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아!"
"... 뭐, 아니, 너 차 갖고 왔었어?"
"어..., 일단 타. 그거 주고."
언제는 막차가 끊겼네 어쩌네 하더니 쟤 차 끌고 왔었나봐.
캐리어를 트렁크에 집어넣은 김선호가 턱짓으로 조수석을 가르키자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저기 있잖아, 내가 오늘은 기차를 타고 가면서 좀 생각을 해보려고 했는데 말야... 너때문에 글렀어. 텄네 텄어.
한숨 푹 내쉬고 앉아 안전벨트까지 야무지게 한 다음 창문에 고개를 박았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내가 김선호한테 고백했을 때부터가 꿈이었으면 좋겠어. 나 요새 왜이렇게 답답하냐... 네 얼굴을 봐도 답답하고 안 봐도 답답해.
"좀 더 자도 되는데. 의자 확 젖혀서."
"안 졸려..."
"아, 밥은? 밥은 먹고 나온 거야? 이 시간이면... 안 먹었겠네."
"응, 아직..."
"집으로 갈래, 밥 먹으러 갈래?"
내가 지금 여기서 너랑 밥 한 끼 했다간 먹는 족족 다시 뱉어내게 생겼거든. 힘없는 목소리로 지이입... 하자 뭐가 좋다고 또 웃고 앉았다.
"그럼 잠깐 눈 좀 붙여. 도착하면 깨울게."
나도 그러고 싶거든. 잠이라도 왔으면 좋겠다 진짜. 누구 나 좀 기절시켜줄 사람? 집 오면 깨워줄, 아니, 김선호 가고나면 깨워줄 사람?
*
초점 잃은 눈으로 한 시간을 달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더 일찍 올라왔기에, 제 집인데도 내가 머쓱하고 민망했다. 다행스럽게도 김선호는 정말 바래다만 주고 돌아갔다.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집에 오자마자 캐리어는 방 구석으로 던져버리고 종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전부터 나는 암산이라곤 도저히 안 되는 머리를 가져서, 아니, 아무튼. 쓰면서 생각하면 좀 도움이 될까봐.
들고나온 에이포용지에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겨우 적은 것은,
김선호가 내가 좋대. 였다. 그 뒤로는 무수히 많은 점들이 찍히고있는 중이다. 볼펜으로 점을 찍어대며 다음 적을 말을 고르고 있다. 왜? 그래, 왜? 왜 좋다는 거지? 내가 김선호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이미 내 기억은 넋 나간 채로 있느라 대충 흘러보냈던 선호의 고백들을 하나 둘씩 주워담고 있었다.
"나 너때문에 하루종일 못 잤어. 네가 그렇게 가고 잘 잔 날이 없어. 너때문에 보조배터리도 챙겨왔어. 혹시라도 연락 올 때 못 받을까봐. 나 너때문에 그랬어. 우정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봐. 우정 아니야 이거."
"우리가 친구라고... 너 나때문에 한 번이라도 밤 잠 설쳐본 적 있어? 나때문에 하루종일 핸드폰만 본 적은? 나 신경쓰여서 누구 만나기 눈치보였던 적이라도 있어? 그런 적 없잖아, 너. 근데 난 너때문에 늘 그랬어. 근데도 우리가 친구야?"
김선호가 전했던 고백이, 내가 했던 말과 닮았다. 내가 그 때 그 말을 어떤 심정으로 했는데. 장난으로 한 말이야? 절대 아니지. 그럼 얜. 얘라고 뭐 장난일까.
"너무 부담갖지 않았으면 하는데. 대답 재촉할 생각은 없거든. 내가 자각하는 동안에, 너는 마음 정리했을 수도 있는 거고... 답변은 네 생각이 다 정리되면 그 때 들을게."
정작 김선호는 별 말이 없는데, 내 머릿속이 자꾸 재촉중이다. 김선호가 자각하는 동안에 내가 마음 정리를 다 했을리가? 없다. 없지. 당장 어제만 해도 안 보겠다고 그 뻘짓 벌이다가 만난 건데. 김선호가 자꾸 눈 앞에 둥둥 떠다닌다. 2주 전에 울던 그 김선호, 어제 고백했던 그 김선호, 내가 꾸역꾸역 좋아하던 평소의 김선호. 누가 빔 프로젝트라도 몰래 쏘고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나타나는 얼굴에 오바해가며 눈을 꽉 감아버렸다. 누구한테 털어라도 놓고싶다... 누가 나대신 고민 좀 해줘어.....
"미쳤나 싶은데."
"그치... 진짜 미쳤나봐. 그렇게 갑자기 고백,"
"아니. 걔 말고 너. 너 미쳤나 싶다고."
내가 또 털어놓을 데가 어디있겠나. 이 복잡하고도 아이러니한 상황을 솔직담백하게 털어놓을 사람은 해윤이밖에 없었다. 해윤이도 연락은 계속 했지만, 얼굴 본 건 내가 김선호한테 고백했던 그 날이 끝이었기에 나만큼... 아니지. 나보다 더 이 상황에 황당함을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돌아오는 건, 내가 미쳤나보다는 말....이네.
"봐봐. 너 걔 좋아하지? 그리고 이젠 걔가 너 좋대지. 안 만날 이유가 뭐야. 넌 지금 나를 부를 게 아니라, 김선호를 불렀어야 돼."
"그런... 그래도 그렇지.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막 정리도 안 되구. 이 상태로 무턱대고 만나자고 하고 싶진 않아서 그렇지."
"너는 예고하고 고백했나. 원래 다 그래. 갑자기 좋아질 수도 있고, 갑자기 싫어질 수도 있는 거지. 네 말 들어보니까 걔도 너 딱히 친구라고 생각 안 한 것 같은데? 자기가 헷갈렸다고 그랬다며."
답답한지 아예 자세를 고쳐앉은 해윤이가 맥주 대신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물잔을 쾅 내려놓았다. 하기야. 내가 해윤이어도 저랬겠다. 뭐가 문제인가 싶을테니까. 뭐가 문제냐면. 나는 애초에 걔랑 여기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단 말이야. 내가 해온 걔와의 상상은 언제나 내 고백이 끝이였어. 떨리고 두려우면서도 묘하게 후련할 그런 고백. 그 이후부턴 생각도 안 해봤다고. 은연중 거절 당할 거라는 예상까지만 했었어. 그게 다인데. 내가 생각한 너와의 관계는 겉친구나 남남. 그거 둘밖에 없었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이러나봐. 너랑 어쩌지도 저쩌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나봐. 거절하든, 받아들이든 친구도 남도 아니게 되니까. 평소에 상상이나 좀 길게 해둘걸. 차이는 쪽도 좋지만 김선호가 나 좋다고하는 허무맹랑한 상상이라도 좀 해둘걸. 그랬으면 그 허무맹랑한 상상이 현실이 됐을 때 조금 더 유연했지 않았을까. 그것도 어디까지나 내 상상이구나.
개강. 딱 개강할 때까지만 이런 사이로 지낼게. 그 안에 정리 다 할게. 혼자 헷갈려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아니까 빨리 끝낼게. 그러니까 답답하고 힘들어도 나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라, 선호야. 너랑 어떤 사이까지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볼래.
*
사족 |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라 는 이름이가 선호한테 한 말이지만 사실 제가 독자님들께 드리는 말... 얘네 둘 연애도 머지않아따.. 쿠쿠 그럼 다음 글에서 또 봬요. 항상 건강 챙기시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