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아플 정도로 떠들썩한 말소리와 그것보다 더 시끄러운 음악 소리.
싸구려 스피커로 난잡한 비트의 음악을 틀다 보니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들렸다.
빈 병과 술이 남아 있는 병도 구분하지 못하고 빙빙 돌려대는 탓에
테이블에 흥건해진 소주를 닦으면서 생각했다.
사진과 14학번들은 싹 다 미친 새끼만 모인 것이 분명하다고.
그렇지 않다면 4년 동안 지독한 연애를 하다가 꼴사납게 끝난
채형원과 나를 술자리에 동시에 부를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이 정신 사나운 술자리의 시작은 민영 언니의 이른 결혼 소식.
구질구질한 이별 이후 군대로 도망친 채형원과 나는 더 이상 사진과 단톡방 멤버가 아니었고,
민영 언니는 온라인 청첩장은 예의가 아니라며 다 같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했다.
톡방에 없는 동기들한텐 각자 알아서 전달하자.
참여 멤버가 누군지도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급하게 도착한 약속 장소에는 채형원이 있었다.
헤어진 이후로 수 백번 보고 싶다고 되뇌였지만,
단 한 번도 우연히 마주치는 일 없었던, 매정하고도 싸늘한 표정의 채형원이.
예비 신랑의 잔소리 때문에 일찍 귀가한 민영 언니가 빠지고, 본격적인 2차가 시작되었다.
귀까지 시뻘개진 동기들은 더 이상 순발력이 필요한 술게임을 할 정도의 정신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가 지친 술자리에서 손 쉽게 텐션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달리 무엇이 있을까,
어느새 소주병은 빙글빙글 돌아갔고 진실게임이 시작되었다.
"전 남친이랑 친구가 될 수 있다, 없다?"
맞은편에 앉아서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나와 채형원이 꽤나 웃겼나 보다.
굳이 짗궂은 질문을 던지고 낄낄대는 동기들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왕 간지에 살고 간지에 죽기로 했다면,
헤어진 지 몇년이나 지난 전남친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쿨한 여자로 보여지는 게 좋은 걸.
"안 잤으면 친구할 수 있지, 뭐."
채형원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동기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야, 미친 거 아냐? 너무 쿨하다, 할리우드인 줄.
뭐야? 채형원의 눈썹이 구겨졌다. 너랑은 친구 못 한단 소리지.
입 모양으로 속삭이자 헛웃음을 치는 채형원이 보였다.
"재미 없어 이런 질문. 얘 곤란하게 하지 마."
표정 관리를 잘 못하는 채형원의 얼굴에서 기분이 상했단 사실을 금방 읽어낼 수 있었다.
내가 곤란한 게 아니라 네가 곤란한 거겠지. 술에 취해서였는지,
아니면 너에 대해 남은 감정이 증오밖에 없는지.
나는 채형원의 속을 살살 긁을만한 뾰족한 말을 찾고 있었다.
"왜? 나는 재미있는데. 얘들아 괜찮아."
"야, 너는 진짜..."
"내가 얘랑 헤어진 지 몇 년인데, 아직까지 이런 걸로 기분 나빠할 정도로 속 좁지 않아."
너 속 좁잖아. 밴댕이 소갈딱지면서. 뭐? 이제 대놓고 나를 노려보는 채형원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연애할 때 수도 없이 마주쳤던 다정한 눈엔 애정이란 감정은 전혀 없었다.
"...병 줘."
채형원이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소주병을 가져왔다.
병을 있는 힘껏 움켜쥔 너는 병목이 나를 향하게 내려놓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뭐하냐, 너? 당황한 나를 보며 네가 말했다. 뭐하긴. 질문하려고 하지.
"넌 이 자리가 편해?"
"불편할 게 뭐가 있어? 우리 이미 끝났잖아."
"이거 진실게임이다. 거짓말 할 거면 차라리 마셔."
"거짓말 아닌데, 진짜야."
순식간에 얼음장 같이 차가워진 분위기에 숨 막힐듯한 침묵이 찾아왔다.
살벌한 기운을 느꼈는지 옆 테이블에서도 숨을 죽이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채형원, 지금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이게 무슨..."
"너, 나랑 헤어지고 내 생각 한 번도 안 났냐?"
쏟아지는 시선에 정신이 번쩍 든다. 분노의 감정보다는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어서 이 싸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고, 내 앞에서 씩씩대며 나를 노려보는
채형원을 진정시켜야지, 했지만. 상상도 못했던 질문을 받게 될 줄이야.
"제발, 여기서 이러지 말자. 너 많이 취했어."
"나 안 취했어. 너 내가 취하는 거 봤어?"
"아니. 근데 차라리 취한 거면 좋겠어. 지금에서야 이러는 거, 추해."
"추하다고?"
너의 눈동자가 울렁거렸다. 입술이 달싹거리는 게 울음을 참는 듯 했다.
너 도대체 왜 이래, 몇 년 만에 내 앞에 나타나서는?
울고 싶은 건 나야, 채형원. 괜히 나까지 울컥해서 목소리가 떨렸다.
너는 진짜 밉다. 채형원, 진짜 못됐다.
"어, 추해.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한 건 너야.
울고 불고 매달려도 이 관계 끝났다며 매몰차게 밀어낸 것도 너야."
죽고 싶을만큼 힘들 때, 그래도 몇 년 동안 연인이자 또 서로에게 제일 가까운 사람이었던
너를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네가 나를 밀어낼 때 보였던 차가운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너와 관련된 모든 사진과 흔적을 지우고
이제서야 네가 없는 일상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왜 내가 좋아했던 예전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서, 나를 무너지게 만들어..."
결국 졌다. 눈물이 많지 않은 나를 하루종일 울게 만들었던 너한테 이번에도 졌다.
만약, 만약에라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너 없이도 행복한 내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다 실패해버렸다.
"... 나가서 얘기하자."
너 또한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채형원, 너 왜 기대하게 만들어.
사람 마음 몇 년 동안 난도질 해놨으면 이렇게 약한 모습 보여서 미련 남게 만들지마.
"나 너랑 할 얘기 없어."
"나는 있어."
내가 네게 처음 마음을 내보였던 그날처럼.
다정하지만 슬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네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까.
밑바닥까지 본 우리 관계, 다시 파헤쳐봤자 상처만 남는 걸 알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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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친 서사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떠들썩한 술자리가 상상이 가지 않겠지만 코로롱 전이다.. 생각해주십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