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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박지민] 불나비 11 | 인스티즈




김윤아 - 고독한 항해

반복재생 부탁드립니다.







불나비

11








 쏟아지는 비에 절망도 함께 씻겨나갔으면 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두 가져가 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절망은 절망으로 배를 불린다. 절망은 또 다른 절망을 반드시 동반한다는 사실을 자꾸만 망각하고 마는 것은 어째서일까. 절망 앞에서 무릎 꿇는 한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겠다. 절망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덮치고 말 테니까. 고작 하나뿐인 저의 육신, 그래도 가장 거대한 절망을 떠안아야지. 그 절망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거대한 절망에 남는 것 하나 없이 모두 뜯겨 나간대도. 그것이 가장 거대한 절망이라면 반드시 제가 떠안고야 말겠다.


 지민은 제이의 말대로 두양애로 돌아왔다. 깊게 눌러쓴 검은 모자 아래로 그늘이 드리웠다. 자연스럽게 긴 복도를 걸었다. 아무도 지민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제이인 줄 알아 그랬다. 지민은 자꾸만 입이 탔다. 갈증을 느꼈다. 제이가 무엇을 남겼기에, 제가 확인해야 할 것이 무엇이기에. 지민이 내딛는 걸음걸음이 무거웠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연화만 무사할 수 있으면 됐다. 지민은 소리 없는 기도를 계속했다. 걸으면서도 되뇌었다. 연화가 무사하게 해달라고. 닥쳐오는 것이 무엇이든 두 번은 연화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타오르던 화염 속 허공에서 시선이 나부끼던 연화. 제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연화. 제가 두고 온 연화, 절망 속에 제가 버려둔. 결코 두 번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제이의 방에 들어선 지민이 자연스럽게 책상 마지막 서랍에 달린 다이얼을 돌렸다. 문이 열렸다. 들어있는 것은 제이의 글자가 적힌 종이와 곱게 넣어진 서류 봉투뿐이었다. 지민이 서랍 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들을 책상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지민, 여기서 널 의심하고 있어. 이미 결정했을 테지. 연화를 데리고 도망쳐. 곧 너도 도청하기 시작할 거야. 뒷감당은 생각하지 마. 그건 내가 해.’


 제이가 남긴 쪽지였다. 지민이 왼손으로 쓰고 있던 모자를 벗더니 반대손으로 제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었다. 책상 위로 잔뜩 엎어진 서류들을 뒤집었다. 자꾸만 손이 어긋나는 것만 같았다. 종이 따위가 우르르 무너지는 형상이었다. 그게 꼭 저의 모습 같았다. 그 안에는 리안화 내에서의 저의 모습이 찍힌 사진부터 저의 수발신 기록, 심지어는 통화 내용까지 들어있었다. 그들이 저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지민은 사실 이미 알고는 있었다. 제이가 개입하는 것은 예상에 없었다. 모두 제 선에서 끝내고 싶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제이가 지민의 이름으로 자선 행사에 참여한 것도 지민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제이는 일전부터 이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연화를 데리고 도망치라는 걸 보면 제 뜻에 동의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제이가, 왜? 지민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제이는 제 나름대로 계획을 짜고 있는 중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게 이를 보여주려고 했을 테지. 지민과 제이가 만나고 바뀔 수 있는 곳, 두양애뿐이었다. 이미 통화 내용까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전화는 도청 중이다. 이것이 제이가 지민에게 이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민은 제이의 말대로 할 생각은 없었다. 연화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 그래. 다 좋았다. 그런데 남은 제이는? 지민은 제이를 두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연화를 리안화로부터 빼돌리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민은 자꾸만 헝클어진 제 머리카락을 쓸었다. 손끝에 까슬한 감촉이 남았다. 대체 지금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의심을 받고있는 지민만 사라진다면 제이는 안전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연화는 안전하지 못하다. 제가 연화와 함께 사라진다면 남은 제이의 안전 역시 보장할 수는 없다. 제이는 어떻게든 두양애에 필요한 인력이었으므로 그들이 그냥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제이는 이미 안다. 그래서 뒷감당을 제가 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 편이 가장 깔끔하게 떨어지니까. 제이는 애초에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선택은 숙명이다. 대체 어떤 선택지가 제 앞에 닥친 걸까.


 “제이. 자리를 비우면 어떡하겠다는 거지?”

 “죄송합니다.”

 “됐어, 지금 차량 경로를 바꿨어. 하필이면 중요한 날에 자리를 비워서 말이야. 개새끼,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이런 날을 모르고 그냥 넘길 뻔했잖아. 그 애가 없었으면 시도도 못 했겠지, 다행이야.”


 지민의 맞은편에서 오던 남자가 지민의 앞에서 멈춰 섰다. 지민은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그의 얼굴에 남은 흉터가 눈에 띄었다. 왼쪽 눈을 세로로 가로질러 길게 나 있는 흉터였다. 언젠가 지민이 남긴 흉터였다. 못으로 길게 그어진 자국이었다. 지민이 숨이 넘어가도록 맞고 있는 제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어느 어린 날, 영광스럽게 새긴 흉터였다. 지민이 입안의 여린 살을 씹었다. 피가 터져 나와 비릿한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못으로 할퀴는 게 아니라 저 눈을 찔렀어야 했는데. 지민은 그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문득 지민은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한기를 느꼈다. 차량 경로, 무슨 차를 말하는 거지? 지민은 가만 입을 다물었다.


 “이번 한 번 잘 넘기면, 절반은 성공한 거다. 제이. 너도 이젠 알겠지. 우리는 이제 너로도 족하다고. 자리 잘 지키고 있어.”


 지민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뒤를 돌아서 복도를 걸어갔다. 지민이 두통을 느꼈다. 눈앞이 핑 돌았다. 중심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제이로도 족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지민, 저의 존재를 지우겠다는 이야기이다. 지민은 이제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토기가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차량의 경로를 바꿨다고 했다. 연화가 타고 있을, 그리고 지민 행세를 하고 있는 제이가 타고 있을 차임이 분명했다. 지민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민이 그대로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주차된 차 문을 급하게 열고는 시동을 걸었다. 제발, 제발. 지민은 종교 따위는 없었지만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대상을 찾으며 간곡히 빌었다. 아무 일도 없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시동이 걸리자 켜진 네비게이션에 지민의 핸드폰 위치가 추적되었다. 이미 이동 중이었다. 지민은 세게 엑셀을 밟았다. 숨이 명치께에서 걸려 목을 옥죄고 있었다. 눈앞이 자꾸만 어지럽게 돌았다. 차창 위로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앞창을 쓸어내리길 반복했다. 빗방울에 불빛마저 번져 보였다. 차체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지민이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이를 악물고 엑셀을 밟았다. 턱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옥경, 예양은요?”

 “예양 먼저 보냈어. 몸이 안 좋다고 하더니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지더라구. 별로 춥지도 않은데 몸까지 떨기 시작하던데. 내가 갔어야 했는데, 나까지 갑자기 자리를 뜰 수가 없어서 말이야….”


 대답하는 옥경의 목소리가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말을 들은 연화가 고개를 기울였다. 옥경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얼굴 비추며 돌아다니다가 중간에 갑자기 자리를 뜰 수는 없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예양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말간 웃음을 짓고 있던 예양을. 예양이 제가 아픈 걸 티 내는 성격이었나? 연화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행사는 이미 끝났다. 아니, 행사에서의 역할은 끝났다.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누구보다도 이 행사를 기다리던 예양,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는 그 목소리가 머릿속을 배회했다.


 “예양 많이 아파보였어요?”

 “어어, 그냥 아파보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식은땀도 막 흘리는 것 같고, 계속 바닥만 보고. 걱정돼 죽겠어, 연화. 혹시 예양 들어가면….”

 “바로 괜찮은지 봐달라고 연락해둘게요. 너무 걱정 말아요, 옥경.”

 “고맙다, 정말 고마워. 연화.”


 연화는 그런 대답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행동은 그렇게 하면서도 발갛게 상기되어 있던 예양의 얼굴을 떠올렸다. 예양이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무리 같은 음절을 곱씹어도 이상했다. 제 곤두선 감각이 자꾸만 다른 쪽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예양이 정말로 아픈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내린 답은 하나였다. 예양은 아프지 않다. 그저 두려운 일을 맞닥뜨렸을 뿐이다. 연화는 그런 제 생각이 정리되자 고개를 들어 제 왼쪽에 서 있는 제이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너는 알지.”

 “몰라요.”


 제이가 대답했다. 목적어를 빠뜨린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제이는 연화가 뜻하는 바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연화가 제이의 얼굴을 눈으로 훑었다. 지민과 같은 얼굴, 그러나 표정만큼은 달랐다. 연화는 그 안에서 거짓을 읽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으나, 여전히 가만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연화는 제이의 표정을 모두 읽을 수는 없었다. 지금만큼은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믿는 수밖에는 없었다. 제이는 정말로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러면서도 연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연화는 제이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태여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럼 추측이라도 해봐. 그쪽이랑 관련된 일 같으니까.”

 “추측…. 예양, 그 사람이 이쪽이랑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야? 크라톰. 예양에 대해서 정보 알려준 사람, 지민 아니고 너였다는 거 알아. 알아주길 바랐던 거 아니야?”


 연화가 제이에게 따지듯 물었다. 분명 그날 저에게 예양이 크라톰 티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은 제이였다. 제이, 그가 함부로 정보를 흘렸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민조차도 예양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도 없었다. 아무에게나 마음을 내어주지 말라고, 저마저도. 그렇게 말했던 지민이었다. 예양에 대해 갈피를 잡게 한 것은 결국 제이였다. 예양의 뒷조사를 하다보면 지민, 어쩌면 제이의 존재까지도 알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예양에 대해 조사하도록 만든 것은 제이만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연화는 굳게 믿었다. 제이와는 고작 몇 번 마주친 게 다였지만 연화는 그렇게 판단했다. 모든 계획을 세우고 가능성을 따지도록 훈련받았을 것이다.


 “저도 마약 쪽은 몰라요. 예양이 불려갔으면 이유는 그것 하나뿐이에요.”

 “마약?”

 “예양이 큰 역할을 맡는 게 아니라서요. 그냥 리안화 이름으로 몇 번 거래했던 곳, 거기서 다시 이쪽으로 연결시켜요. 정말 말 그대로, 마약 거래 중개 역할. 그 정도.”

 “크라톰은?”

 “마찬가지죠. 예양은 리안화에 있는 게 더 나을 거예요, 아마도.”


 그렇게 말하고 제이는 고개를 돌렸다. 이로써 예양은 두양애임이 확실해졌다. 제이는 제 손을 들어 정돈된 머리를 쓸었다. 연화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손등에 새겨진 나비 타투마저 익숙했다. 짧게 한숨을 돌리며 연화도 고개를 돌렸다. 잔뜩 멍 들어있던 예양의 얼굴을 떠올렸다. 저번 거래를 앞두고서였다. 그때도 그럼 두양애였을까? 리안화 소속임을 뻔히 알면서 대놓고 보이는 곳에 상처를 남겼다는 것은 예양의 안위를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예양의 입지를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예양이 두양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지민과도 같을지 모른다. 리안화보다 먼저, 그곳에서 목줄이 채워져서.


 연화가 제이를 향해 손짓했다. 예양이 호텔로 돌아오면 연락 달라고 해. 치료도. 그 말을 들은 제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민이 하던 일을 제가 대신하는데도 전혀 어리숙한 모습이 없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못 알아차리지 싶었다. 지민과 제이, 연화는 그 음절을 한참이나 혀로 굴렸다. 연화의 입속에서 그 두 이름이 한 데 굴렀다. 연화는 그 이름들을 꼭꼭 씹었다. 체하지 않게 소화해내려는 것처럼. 연화와 제이는 건물에서 나와 차로 향했다. 지민의 차가 정차해 있었다. 제이가 문을 열기도 전에 경호원이 앞서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연화가 차에 올라타고, 제이가 따라 올라탔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어두웠다. 아직 저녁이었으므로 해는 지지 않았으나 먹구름이 낀 탓이었다. 우중충하게 공기가 내려앉았다. 차에 앉아서 연화와 제이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꺼낼 수 없었다. 기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가던 중, 창문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툭, 툭. 누군가가 손끝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인 것 같기도 했다. 연화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눈을 감자 검은 어둠이 짙게 드리웠다. 연화가 눈을 감자 제이의 시선은 연화에게 향해 있었다. 무릎 위에 올린 저 두 손을 다시 한번 잡고 싶었다. 그러나 제이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그저 눈을 감은 연화의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는 그런 처지였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리워했던 대상, 연화. 내밀어진 작은 호의가 꼭 그녀의 다정함 같았다. 입속에서 녹아내리는 달콤하고도 찐득했던 그것이, 제 감정으로 전이되어 온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저는 이제 다시 그 다정함을 맛볼 수 없을 테니까.


 이제는 비가 억세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연화가 그 소음에 눈을 떴다. 어두워져 가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좋지 않은 예감에 제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동자에 제가 비쳤다. 제이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제이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제이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일렁거렸다. 제이는 알았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룸미러로 보이는 기사의 얼굴이 아까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제이가 속에서 올라오는 욕을 곱씹었다. 하필이면 제가 있는 날이다. 제가 지민을 두양애로 부르면 안 됐다. 그들은 저와 지민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저는, 연화를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특화된 것은 오직 두뇌 능력이지, 신체 능력이 아니다. 제이는 처음으로 그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CCTV나 구조물을 보며 작전을 짜는 것과는 달랐다. 저는 그렇게 신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미리 훈련해두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고작 제 몸을 지킬 수준에 그치고 만다. 제이가 연화를 눈동자에 담았다. 제가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연화를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그 절망이 신체를 잠식해가고 있었다.


 연화 역시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있었다. 제이의 눈이 지민이 저를 볼 때 하는 눈과 비슷했다. 두려움에 잠식당한 눈. 제이의 시선이 조용히 운전석에 앉아 있는 기사를 향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였다.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은 연화가 타고 있는 차가 전부였다. 연화는 조심스럽게 팔꿈치까지 오는 긴 장갑 끝을 당겨 벗겨 내었다. 그와 동시에 손목 위부터 이어진 화상 자국이 드러났다. 제이의 시선이 잠깐 그곳에 닿았다. 어둠 너머로 헤드라이트를 킨 채 저희를 향해 질주하는 승합차가 보였다. 눈이 부셨다. 제이가 품 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연화가 장갑의 양쪽 끝을 한 번씩 꼬아서 잡고 그대로 운전석에 앉은 기사의 목을 뒤에서 장갑으로 당겨 압박했다.


 핸들이 멋대로 돌아갔다. 기사가 목이 졸리면서 뱉는 숨이 허공에 흩어졌다. 기괴한 소리가 났다. 제이는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연화는 힘을 주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제 체중을 실은 채였다. 갑작스러운 브레이크와 동시에 차가 도로 위에서 반 바퀴 미끄러지며 멈추어 섰다. 기사가 숨을 쉬지 않는 것을 확인한 연화가 장갑을 버리듯 내팽겨쳤다. 안전벨트를 푼 연화와 제이는 시선을 주고 받았다.


 “그쪽이지? 너, 할 수 있겠어?”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연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이가 총을 고쳐 잡았다. 제이의 호흡이 불안정했다. 연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총을 다시 쏠 수만 있었다면, 그랬다면 상황은 조금 더 나았을까? 제이는 상황 판단에는 능할 것이다. 그게 현장에서 굴렀던 지민에 미치지는 못할 것이지만, 그래도 해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무리 한적한 도로라도 함부로 총격전을 벌이지는 못할 것이다. 금방 위치가 노출될 것이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쉽게 총을 꺼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버텨볼 수도 있다. 어쩌면 연화와 제이 모두 멀쩡할 수도 있다. 제발, 상황이 저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무기는, 훤히 트인 이 공간에서 무기는 주로 뭘 쓰지?”

 “시끄럽지 않게 해결하려면 아무래도…, 칼이죠.”


 제이의 목소리에 연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소음기를 달아도 한계가 있으니까. 기다려. 연화가 말했다. 제이가 고개를 한 번 끄덕거렸다. 멈춰선 승합차가 동태를 살피려는 듯 가만히 있었다. 그러곤 차의 문이 열렸다. 무장한 인물들이 여럿 내렸다. 그들은 아직 기사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그들이 점차 차를 향해 가까워졌다. 세차게 내리는 비 탓에, 이대로 차에서 내리면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또한 짙게 선팅된 창문 탓에 그들에게는 연화와 제이가 보일 리 만무했다. 기사를 살피려는 듯 운전석의 창문으로 한 인물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쏴.”


 그와 동시에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제이가 총을 쐈다. 창문과 가깝던 얼굴에서 피가 터지며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와 동시에 깨진 창문 사이로 보이는 인영을 향해 제이가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차게 내리는 비로 인해 시야가 흐려 치명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연화가 사격 중인 제이의 손 위로 제 손을 얹었다. 제이가 팔을 내렸다. 연화가 제이 옆의 문을 열라는 듯 고갯짓했다. 제이의 손이 잠깐 망설였으나 그대로 연화의 말을 따라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내려 차의 뒤편으로 저들의 몸을 숨겼다.


 “탄 아껴. 칼 쓸 수 있지?”


 빗소리에 연화의 말이 군데군데 먹혀 들어갔다. 제이가 품속에 다시 권총을 집어넣곤 차 문에 보관되어 있던 칼을 꺼내 들었다. 내리는 비에 온몸이 금방 젖어 들어갔다. 연화가 그 옆에 있던 작은 칼을 하나 더 챙겼다. 그러는 사이 저들에게 다가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연화가 고개를 들고 챙겨 들었던 작은 칼 하나를 빠르게 던졌다. 칼이 그대로 목에 꽂히고 피가 터져 나왔다. 연화는 몸을 일으켜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그 인영을 발로 차 밀어내곤 차 보닛을 미끄러지듯 올라타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연화의 얼굴에 튄 피는 빗물에 빠르게 씻겨 내려갔다.


 차에서 내리기 전 한 명, 그리고 방금 한 명. 남은 건 네 명이다. 연화는 안도의 숨을 뱉었다. 네 명이면 불가능은 아니었다. 제이만 잘 버텨준다면. 연화는 제이에게 시선을 돌릴 새도 없었다. 제 앞으로 다가온 인영에 팔목을 잡혔으나 빠르게 상대의 무기를 든 손부터 발로 찼다. 방금 한 발차기로 칼이 날아갔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떨어지는 비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방심한 사이 칼이 제 앞으로 날아들었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팔목이 잡혀있었던 탓에 칼이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그대로 피가 흘러나와 옷을 적셨다. 상대가 무기를 들고 있는 손목을 칼로 내리찍었다. 그와 동시에 보닛으로 다시 물러나면서 상대의 목을 찔렀다. 칼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고 보닛에 앉은 채로 상대의 배를 발로 찼다. 제 손에는 칼만 남고 상대의 몸뚱아리가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제이를 향해 시선을 돌리니 남은 세 명이 그를 향해 있었다. 아무래도 제이를 지민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제이는, 칼로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다. 지민에게서 겨우 권총이나 칼 따위를 쥐는 법을 배웠지, 실전에서는 써먹어 본 적이 없다. 그럴 일조차도 없었다. 제이는 당장 코앞으로 닥쳐오는 죽음을 목도하는 것을 처음 경험했다. 동선을 짜고 무전기로 경로를 알리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장 제 앞에 절망과 함께 두려움이 닥쳐왔다. 제이는 솔직한 심정으로 두려웠다. 제가 사람을 죽이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연화를 도울 수 없는 무력감이 두려웠다. 연화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들이 저에게 발걸음하는 것을 보았다. 제가 지민인 줄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해서라도 제가 연화의 시간을 끌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이가 앞선 이의 허벅다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그와 동시에 옆쪽에서는 칼이 날아들었다. 급하게 허리를 숙여 얼굴로 날아드는 칼을 피했다.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마다 죽음이 자꾸만 제 목을 옥죄었다. 방금 피하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이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도 없었다. 그 여유에 정신을 빼앗기면 영영 피가 씻겨 내려가는 이 빗속에 남겨질 것이 분명했다. 다시 저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어깨에 칼을 꽂았다. 그러나 동시에 제이의 배에 칼이 꽂혔다. 제이가 고통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깊게 꽂히지는 않은 모양이었으나, 칼이 다시 빠진 사이로 피가 울컥 터져나왔다. 제이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제이의 흰 셔츠가 붉게 물들어갔다. 제이가 왼손을 들어 상처를 틀어막았다. 언젠가 지민이 알려준 적이 있던 위치에 그대로 칼을 휘둘렀다. 제이가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생전 처음 느끼는 고통 탓이었다. 연화가 달려와 다른 한 명을 상대하고 있었다. 제이는 시야가 제대로 트이지 않는 빗속에서도 연화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연화는 제가 지킬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한다. 그녀를 지키겠다는 생각은 오만한 것일지도 몰랐다. 제이는 제 몸이 미끼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연화를 위해서라면.


 벌어지는 상처를 잡고 상대하느라 자꾸만 정확도가 떨어졌다. 제이의 칼이 상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상대가 쥐고 있던 제이의 목을 놓쳤다. 그러면서 휘두른 칼이 제이의 어깨를 스쳤다. 제이의 왼쪽 어깨에서도 피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제이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가슴팍에 칼을 찔렀다. 상대가 바닥으로 중심을 잃고 무너짐과 동시에 제이 역시도 바닥을 향해 중심을 잃었다. 엉덩이가 아스팔트 바닥으로 먼저 떨어졌지만 그런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연화가 제이에게로 달려왔다. 제이가 더운 숨을 내뱉었다. 땀인지 비인지 눈물인지,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요. 깊게 찔린 게 아니라.”


 연화가 주변을 살폈다. 제 주변에 남은 것은 여섯 구의 시체뿐이었다. 빗소리에 모든 소리가 묻혔다. 감각이 둔해졌다. 제이의 흰 셔츠가 온통 붉었다. 옆구리를 베인 연화에 비하면 상처가 심각했다. 연화가 급하게 칼로 제 긴 치맛단을 죽 찢어내었다. 상처 위로 그 천을 덮고는 꾹 눌렀다. 비까지 오는 터라 지혈이 쉽지 않을 것이었다. 제이는 제 배 위에 올려진 연화의 손에서 온기를 느꼈다. 올려진 연화의 손 위로 저의 손을 올렸다. 눈을 깜빡거렸다. 제이는 제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에 가려 어차피 보이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제이는 마음껏 눈물을 흘렸다. 저는 지민과는 다르다. 숨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두려운 감정과 동시에 맞이하는 것은 연화에 대한 감정이었다. 잡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아는데, 아는데도. 제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연화가 여전히 제이의 상처를 누르고 있었다. 이런 다정함이 싫었다, 제이는. 싫어하고 싶었다.


 반대편에서 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연화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제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제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온몸을 감싸는 것은 절망감이었다. 제이는 제가 더 이상 연화에게 도움이 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상하게도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연화 역시도 자상이 있었다. 다가올 그들을 더 상대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게 분명했다. 제이는 끝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냈다. 연화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살아나갈 수 있을까? 공포는 저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도망갈래요, 연화?”

 “무슨 소리야.”

 “내가 여기서 시간을 끌어볼게요. 대신 오래는 못 끌지도 모르니까 빨리 뛰어야 돼요, 연화.”


 제이가 생각해낸 결론이었다. 제가 지민으로 남고, 연화는 모습을 감추면 된다. 나머지는 지민이 알아서 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머리 좀 쓴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나는 건 이것뿐이에요. 우습게도. 제이가 말했다. 제이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게 비가 주는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아닌지, 연화는 모른다. 제이가 손을 허공을 향해 들어 보였다. 검지로 가드레일 바깥을 가리켰다. 연화의 시선이 그쪽으로 따라갔다. 차 소리가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요. 다 내려가란 소리도 아니니까, 그냥 잠깐. 중간에서 몸이라도 숨기고 있어요.”

 “너 두고 안 가.” 

 “제 핸드폰 가져가요. 박지민 소속 때문에 지원 요청은 못하더라도, 위치추적은 되니까. 걔가 꼭 찾으러 올 거예요. 걔는 숲을 뒤져서라도 연화를 찾아낼 애니까….”


 제이의 의식이 자꾸만 가물가물했다. 비까지 맞아 더 그랬다. 열이 오르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의식을 차리기 위해 자꾸만 눈을 부릅떴다. 제이는 순간적으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래, 지민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이것보다도 더 두려웠겠지. 언제나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이마저도 사실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지민을 향한 것이었으니까. 제이가 지민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와는 다르게, 용기 있는 그 애. 어떻게 버텼을까. 어떤 절망감이 그 애를 좀먹고 있던 것일까. 제가 여기서 지민으로 죽는다면, 그 애는 괜찮을 텐데.


 “연화, 제발 가요.”

 “나는 괜찮으니까 너나 신경 써.”


 연화를 밀어내는 제이의 손이 우습게 연화는 고개를 숙인 채로 상처를 지혈하기에 바빴다. 연화의 시야에 또 다른 승합차가 걸렸다. 우선 혼자 지혈해보고 있어. 알겠지? 연화가 말했다.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연화는 다시 옆에 놓인 칼을 손에 쥐었다. 할 수 있을까? 연화의 머릿속을 단 하나의 의문이 가득 채웠다. 연화는 사실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이의 상태는 좋지 못하고, 저 역시도 지쳤다. 그리고 이제 저 승합차에서는 적어도 여섯이 내릴 것이다. 만약 저 차가 마지막으로 남은 게 아니라면,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연화는 문득 저를 바라보던 지민을 떠올렸다. 지민, 박지민. 훈련실에서 사격을 연습하던 그 첫 만남까지도. 연화가 급하게 제이의 자켓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권총의 무게만으로도 제 손이 떨렸다. 제가 지금 사격을 할 수만 있었다면, 저 혼자로도 족했다. 그러나 연화는 확신할 수 없었다. 권총을 손에 들었다는 사실 자체로도 호흡이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승합차가 정차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리게 지나갔다. 연화는 어쩌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밝은 빛이 빠르게 다가왔다. 연화가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헤드라이트가 켜진 검은색 세단이 그대로 승합차를 향해 돌진했다. 승합차와 가까워질수록 속력이 빨라졌다. 승합차가 세단과 크게 부딪혔다. 충돌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굉음에 귀가 멍멍했다. 두 차 모두 빗길에서 크게 미끄러졌다. 그러나 빠르게 중심을 다시 잡은 세단은 연화와 제이가 몸을 숨긴 차 옆에서 멈춰 섰다. 연화가 숨을 멈추었다. 운전석의 문이 열렸다. 지민이었다.


 “…박지민.”


 지민은 온통 검었다. 검은 모자부터, 검은 옷차림까지. 연화는 그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 제가 안정감을 느끼던 대상을 떠올렸다. 화려한 머리 색, 피어싱, 반지, 나비 펜던트 목걸이, 나비 타투, 익숙한 향수 냄새.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타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연화는 안정감 그 이상을 느꼈다. 연화가 숨을 내쉼과 동시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도의 눈물이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 탓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리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연화가 한쪽 팔을 들어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러나 연화는 지민에게 바로 갈 수는 없었다. 옆에 반쯤 누운 제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자리를 비우면 제이는 방어를 할 수 없었다. 승합차는 충돌로 인해 가드레일 밖으로 밀려나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폭발음이 들렸다. 연화가 순간적으로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비가 오고 있음에도 불길이 타올랐다. 연화의 눈동자에 불길이 새겨졌다. 연화는 이제 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전원 사망이라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자갈을 즈려밟고 오던 차의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생생했다. 급하게 온 것인지 총도 챙겨오지 않은 지민이 시야에 걸렸다. 제가 여기서 총을 쏘아야 하는데, 아는데 제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총의 반동과 동시에 느껴지던 그녀의 무게가 떠올랐다. 연화는 숨이 막혀왔다.


 남은 것은 셋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가드레일 밖으로 떨어져 불타오르고 있었다. 지민도 숨을 꾹 참았다. 그 날의 온도가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눅눅하게 퍼지는 비 냄새만 아니었다면 까무라쳤을지도 모른다. 지민은 연화에게 시선을 던지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어서 끝내고 연화에게 가야 했다. 지민이 한 인영의 목을 뒤에서 감쌌다. 그러는 순간 지민은 칼에 손등을 깊게 베였다. 타투가 있는 자리였다. 연화가 좋아했는데, 지민은 그런 생각뿐이었다. 고통쯤에는 무감해졌다. 나비 한 마리가 반으로 베어졌다.


 지민에게 칼을 맞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 하나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지민은 아직 온몸으로 다른 이를 상대하고 있었으므로 방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연화가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들었다. 사격에 손 놓은 지 너무 오래되었으나 몸에 익숙하게 자리 잡은 자세가 잊히는 것은 아니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불길이 눈앞에서 타오르고 있는 것만 같았고, 제가 있는 곳이 도로인지 폐공장인지 헷갈렸다. 연화는 그날 이후 사격을 할 수 없었다. 아니야,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제발, 제발. 해야만 한다. 연화의 손이 잘게 떨렸다.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았다. 눈물이 자꾸만 차올랐다. 빗소리가 귓가를 크게 때렸다. 제가 쏘지 않으면 지민은 다칠지도 모른다.


 숨을 참아야지, 이렇게. 지민에게 건네던 제 목소리가 환청처럼 떠올랐다. 과녁의 가운데를 조준하던 그 기억을 억지로 헤집는다. 훈련실의 공기를 떠올린다. 옆에 있던 어린 지민의 모습도 떠올린다. 폐공장 폭발 전, 개머리 부분에 나비 두 마리가 새겨진 권총을 잡던 제 모습을 떠올린다. 연화가 제 왼쪽 눈을 감았다. 비 때문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숨을 참았다. 지민을 향해 달려드는 그는 움직이는 과녁에 불과하다. 연화가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화의 팔이 반동으로 움직였다. 지민을 향해 달려들던 이의 머리에서 피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지민이 제 온몸으로 압박하고 있던 이의 목을 꺾어버렸다.


 총소리에 지민이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연화의 모습이 보였다. 화상 흉터 위로는 비가 쏟아져 내렸다. 빗소리만이 남았다. 연화가 눈물을 흘렸다. 지민은 멀리서도 연화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제이는 제 상처 위에 올린 손을 떼지 않고는 웃었다. 아, 역시 박지민이네. 제이의 혼잣말이 빗속으로 파묻혔다. 제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로써 모든 이유가 확실해졌다.


 세찬 빗줄기를 맞으며 숨 쉬고 있는 것은 셋뿐이었다. 지민은 연화에게로 곧장 달려왔다. 옆에는 제이가 차에 몸을 기댄 채 숨을 쉬고 있었다. 제이가 저는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제이의 상태를 확인한 지민이 연화의 손에 들린 총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 총을 쥐고 있는 손에 이어진 화상 흉터까지. 지민이 그 손을 잡아끌었다. 연화가 저항 없이 지민과 가까워졌다. 지민이 연화의 손을 잡았다. 그것으로 연화는 제가 아직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화는 겨우 숨을 쉬었다. 지민의 손을 잡고서.


 이 절망에는 과연 끝이 있을까. 언제쯤 절망의 결말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저는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절망에 달려들 것이라는 사실. 고통에는 무감해진 지 오래다. 지켜내야만 하는 것을 지킬 수만 있다면. 저 하나쯤은 절망의 쳇바퀴에 갇혀 달리고, 구르기를 반복해도 괜찮다. 그런 게 제 숙명이라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그이만 절망에서 구출해내기만 한다면. 매일 밤 저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환상통조차도 버텨낼 수 있다.



2021.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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