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째 더 악화된 것 같아.
이런 찬 바람 쌩쌩 부는 사태나 만드려고 구준회 부른 게 아닌데. 요즘따라 자주 보게 되는 구준회 뒷모습이 더럽게 낯설었음.
어떻게든 잘 얘기해서 윈윈 하고 끝내려 했는데 내 기분도 상하고 구준회 기분도 상하고 윈윈은 개뿔... 이미 내 눈에서 멀어져 가는 구준회를 붙잡아서 뭐라도 더 말하고 싶었는데 차마 붙잡지도 못하겠고 답답해 미치겠더라.
지금 이 기분으로 한빈이 오빠를 만나러 가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음. 오빠 앞에서 기분 괜찮은 척이나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죄송해요... 오다가 길을 완전 반대편으로 들어서..."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뭘."
원래 괜찮다는 제스처를 보고도 더 미안해질 수도 있는 거였음...?ㅋㅋㅋㅋㅋㅋ 내가 길치인 건 세상 모두가 아는 거 아니었는지? 저는 세상 최고 길치입니다. 누가 뭐래도요.
오다가 버스도 잘못 타고 거기다 길까지 잘못 들어서 약속 시간에 20분이나 늦어버렸음... 왜 명동 올 때마다 꼭 길을 잃는 건지 의문. 참 가지가지 한다, ㅇㅇㅇ. 명동을 못 가... 한 번을 못 가......
"오늘은 어디 갈까?"
"전 어디든 다 괜찮은데..."
"아, 그 전에."
"네?"
"말 편하게 하라고 했잖아 오늘부터."
맞다. 다음에 볼 땐 말 편하게 하라고 했었지.
근데 한 살 차이인데도 일단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갭이 있잖음? 그 갭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말을 쉽사리 못 놓겠더라고ㅋㅋㅋㅋㅋ
한빈이 오빠가 대략난감에 빠진 날 툭툭 치더니 "밥 먹으러 가자, 해 봐." 하면서 재촉하는 거임ㅠㅠㅠㅠ
어렵다... 매우 어렵다...... ㅇㅇ... 나오지 않는다 말이... ㅇㅇ... 말도 하나 못 놓는 바보다......
오빠한테 말도 못 놓는 답답이로 낙인 찍히기 싫다는 생각까지 들고 나니 큰 결심을 했어. 마침내 지진난 동공을 대놓고 자랑하며 숨까지 가다듬고 입을 엶ㅋㅋㅋㅋㅋㅋ
"오...빠 밥 먹으러 가......"
내 처지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한탄하다 뜸 들이면서 저기까지 말하니까 한빈이오빠가ㅋㅋㅋㅋㅋㅋ
뭐가 그리 흐뭇한 건지 잔뜩 웃음을 머금고 "응, 계속 말해 봐." 하는데 처음으로 오빠가 얄밉게 느껴졌음;
"...자......"
"아, 진짜."
"왜... 왜 웃어요!"
"이제 한 번에 말해봐."
"아, 오빠 밥 먹으러 가자고!"
"하하, 이렇게 잘 말할 수 있으면서."
어쩌면 이 오빠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순수한 인간이 아닐지도 몰라. 웃는 얼굴로 내 고통을 즐기고 있는 걸 똑똑히 보았음.
-
"그런데 무슨 일 있었어?"
"응? 아, 아니."
"안색이 안 좋아 보이길래."
"하하... 내 안색 괜찮...을 텐데..."
내 안색 괜찮을 텐데는 뭐임ㅋㅋㅋㅋㅋㅋㅋ 아직 완전히 편해지지가 않아서 그런가 한빈이 오빠 앞에선 어색한 말만 나왔음;
붙임성 없는 내가 아저씨 처음 봤을 땐 어쩜 그리도 말이 술술
나왔는지 다시 한 번 신기해지는 순간이었어...
"……."
어딘가 시무룩해 보이는 날 결국 눈치채고 오빠는 포크까지 내려놓더니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음. 괜찮은 척 하려고 했는데 난 정말 감정 따위 못 숨기는 솔직한 사람인가 봐...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렇게 한빈이오빠가 날 보면서 계속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 갑자기 손깍지를 덥썩 끼워 잡더니, "따라와." 이러더라?
......저 아직 다 안 먹었는데요. @@@@남은 음식 싸주실 파티원 999@@@@ (0/n)
그보다 우리 지금 처음으로 손 잡은 거? 솔직히 살짝 놀라서
잠깐 움찔하긴 했지만 나도 손 안 빼고 가만히 있었음...ㅋㅋ어디로 데려가려는 건지 궁금하다가도 오빠 만나오면서 지금처럼 간지러운 기분이 든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맞잡은 손만 계속 신경쓰였어.
이렇게 남자 손을 떨리는 마음으로 잡아본 게 얼마만인데... 아빠랑 구준회 손 말곤 남자 손 잡은 기억도 까마득했음ㅋㅋㅋㅋㅋㅋㅋ
-
"오빠 우리 어디 가는 거예... 아니, 어디 가는 거야?"
"말 편하게 하라니깐 그러네."
오빠랑 느긋하게 명동을 거니는 기분은 썩 괜찮았음. 사실 거닌다는 표현보단 끌려간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겠지만ㅋㅋㅋㅋㅋㅋ
평소엔 끽해봤자 'only' 친구들이랑만 오던 곳이었는데 이렇게 한빈이 오빠랑 걸어보니 조금 과장 보태서 안 보이던 거리의 아름다움까지 쏙쏙 눈에 들어오는 기분이었음.
그렇게 일단 무작정 따라가고 있긴 한데 계속 가다 보니 뭔가 전에 와본 적이 있는 길 같더라?
......와씨. 잠깐만. 나 방금 왜 등골이 오싹했지.
어딘가 불안한 기운이 급습해서 한빈이 오빠한테 어디 가고 있는 거냐고 몇 번씩 물어봐도 일단 따라와보라는 말만 하고 다른 말은 안 하는 거임.
주변에 있는 삐까뻔쩍한 간판들도 괜히 익숙한 것 같고, 저 앞으로 보이는 라이브 카페까지 익숙한......
스탑.
......맞다. 여기 명동이지.
설마.
아, 진짜 설마. 아니지?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애써 미소짓고 오빠를 따라서 계속 가는데 왜 대체 이곳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지 심히 궁금하더라? 그리고 왜 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건지도 궁금하더라?
예수님 알라신님 성모 마리아님 석가모니님 제발.. 제가 생각하는 시나리오대로만은 되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
제가 아는 절대자는 모두 읊어봤습니다. 신은 없다고 깝쳐서 죄송합니다. 내일부터 교회든 성당이든 절이든 사원이든 나가겠습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
전 어떻게 해야 이 운명의 장난 같은 각본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죠.
"...내가 이런 곳을 진짜, 진짜 안 좋아하거든?"
"내가 꿀꿀할 때마다 가끔 오는 곳이야."
"다른 곳 가자... 제발,응?"
"들어와보면 생각 달라질 거야."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은 진짜였다.
옛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말 역시 진짜였다.
ㅋ.
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쯤 되면 신이 날 미워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이건 아니잖아.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내 꼬인 운명이 진심으로 어이없어서 나오는 헛웃음이야...
맞아... 믿기진 않겠지만 오빠는 아저씨가 일하는 라이브 카페로 날 데려왔어.....
처음엔 나도 이게 꿈인 줄 알았음. 어떻게 넓은 명동의 그 많고 많은 장소 중에서 하필 여길 데려오지? 말이 됨? 우연의 일치라 하기엔 너무 말도 안 되지 않음?
생각이 달라지고 뭐고 전 여기 오는 게 겁나게 불편하다 이겁니다. 염병, 싫어! 싫다고!
침착하자, 보아하니 오늘은 평일이다. 지금은 오후 7시 30분을 막 넘긴 시각. 아마도 지금 아저씨는 일하고 있을 것 같고? 결론은 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아저씨를 피하려면 공연 보러 들어가기 전에 이 건물을 나가는 게 답이겠지?
아니야. 다시 생각해 보자. 오빠는 내 생각 해서 데려와준 건데
싫다고 나가버리면 예의가 아니잖아. 분명 인성을 재평가받게 될 것이다.
그럼 아저씨가 내가 여기에 온 걸 모르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안 들키기만 하면 되잖아?
"...농담이고 이런 곳 좋아하니까 들어가자 오빠..."
"아... 난 또 내가 잘못 데려온 줄 알고 걱정했지."
사실 매우 잘못 데려오셨어요! 아이고 내 팔자야!
...라 전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오빠의 지금 표정을 텍스트로 표현해 보자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시무룩'이었기 때문에 난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음^^...
마치 결계라도 되는 것 같은 이 크고 아름다운 문을 도저히 내 손으로 열 용기가 나지 않아서 오빠 뒤에 숨어서 들어갔음...
어차피 안은 장소 특성상 어둑어둑하니까 쉽게 아저씨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아서 크게 걱정할 필욘 없는데도 나 혼자 불안해서 눈을 마구 굴려댔음.
안으로 더 걸어 들어갈수록 심장 박동수가 미친 듯이 높아졌지만 내 걱정이 무색해지게도 무대 위엔 아저씨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었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저씨는 없었고. 아저씨 오늘 안 나왔나 보네.
얼마 남지 않은 빈 자리 중에서 제일 무대와 가까운 자리에 오빠랑 나란히 앉았음.
원했던 대로 아저씨도 없는 것 같은데다가 이렇게 됐으니 편하게 공연만 보다 가면 되는 건데 왜 어딘가 씁쓸한 거냐고.
공연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노래도 귀에 안 들어오고. 그렇게 몇 곡이 바뀌는데도 내내 영혼 없이 공연을 보다 보니까 어느새 노래하던 분은 꾸벅 인사한 후에 들어가시고 조명이 꺼지더라.
그리고 곧 조명이 켜졌을 때 누가 나온 건지 사람들이 웅성거리길래 별 생각 없이 발끝만 보던 눈을 무대로 옮겼어.
......아저씨.
솔직히 마주치는 건 꺼리면서도 한편으론 보고 싶어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막상 무대 위로 오르는 아저씨 모습을 보자마자 여기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
아직은 아저씨를 이렇게라도 가까이에서 볼 용기 따위 나지 않는 거였어, 난.
혼자라도 나가서 나중에 오빠한테 따로 설명하든가 해야겠다, 하고 황급히 가방을 챙기려는데 반주가 들려오더라.
"안녕 나야 잘 지내지, 요즘 날씨 많이 춥지"
가만히 발걸음을 멈춰서 듣다가 문득 말하고 싶었어.
나 저 노래 좋아한다고, 자주 듣는 노래라고.
"네가 있던 곳, 우리가 있던 곳 가끔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널 마중 나가곤 해"
가슴은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외치는데, 되려 몸은 무대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어. 신기한 일이지. 마음을 안 따라주더라.
그냥, 뭐랄까. 노래하는 아저씨는 확실히 사람을 빨려들어가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
나도 모르게 너무 열심히 올려다본 탓에 결국 한참 노래 부르던 아저씨와 의도치 않게 제대로 아이컨택을 해버렸어.
찰나의 턱, 막히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아저씨도 나 못지 않게 놀랐는지 순간적으로 미간이 움찔한 걸 분명히 봤단 말이야.
"오늘따라 갑자기 네 생각이 나니까"
날 보고 놀라서 그랬을까, 마지막에 목소리가 갈라진 것도 들었는데.
-
"..요즘따라 컨디션이 안 좋네요, 죄송합니다."
한 곡 더 들려 드리고 인사 드리겠습니다, 하는 아저씨 목소리가 퍼진 다음 나오는 곡은... 크러쉬 노래 중에 '가끔'이라고 알아?
그 노래였는데 이번에도 첫 소절만 듣고도 넋이 나갈 정도로 멋졌어. 할 말은 딱 하나였어. 정말, 정말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구나.
이 노래도 되게 자주 듣는 건데. 하필 오늘따라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나오더라.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아저씨 목소리로.
"넌 나와 같을까, 나만 아는 걸까"
"아주 가끔 보고플 뿐인데"
"이렇게 나만 바보처럼 내 마음 가두고서 살아"
이상하게 찌릿한 가사까지.
하도 집중하고 봐서 그런가 유난히 짧게 느껴졌던 아저씨 노래가 끝나고 잔잔한 음악만 깔리는데 또 눈이 마주친 거야.
처음 왔을 때 스쳤던 눈빛도 지금 같았는데. 어딘가 찡한 그런.
아까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일부러 아저씨가 날 봤다는 거였어. 아마 아까 본 게 내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본 것 같았어.
다시 한 번 나랑 시선이 공중에서 맞닿고 아저씨 눈이 살짝 커진 걸 똑똑히 봤을 때, 조명이 모두 꺼졌어.
조명이 다시 켜졌을 땐 무대 위에 아무도 없었고.
"쉬었다 하려나 보다."
"...응?"
"15분 정도 쉬었다 다시 다른 팀 공연 진행될 거야. 나 잠깐만 전화 좀 하고 올게. 금방 올 거야."
오빠는 그렇게 전화하러 잠깐 자리를 비웠고 난 나 혼자 안절부절하고 있었어...
아저씨 공연이 끝나고 그제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옴. 나 미쳤나? 쭉 아저씨 눈에 안 띄려 했던 계획도 내 손으로 망친 거지. 난 왜 항상 뒤늦게 후회를 하는가.
그러니까 왜 가까이에서 아저씨 보겠다고 함부로 나대가지고. 아, 조용히 뒤에서나 보다 갈 것이지. 오빠 기다리면서 혼자 머리 쥐어 뜯다 한 마디로 난리를 치고 있었음...
"일찍 다녀."
......뭐야?
빠르게 지나갔지만 정확히 날 향했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뒤돌아봤어.
내가 방금 전까지 저 위에서 들었던 목소리. 그렇게 듣고 싶던 목소리. 미치도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
내가 뒤돌아봤을 때 그 목소리의 주인은 이미 날 지나치고 다른 사람들의 어지러운 웃음 사이에 섞여 있었지만.
원망스러울 정도로 뚜렷하게 보이는 아저씨 모습만 멍하니 보다, 이윽고 같이 웃음을 나누는 여자들에게 눈이 갔어.
저거 다 아저씨 꼬시려고 일부러 하는 행동이잖아요. 언제 한 번 나한테 그랬잖아요. 뻔하게 접근해오는 여자들은 싫다면서요. 왜 저러는 거 보고도 아무 말 안 해요?
왜 자꾸 나만 신경 쓰이는 거예요, 왜.
쓸데없는 감정 소모는 더이상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도 그저 웃는 얼굴로 뻔한 행동을 받아주는 아저씨 모습이 너무 보기 싫더라.
아물어가던 상처가 또 터진 기분.
이번에도 제일 화나는 건 역시 내 자신이었어.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는 거야. 대체 왜? 뭐가 서러워서? 아직까지 잘 모르겠어.
몰래 맺히기만 했던 눈물이 곧 떨어질 만큼 차오르려 하길래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뒤로 젖혔을 때,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데리고 나가려는 오빠가 서 있었어.
그리고, 그런 오빠와 같이 라이브 카페를 나갈 때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건 오빠 손에 이끌려 나가는 날 빤히 보던 아저씨.
-
며칠 전 라이브 카페에서 갑작스레 아저씨를 만나 빚어진 혼란은 겨우 잠재웠음.
아직도 "일찍 다녀."의 충격은 살짝 남아 있는 게 사실이었지만. 설마 이렇게 어색해진 사이에서 아저씨가 먼저 다가와 그런 말을 던지고 갈 줄은 누가 알았겠어.
예상했겠지만 그 날 라이브 카페에서 만난 이후론 아저씨를 보지 못했어. 단 한 번도. 심지어 아저씨가 사는 옆집에선 사람이 있는 기척도 없었고.
아저씨를 아파트에서 자주 못 보게 된 건 언제부턴가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번엔 좀 다르단 말이지. 애써 피하지 않아도 만나지 않았다는 건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음.
아, 모르겠다. 더 신경 써봤자 아저씨 생각만 떠오를 테니 걱정은 접자.
아무튼 여기저기 치인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자 한가롭게 누워서 유튜브를 뒤적거리던 중 한빈이 오빠한테 전화가 왔음.
이제 오빠랑 전화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 이거야. 어느새 내심 전화를 기다리는 수준에 이르렀음.
"여보세요?"
[나올 수 있어, ㅇㅇ야?]
"어... 지금?"
[응, 지금.]
"왜?"
[너네 아파트 공원으로 갈게. 지금 그 근처야.]
뚝.
...이건 뭐 협박도 아니고. 웬 통보식.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라는 협박성 짙은 메세지가 핸드폰 너머로 와닿아서 나도 모르게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음.
그리고 그 날 '오빠, 밥 먹으러 가자'를 끝까지 시키던 악마 같던 모습도 겹쳐져서 몸서리침ㅋㅋㅋㅋㅋㅋ
내가 안 나가겠다 하면 나올 때까지 밤이라도 새워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확실했음...
미친. 근데 지금 나오라고?
놀라서 거울을 들여다 보니 슬슬 떡질 기미가 보이는 머리는 기본이요, 목 늘어난 티에 수면바지에... 더 말하는 건 의미가 없었음ㅋㅋㅋㅋㅋㅋ
누구보다 빠르게 얼굴에 물 끼얹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자까지 눌러쓴 다음 집을 박차고 나섰음.
-
마지막으로 급하게 걸치고 나온 가디건 단추를 잠근 다음 공원으로 달렸어.
그리도 가깝던 곳이 만리장성이라도 오르는 것처럼 너무 먼 거야... 아, 이 오빠는 올 거면 미리 좀 알려주지.
뛰는데 가디건 뚫고 찬 바람이 또 다 들어와ㅋㅋㅋㅋㅋㅋㅋㅋ 역시 이미 여름이 아니다... 아니야...
공원에 갔는데 아무도 없길래 물음표를 띄운 것도 잠시 저기서 오빠가 보이길래 반가운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발을 옮겼음.
오빠도 뛰어온 건지 숨 엄청 찼더라... 마른 기침만 연신 하는데 물을 사와서라도 먹여주고 싶은 충동 간신히 참음;
"왜 뛰어왔어, 힘들게?"
"……."
"그리고 갑자기 나오라고 하면 놀라잖아. 너무해 진짜."
"ㅇㅇ야."
갑자기 내 눈높이에 맞춰서 허리 숙이고 눈을 부담스럽게 마주보는 거야... 저기, 만나자마자 너무 가까운데요...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양봉업자의 자손임이 확실했음. 이 오빠는 눈물도 꿀일지 몰라. 무슨 사람 보는 눈빛이 이래.
코앞으로 다가온 오빠 얼굴에 움찔했는데 이어서 내 양손을 살짝 잡아오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뒤로 내뺐어.
"...오빠?"
"……."
***
1. 노트북이 맛이 갔다.
2. 불마크를 더 이상 못 쓴다.
=> 왓더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