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붉은 참혹상
written by: 규피덴셜
state: 공유, 배포 xX
nick: 테라규, 감성, 씨규빠, 타라, 베긔, 체리펀치, 소라빵, 코알라, 모닝콜, 찹쌀떡, 뇨뇽
붉은 참혹상 -11-
대략 4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성규가 열 아홉살이 되던 해였다. 사관학교에서 시험은 열 여섯 살에서 열 일곱살로 넘어가던 해에 마치기를 금방하였고 다른 친구들이 사관학교에 들어올 나이에 성규는 일찌감치 열 일곱의 훈련병이 되어 벌써 1년의 훈련을 마친 상태였다. 성규는 이제 더 이상 사관학교라는 곳에 대해서 들뜸이 없었다. 그저 복종과 명령 속에서만 사건이 일어나기에 더 이상 재미를 느낄만한 가치를 찾기도 힘들었다. 이상민 대령하면 무조건 자신이 존경하는 대상이라고 머릿 속에 세뇌가 된 것마냥 스스로에게 묶여 있었다.
“야, 김성규!”
“…….”
“김성규 훈련병!”
“왜?”
훈련병이라는 말을 붙혀주지 않으면 들은 척도 하지 않다가 훈련병이라고 하자 능청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돌려가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성규가 얄궂다. 명수는 그런 성규를 쳐다보면서 어이없다는 식으로 표정을 굳혔지만 어째 하였든 이상민 대령에게 직접 인정을 받고 사관학교에 먼저 들어와 그 비상하다는 머리로 어째 저째 훈련병이 되었으니 자신보다 선배라는 것은 확실했다. 명수는 들고 있던 책을 들어보이면서 성규에게 가서 책을 펼쳐 보였다.
“벨름 제국의 역사 내용 중에서 그… 벨름팍스 전쟁에서 왕관을 가져다 준 왕자 이름이 뭐였지?”
“장정후.”
'아, 맞다.' 기억해냈다는 듯이 명수는 다시 필기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죽어라 공부하는 걸 보면 언젠가 자신과 동등한 날이 올 것이라는 무언의 경고를 하는 듯 보였지만 성규는 아무렴 상관 없었다. 그렇게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난리 법석을 떨었던 명수가 지금은 자신의 아래에서 허덕이며 훈련병이 되고자 한다는 사실만으로 성규는 어깨가 들썩거렸다.
「아아, 오늘 사관학교에 입학생 환영회가 있겠습니다. 500대 훈련병들은 어서 C동의 7번 회의실로 와주십시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명수가 필기를 하든 말든 성규는 바로 그 건물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명수는 깨달았다. 옛날의 김성규를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김성규 또한 정말 짜증난다는 것 말이다. 입학생 환영회라면 아마 오늘 우현이가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날일텐데.
*
「형, 성규 형이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안 했어.」
「에이, 내가 아는 성규 형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명수는 떠올렸다. 그 날, 성규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서 우현이 자신에게 쪽지 전달을 부탁한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현은 정말 쉴 새 없이 계속 명수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성규가 무슨 옷을 입었었는지, 머리는 단정했는지, 뭐가 바뀐 건 없냐는지 계속 물어보기에 명수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올 정도였지만 명수는 자신이 더 미안해지는 느낌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성규 형이 나 싫대요?」
「몰라.」
「성규 형이 나 모른대요?」
「몰라.」
「왜 몰라요?」
「나도 몰라.」
정말 얘가 성규를 좋아하긴 하는구나 싶었다. 사실 전에는 그저 형 동생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친한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달랐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 그것의 형태였고 명수는 순간적으로 우현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동성애자라는 단어에서 약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1차적으로 놀라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대다수이겠지만 명수에게는 아무렇지 않았다. 군부대에서 일어나는 남색과 그 성희롱의 이야기에 대해 부모님과 삼촌이 하는 얘기를 어릴 적부터 엿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얼마든지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왜 그게 하필 김성규냐는 점이었다. 물론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기 떄문에 신경쓸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럼 성규 형 표정은 어땠어요?」
「너 왜 좋아하냐, 걔.」
「표정이 슬펐어요? 좋아했어요?」
「왜 좋아하냐고.」
「아니면 대뜸 화냈어요?」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꿀밤을 먹여주고 싶은 경우였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우현이가 물어보는 질문 끝끝마다 울음이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금새 코 끝이 찡한지 콧물을 훌쩍이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자신을 쳐다보기에 명수는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우는 애들 달래주는 게 딱 질색이야. 명수는 그저 걷고 또 걷기만 했다. 우현은 쫄랑쫄랑 명수를 따라갔지만 터져나오는 울음은 자신도 멈추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성규 형이 나 용서 안 했나봐요…」
「걔는 용서 안 해. 나 같아도 용서 안 했겠다.」
우현이는 계속 땀처럼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다 닦아내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까지 다닿았다. 손에 이미 물기가 온통 차서 더 이상 눈물을 닦아봐야 담아낼 수가 없었다. 나 같아도 용서 안 했겠다는 명수의 말에 우현은 고개를 살짝 들어올려 눈가에 온통 눈물로 젖어서 번들거리는 얼굴로 명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형 혹시 그 편지 읽으셨어요?」
「읽었지.」
「왜요? 그거는… 내가 성규 형한테 주라고 한 거잖아요.」
「내가 대신 전해주는 대가 비슷한 거?」
우현은 갑자기 흐르던 눈물들이 쏙 들어간 것마냥 벙 쪄서는 앞으로 걸어가는 명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언젠가 뛰어서 쫓아가겠지. 우현은 명수가 저기 멀리까지 가는 동안 그대로 자리에 서서 쳐다보았다. 우현은 약간 후회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 일을 명수 형에게 부탁을 했을까. 아, 정말 성규 형이랑 왜 둘이 매일같이 시비가 붙고 싸웠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 듯 싶었다. 눈물을 닦는 와중에도 명수가 짜증나기 시작했다.
「김성규가 니 편지 좃나게 찢어서 버리더라.」
「거짓말 치지 마요.」
「나 쓸데없이 거짓말 치는 걸로 재미 느끼는 사람 아냐. 그만큼 잔인한 사람도 아냐.」
「이미 충분히 잔인하니까.」
우현이 앞으로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속상함과 화남이 전부가 아닌, 그저 창피함의 몫이었다. 명수는 그 자리에 가만히 남아서 우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김성규를 왜 좋아하지? 사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 김명수는 이해하지 못한다.
*
“503학번 남우현! 사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503학번에 입학한 학생들이 줄지어 선 채로 자신의 이름을 외치면서 사관학교 훈련장 앞에서 줄지어 서 있었다. 훈련병이 된 성규는 신입생들 앞에 줄지어 선 채로 뒷짐을 지고 서서는 우현과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다. 그 날 이후로 처음 보네. 물론 그 날 뒷모습만 보긴 했어도 정말 오랜만이다. 생긴 건 정말 똑같아. 짧은 머리도 꽤 잘 어울리는구나. 성규는 우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웃으며 쳐다보았다. 하지만 바로 고개를 무심하게 돌려대는 우현의 행동에 성규는 아쉬움에 고개를 살짝 떨구다 자신도 시선을 돌려내었다.
신입생 환영회라는 말을 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 훈련병들이 신입생들을 환영해준다고 말하기에는 조금은 부끄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저 박수를 쳐주면서 입학에 인정을 해주는 것 뿐. 그에 성규 또한 박수를 쳐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은 열 일곱살의 아이들이기에 학생들 키에서도 들쑥날쑥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그에 우현이는 또래들에 비해서 좀 큰 편에 속했다. 아직 자신보다 작다는 것에 성규는 끄덕였지만 언젠가 우현이가 자신보다 더 클 것이라는 잡다한 생각에 더운 것도 무시한 채로 싱글벙글 혼자 좋은 맘을 숨기지 못했다.
“축하한다.”
사관학교와 훈련에 베인 행동과 말투는 우현을 대하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잇따르게끔 만들었다. 성규는 어색함에 우현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며 웃어보였지만 우현은 자신을 민망하게 만들만큼 무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예전의 계속 웃고 있던 얼굴은 사라진 지 오래라는 마냥 제 앞에서 입꼬리 하나 움직이질 않았다.
“오랜만이네요.”
“응, 그, 그렇지.”
“제가 명수 형 통해서 준 편지요. 가지고 있어요?”
성규는 당황함에 눈알을 도로록 굴려대면서 심각히 고민하는 척 하며 변명거리를 구상해 놓으려 버리를 굴렸다. 우현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기가 찬다는 듯이 웃어재끼면서 말라가는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놓으면서 혀로 축였다. 우현은 가만히 성규를 쳐다보면서 눈빛으로 전한 듯 싶었다. 예전에 형 그렇게 좋아하던 남우현은 없다고 그렇게 전해주고 우현은 바로 뒤를 돌아서 성규를 등지고 앞으로 걸어갔다. 아마 우현은 계속 앞으로 성규를 무시하며 살았을 것이다. 성규가 만약 우현을 잡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있어.”
“…….”
“내가 찢었어.”
“……. 거짓말.”
우현은 그 때의 명수 말이 사실이 아니기만을 빌고 빌었다. 그렇게 성규의 말을 듣고 난 우현은 걸음을 멈춰 섰고, 차라리 편지가 없다고 하는 편이 나았을거라고 생각했다. 김명수가 조금이라도 나한테 거짓말을 한 게 맞았더라면 싶었기에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을 지도 모른다. 우현이 뒤를 돌아봤을 때 예전의 성규 형의 모습이 있기를 바랬다. 까칠하게 대할 지는 몰라도 순수한 모습이 담겨있을 그 미소와 함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지금은 짧은 머리에 몰라보게 커진 체격에 군복을 갖춰 입은 모습이 우현은 더 미워 보였다. 내가 왜 여기까지 오려고 애를 썼는데.
“찢었어.”
“…….”
“상처 받은 척 하지마. 너가 알고 있었다는 거 다 알아. 김명수는 그만큼 잔인하고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니까.”
“명수 형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성규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언제나 우현이는 자신의 편이었는데, 내가 뭘 해도 우현이는 날 좋아해주고 우현이는 내 편이었는데. 어느 순간에 김명수의 편이 된 거지? 열 여덟 살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규는 아직 편을 가른 상태로 김명수를 대적하듯이 바라보고 있었고 그런 김명수를 옹호하는 우현의 행동을 믿고 싶지 않은 상태에 이르렀다. 김명수가 잔인하고 인간 같지 않은 놈이 아니라고? 글쎄, 니가 못 겪어봤나본데. 성규는 코로 작게 한숨을 내뱉고서는 씨익 웃었다.
“니가 김명수를 잘 모르나본데…”
“잘 알아요.”
“…….”
“그 편지 누가 전해줬게요? 그 편지 전해주고 형이 찢었는지 안 찢었는지 어떻게 알았게요? 그거 누가 말해줬게요? 그 행동이 그렇게 잔인한 짓일까? 형이 내 마음 계속 몰라준 것보다 더 잔인할까? 아니, 알면서 혼자 부정했겠지. 나 같은 게이 새끼가 좃나 꼴보기 싫었겠죠. 딱 봐도 그거네. 그 때 그 일 때문에 나 큰 소리 못 치는 입장에 있는 거 다 알아요. 그래도 형이 내 맘 몰라줬잖아. 어려서 그랬다고 말하려고요? 지금이었어도 형은 내 맘 몰라줄거잖아. 사람은 변해요. 그런데 형은 하나도 안 바뀌었어.”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서 가는 우현이를 더 이상 돌릴 방법이 없었다. 그 편지 찢은 거 하나가 그렇게 대수인가? 성규는 가만히 생각해보았지만 더 이상 알 궁리가 없었다. 우현이한테는 그게 그렇게 상처였나보다. 성규는 벙찐 채로 생각하면서 다른 훈련병들 사이에 끼어 들어가 우현이와의 대화를 잊으려 다른 입학생들을 눈에 담지 않았다.
*
「김성규가 되게 혐오하는 눈빛으로 니 편지 쳐다봤어. 내가 봤어. 니 편지 손에 오래 담고 있지도 않았어. 눈으로 훑고 버렸어. 그리고 되게 태연하게 나 쳐다보더라. 성규한테는 너가 아무 것도 아닌가봐. 너는 그렇게 성규 좋아하는데, 그치?」
「그만해요.」
「너나 그만해. 그래, 열 넷. 많지 않은 나이지. 하지만 미안하게도 우리 삼촌과 이상민 대령이 꾸려가는 이 사회는 좃나 구려서 말야. 우리 정도 나이대에는 현실을 파악해야할 의무가 있어. 김성규 마음을 돌리는 방법이 있어.」
「없어요.」
「욕망에 빠져서 판타지만을 바라보고 있는 김성규를 현실로 돌려놔야 해. 사관학교에 입학해서 복수해. 김성규 엿 먹여줘. 그러면 김성규도 어느 순간 네 진심 알아주겠지.」
「제 진심따위 없어요. 이제 안 좋아해.」
「그거야.」
뒤 돌아서 뛰어서 도망가려던 우현을 붙잡은 명수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성규 형은 어릴 적부터 바로 앞에서 눈에 띄이면서 좋아한다고 눈빛으로 전하던 내 말은 모조리 무시하고 이상민에 대한 책을 읽고, 이상민이 나오는 뉴스를 보고, 이상민 얘기를 하며, 이상민의 직책을 얻기를 바랬고, 이상민만을 위해서 살아왔어. 이제야 이상민에게 인정 받아 사관학교에 들어간거고. 그러니까 난 충분히 그에 성규 형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려도 되고, 그만큼 성규 형을 미워해도 되는거야. 성규 형을 안 좋아한다는 말에 '그거야'하고 답한 명수의 말이 궁금해져 우현을 뒤돌아 눈물 범벅인 얼굴을 내비쳤다.
「이제 안 좋아하면 그걸 쓰라고. 왜 묵혀두니? 화 안 나? 안 속상해?」
「형 진짜 잔인해요.」
「아냐, 이게 현실인거야. 너가 너무 달달한 판타지를 바래왔던 거지. 김성규도 그렇고.」
우현은 깨달았다. 더 이상 현실을 바라보기엔 우리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명수는 잔인한 사람이지만 그만큼 현실적이라는 것을. 우현은 더 빨리 집으로 가는 길이 있음에도 매일 돌아서 성규를 데려다 주고 가는 길을 택했다. 성규 형 없이 성규 형네 집으로 가는 길은 정말이지 구불구불하고 자신의 집으로 가는 길에 비해 순탄치 않았다. 우현은 아직 부러져 있는 손잡이를 보면서 문을 쾅 차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우현은 문을 열어둔 채로 무시하고 길을 다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