을 제치고 급하게 성규의 손을 잡고 나온 우현의 행동에 또 웅성거리는 사무실. 뒤를 돌아볼 겨를 없이 힘을 주고 버티는 성규의 손을 더 억세게 잡은 후, 그 동안 느끼지 못했던 어떤 애매한 감정의 소용돌이. 아직도 블라인드가 내려져있는 팀장실을 열고, 성규를 던지듯 내려놓고서야 거친 숨을 몰아쉰 우현이 제법 굳은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아까 팀원들과 함께 있을 때처럼 밝은 얼굴이 아닌 성규가 급히 몸을 돌려 팀장실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막아내는데 왜 땀이 흐르는지. 분명 덥지 않은 날씨임이 틀림 없었다. 타이가 갑갑해 한 번 풀어내자 그제서야 얼굴을 바라보는데……왜 우는지. 울고 싶은 것은 분명 본인이었다. 성규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에 화도 내지 못하고 책상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니, 고개를 푹 숙이곤 비벼닦는다. 여전해서, 여전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래놓고 결혼……을 한다고. 아직도 어리면서. 직접 듣고 싶은 말, 아니, 직접 들었다가는 까무러칠 말에 우현은 부러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함께 있었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저 결혼해요 팀장님."
"……듣고 싶지 않아."
"날짜도 잡혔어요. 상견례도 마쳤습니다."
"……듣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팀원들이 와서 축가도 부르……"
"듣고 싶지 않다고!"
끝내 성을 내고 말았다. 우현의 큰소리에 말을 멈춘 성규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소리를 지르세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부리는 투정 같아서 또 가슴이 아려온다. 얼굴도 못 보면서, 그런 겁쟁이면서 부리는 투정은 왜 아직도 아기 같은데. 김성규, 성규야. 이젠 우현의 목소리도 젖어들고 있었다. 결혼 할거니? 하지마,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그니까 결혼은 하지마. 너 결혼하면……나 죽어. 응? 내가 그 희망 하나로 살았는데. 너랑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나 돈 벌고 있잖아. 너 회사도 때려쳐. 내가 회사를 그만 둘까? 우리 도망 갈래?
……다 필요 없어요. 주연 씨만 있으면 돼.
한숨처럼 흐르던 우현의 말이 성규의 제법 단호한 말에 갈 곳을 잃고 추락했다. 어찌 이렇게 아플 수 있을까. 예전처럼 살랑거리던 애교가 없다. 아직도 주저앉은 자세로 일어나지 못하면서 말대답을 하는 성규를 일으켜, 버썩 안아버렸다.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쳐도 아직은 그 자세가 익숙해서. 서로가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과거가 너무 정확해서. 성규의 허리를 붙잡고 급히 입을 맞춰오는 우현의 얼굴을 피해 안간힘을 쓰다가 끝내 피를 보고야 말았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쓰라림에 힘을 풀자, 급히 몸을 빠져나온 성규가 우현의 안색을 살피다가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대충 뱉어놓은 침에 붉은 빛 선혈이 가득했다. ……미안. 우현의 사과와 함께 정적이었다. 이제서야 조금씩 실감나는 '결혼'이라는 새삼스러운 말이 왜 이렇게 적응이 안 될까. 평생 아기 같을 줄 알았던 넌데. 결혼……그거 좋지. 피 고인 말엔 뼈가 있었다. 한없이 자책하며 성규를 보던 우현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한 번만 안게 해줘."
"……"
"키스는 싫어하니까. 안게만 해줘."
"……"
"아니면."
"……"
"아, 저씨라고 한 번만……"
이번엔 우현이 무너졌다. 책상 위에 걸쳐있던 엉덩이가 바닥을 향해 내려오다가, 급히 정신을 차리고 벽을 짚었다. 그래도 어지러움은 가시질 않았다. 고개만 숙인 채 말이 없던 성규는 끝내 우현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 한 마디가 너무 듣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오직 '김성규'의 입에서 나온 아저씨라는 말이 듣고 싶을 뿐이었다. 그 세 글자. 예전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소중함들. 일말의 희망조차 사라질 결혼이라는 미래 앞에 우현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성규 앞에서 딱 두 번째로 우는 것이었다.
「아프지만 마. 아저씨 출장갔다온 사이 이렇게 아프면 어떡해.
……그래서 전화도 못했잖아. 아저씨 걱정할까봐.
아저씨가 미안하다. 바빠서.」
지독히도 바빴던 그 해 겨울, 우현의 부재와 함께 끙끙 앓았던 성규의 얼굴을 보자마자 갑자기 울컥한 우현을 보고 놀랐던 성규의 얼굴이 선연하다. 다 부르튼 입술 사이로 뱉었던 아저씨라는 말에 왜 이리 슬펐던지. 그래도 영원히 함께 있을 줄 알았던 덕분에 추락할 것 같진 않았었는데. 다행히 우현을 보고 빠르게 회복했던 성규의 모습이 기특해 하루 종일 서로의 얼굴만 보고 웃었던 기억이 선명한데……. 사진첩을 열어본 것처럼 선명히 떠오르는 과거에 몸서리치던 우현이 어깨를 들썩였다. 주체할 수 없는 흐느낌을 느낀 성규가 본 우현은 분명히, 금세라도 죽을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회사에서 그렇게 차가운 척을 하더니. 입술을 앙 다문 성규가 벌떡 일어나 벽에 기대어있는 우현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꽤나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성규의 얼굴을 딱 붙잡고 한참을 마주보던 우현이 다시 입술을 찾았다. 이번엔 반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우현을 더 슬프게 하고 있었다. 우현에게 입술을 내주는 것이 결국 벌이라는 것을 잘 아는 성규가 주는 마지막, 정말 마지막이었다. 펑펑 울면서 성규에게 입맞춤하는 우현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마지막이니까……마지막이니까……. 피비린내와 눈물의 짭쪼름함이 둘의 얼굴에 엉켜있었다.
……그만해요. 사원들이 오해하겠어요.
성규야! 김성규!
9월 30일. 예식장에서 뵙겠습니다.
……
안녕히 계세요, 팀장님.
마른 세수를 하고 끝내 팀장실을 빠져나가는 성규를 보면서 우현은 목놓아울었다. 결혼, 잘 해. 성규야. 평생 아기 같을 줄 알았던 너도 결혼을 하는구나. 너를 외롭게 해서 미안해. 바쁜 것을 핑계 삼아 너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었던 내 과거를 반성한다. 성규야, 너는……부인에게 잘 해줘. 내가 너에게 주지 못했던 사랑을 다 돌려줘. 나처럼 사랑에 대해서 후회는 하지마. 너 없는 나는 어떻게 살게 될까. 지금도 이렇게 벅찬데. 가장 아름답고 멋진 그 날이 될 9월 30일에 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신부에게 반지를 껴주는 너를 보며 난 살아갈 수 있을까. 차라리 너의 입으로 듣지 못해서 다행인걸까. 난……있잖아……다시는 너 같은 사람 못 만나. 아저씨, 그 아저씨 소리가 그리워서. 나도 나이를 먹었나봐.
난 여자를 안을 수 없는데 넌 여자를 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괴롭다.
좋은 팀장도 아니었으면서
좋은 아저씨도 아니었어.
난 너에게 뭐였을까.
……나에게 입술을 내주고 떠나서, 행복하니.
***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성규의 결혼식날, 우현은 나타나지 않았다. 신부 대기실에 들러 방긋 웃던 성규도 하객석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일일이 회사 손님을 맞이하며 화장실을 배회하던 성규가 결혼식이 시작되기 30분 전에 옥상을 찾았다.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우현에게 녹음을 남기려, 성규가 급하게 중얼거렸다.
……아저씨 나 결혼해요. 아저씨도 행복하게 살아요. 난 아마 행복하지 못할 것 같아. 그니까 내 몫까지 행복해줘요. 아저씨를 울릴 수 있는 사람이라 행복했어. 아저씨, 근데 난 가장이 될 자신이 없어. 아저씨 밑에서 아저씨가 하자는 대로 하면서 살고 싶어. 지금도. 근데 밑에 주연이 누나가 있어. 누나는 아저씨만큼 잘해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날 혼자 두진 않았어. 아저씨는 왜 그 때 날 혼자 둬서 왜 이렇게 만들어. 오늘도 바쁜거야? 난 솔직히 기대했어. 드라마에서처럼 아저씨가 내 손을 잡고 결혼식장을 뛰쳐나가주길 바란 것도 사실이야. 아저씨는 언제나 이런 식이지. 그래도 아저씨, 아저씨가 난 아직 좋아. 아저씨는 나처럼 사랑에 대해서 후회는 하지마.
난 아저씨가 지금 보고 싶은데 아저씨가 여기 없다는 게 괴로워.
좋은 아저씨도 아니었으면서
결혼식장에 나오지도 않았어.
……사실 좋은 아저씨였어.
……아저씨를 만나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
화장이 조금씩 번져가고 있었다. 흰 장갑을 벗고 대충 눈물을 눌러닦은 성규가 식장으로 내려와 입장할 준비를 했다. 급하게 진행된 결혼,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 마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날이 되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불행한 신랑. 흰 천에 발을 내딛는 성규의 구두코가 유난히 빛이 나고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밑에 주목을 받으며 걸어가는 것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부가 입장하고, 주례를 듣고, 단체 사진을 찍고, 폐백을 하고, 피로연을 하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비행기 안, 새근새근 잠든 신부에게 담요를 덮어주는 제 손길에 추억이 피어올랐다. 우현과 사귄 후 100일 되던 날, 유럽여행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담요를 덮어주며 제 얼굴을 빤히 보던 그 눈빛. 충분히……따뜻했던 사람, 나의 아저씨.
아저씨는 지금 행복해요?
난 여전히 자신이 없어요.
성규야 넌 행복하니.
이제 희망이 사라진 난 살아갈 자신이 없어.
여기는 유럽.
아저씨와 갔던 곳은 여전하네. 우리가 몰래 키스했던 길거리도.
여기는 '우리'집.
새삼 보는 우리의 안방은 여전하네. 우리가 사랑을 나눴던 침대도.
누나가 씻으러 갔어요.
첫날 밤을 보낼 자신이 없어. 싫어. 아저씨가 보고 싶어.
뿌연 김이 서린 욕실에, 나 혼자 있다는 게 싫다.
너가 결혼한 후 혼자된 내가 싫어. 너가 보고 싶어.
아저씨……잘 살아요. 잘 지내요.
성규야……잘 살아. 난……
***
성규가 신혼 여행을 마친 후 첫 출근한 회사는 역시 시끄러웠다. 그 때처럼 우현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도. 제게 몰린 관심에 일일이 응대해주며 은근히 바라보는 팀장실은 여전히 불이 꺼져있었다. 오늘따라 팀장님이 유난히 늦으시네. 성규 씨 신혼 여행 갔을 때 팀장님이 아프셔서 매일 늦게나오셨거든. 거의 죽어가시더라. 이런 말 따위를 듣고 있자니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벌컥 열어본 팀장실에는, 빌어먹게도 천장까지 솟구친 피에 파묻힌 신제품 개발팀의 팀장이 있었다.
난……
회사 때문에 널 떠나보게 됐으니, 나도 여기서 떠나야겠지.
잘 살아.
너는 이 광경을 보지 못했으면 좋겠어.
좋은 모습으로 떠나고 싶었는데 너에게 키스해달라고 조른 것이 마지막이 되버려서 신경이 쓰인다.
결혼식 못가서 미안. 축의금은 우리 팀 이름으로 냈어.
……사랑해 성규야.
신제품 개발팀은 온통 난리법석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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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맨물 아고물 후회공이라는 세 마리 토끼 잡으려다 다 놓친 글...Hㅏ.. 그래도 읽어주시는 나만의 독자님이 만족하셨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