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 없이 아침이 밝았다.
사람의 무덤과 같은 한기와 고요가 지붕을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었다.
허공에는 구슬피 우는 까막새만이 힘겨이 날개를 푸득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대문에 곱게 걸린 흰 천들이 쌀쌀한 바람에 요동친다.
원식은, 그렇게 떠났다. 혼자서.
원식의 죽음을 기리는 마을 주민들의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집집마다 하얀 천을 대문에 내 걸었고, 저마다 그의 대문 앞에서 기도를 했다.
그의 죽음은, 조용했던 화운마을에 잔잔한 일렁임을 가져다 주었다.
상혁은 하얀 상복에 까만 머리띠를 둘러매고 초췌한 얼굴로 멍하니 마당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믿기지 않았다. 원식의 죽음이.
증조부 때 부터 대대로 호위무사를 맡아 왔던 가문의 주인이 사망했다. 자신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던 또 다른 아버지 같은 존재가. 이렇게..
나는, 한심하게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도, 존경 해 마지 않는 사람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상혁의 곱게 휘어진 콧대가 서글프게 찡그려졌다. 감당 할 수 없을 만큼의 슬픔이 몰아 닥쳤다.
상혁의 부친과 모친이 원식의 사망 소식을 듣고 상경 했다.
대문에 발을 디디는 그 순간 부터, 그들은 이미 말을 잃은 상태였다.
대감님이 어찌.. 어쩌다.. 도대체..
말을 잇지 못하는 그 입술들은 이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
"나비야.. 나비야."
택운의 고운 등선이 움직였다. 나풀거리는 치맛단이 택운의 발목 언저리에서 펄럭이었다.
마치, 나비의 날갯짓을 보는 듯한 기이하고 묘한 움직임이었다.
텅 비어버린 택운의 동공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상처 입은 마음은, 쉽사리 치유 되지 않았고, 그 고통에 증오심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택운이 사뿐거리며 무겁게 가라앉은 마당으로 뛰어 나갔다.
잔잔한 물결에 바위가 풍덩, 하고 빠지는 듯한 모양새가 어쩐지 위태했다.
"혁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상혁은 가녀린 목소리에 고개를 스르륵-. 하고 들었다.
새하얀 치맛단이 나풀거린다. 꽃이 만개한 풍성한 폭이 고운 허리선에서 똑, 하고 떨어진다.
..
"택운.."
상혁은 택운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택운은 치마를 걸치고 있었다. 여인들이 즐겨 입는 하이얀 천을 덧댄. 아름다운 옷을..
"어때?"
그리고 그 하얀 치마보다 더 흰 색을 띤 택운의 얼굴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상혁은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택운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당장이라도 달려가 품에 포옥, 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아니된다.
"왜.. 치마를."
"마땅한 상복이 없어서.. 전에 샀던 이것을 입었어."
"...예쁘다."
"..그래?"
상혁은 슬피 젖은 모습이었다.
어쩌면 원식의 자식인 택운보다 더욱 슬픈 듯 해 보였다. 지극히 모순적이었다.
택운은 또 다시 사뿐사뿐 걸어 마루 끝에 걸터 앉았다.
발이 움직이는 모습 하나 하나 까지 놓칠 수가 없었다.
택운아, 너는.. 참으로 예쁘다.
얇게 콧노래를 부르던 택운은 이내 붉은 입술을 열어 노래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이것 밖에 없네."
누군가가 나에게 알려 준 노래인데..
왜 나를 버렸을까. 응?
왜 모두 나에게서 떠나 가는 걸까?
내가 뭘 잘못했길래.
택운은 푸스스- 웃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웃으며 눈물을 흘리는 택운의 모습에 상혁은 가슴이 쿵. 내려 앉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사라 질 듯한 택운의 모습이 못 견디게 싫었다.
단숨에 택운에게 걸어 가 품에 안았다.
그윽하게 퍼지는 택운의 향에 아찔하게 취할 것만 같았다. 그저 안고 있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 좋았다.
"아.. 아, 아."
택운이 발작 하며 상혁에게서 떨어졌다.
고운 손으로 머리와 귀를 감싸고, 달달 떨었다.
사내들에게 윤간을 당한 이후로 택운은 급작스럽게 발작을 해 대곤 했다.
그런 택운의 모습에 상혁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만다.
"추워, 추. 추워. 추워."
달달 떨리는 잇새로 터지는 미성이 상혁의 심장을 짓눌렀다.
"한상혁."
등 뒤에서 들려 오는 단하의 목소리에 상혁은 택운에게서 물러나 천천히 뒤로 돌았다.
단하는 무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상혁의 얼굴에 움찔했지만, 이내 얼굴을 고쳐 잡고 상혁에게 다가갔다.
"나랑, 혼례를 올려."
"..."
"한상혁, 아니. 상혁 오라버니."
"..."
"내가 얼마나 연모 하는 지 알잖아. 내가 무엇 때문에 내 팔 한쪽을 버려 가면서 당신을 지킨 건데!"
단하는 빽- 울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팔을 걷어부쳤다.
팔에 길게 자리 잡고 있는 흉터가 넘실넘실 기어 와 상혁을 마구 찔러 댔다.
언젠가 자신이 수련 중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을 때, 그를 훔쳐 보고 있던 단하가 대신 칼에 맞아 생긴 흉이었다.
상혁의 목숨과 맞 바꾼 단하의 팔 한짝은 불구가 되어 버렸다.
"오라버니를 처음 보았을 때 부터, 쭈욱.. 사모 해 왔다고."
"..."
"그런데.. 어째서. 저딴 년 한테 가려는 거야..?"
"..."
"...후회 하게 해 줄거야."
뭘..?
"저 년을 죽여 버릴 거야. 그리고 한상혁 너의 부모도 죽여 버릴거라고! 오라버니가 나한테 올 수 밖에 없도록.."
반드시.
상혁은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을 감았는데도 푸르른 하늘이 보이는 듯 했다.
자신을 낳아 언제나 미소 지어 주던 양친.
유년기 때 부터 수련을 해 오던 폭포.
자신에게 말을 건네던 원식.
자신을 바라 보던 단하.
그리고.. 나의 정택운.
"추. 추워. 응? 추워. 따뜻하게.."
추워?
"모조리, 다.."
모조리.
"불태워."
불태워버릴까.
택운아. 너를 사랑 할 수 없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