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어쩌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사는 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친걸까봐 몸이라도 멀어지기로 했다. 그래서 해윤이랑 헤어지자마자 바로 동생한테 연락을 때렸다. 이렇게 절박해요 내가. 동생네 집에 얹혀살기까지 거의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벌써부터 짬짬이 짐을 꾸려놓기 시작했다. 짐 하나를 캐리어에 집어넣을 때마다 꼭 김선호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도 그 작은 캐리어에 넣어두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꼭...
"성이름~ 나 왔어~"
쟤는 방해를 못 해서 안달이지... 지금 누구때문에 토끼려는지도 모르고. 요새 김선호는 출석 도장이라도 찍듯이 하루를 안 거르고 벨을 눌러댄다. 인터폰 너머 보이는 얼굴은 또 잘생기고 지랄이다.
어쩌다 쟤를 좋아해서... 하는 생각은, 나를 삼 년 전으로 돌려놓았다.
선호를 알게 된 건, 19살 때였다. 학기 초에 동아리를 정해서 하나씩 들어가야했는데 하필 그 날 학교를 빠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정원 미달인 곳에 이름을 넣었고 그게 김선호가 있던 동아리였다. 영화 동아리라길래 그냥 영화나 보고마는 놀고먹는 동아리인 줄 알았는데, 동아리 시간이 끝나고 교실에서 나가던 날 붙잡은 김선호는 세 장의 종이를 건넸다.
"저 이거, 써야되는데..."
"..."
왜 정원 미달 동아리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동아리가 폐부 될 때까지 난 부원의 자리를 지켰다. 왜...? 감상문 종이 내미는 김선호가 좋았거든. 막연하게 그게 좋아서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좋아하면서 이유가 늘어만갔다. 친절함, 다정함, 친근감. 나중에는 그게 독이 될지도 모르고 열심히도 좋아했다. 이유까지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나는 걔가 하는 행동마다 의미 부여를 했다. 지금이랑 완전 정반대지. 지금은 걔가 어떤 행동을 하든 내 착각이라고 딱 잘라내고 있으니.
김선호를 좋아하지말걸 그랬다고 후회하기 시작한 건 바로 그 다음 해였다.
졸업식이 있던 날, 우리는 서로에게 안겨줄 꽃다발을 준비했으나 이유가 달랐다.
"졸업 축하해, 성이름. 네 건 특별히 좀 더 큰걸로 준비했어."
"...왜?"
"왜긴. 제일 좋아하는 친구니까. 근데, 그거 내 거야? 되게 크다."
"아니. 너 줄 꽃같은 거 없거든."
이유가 달라서, 처음으로 후회를 했다.
나는 매번 설렜던 기억밖에 없는데, 그 애는 그렇지 않다는걸 알게 됐으니까.
아마 그 날 김선호한테 받은 꽃다발 포장지는 아직까지도 본가 내 방 책상 위에 있을 거다. 서러움에 엉엉 울면서도 그 꽃은 꾸역꾸역 들고왔었거든. 그 말을 듣고 고백도 못 해보고 차인 기분이 들었어서 금방 마음 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뭔 아직까지도 좋아하고있냐. 김선호가 준 꽃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 때처럼. 꾸역꾸역.
인터폰 화면으로 손을 휘적휘적 하는 김선호에 정신 차리고 싸다 만 캐리어를 발로 차 침대 밑으로 밀어넣었다. 참자. 따악 일주일만 참자. 참았다가, 종강하는 날 저 캐리어 꺼내들고 나른다. 기필코.
*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자기 피해서 내려가는 거라도 눈치챈마냥 김선호는 꼬박 날 찾았다. 아니 원래 그러긴했는데... 평소보다 더. 시도 때도없이 부르고, 내가 안 오면 자기가 오고. 와중에 걔가 그러면 그럴수록 더 좋아... 나 진짜 노답이네. 게다가, 안 그래도 걔가 그런 탓에 매일을 얼굴 보고 있는데 해윤이랑 만났던 날에,
"꼭 내려가야겠어?"
"응, 그래야지. 그래야... 빨리 정리하지."
"아, 그럼 너 내려가기 전에 언제 한 번 선호랑 같이 만나자. 둘이서 만나긴 좀 그렇고... 안 본지는 꽤 됐거든."
"... 그러지 뭐."
해서, 해윤이랑 선호랑 셋이서 자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셋은 진짜 간만이라고 해윤이나 선호나 둘 다 들뜬 분위기였다. 나만 티도 못 내고. 그래도 최대한 긍정회로를 돌리려고 노력중이다. 그래! 당장 내일 모레면 내려가서 얼굴도 잘 못볼텐데 미리 실컷 봐두면 좋지.
"이거 먼저 먹고 마셔. 저번처럼 또 만취 상태 될 때까지 달리지말고."
좋냐? 좋아?
김선호가 테이블 위로 올려놓는 숙취해소제를 만지작댔다. 나 지금 뭐하냐... 얘 안 보겠다고 별 뻘짓 다 했으면서. 당장 며칠 뒤에도 딴 데로 갈 거면서.
똑바로 얼굴 마주하는 게 거의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하고나니 괜히 아쉽고 시원섭섭했다. 이런 것도 나 혼자서만 생각하고 있는 거지만. 혹시라도 정말 이걸로 끝일까봐, 안주 먹는 것보다 더 많이 쳐다봤다. 나중엔 얼굴에 뭐 묻었나 싶어 혼자 더듬더듬 거릴만큼.
"김선호, 너 전화 온다."
"아, 그러네. 받고 올게. 얘기들 하고 있어."
해윤이 말에 핸드폰 집어들고 나가는 김선호 뒷통수를 빤히 쳐다봤다. 아쉬움의 눈길이 아니었다. 개자식. 이라고 눈빛으로 말해요 중이었다. 아니, 헤어졌지, 짐 다 빼갔지. 더이상 연락할 이유가 어딨냐고. 계속 다시 안 만난다 어쩐다 하는데, 저거 곧 은정이 걔랑 합친다에 내가... 몰라. 개자식. 나중에 다시 만난다고 연락 오기만해봐. 나 진짜, ... 아 맞다. 나 이제 얘랑 연락 안 하려고 이 짓 중이지? 어휴.
"아, 근데 그럼 너 아예 내려가서 사는 거야?"
"아니. 개강하기 전에 다시,"
"그게 무슨 소리야?"
"어?"
"내려간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타이밍 한 번 참 구리다. 야심차게 기획.... 어쨌든 얘한테는 철저하게 비밀이었던 상자가 활짝 열리고 말았다. 무슨 전화를 저렇게 짧게 해. 아니지. 그게 문제냐 지금?
잔뜩 성나보이는 김선호 얼굴에 쫄아 우물쭈물거렸다. 해윤이도 앞에 앉아 눈치나 보고있는, 누구 하나 편할리 없는 상황이었다.
네가 왜이렇게 화가 났는지 머리를 굴려보는데, 딱 떠오르는 이유가 하나 있더라. 넌 날 지독히도 생각하는구나. 친구로서. 친구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사람이 나구나, 너한텐.
그 생각이 드니까 쫄아있던 기색도 가버리고 미안한 감정도 휘발됐다. 그냥. 한숨만 나왔다. 내가 왜 너한테 일일이 다 말 해줘야하는데? 하는 삐뚤어진 못난 마음이 자꾸 마음 밖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그냥, 잠깐 동생 집에 내려가있기로 했어."
"나한테는. 왜 말 안 했어?"
"..하... 그냥 말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너,"
"아 진짜... 나 좀 먼저 갈게."
짜증남, 쪽팔림, 암담함. 김선호 못지않게 화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면 해윤이가 안절부절이다. 나중에 꼭 따로 사과 해야겠다. 당장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자리를 벗어나기에 급급했다.
"너 진짜 왜이러는데!"
"... 나 못 하겠어. 진짜 못하겠어, 선호야. 나 너랑 친구 안 할래."
따라나온 선호가 막아세우자마자 감정들이 마구 섞여 복잡한 상태 그대로 툭툭 튀어나왔다. 내가 무슨 말을 뱉고있는지, 누구한테 뱉고있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성이름.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건지 알고나 말 하는 거야? 실수라고 해. 말이 헛나왔다고 해. 그럼 나 다 잊을게. 빨리, 아니라고..."
"내가 너 좋아해. 그래서 우리 친구 못 해. 나 그만 할래..."
"... 뭐?"
"좋아한단 말이야... 난 널 그런 눈으로 보고있었다고.."
몇 번씩, 고백에 대해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정말 만약에 내가 선호에게 고백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얼굴 다 빨개져가지고 덜덜 떨면서 하게 되겠지.
근데 아니었다. 얼굴은 눈물때문에 엉망이 됐고, 떨지않은 대신 주저앉았다. 서럽게 울면서 토해내듯 고백을 했다. 받아달라는 말 대신에 친구 그만하자는 말이나 했다. 그게 내 고백이었다. 삼 년동안 주구장창 숨겨왔던 거.
"이름...아, 일단 일어나서. 일어나봐. 나 좀 보고..."
"난 너랑 친구 못 하겠어. 우리가 될 수 있는게 친구나 남이라면, 난 너랑 남이 되고 싶어."
"성이름..."
"오늘만. 오늘 한 번만 나한테 져주라."
이 창피하고 엿같은 상황이 꿈이길. 근데 것보다, 네가 알았다고. 그렇게 하자고하기를 더 바라.
선호야. 그냥 잠깐 있다 지나갈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줘.
나는 도저히 너랑 친구는 못 하겠어.
김선호랑 친구 관두기 얼떨결에 성공한 것 같네.
*
사족!!! |
갑자기 고백이요...? 싶으실 수 있지만 여기서부터가 레알임다.. 이 끝부분 쓰려고 스토리 멱살 잡고 끌고왔습니다ㅎ_< 이 한 편에만 넣고 싶던 부분 반절은 들어간 것 같아요 남은 반절은 완결까지 쪼개고 쪼개서 들어갈듯합니다 그럼 건강 유의하시고...! 저는 빨리 써와서 빨리 다시 돌아오겠습니ㅡ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