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애석하게도 나는 친구를 정리하는 법따위 몰랐다. 아니. 김선호를 정리하는 법을 몰랐다. 이건 내 실수인데, 김선호의 일과중 대부분이 나이듯이 공평하게도 내 일과중 대부분이 김선호였다. 삼년을 주구장창 함께해왔던 애를 하루 아침에 말끔히 잘라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것도 몇 발자국 안 되는 거리에 사는 애를.
마음같아선, 얼굴 딱 잡고 나 너랑 친구 못 해먹겠으니까 우리 앞으로 모르는 사이 하자고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은데. 현실은,
"가자. 나 오늘 진짜 배고파. 너 없는 수업이라 진이 다 빠졌어. 힘이 하나도 없다니깐?"
김선호 학식 친구 노릇이나 해주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제 몫으로 놓인 라면 그릇을 뒤로 하고 내 제육볶음을 한 입 얻어먹은 김선호가 만족스럽게 웃음 지어보였다.
"아, 이거지."
또 한 번 그릇으로 침투하려는 숟가락을 탁 치면 금방 서운한 얼굴을 내비치는 게, 귀엽, 다고 느낄 뻔 했다. 친구 관두자고 결심한지가 지금 하루인데 하마터면 꼼짝 못 하고 3년 더 친구하자고 할 뻔 했다. 속으로 뺨을 몇 번 후려쳐 마음을 가다듬고 괜히 김선호를 째렸다.
"넌 이러자고 나 불렀냐?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게?"
"아니, 꼭... 그냥 이제 공강이니까 밥도 같이 먹고 놀아달라고 불렀지..."
김선호는 알까. 저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걸. 이미 쳐질대로 쳐진 눈꼬리에 냅다 제육볶음 그릇을 밀었다. 농담이거든, 먹어. 숟가락 가득 퍼서 입에 넣어주기까지하면 서운함 범벅이었던 얼굴은 싹 가신다.
이래가지고 나 올해 안에 김선호랑 친구 관둘 수 있을까...
*
현실적으로 (겉으로만이라도) 잘 지내던 친구 사이를 딱 끊어내는 건... 못 할 것 같다. 김선호 성격상 이유라도 알아내고자 할 거고, 이유를 말 하는 건 못 하겠다.
그래서, 그나마 현실감 있게 마련한 대안이 서서히 멀어지기였다. 처음에는 연락을 드문드문 받다가, 거의 안 받다가, 아예 안 받기. 뭐든 말은 쉬우나 그다지 어려울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김선호>
부재중 1통
먼저 그 애의 전화를 부재중으로 돌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고, 몇 번 하고나니까 당장 다시 걸어야할 것 같은 마음도, 왠지 모를 찜찜함도 사라졌는데. 문제는 김선호 태도였다. 처음이야 바쁜가보다 하고 넘겼을텐데, 안 받는 횟수가 늘자 김선호는 종종 똥강아지 표정을 장착하고 날 찾아왔다. 한 손에는 자주 마시던 카페라떼 한 잔을 들고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다 우르르 나오는 사람들 속 절 찾아냈다.
"이름이 연락 잘 되게 해주세요."
소원이라도 빌듯이 두 눈 꼭 감고 그러면, 나도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속으로는 김선호랑 친구 그만하게 해주세요, 하면서.
평소같으면 자연스레 학식 다음 학교 앞 카페로 향했을텐데, 요 며칠 사이 선호는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왔다. 수업 마치고 나오면 손에 쥐여주면서 너 바쁘니까... 아무리 바빠도 연락은 해달라는 것처럼 말을 흘렸다. 두세 번정도 그 커피를 얼떨결에 받아들곤 했는데. 이제쯤이면 거절해도 되겠지.
"카페인 좀 줄이려고. 너 마셔."
김선호가 쥐여준 커피를 도로 돌려주면...,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또 마음 약해지게 굴까봐 올려다보질 못 했다. 다시 제 손에 들어온 커피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김선호는 입맛을 쩝 다셨다.
"너 주려고 사온 건데... 아, 이따 저녁에 우리 집 안 올래? 같이 고기 구워먹자. 너 좋아하는 삼겹살 어때?"
신난 얼굴로 고기 굽는 제스쳐까지 취한 선호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여기서 알았다고 해도 되나? 아니. 커피는 안 받고 고기는 받아? 그건 좀 이상하잖어... 다시 고개를 돌려 선호를 마주하면 대답을 요구하듯 눈썹을 들썩인다.
"다음에~ 밀린 과제가 산더미야."
"다음... 그래, 다음에."
괜히 시간을 확인하는 척 손목을 오바하며 확인했다가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먼저 갈게."
"그래. 문자, 좀... 확인 빨리 하고."
알았다고 고개 끄덕이면 김선호는 내 몫으로 챙겨온 카페라떼를 그대로 들고 뒤돌아 갔다.
정말 슬슬 멀어지길래 내심 속상하기도 했다. 물론 멀어지려고 다짐했던 건 나지만, 너무 쉽게 멀어지길래. 원래 나만 좀 밀어냈으면 진작 끝났을 관계인가 싶어서.
📞김선호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너무 잘 풀려서 속상하다고 해야할지. 커피 몇 모금 홀짝이며 걷다 울려대는 핸드폰에 김선호 이름을 확인하고 뒷 주머니에 핸드폰을 찔러넣던 때였다.
"...야. 성이름. 너, ... 뭐 하는 거야 지금?"
핸드폰을 귀에서 툭, 힘없이 내려놓는 김선호를 보자 나쁜 짓 하다 걸린 사람마냥 토끼눈이 됐다. 하기야, 김선호 딴에서는 나쁜 짓 맞지. 너무 놀라 대꾸도 못 하고 있으면 선호는 나를 한 번 훑고 돌아섰다.
친구 사이를 끝낼 수 있는 완벽한 타이밍이었지만, 싫었다. 괜히 오해 주고 끝내기엔 내가 너무... 싫어서. 그래서 김선호 등판을 보자마자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달려가 앞을 막아세웠다.
"아니... 그게, "
"나 싫다고 시위하는 거야? 바쁜가보다 했어. 맨날 주고받던 대화창에, 주는 것밖에 없어질 때도 그런가보다 그랬어. 네가 일부러 나 피하는 줄 알았으면 안 그랬을텐데. 그치? 말 하지 그랬어. 어디가 얼마나 안 좋은지. 말 하지. 친구 하기 싫다고."
"... 얘기 좀 하자. 너 싫다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게, 난..."
눈 앞이 아득해졌다. 지금인가. 내가 너 좋아해서 친구 못 하겠다고 고백 저지르는 게. 지금이었던가. 우리가 바로 끝나버릴 타이밍이. 쉽사리 말문을 트기가 어려워 서글픔에 눈물이 핑 돌았다. 고백하고나면, 김선호는 어떠려나.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할까. 그게 무서웠다.
말 못 하고 우물쭈물 대면 김선호는 내 옷깃을 잡아 코 앞 카페로 이끌었다. 어벙벙한 나를 앉히고 따뜻한 물까지 떠와서야 앞에 마주보고 앉았다. 여전히 기분은 가라앉아 보이지만, 한결 차분해진듯한 선호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너 이유없이 그럴 애 아니라는 거 알아. 뭔데? 내 문제야, 네 문제야? 내 문제면 내가 다 고칠게. 네 문제면, 네가 해결해. 우리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선호가 가져다준 물잔을 한참이나 어루만지다가 겨우 입을 뗐다. 오늘 고백은 못 해도, 잠수 타다가 연락 끊는 방법 잃어서 당장 친구 못 끊는다해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 해야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좋아서 그랬다고 말은 못 하지만.
"내 문제야. 근데, 다음에. 다음에 말 해줄게. 앞으로 이렇게 구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이유는 다음에 얘기할게. 미안."
대답을 듣는 선호의 표정이 차분했다. 찌푸려진 미간도 서서히 풀려갔고, 차게 식었던 눈도 점점 온기를 되찾았다.
"됐어. 앞으로 안 그러겠다면 뭐. 나도 아까는 미안. 네가 나 피하는 거에 서운하기도하고 화도 나서. 좀 감정적으로 굴었네."
"... 나였으면 한 대 쳤을걸. 네가 뭐가 미안해."
"참... 어쨌든 이제 나 일부러 피하지마. 내 잘못 생기면 바로 말해주고. 네가 나 멀리하면 나 상처받어."
장난스럽게 가슴을 움켜쥐는 선호에 여러 의미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귀여움에 나온 웃음, 안도의 웃음, 다행이지만 망했구나 싶어 나오는 헛웃음.
그래. 김선호랑 연락 딱 끊고 바이바이 하는 건 물 건너갔다. 앞으로 이런 일 없게 하겠다고 약속까지 했으니...
하하하하...
순간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퀘스트 창 비스무리 한 것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그 창 가운데 적혀있던 것.
연락 피해가며 서서히 멀어지기 fail !!!!
이러다 평생 친구로 남겠네...
*
사족 <스토리와 무관하므로 확인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안녕하세요 회원입니다! 요새 김선호 배우한테 빠져서 이런 저런 스토리 상상을 하다가 글로 옮기게 됐습니다...•¤• 스토리가 (오늘처럼...) 급발진할 수도, 거북이처럼 느리게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만 열심히 적어볼게여...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건강 조심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