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그날 하루를 종일 시달리는 것에 날려버렸다.
나의 불가항력적인 애매한 대답이 애들 성에 차지 않자 더 꼬치꼬치 캐물어왔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난 아무 사이가 아닌 것도 아니고, 애틋한 사이인 것도 아니다.
특별한 사이라고 한다면 특별한 사이겠지.
아침 조회가 끝나자, 무리 지은 애들이 반장에게 다다다 뛰어온다.
갑자기 들이닥친 무리에도 녀석은 준비된 사람처럼 예쁜 얼굴로 웃어보인다.
"선도부장!"
"왜?"
"진짜 쟤랑 사귀어?"
'왜 난데없이 남한테 삿대질이야.'
돌직구 질문과 삿대질에 기분이 나빠져서 아니꼽게 쳐다보고 있는데 녀석이 태연하게 웃는다.
그리고 그 웃는 입술에서 다음으로 나오는 말이 어쩐지 따갑다.
"(웃으며) 아니."
"정말 아니야?"
"우린 친구야."
떼거지로 몰려온 여자애들은 한 걸음 물러나는 듯 하다.
녀석은 그 애들에게 쓸데없는 데에 관심 쏟지 말고 공부나 더 하라며 핀잔을 준다.
난 허무해졌다.
저렇게 간단히, 아무렇지 않게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내가 아등바등 애들에게 둘러대는 꼴과,
저 태연한 얼굴로 '아니' 라고 하는 꼴이 대립되어 볼쌍 사납다.
"야."
"......"
"...야!"
"어? 아.... 미안, 딴 생각하느라..."
"..너 아까부터 반장만 쳐다보는 것 같던데."
아차, 실수.
이런 시선을 들켜봐야 곤란해지는 건 내 쪽인데.
또 그 생각으로 잠시 태연한 얼굴의 녀석이 떠올라 버렸다.
"야!..... 얘가 자꾸 왜 이래?"
"아... 미안해..."
"...내가 물어보면 또 말 못하겠다고 할 거지?"
".....있잖아."
"?"
"되게 재수없는 놈이 있어."
"...?"
"진짜 되게 재수없거든?
그런데 그쪽에서 딱 잘라 버리니까 그것도 되게 기분이 나쁘다?"
"정든 거네."
"...정?"
"그래.
미워하는 것도 결국 마음이 있는 거야.
넌 걔를 미워하는 사이에 정든 거지."
"....그런 걸까."
"미워하는 놈이 누군데?"
"...그건..."
"....?"
"다음에 말해줄게, 미안."
"...치사하게.
됐다! 내가 뭘 바라냐, 에휴."
난 결국 녀석한테 정이 든 걸까.
그치만 그렇다고 해서 녀석을 미워하는 마음이 가신 것은 절대 아니다.
난 지금도 녀석 때문에 충분히 곤란하니까.
"어제는 무사히 잘 치뤘어?"
"......"
"그래서 어젠 조용히 돌려 보냈는데...
아직 삐쳤나보네."
"......"
선도부실로 들어서니 녀석이 밉살맞은 얼굴로 맞이했다.
나에게 뭐라뭐라 지껄이더니 내 뺨에 있는 머리칼을 손으로 넘겨준다.
가만히 노려보고 있던 나는, 녀석이 고갤 숙여 내 목을 파고들려 하자 입을 움직인다.
"그것도 계획이야..?"
"...뭐?"
"......."
"어제 일로 힘들었나본데, 이런다고 오늘도 풀어줄 거라고 생각하진 마."
"......"
녀석은 내 말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내 목을 파고 든다.
난 벌어지는 전개에 가만히 숨 죽이고 있다.
녀석이 내 목에 입술을 묻으며 단추 하나하나를 풀어나간다.
내가 목석처럼 굳어있자, 녀석이 고갤 들어 나를 내려본다.
"어제 시달려서 뇌라도 다쳤냐?"
"......"
"왜 이래."
"...너랑 엮이는 게 신물나서."
"...?"
"네가 내 몸 만지는 것도 싫고,
다른 애들이 그런 너 따위랑 엮는 것도 싫고,
너 때문에 친구랑 멀어지는 것도 싫어!"
"......"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제 아무리 내가 묶여있는 사진이라도 애들은 다 나보고 걸레라고 하겠지."
"......"
"그럼 난 학교 생활 꼬이고, 집에서도 난리 날거고..."
"......"
"이미 너 때문에 다 꼬이는 것도 모자라서...... 아!"
녀석은 화수분처럼 쏟아내는 나를 붙잡아, 벽 쪽으로 밀착해온다.
녀석의 박력에도 난 꿈쩍하지 않으려 애써본다.
"누가 그렇게 만든대."
"....뭐..?"
"그렇게 안 만들어."
"......"
"애들이 너랑 나 엮는게 그렇게 싫어?
그럼 귀 막고 살아."
"......"
"친구랑은 왜 멀어지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네 능력이야. 네가 알아서 처신해."
"...웃기지 ㅁ... 아!"
녀석이 내 몸을 돌려 내 시야를 벽으로 막아버린다.
"만져지는 게 싫으면..."
"......"
"눈 감아."
"...으읏....."
녀석이 목에다 입을 맞추며 치마 아래로 손을 집어넣는다.
내가 숨을 들이쉬며 소리를 참자 목 뒤에서 쿡쿡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까보다 반응이 느슨해졌네?"
"......"
"...네가 싫건 좋건, 난 안 멈춰.
그러니까 알아서 즐겨."
그리고선 속옷을 벗기지도 않은 상태로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뒷목으로 느껴지는 입술 자국이 낙인과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