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식스 - 있잖아
- "어디야?"
"나 지금 술집 나와서 걷고 있지~"
- "엄청 마셨고만. 그대로 있어. 괜히 엇갈리지 않게. 나 지금 정문에서 가는 중이거든?"
늘상 전화로 듣던 목소리가 오늘은 왠지 더 어리광부리고 싶게 느껴졌다.
[SF9 김인성 빙의글]
12학번 언론정보학과 김인성
03
의미없는 말들을 주고받다 보니 김인성이 금방 눈 앞에 나타났다.
정말 도서관에서 바로 뛰쳐나왔는지 안경도 그대로였다.
나를 보더니 한숨부터 쉬었다.
"어디 학교라고? A대? 근처 학교라서 좋게 봤더니만 못 쓰겄네. 무슨 애를 바보를 만들어 놓냐."
"야아!"
김인성의 말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칭얼거리는 나를 나란히 둔 채 김인성을 천천히 보폭을 맞춰주었다.
둘 사이에 오고가는 말은 없었지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머리까지 맥박뛰는 게 느껴질 만큼 정신이 없었다.
겨울 밤 공기가 내 뺨에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것을 보아, 지금 내 얼굴이 엄청 뜨겁게 달아올랐겠구나 체감했다.
다행이다. 술 안 마셨으면 무조건 티 났겠지.
밤 중의 대학가는 조용했고, 자췻방으로 향하는 골목길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김인성과 나는 서로 앞만 본 채 묵묵히 내 자췻방을 향해 걸었다.
안경을 걸친 김인성의 귀 끝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손을 뻗어서 옆에서 걷고 있는 김인성의 팔에 팔짱을 끼고 싶었다.
김인성의 어색하게 있는 소매만 쳐다보다가 결국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 했다.
김인성이 내 팔꿈치를 잡았다.
"어이구, 조심조심."
그러고는 내 팔꿈치를 조심스럽게 잡고서 그대로 다시 걸었다.
그때부터는 온 신경이 김인성이 잡은 내 팔꿈치에만 쏠렸다.
두툼한 돕바를 입고 있던 터라 손을 대었는 지 티도 잘 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아, 미친. 나 진짜 김인성 좋아하나 봐.
그 겨울 밤, 가로등이 드문드문 비추는 휘경동의 골목길이, 내게 너무 특별해지는 순간이었다.
* * *
전공 시험까지 마치고 나니 완벽한 종강이었다.
다른 수업이 끝나고 같이 점심 먹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김인성이 저 멀리 보였다.
그 날, 미팅이 끝난 날 밤 이후로 우리 사이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겉으로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고, 오직 내 마음만 정확히 판가름나게 되었다.
슬픈 짝사랑의 시작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냥 지금처럼 짱친 선후배 사이라도 좋았기에 더 이상 욕심 낼 생각은 진작에 버린 상태였다.
김인성에게 가는데 뒤에서 동기들이 나를 불렀다.
"어제 해장은 잘 했어? 시험은 잘 봤구?"
"그게 아니라, 너한테 너 파트너, 그 강…찬희? 걔가 연락 안 했어?"
의외의 이름에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한 김인성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너 그 날 나가면서 걔 핸드폰 떨어뜨려서 액정 나갔어."
"어?"
"연락처 주냐고 물어보니까 어차피 단톡 있으니까 따로 너한테 카톡하겠다고 했는데, 혹시 걔가 얘기꺼내서 뭐해서 말 못 하고 있을까봐."
동기들이 신경 쓰일만큼 액정이 꽤 많이 나갔었나보다.
어느 새 다가온 김인성이 무슨 일이냐고 나와 내 동기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동기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환하게 웃더니 나한테는 따로 연락해보라는 말도 잊지 않은 채 사라졌다.
액정이 나갔는 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뭔가 마지막에 와장창 했던 것은 분명 기억이 났다.
"왜? 아까 애들이 뭔 얘기 한거야?"
점심 먹는 내내 인상 팍 쓰고 먹는 둥 마는 둥 뒤적이고 있던 내 태도에 결국 김인성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미팅에서 내가 어떤 남자애한테 좀 크게 실수 했나봐. 먼저 연락해봐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실수를 해? 뭔데?"
괜히 덩달아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무것도 아니라며 말을 피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계절학기 시작이냐며 묻는 내 말에 김인성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온통 강찬희 핸드폰으로 가득한 나에게 그 표정이 읽히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