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슬픈 일이 뭔 줄 알아요? 기억을 못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세상에서 제일 슬퍼요.
"여기서 뭐해요?"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할까 꽃집 앞을 서성이는데 문이 열리며 선호씨가 나왔다. 나였어도 누가 내 가게 앞에서 손톱 물어뜯고 있으면 호기심에 나와봤을걸?
"아.. 오늘 날이 좋아서 산책 중이었어요."
"여주씨는 산책을 서서 하나 봐요. 안에서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안 느껴졌어요?"
"뚫어져라?"
"그게 포인트가 아닌데 또 그 말에 초점을 맞췄구나? 이제 놀랍지도 않아요."
"선호씨 저 할 말이 있는데.."
"추운데 들어와서 말해줘요."
"아니요. 저는 매서운 추위로 정신 좀 차려야 해서요."
"진짜 안 들어올 거예요?"
"저는 따듯할 자격도 없어요."
"그럼 나도 함께해요."
반쯤 나와있던 그는 문을 열고 아예 나와버렸다. 얇은 와이셔츠 하나만 입은 선호씨는 죄 없어.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난 꽃집 안에 있다.
그는 내가 입을 열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줄 생각인지 별말 없이 내 옆에 앉아있어주었다.
"여기 왜 이렇게 찾기 어려워..? 마중 나온다며!!!"
갑작스러운 여자의 등장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던 사과 멘트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인데요..?
"손님 계셨네. 먼저 해드려."
나를 손님으로 칭한 그녀의 말에 얼떨결에 난 세컨드로 밀려나버렸다. 둘이 무슨 사이인지 가늠도 안 된 와중에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버려서 내가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미쳐버렸다. 그래 우리 썸도 아닌데 고작 여자랑 있다는 이유로 질투하면 안 되지. 난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야.
"선호야 꽃 아직도 살아있다? 벌써 일주일도 더 된 것 같은데 신기하지?"
나 꽉 막혔어. 나 아주 단단히 막힌 사람이야. 우리 집 변기도 이 정도로는 안 막혀.
더 이상 여기 있다간 내 기분만 우울해질 것 같아 슬금슬금 일어나는데 그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있는데 그도 나와 똑같은 자세를 취하더니 지금 뭐 하냐고 묻는다. 아니 선호씨 이런 거 따라 하지 마요 벽 부숴버릴 만큼 귀여우니까.
"아.."
"잠시만요 진짜 잠시만 기다려줘요."
나 좀 보내줘요.. 곤욕이란 말이에요...
"화분은?"
"이거 힘들 게 구한 거야. 다음에 물었을 때 시들었다고 하면... 와.. 너 진짜 가만 안 둬."
화분을 주려다가 다시 자기 쪽으로 당겨서 당부하는 선호씨에 슬금슬금 웃음이 나왔다. 키는 멀대같이 큰 사람이 화분 꼭 안고 저러니까 들쳐매고 튀고싶어ㅠㅠㅠ
"나 차 좀 빌려주라! 내 차 수리 맡겨서 모레쯤에야 나온대.. 화분 들고 다니면 레옹 같잖아.."
"근데 내가 만약 빌려줬어. 그럼 난 집에 어떻게 가지?"
"집 가깝잖아! 차로 다니면 기름값만 아깝다니까? 걸어서 갈 수 있잖아."
오호라 집도 알고 있으시다?
"오르막길 많아서 힘들다니까?"
"우리 집은 버스 타면 30분도 더 걸리는데..? 이렇게 야박하게 굴 거야? "
"일단 알았어. 사고 나면 하.. 그땐 나도 날 못 말려. 진짜야."
"그래!! 근데 선호야아아 나 여기까지 왔는데 꽃 안 줘~? 웅?"
갑자스러운 애교에 마치 누구한테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주먹을 꽉 쥐고 마치 조폭이 형님한테 인사하듯 고개를 푹 숙이고 카페로 향했다. 이제부터 애교 배운다.
**
"재우가아아"
"원시인이세요..?"
이게 아닌가?
"남자들은 어떤 여자 좋아해? 애교 있는 여자?"
"사람마다 다르겠죠. 저는 별로."
"애교를 싫어해서 나한테 원시인이라고 한 거지?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귀엽다는 말 듣고 싶어요?"
얼떨결에 난 귀여움을 갈구하고 있었다. 재욱이는 보너스 줘도 귀엽다는 말 안 해줄 냉혈 인간인 걸 알기에 타깃을 바꿔보기로 했다. 친구들 톡에 애교 가득 담아 보냈는데 다들 쌍욕을 하는 거다. 이게 아닌데.
"전혀 안 귀엽나..?"
"사장님 로또 한 개도 안 맞았다고 속상해할 때 귀여워요"
"그게 뭔데..."
"사장님 진상 올 때마다 의자 주먹으로 내려치는 거 귀여워요."
"너도 내가 주는 건 싫더라도 꾸역꾸역 먹는 거 귀여워"
"먹는 게 나와서 말인데 사장님 볼 터질 정도로 가득 먹는 거 햄스터 같고 귀여워요"
"너 웃을 때 귀여워"
"아 그건 반칙이죠"
아니 우리 게임 중이었어? 난 진짜 칭찬한 건데. 내 귀엽다는 말에 웃음을 꾹 참다 뒤로 돌아서 허공을 보는 재욱이에 어이가 털렸다.
"어쩐지 말도 안 되는 거 투성이더라."
"진심인데. 각자 귀여운 기준이 다른 거죠."
"아 애교는 원시인 같은데 그런 건 귀엽다?"
"은근 뒤끝 있으시네. 한 번 더 해봐요. 제 대답이 달라질지도 모르잖아요."
"됐어."
"근데 사장님 애교는 진짜 하지 마요. 부탁이에요."
"와 내일 재욱이 안 봐서 좋다. 드디어 주말이네."
"내일 우리 데이트인데?"
"응? 그건 반말인 것 같은데?"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살려주세요.
**
(퇴근 언제 해요?
선호도플라워 사장님🌻)
그의 저장된 이름이 딱 우리 사이를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이웃 사이. 서로 가끔 부탁하고, 어려울 때 돕는 그런 느낌?
근데 퇴근 언제 하냐는 문자는 말이 달라지지. 설마 같이 퇴근하자고 하는 거 아니야..?
(저 오늘 차 도둑맞았는데 집에 같이 갈래요?
선호도플라워 사장님🌻)
(퇴근할 때 들러요. 할 일 넘쳐나도 바로 퇴근할게요
선호도플라워 사장님🌻)
맙소사. 이마를 짚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데 재욱이가 내 휴대폰을 자연스럽게 가져가버렸다. 순간 내가 가져가라고 준 줄.
"깜짝이야.. 폰은 왜?"
"재밌는 거면 같이 보려고 했죠."
"너는 재미없을걸?"
화면에 떠있는 문자를 확인하더니 자기 앞치마 주머니에 넣는 거다. 선호씨는 차를 도둑맞고 나는 폰을 도둑맞았다.
"뭐해?"
"일에 집중해요."
"그렇지만 일은 재욱이가 집중하고 있는데?"
"안 돼요. 같이 해야 돼요. 저희는 공동체니까."
"응? 언제부터?"
"지금부터요."
"안 주면 내일 잠수탄다."
그깟 데이트가 뭐라고 황급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미는 거였다. 순순히 내 손에 쥐어진 폰에 난 다시 재욱이에게 내밀었다.
"가져가 다시..!"
"그런 걸로 협박하냐.. 너무 했네."
"가져가라니까..!?"
"아 싫어요. 데이트 무조건 할 거예요."
전세가 역전됐다. 이제는 내가 재욱이의 주머니에 휴대폰을 욱여넣으려 하고 있다. 내 휴대폰 받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건지 잘도 피하는 재욱이에 나도 오기가 생겼다. 근데 얼핏 표정을 보니 웃으며 즐기는 것 같은데? 이 자식 웃어..?
"역시 재욱이 웃으니까 귀엽네."
"..아 진짜!"
얘 진짜인가 봐.. 나 찐으로 좋아하나 봐..
얼굴이 붉어져 괜히 성질을 내는 재욱이의 방심한 틈을 타 주머니에 휴대폰을 쏙 넣고 해맑게 웃어 보였다. 화를 낼 줄 알았던 재욱이는 그저 내 얼굴을 빤히 보는 거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ㅇ, 왜.."
"그냥요."
"..그냥?"
"사장님이 더 귀여워요. 웃는 거."
요즘 연하남은 박력이 엄청나더라고요. 라떼는 수줍은 봄 잠바가 인기였어(근거 없는 소리)
**
퇴근하면서 난 답장도 안 해놓고 약속이라도 한 듯 꽃집으로 들어갔다. 그저 무심하게 일하고 있던 그는 날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고 난 무의식적으로 그의 보조개를 콕 찔러버렸다. 당황해서 웃음을 잃은 그 잠시 동안 난 많은 생각을 했다. 뭐 묻었다고 할까? 아니면 냅다 도망칠까? 이미 저지른 거 그냥 아무 말이나 해버렸다.
"오 보조개가 생각보다 크네요. 세 들어가서 살아도 되겠다."
"아늑할걸? 들어가서 살면 맨날 볼 수 있겠어요."
개 같은 드립을 받아준 그에게 감탄하다가 이어지는 뒷말에 표정이 또 굳어버렸나 보다.
장난도 못 치겠어 이제라며 투정을 부리는 그였다.
"워, 월세가 얼마 정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진심인데..! 왜 웃어요?"
"월세 안 돼요. 전세도 안 되고 무조건 사야 하는데."
난 생각 자체가 마인드맵처럼 다양하게 뻗어나간다. 무조건 사야한다는 말에 화분을 사간 아까 그여자가 떠올랐고 난 어떻게든 이겨먹겠다고 되도 않는 애교를 부려버렸다.
오늘로써 흑역사 또 채우는 건가.
"공짜로 주시면 안돼용!? 웅??"
"응?"
역시나 내 예상대로다. 재욱이가 뜯어 말릴 때 그만 뒀어야 했는데.
곧 그는 갑작스럽게 내 볼을 꼬집는 거다.
그것도 진짜 귀여워 미치겠다는 표정으로말이다. 뭐지 이 상황?
"오 뭐야. 죄송해요. 김선호 미쳤나 봐 진짜."
"ㅇ, 아.. 괜찮아요! 퉁치죠 뭐! 저도 보조개 만졌으니까..!"
"제 보조개 두 쪽 다 살아요. 다 줄게요."
"헐 그럼 선호씨 이제 제 거네요?"
별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다. 말한 나도 놀라자빠지겠는데 그는 얼마나 놀랐겠는가. 가뜩이나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떠 나를 본다. 입이 방정이다 아주.
"근데 선호씨 혹시 초심 잃었어요? 요즘 되게 일찍 퇴근하시네요?"
"누구랑 같이 가야 해서요. 그분이 만나기 되게 어렵거든요. 오늘도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가버리더라고요."
"만나기 쉬울 텐데.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그분 만나는 건데요?"
"사람 가리냐고 좀 물어봐 줘요. 나한테만 그러는 것 같은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저는 외국에 있어도 선호씨가 부르면 바로 달려올 거예요!!"
"그거 고백인데?"
"와 내가 이렇게 막무가내였구나.. 죄송해요.."
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니까 뭔가 죄짓는 느낌인데. 근데 맞는 말이라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아니라고 부정은 못하고 지난날의 나를 한탄할 뿐이다.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줘요. 아, 앞으로 이런 말 안 할래요. 또 홀랑 가버릴 거잖아."
"아니 아까는.. 사실 두 분 무슨 사이인 줄 알고.. 제가 방해하는 걸까 봐.."
"방해요? 방해 좀 해줬으면 좋겠네."
네? 그럼 표정은 왜 굳어졌는데요?"
"오해할까 봐 그렇죠. 여주씨가 오해하는 거 싫으니까."
"오해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걔랑 저 그냥 친구예요. 꽃도 걔가 사간 거고요. 저 아무한테나 꽃 주는 그런 놈 아니에요."
"아..? 그럼 저는 아무나가 아니에요??"
대꾸도 없이 우당탕탕 마감을 마친 그와 어색한 퇴근을 했다.
난 걸어가면 한 10분 정도 걸릴 만큼 가깝고 선호씨는 걸어가면 아마 20분 정도 걸릴 거다.
그래서 일부러 지름길인 척 멀리 돌아가는 중이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오르막길이 많은 것 같지?"
"원래 올라갔다가 쭉 내려가야지 지름길이 될 수 있는 거예요."
물론 개구라다.
"어? 여기 익숙한데?"
"...네? 저는 처음 보ㄴ.. 아, 여기 거기구나. 잘 알죠."
"여기 골목 꺾으면 바로 저희 집이에요. 저희 집 가는 지름길이었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오.. 저 지름길 앱 만들까 봐요.. 어떻게 여기가 나왔을까..?"
"아, 여기가 아니구나.. 제가 착각했나 봐요. 다시 밑으로 내려갈까요?"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순간 어떤 남자가 성큼성큼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거다.
정말 말 그대로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맞네! 너 닮은 사람인줄. 너가 어쩐 일로 여자를 다 데려오냐?"
"..야 들어가."
"안녕하세요 전 김선호랑 같이 살고 있는 변요한이라고 해요. 그래서 성함이?"
"안녕하세요! 저는 선호씨 꽃집 옆에서 카페 하고 있는 김여주라고 해요."
"아~ 어제 그분이시구나? 얘가 갑자기 막 뛰쳐나가는 거예요 뭐에 홀린 것처럼."
"야야야 뭐라는 거야 지금."
"걔가 갔다 오자마자 막 우울해하더라고요. 시련 당한 사람처럼. 저는 태어나서 얘가 이러는 거 처음 봤거든요."
"...진짜 마지막 기회야."
"아 알았어! 이제 안 할게. 절대 안 해."
그분은 다짜고짜 악수를 하며 자신을 소개했고 나도 얼떨결에 내 소개를 했다.
선호씨는 옆에서 한숨을 푹푹 쉬지 난 당황스럽지 그분은 쉬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잠시만 낯이 익은데..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제가 원래 얼굴을 잘 잊거든요? 너무 또렷한데 지금?"
"너 지금 누구한데 수작 부리는지 알지? 이따 들어가서 가만 안 둔다 진짜."
"아 생각났다! 그 생선구이집! 사거리에 알죠?"
그는 선호씨가 뭐라 하든 말든 꿋꿋이 자기 할 말을 이어나갔다.
난 선호씨 눈치 보랴 그분 말에 대꾸해 주랴 혼이 다 빠졌다. 그래도 선호씨 친구니까 맞춰주는 게 예의겠지..?
"네..? 아아아!! 생각났다, 생각났어!! 거기 맛집이잖아요!!"
"...이야 이런 인재를 이제서야 찾았네. 리액션 되게 좋으시다. 근데 저 생선구이 못 먹어요. 어렸을 때 가시 걸려서 트라우마가 생겨가지고."
"아 낚였네.. 어쩐지 생선구이집에서 만났는데 기억할 리가 없지.."
"저 이제 갈게요. 선호야 늦게 들어와."
분명 길을 착각했다고 했지만 그의 친구는 선호씨가 말해준 그 집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하하 쟤가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갑자기 왜 저러지? ..갈까요?"
"어디 가려고요? 선호씨 집 여기잖아요ㅋㅋㅋㅋㅋㅋ"
"아 여주씨 몰랐구나? 친구 본가가 여기에요. 저희 집은 여기서 멀어요. 엄~~청."
"야 김선호 올 때 맥주 사 와!!!!"
창문을 활짝 열고 소리치는 친구에 그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본가가 여기에 있는데 친구랑 같이 사는 게 더 이상하지.
친구를 만난 이후로 사이가 너무 어색해져버렸다.
난 어제 일이 신경 쓰여 말도 못 걸고 선호씨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입을 꾹 다물고 걷기만 했다.
"친구분도 보조개가 있네요? 제가 생각해봤는데 보조개 있으면 그 분위기가 음.. 뭐라 해야 하지? 순하고 귀엽고 멋있고 아기자기한 것 같아요."
"그 말 뜻은 친구도 귀엽고 멋있다?"
"아 말이 그렇게 되네..?"
"술 마셨을 때만 그러는 게 아니네요."
"예??????"
"그냥 그러길래."
망했다 진짜로. 나 무슨 말을 지껄인 거야..
**
그날로 돌아가 보자.
붕 뜬 느낌, 울리는 좋은 목소리, 방금 감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진한 샴푸 향, 포근한 섬유유연제 향까지.
4콤보로 기분이 좋아진 여주는 그의 목을 더 끌어안아 거북이 등에 기생하는 따개비처럼 더 달라붙었다.
"어 그래 화가 많이 났구나? 야식 같이 먹기로 해놓고 사라져서 많이 놀랐지? 나도 나한테 많이 놀랐어. 근데 이게 잘 생각해보면 기회다? 1인1닭 할 수 있는 기회. 나 지금 전화받을 상황이 아니라서 집 갈 때 전화할게."
그렇다 그는 룸메와 야식을 먹기로 해놓고 무작정 여주를 찾아온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어서 안 먹어도 배가 아플 정도로 불렀다.
기다릴까 봐 차 타고 최대한 빠르게 왔건만 정작 그녀는 잠에 빠져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에 태우면 혹여나 그녀가 깰까 동네 한 바퀴를 산책 삼아 돌기까지 하는 중이다.
"...킁킁"
"콧물 나요?"
"향이 너무 조아요.."
"참나. 만취해도 향은 나나 보네."
"..김선호씨?"
"...아니 왜 갑자기 성을 붙이ㄱ"
"내려줘요!!!"
다리를 마구 흔들어대는 탓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어떻게 자신한테 그럴 수 있냐며 대성통곡을 하는 그녀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서툴게 토닥여주기밖에 없었다.
근데 그녀는 그것조차도 싫은 건지 어깨를 털며 그의 손을 떨어트리는 거다.
"지금 해보자는 겁니까?"
"제일 미워!!"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일어나요."
토닥여도 거부하지, 팔을 잡아도 뿌리치지, 그녀의 앞에 쭈그려 앉는데 뭐가 그렇게 슬픈지 엉엉 울고 있는 그녀였다.
"뭐가 그렇게 슬픈 건데요? 뭐가 그렇게 서러울까.. 나도 막 운다?"
"...몰라.. 가버려요.."
"파란 장미 때문에? 정말 그거 때문이에요?"
"몰라여.."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여주씨한테 잘해준 기억밖에 없거든요."
"잘해줘서 그렇잖아여!!! 왜 잘해줘요!!!? 왜 맨날 챙겨주고!! 어!? 웃어주고!!"
참고 참은 여주의 설움이 폭발해버렸다. 한 번 시작된 거 막힘없이 주접을 쏟아냈다.
"유죄.. 당신은 유죄.. 길티.. 선호씨는 곧 감빵 갈거라구요..."
"아니 그게 무슨.."
"제발 하나만 하면 안 되나..? 얼굴이 잘 생길 거면 성격이 나쁘던가.. 왜 부족한 거 하나 없는 사람이 나한테 잘해줘서 심장을 뒤집어 놓냐구요!!"
"...술 주정이에요? 여주씨 술 마시면 모든 남자한테 막 이럽니까?"
"네!!!!!!!!! 이 남자 저 남자한테 다 그럽니다!!!!! 됐어요!!!!?"
그녀는 코를 훌쩍이다 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차라리 눈앞에서 사라지면 덜하겠지. 그는 벌떡 일어나 집에 가는 척 그녀의 뒤에 섰다. 진짜로 눈앞에서 사라지자 일어나려 애쓰는 그녀의 두 어깨를 잡고 일으켰고 순간적으로 힘을 낸 그녀는 당차게 일어나 그의 이마를 머리로 박치기했다.
"아..!"
"선호씨의 용안에 내가 무슨 짓을.. 도라버려써 김여주.. 도랐어.."
"아니 용안이라는 말이 여기서 왜 나오지?"
"선호씨 얼굴 지켜야 하는데.. 그치만!! 지금 선호씨 보기 시러요.. 그러니까 비켜주시져..?"
앞서 걷는 그녀의 뒤를 쫓으며 혹시라도 넘어질까 안절부절못하는 중이다. 조금이라도 비틀거리면 당장이라도 잡아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가깝게 뒤를 따라 걸었고 집으로 갈 줄 알았던 그녀는 놀랍게도 놀이터로 향했다.
"어? 거기 집 아닌데? 왜 거기로 갈까..?"
"같이 탈래요???"
"추운데 그네 타려고요?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말을 그렇게 하지만 어느새 그녀의 뒤에 서서 열심히 밀어주는 중이다.
"정말 덕분에 제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이 밤에 내가 뭐 하는 걸까요?"
"선호씨!!!"
"애타게도 불러주네. 왜요?"
"왜 힘도 쎄요..? 말도 안 돼..."
또 울먹거리는 그녀에 또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그네를 밀다 말고 옆 그네에 앉았다.
뭘 해도 울먹울먹 거려서 도저히 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추가돼써.. 꽃을 든 남자는 힘도 쎄.."
"뭔 남자요?"
"혹시 선호씨.. 운동도 해요..?"
"가끔?"
"아아아앙악 안돼애애애"
절망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머리를 굴렸다. 대체 자신이 운동하는 게 이 정도로 절망할 일일까 하며.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요. 출근해야죠."
"오..!"
"그래요. 가요 얼른."
"미끄럼틀 탈래여!!"
"미끄럼틀?"
그녀는 놀이터의 무법자가 될 생각인지 한참을 돌아다녔다. 그는 보호자가 된 심정으로 마지막이야. 진짜로 이것만 타고 가는 거야. 하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질긴 사람이었다.
한참을 고생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집 쪽으로 걸었고 그는 또 그녀의 뒤를 따랐다.
"드디어 집 도착이네. 잘 자요."
"잘 못 자여!!!!"
"한 마디만 더 했다간 이마에 뿔 2개 생기겠는데요? 이러다 도깨비 되겠어요."
"차라리 뿔이라도 생겨봐요.. 그럼 좀 못나지겠네.. 그럼 덜 빛나겠어..."
"저랑 약속 하나 합시다. 앞으로 술 마시면 그런 말 안 하기로."
"왜여..?"
"왜요? 지금 왜요라는 말이 나와요?"
"몰라여..."
"다른 남자들은 그런 말 들으면 오해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요. 나도 막 운다? 저 은근 눈물 많아요."
"우는 선호씨 최고.. 진짜 최고.."
그렇게 그녀는 최면에 걸린 듯 최고라며 혼잣말을 하다가 집으로 쏙 들어갔다. 그의 앞에서 토로 피자를 만들지도, 고백을 하지도, 쌍욕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여주의 술 주정이 자신을 향한 애정이 아닌 모두에게나 하는 주접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 그는 눈치가 드럽게 없다.
여러분 댓글 읽는 재미가 쏠쏠하네YO.. 제 일상이 글잡 들어오기가 되었어YO..
독자릠덜 너무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글 열심히 쓰는 선호도조사가 되겠습니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