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스트에김선호는 반칙이지
어제의 내 예상과는 약간 다르게 흘러갔다. 5시에 잠드는 게 아닌 밤을 새어버렸다는 정도? 와 까마귀 운다. 나도 같이 울까..?
난 흑역사를 두고두고 간직하는 거지근성을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흑역사를 축적해놓고 자기 전에 페스츄리처럼 겹쳐서 이런저런 기억이 떠올랐는데 어제는 유독 선호씨와 있었던 그 부분만 100번도 넘게 리플레이 됐다. 그러다 문득 밖을 보니 날이 밝아있었다.
밝아진 밖을 보다가 순간 내 인생이 너무 웃겨 하루를 웃으며 시작했다. 내가 웃으면 엿먹으라는 듯 까마귀가 울어대는 탓에 그냥 준비나 했다. 별 수 있겠는가. 밤을 새도 하루는 반복되듯이 난 오늘도 출근을 해야 했다.
어제 그렇게 흑역사를 쌓았지만 그래도 선호씨 얼굴 보겠다고 출근하면서 은근 기분이 좋아졌는데 웬일인지 꽃집이 닫혀있었다. 내 삶이 무너졌어.
톡이라도 남겨볼까 싶었지만 연락까지 하면 너무 오바하는 것 같아 간신히 참았다.
하루 재수 없으면 끝까지 없다고 재욱이의 출근시간까지 꽃집은 굳게 닫혀있었다.
"저 왔어요 사장님. 반기는 척이라도 좀 해주시지."
"왔어?? 점심은 먹었구?"
"네. 몰골은 또 왜 그래요?"
"오 그 말 잘 꺼냈다. 너 그렇게 다 말하고 다닐 거면 우리 카페나 좀 홍보하고 와."
"갑자기 오자마자 혼내시네."
"너가 선호씨한테 내가 졸작 보러 가는 거 거짓말이라고 말했다며."
"그걸 미쳤다고 말해요?"
"연기 갈수록 늘어 아주."
"형이 눈치 챈 거 아니에요? 괜히 내 핑계 댄 것 같은데."
아 더 싫어!!!! 죽을래!!!! 벽에 머리를 박으려는데 내 이마를 조심스럽게 감싸준 재욱이와 눈이 마주쳤다. 내 눈을 황급히 피하며 벽 더럽다고 미간을 좁힌다. 그런 재욱이의 손을 잡고 내려 쇠약한 한숨소리를 내며 내 망할 인생을 한탄했다.
"어? 피!? 나 피나??"
"어디 봐요"
커피를 마실 생각이었는지 머신 근처까지 갔다가 도로 나에게 다가왔다. 내 손을 거칠게 가져가서 이곳저곳 살펴보더니 곧 조심스럽게 내 손을 내려놓고 자신의 손을 씻는 거였다. 이게 말로만 듣던 반걱정일까? 반존대를 이은 반걱정?
"...야..더 걱정 해줘.. 그게 끝이야..?"
"걱정은 사장님이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거 제 손에서 묻은 거예요."
"너 피나???"
"준비하다가 긁혔어요. 데일밴드 붙인다는 걸 깜빡했네."
"어디 봐봐."
"보긴 뭘 봐요. 별 거 아니에요."
"얼른. 흉질까 봐 걱정 돼서 그래."
"..걱정? 진짜 별 거 아닌데."
구급상자를 꺼내 약을 바르다가 얘는 아픔도 없나 싶어 고개를 들자 잔뜩 찡그린 얼굴로 입을 막고 있었다.
역시 차가운데 귀여워. 겉바속촉같은 상반되는 매력이 출중한 아이야.
"귀엽네ㅋㅋㅋㅋㅋㅋ"
"귀, 귀엽긴 뭐가 귀여워요."
"아파?"
"아 아니에요 진짜."
웃겨서 막 웃다가 실수로 상처를 건드리자 또 입을 막는 처음 보는 모습에 우울했던 감정이 좀 진정이 됐다.
"되게 재밌어 보이네. 뭐가 그렇게 재밌을까."
"헐 선호씨 출근하셨네요!?"
"주문 안 받습니까?"
"오늘도 아메리카노 아이스로 맞죠?"
"..아뇨. 오늘은 프라프치노 먹을래요. 만들기 오래 걸리는 걸로."
"네??"
"모카프라프치노에 자바칩 추가해시고 휘핑 많이 올려주세요. 아, 드리즐은 3바퀴 둘러 주세요."
"그럴 거면 스벅을 가세요."
"사장님 안 됩니까?"
이제 철벽 치는 건가..? 갑자기 사장님이라고 부르네.. 분명 듣기 좋게 내 이름 불러줬었는데..
마상을 입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카페 주인이었다. 무조건 된다며 계산을 해주고 만들려는데 재욱이는 자기가 만들겠다며 믹서기를 꺼내들었다.
"아니야 손 다쳤잖아. 이거 만들고 밴드 붙여줄 테니까 잠시만 앉아있어."
"됐어요. 조금 까진 것 가지고"
"앉아 있어 얼른. 아니면 나도 다친다?"
"아 알겠어요 앉아있을게요"
"아니 여주씨가 다치긴 왜 다쳐요"
둘이 리액션 겨루기 하네. 순간 뻘쭘해진 난 재욱이의 손에서 믹서기를 뺏어들고 내 사랑까지 듬뿍 넣어 음료를 완성했다. 받자마자 한 입 마신 그는 머뭇거리다 나를 보며 말한다.
"ㄱ, 그 저도 여기 좀 아픈데. 아까 보니까 피도 났던 것 같기도 하고."
"네? 왜요?? 어디 봐요!"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가 생난리를 치고 있는데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니 뭐해요 여주씨? 내 손에 뭐 전기라도 흐르나?"
"아, 아니 정전기 났어요, 정전기."
"아까 재욱이 손은 아주 사라질까봐 조마조마하며 꼭 쥐고 있던데. 내 손은 뭐 별로인가? 막 만지기도 싫고 그래요?"
"주세요. 확 잡아버리게."
손을 맹금류처럼 낚아채 상처 난 곳을 빤히 바라보는데 상처는커녕 너무 깔끔하다. 이쪽 손이 아닌가? 눈치를 보며 선호씨를 보는데 방금 전까지 자기 손은 왜 안 잡아주냐 하던 패기는 어디 가고 수줍은 소년이 서 있는 거다.
"더워요? 왜 이렇게 땀이 나요?"
"오늘 좀 더운 것 같아요. 겨울인데 이상하게 덥네."
"근데 상처가 없는데요?"
손가시를 뜯었는데 너무 아프다며 낑낑대는 탓에 보이지 않는 상처에 연고를 발라줘야 했다.
데일밴드까지 붙여주자 만족한 듯 웃는 그의 미소에 난 전염이라도 된 듯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 출근 왜 늦게 하셨어요?"
"오늘 볼 일이 있어서 늦게 출근했어요."
"아 그래서 안 여셨구나. 저는 오늘 무슨 일 생긴 줄 알구.."
"..기다렸나?"
"..네?"
"농담입니다 농담. 그렇다고 정색하면 마음 아픈데."
"기다렸어요. 애타게 기다렸는데."
"...아니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 좀.. 제발.."
누가 내 뺨 좀 때려주세요. 왜 난 저런 말만 들으면 표정이 굳어질까? 꼭 좋아하는 사람이 저런 말을 해주면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지더라.
바로 수습은 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이번엔 그가 저번의 나처럼 황급히 밖을 나섰다.
"사장님 저는 과다출혈로 병원 실려가겠는데요."
"아니 재욱아 너 아까랑 말이 좀 다른데? 별 거 아니라면서ㅋㅋㅋㅋㅋㅋㅋ"
"얼른 붙여줘요 밴드."
이렇게 밴드 붙일바엔 밴드나 할래.
**
"오늘은 일찍 퇴근 안 해요?"
"어제 나 잡았잖아. 오늘은 오래 있어줄 수 있어."
"진짜요? 단지 그거 때문에?"
"어제 기대했다며. 그 말 들으니까 띵하더라. 요즘 카페에 신경 안 썼나 싶어서."
"내 말 뜻은 그게 아니었는데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요."
"그럼 내가 선호씨한테 너무 신경을 썼나..?"
"아 이것도 아니구나? 그럼 뭘까..?"
"얘기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변하지? 바나나 갈변하듯 변하네."
"어? 우리 과일 주문해야 하지 않아?"
"와 이 말을 이렇게 받네?"
정말 어이가 없는 건지 고개를 저으며 웃은 재욱이는 아까 주문했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의 어깨를 잡고 다시 앉혀주었다.
그래 요즘 사랑에 빠져 카페에 신경을 못 쓰긴 했어. 앞으로는 집중하자.
"사장님 연애 못해보셨죠? 딱 보니까 모솔이네."
"나 인기 엄청 많아. 밖에 줄을 서, 줄을."
"줄이 어디 있는데요 대체."
"어!? 아주 끝도 없어!!!"
"진짜 밑도 끝도 없으시네."
"아무튼 있어.. 눈에 안 보일 뿐이야.."
"제가 서드려요? 되게 궁하신 것 같은데."
"어..?"
"뭘 또 놀라요. 무안하게."
그 말에 안 놀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 같은 심장 약한 사람은 그런 한마디에 죽다 살아나.
민망함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괜히 이 상황을 무마시키려 장단에 맞춰주었다.
"번호표 뽑아야하는데? 뽑을래?"
"뽑으면 만나주기는 하죠?"
"당연하지!"
"주세요 번호표."
"응? 번호표?"
은근 이런 거 안 받아줄 것 같은데 잘 받아주더라. 대충 종이에 아무 숫자나 끄적여서 주니 고이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백퍼 집 가서 아 뭐야; 이게 왜 여기 있어;; 하면서 버릴 거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마음 찢어지네. 내 앞에서는 사회생활 잘하는 착한 알바생이니까.
"그 때 가서 모른 척 하지 마요."
"그만해 이 자식아."
"ㅋㅋㅋㅋㅋㅋㅋㅋ뭘 그만해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시작은 무슨."
"어리다고 무시하지 마요. 어쩌면 형보다 더 좋을 지도"
"그래 우리 재욱이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 싶은 거 다 해."
"사장님이 먼저 말한 거예요. 후회 하지 마요."
"그럼. 후회 할 일이 뭐가 있어"
"이번 주말에 데이트해요. 저 데이트 하고 싶어요."
"아니 그게 무슨 자다가 팝핀 추는 소리야..?"
"한다는 걸로 알게요."
"아니 어딜 봐서 저게 한다는 소리로 들리는 건데."
진심이야 연기야..? 언제 그랬냐는 듯 휴대폰을 하는 재욱이에 장난임을 깨닫고 나도 할 거나 하려는데 눈앞에 휴대폰을 들이민다.
"와 맛있겠다."
"여기 가요 우리."
누가 봐도 저희 연인끼리 데이트해요 할 법한 예쁜 파스타집이 화면 가득 차있었다.
밑으로 슬쩍 내리면서 눈치를 보는데 싫으면 다른 곳 알아본다며 다시 휴대폰을 가져갔다.
어떻게 대꾸해야하지? 겉으로는 신경 안 쓰는 척 속에서는 생각회로를 돌리고 있는데 구사일생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아이러브커피 대주주 뭐하냐?"
"뭐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지금 일하는 중."
"오 잘됐다. 끝나고 우리집 와."
"뭐가 잘된 건데?"
"두 손 가득 와. 끊는다."
"왜? 여보세요??"
역시 짧고 간단하게 통화를 끝내는 내 친구에게 항상 의아함이 밀려온다. 뭔가 통화하고 끊으면 후련한데 이친구랑은 찝찝하단 말이지?
"여기는요?"
친구의 전화가 일찍 끝난 덕에 휴대폰이 다시 내 손에 들려졌다. 한 번도 뭐 사준 적 없는데 회식 하는 셈 치자 생각하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아니 이게 이렇게 행복할 일이야?
**
"왔어? 들어와."
"뭔데? 무슨 일 있어?"
"왜긴. 술이나 마시려고 불렀지."
"와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너는 무슨 일 있잖아. 진전은? 고백은 했어??"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야 얼른 앉아. 뭔데. 다 털어봐."
배고플 때 마트가면 이것저것 다 사는 거 다들 공감할 거다. 사온 식품들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자 얼큰하게 취했겠다 하고 싶은 말을 그냥 다 뱉어냈다.
"연하 어떻게 생각해?"
"좋은데?"
"그 연하가 내 가게의 알바생이라면?"
"더 좋지. 맨날 볼 수 있잖아."
"근데 진짜 그건 좋다."
"재운이가 너 좋대?"
"재욱이."
"부정은 안하네?? 뭐야? 진짜야????"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주니 내 손을 꼭 부여잡으며 제발 나대지 말고 조신하게 행동해서 주말 데이트를 성공하란다.
아니 다짜고짜 무슨 성공이야.
"근데 난 재욱이를 한 번도 남자로 느껴본 적이 없어."
"이제 느껴봐."
"그치만 꽃을 든 남자는..?"
"아니 가만 보면 애칭이 맨날 바뀌더라? 그분은 너한테 관심 있어?"
"몰라.. 근데 개업한지 100일 됐다고 장미 주는 거 어떻게 생각해?"
"사귀자는 거네. 고백이잖아 그거."
친구가 연애한지 5년 다 되어가서 그런지 믿음직스럽다. 뭔가 이친구가 수박은 껍질째 먹는 거야라고 해도 긴가민가하면서 수박 한통을 씹어 먹을 것 같아.
"여기서 중요한 게 있어."
"뭔데??"
"그 장미 색깔. 꽃말이 다 다르잖아."
"파란장미였어. 아주 정열적이었지.."
"정열은 레드 아니냐..? 암튼 쳐볼게 기다려봐."
친구는 휴대폰을 들어 장미 꽃말이라고 쳤고 난 옆에서 숨죽여 지켜봤다.
"불가능. 이루지 못ㅎ"
"야 그만해"
"이루지 못하는 사랑."
"그만..!!"
어쩜 꽃말도 가지 가지하네. 술이나 마시자. 원래의 주량을 가볍게 뛰어넘어 혀가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 근데 생각할수록 빡치는 거다. 처음엔 빡침이었는데 계속 생각해보니 슬퍼져서 눈물콧물까지 선보였다. 네 혼자 모노드라마 찍는 중이에요.
친구는 옆에서 신경도 안 쓰며 남친이랑 통화중이고 난 그 광경을 보다가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선호씨에게 전화를 걸어버렸다.
"웬일로 전화를 다 하지? 무슨 일 있어요?"
"제가여.."
"얼씨구. 혀도 꼬였는데?"
"제가 감정에 메말랐거든요..? 막 슬픈 영화 봐도 울지도 않구.."
"울어요??"
"아니 장미 꽃말이 왜 그따구야..?"
"그건 반말인데?"
"파란장미 준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여!!!!"
"지금 어디에요?"
"아니 제가 어딘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불가능이라잖아여!!!!!!!"
"집이에요?"
"제가 집이든 닭장이든 마구간이든 무슨 상관인데여!!!!!!!!"
"어디라도 갈 테니까 얼굴 보고 대화해요."
"저 이제 선호씨 안 봐여 다신 제 얼굴 볼 생각 하지 말아요!!..."
순간 휴대폰이 사라졌고 친구는 나의 내일을 위해서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집 가면 파란장미 씹어먹어버릴거야ㅠㅠㅠㅠㅠ
**
눈이 번쩍 떠졌다. 언제 잠든 건지 모르겠지만 침대에 고이 누워있었다. 어제 집에 어떻게 들어왔지..? 늦은 줄 알고 헐레벌떡 일어나는데 순간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오..? 불길한데?"
휴대폰을 뒤적이자 다행히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술 먹어도 기억은 잘 나는 편이라 어제 한 만행들이 단편영화처럼 끊김 없이 재생되었다. 와 친구가 말려줬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거야. 인생 한순간에 조질 뻔했네.
카페를 오픈 하자마자 미친 듯한 갈증에 아이스티를 만들어 원샷을 때렸다. 와 한 잔 더 마실까? 개좋은데? 잔에 아이스티 파우더를 한 스푼 넣었을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어서오ㅅ까지 말하고 손님이 누군지 확인하자마자 난 내 주특기인 쭈그려 앉기를 시전했다. 그에 맞서듯 그는 밀어붙이기를 시전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이거 먹어요."
빼꼼 올라와보니 선호씨가 카운터에 숙취해소제를 올려놓았고 난 그것을 슬쩍 내 쪽으로 땡겼다. 내 팔을 잡는 그에 멈춰졌지만.
"어제 뭐 그따구? 그따구우?"
"...죄송해요 진짜.. 술 먹다가 꽃말 읊어주는 친구 말 듣고 순간 욱해서.."
"아니 얼마나 서러웠으면 대성통곡을 했을까."
"대성통곡은 안했는데.."
"아주 자랑입니다. 현수막에 대성통곡은 안했지만 눈물은 보여준 김여주씨라고 대문짝만하게 써서 앞에 걸어놓을까요?"
"아니 제가 왜 울었다고 장담하세요?? 제가 원래 술 마시면 촉촉해요 목소리가."
"어제 기억 안 나면 됐어요. 정신이 없어서 못 말해줬는데 왜 제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생각합니까?"
"...아니! 개업 100일 선물 꽃인데 불가능이라니까..."
오 잘했어. 잘 생각했어. 개업 핑계 아주 좋았어. 이건 절대 선호씨를 향한 마음 때문이 아닌 개업한지 100일 된 꽃 때문에 빡친 거라 느껴졌을 거다.
뭐 선호씨는 내가 뭐 때문에 이러는지 신경조차 안 쓸 테지만.
"됐고 일단 일어나기나 해요."
쭈그린 몸을 일으켜 선호씨를 보자 왜 그렇게 빤히 보냐며 난리다. 아니 뭐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까? 귀여워 죽겠으니까 그만해.
"알았어요 먼산 볼게요. 이제 말해주세요."
"원래는 파란장미가 없어서 꽃말이 불가능이었는데 많은 연구 끝에 재배할 수 있게 되어서 바뀐 꽃말이 이루어짐, 희망, 기적입니다. 됐습니까?"
"진짜요? 전 그것도 모르고.. 죄송해요..."
어제 나의 만행에 화가 난 건지 감정을 억누르며 한자 한자 힘주어 말하는 그에게 주눅이 들어버렸다. 눈치를 보며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 숙취해소제 옆에 올려진 빨간 장미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진짜 고백 아니야..?
"이거 주면 기분 풀 거죠?"
기분은 내가 풀어줘야 하는데 어제의 내 개같은 전화를 받고도 내 기분 풀어주겠다며 예쁘게 포장해온 장미였다. 이제 그와의 연애를 꿈꾸는 게 아닌 결혼을 꿈꿔야겠다.
"진짜.. 선호씨는 맨날.. 막..."
"네? 잘 안 들려요?"
"왜 항상.."
"싫으면 뭐 가져가고."
"아뇨!! 너무 좋아요!!!"
"말은 진짜 잘해."
품에 꼭 안으니 이제야 안심한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가보겠다며 뒤를 돌았다가 곧바로 다시 나를 보았다. 오, 왜 그렇게 보는데...
"뭐 잊은 거 없습니까?"
"네..?? 음.."
이거 고백 타이밍 재는 거 맞나? 지금 고백 할 시간 주는 걸까..?
"...좋아해요."
"...네?"
"아니 장미 좋아한다고요! 꽃에도 감정이 있다면서요..!"
"아 꽃을..? 아.. 아니 화분에 물 주라고요!"
"...아니 왜 갑자기 화를 내세요!!?"
"곧 시들겠네! 맥아리 없는 것 좀 봐 어휴!!"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 건지 씩씩 대며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오늘 화분에 물 주는 날 아닌데. 내일인데. 알람도 맞춰놔서 맨날 잘 주는 것도 모르면서...
"아, 그리고!"
"...아니 아직 안 갔어요..?"
"꽃에 감정은 무슨..! 나는 감정 없는 줄 아나!!"
"아니 왜 다시 와요..?"
"갑니다! 가요!"
아니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난 건지 모르겠네. 갑자기 왜 저러는 건데.
**
"...선호씨 계세요?"
"...어쩐 일입니까? 이제 꽃 안 사러 오는 줄 알았는데."
"오늘 하루도 달달한 하루 되시라구 모카프라프치노에 자바칩 추가해서 휘핑 많~~~~이 드리즐 3번 둘러서 왔습니다!"
"외우셨어요 그걸?"
"저 원래 이렇게 안 해주는데 선호씨는 소중해서 해주는 거예요! "
"....소중?"
"네 소중하고 아끼는데요? 그래서 이거 안 마셔요?"
"아뇨? 좋아요. 너무 좋은데?"
황급히 받은 그는 한입 마시더니 역시나 제일 맛있다며 주접을 떨어주었다. 하 이 맛에 음료 만들지..
"어 근데 선호씨 이마에 그거 뭐에요?"
앞머리를 들추자 보이는 파란 멍에 내가 다친 것마냥 울상을 짓는데 별 거 아니라며 앞머리를 다시 내려 멍이 안 보이게 가렸다. 그러고 보니 항상 깐머리였는데 오늘따라 더 멍뭉미 넘치네. 당신 신고해야겠어. 전입신고. 우리 집에서 살 아 줘.
"왜 그래요?? 어디 박았어요??"
"어제 강아지가 때렸습니다. 아주 고약한 강아지에요."
"강아지 키워요? 귀엽겠다.."
"어제만 키웠습니다. 어제만. 딱 보니까 강아지가 여주씨를 닮았네."
"지금 저 귀엽다는 거예요?"
"얘기가 왜 그렇게 되지?"
"그래서 아니라구요..?"
"귀엽죠. 귀여워요."
와 오늘 선호씨한테 칭찬 할당량 채웠다. 오늘은 발 쭉 뻗고 잘 수 있겠어.
억지로 귀엽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그래서 이제 기분은 좀 괜찮습니까?"
"저 기분 좋아요! 어제는 그.. 술주정이에요 술주정."
"못된 술주정이네. 그거 아무한테나 하지 마요."
"어쩐지 다들 기겁을 하더라.."
"또 누구한테 했는데요? 친구? 뭐 남사친?"
"어휴 다 해봤죠."
"다? 다??"
"재욱이한테도 해본 것 같은데."
재욱이라는 말에 급격히 눈에 불을 켠 그는 못 들을 거라도 들은 것 마냥 인상을 구겼다. 그 표정에 내가 실수했나 방금 한 말을 되새겨보는데 다시 떠올려봐도 선호씨가 기분 나빠할 말은 없었다.
"..그럼 저 술 마실 때마다 휴대폰 좀 뺏어 주시던가요! 못해줄 거면서!"
"뺏어줄게요. 그러니까 제 앞에서만 술 마셔요."
"네..? 그거 고백인데.."
"아니 뭔 말을 못 해 진짜.."
"진짜 앞에서 술 마시면 말려주실 거예요..?"
"내 앞에서 술 마시면 휴대폰 아예 못 들게 할 건데?"
아 안 돼..!!! 이제 선호씨가 길 한 가운데서 트월킹을 춰도 박수쳐줄 정도로 좋아진 것 같아. 큰일 났다 진짜..
그 때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요란하게도 울렸다. 설레서 심장을 토할 것 같기에 도망갈 타이밍을 잡았다. 가보겠다며 인사를 하고 꽃집을 나서는 순간 전화를 받았는데 요즘 친구로 보이스피싱도 오나? 친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어제 잘 갔냐? 그 남자가 잘 데려다줬고?"
"응?"
"왜 모르는 척이야. 결국 잘 풀었어? 너 갑자기 잠들고 그분한테 전화 와서 위치 알려달라길래 알려줬지."
"무슨 소리야.. 나 필름 안 끊기는 거 알잖아."
"너 원래 조절하니까 안 끊기지. 어제는 미친 듯이 마시더니 꼴좋다. 그분이 차 끌고 집 앞까지 왔다니까??"
"나는 탄 기억이 없어.."
"당연하지 너 잠들어서 그분이 현관문 앞까지 와서 너 업고 갔는데."
"와 잠시만. 와 나 쓰레기.. 돌았네.. 나 오늘부로 집 나간다. 나 쓰레기통에서 자야하거든."
"그분이 그거에 대해서 말 안 꺼냈어? 나였으면 손해배상 청구했다."
"아..! 어쩐지 뭐 잊은 거 없냐더라.. 갑자기 화분 얘기는 왜 하나 했네.. 괜히 화분으로 둘러댄 거였어."
나 이제 짝사랑도 못할 것 같은데 어떡하지. 내 인생 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