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은, 사실 까보면 그렇지 않았다. 이따금 생각나는 네가 있었기에.
냉장고를 열어 간식을 꺼내 먹으려다가도 네가 떠오르고, 티비를 보려 앉으려다가도 탁자에 올려둔 네가 남기고 간 쪽지를 보면 생각나고, 그리고 결과적으론 아이들에게 있는 여주의 연락처.
자신들의 휴대폰에 그토록 있기를 바랐던 여주의 연락처가 있었지만 아이들은 섣불리 연락을 건네지 못했다.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았기에 도대체 무슨 말을 먼저 건네야할 지 생각이 정리되지 못했으니.
그나마 얼굴을 봤던 정한과 민현은 여주가 가고나서 전화를 걸었었지만, 어서 자라는 여주의 말과 함께 통화가 끊긴 민규는 다시금 전화를 걸지 못했다. 석민은 통화를 하면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울 것만 같아 전화하지 못했고.
승관) .........
몇몇 아이들이 회사에 가고, 또 몇몇 아이들은 집에 있는 오전과 오후의 사이였다. 승관은 2층 거실에 누운 채 제 휴대폰을 바라봤다.
승관의 휴대폰 화면엔 미국의 시각이 적혀있었다.
저녁 일곱시쯤을 향해가는 미국 시각에 승관은 한숨을 푹 내쉬고서 몸을 일으켜 지수의 방으로 들어갔다. 곧장 테라스에 들어와 벤치에 앉은 승관이 귀에 휴대폰을 가져다댔다.
여보세요.
“...김여주 휴대폰 아니에요?”
벤치에 앉아있던 승관이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맞아요. 근데 지금 잠들어서.’
“뭐요?”
잠들었다는 여주의 말에 승관이 몸을 벌떡 일으키고, 곧 허리춤에 제 손을 얹었다가 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가 이리저리 손을 불안하게 움직이더니 눈을 대굴대굴 굴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쪽 누구신데요?”
‘여주 깨면 연락주라고 할게요.’
“아니 저기요. 그 쪽 누구신데 받으시냐구요.”
‘이만 끊겠습니다.’
“아익 저기요!”
일방적으로 끊긴 통화에 승관이 소리치고, 마당에 멍하니 앉아있던 석민이 고개를 젖혀 승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그래?!
승관) 야 너 김여주한테 전화 해봤어?!
석민) ..........
소리없이 고개를 저어대는 석민에 승관은 으이고.. 하며 다른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테라스를 빠져나가는 승관을 보던 석민은 고개를 숙이고 마당에 있는 풀을 만져댔다.
석민) .........
승관) 야!
석민) ...왜!
쏜살같이 집에서 나온 승관은 석민에게 다가오며 소리쳤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석민은 적게 소리치며 승관을 쳐다보다 다시금 고개를 내렸다. 어느덧 옆에 자리한 승관은 석민처럼 풀썩 마당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승관) 도대체 언제하시게요? 그러다 내년에 하겠네!
석민) 그러는 뭐 너는! 넌 했냐?!
승관) ..........
석민) 목소리 듣자마자 울 것 같아서 못하겠다고!
그럼 김여주도 울 거 아냐!
석민의 소리침에 승관은 입을 앙다물곤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는 쳐다봤다. 정적이 꽤 이어졌을까, 편의점을 다녀온 민규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고, 승관은 뒤돌아 민규를 쳐다봤다.
민규) 여기서 뭐해.
석민) 야 너 여주랑 통화 했어?
민규) ....그 때 이후론 안했는데. 왜?
석민) 얘도 아직 못했다잖아!
승관) ..........
민규) 왜. 부승관 너 전화해봤어?
어느덧 자연스럽게 옆에 앉은 민규는 비닐봉지에서 자신이 사온 음료수를 꺼냈고, 민규가 음료수를 입에 댐과 동시에 승관이 말했다.
승관) .....아이씨 몰라.
석민) 뭐가.
승관) 전화했더니 남자가 받더라! 여주 잔다고!
푸우우우우우-!!!!!!!!!!
민규가 입 속에 있던 음료수를 허공에 뿌려댔다. 무지개가 그려졌다고 착각이 들 정도의 아름다운 포물선이었다. 고개를 순간적으로 돌려서 망정이지, 자칫 아이들이 전부 젖을 뻔 했다.
승관) 아이씨 더럽게!
민규) 개소리야!
석민) 진짜야?!
민규) 뭐가 진짜야!
승관) 방금 테라스에서 전화했는데 남자가 받아서 그렇게 말했다고!
니네가 전화 해보든가!
통화를 끊은 창균은 여주의 휴대폰을 침대 옆 탁상에 올려두고, 침대 밑에 앉아 고이 잠든 여주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제게 등지고 잠에 빠진 여주에, 창균은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 새근거리는 여주의 숨소리만이 집을 채웠을까, 창균은 몸을 일으켜 자신이 가져온 옷가지를 들곤 화장실로 향했다.
애초에 집에 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다.
출근을 한 아이들이 퇴근을 할 때까지, 집에 머물던 아이들은 논쟁을 펼치고 있었다.
민규) 지랄 마.
승관) 야! 말넘심! 팩트만 가지고 말하는거잖아!
민규) 야 팩트는 남자가 받았다는 것 뿐이지 그 남자가 남자친구일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승관) 아 그치만!
석민) 그치만..
민현) ...뭐해?
거실에서 과자를 먹으며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고, 똑같은 이야기가 되풀이 되고, 결론은 여주에게 다시 전화해 보자. 였지만, 진실을 마주하기 싫었던 아이들은 섣불리 전화하지 않았다.
그 때 민현이 들어오고, 조용하던 평소와는 달리 산만한 분위기에 소파에 앉으며 셋을 바라봤다. 무언가 말하기가 꺼려졌던 아이들이 말이 없자, 민현은 그런 아이들을 빤히 쳐다보며 다시금 물었다.
민현) 뭔데 그래?
석민) ....니가 말해.
승관) ...왜 나한테 그래.
민규) 니가 전화해서 들은거잖아.
민현) 전화? 여주? 여주가 왜?
민현의 마음이 여주에게 어떤 마음인지 아는 아이들이었기에 서로 눈치만 봤고, 결국 석민이 입을 열었다.
석민) 형 여주한테 전화 해봤어?
민현) ...여주 가고나서 낮에 몇 번. 그 다음날부턴 전화 안받던데. 왜?
승관) 내가 오늘 전화를 해봤는데,
어떤 남자가 전화 받았거든? 근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정한) 누가 전화를 받아? 남자가 받았다고?
현관을 들어오자마자 들려오는 소리에 정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고, 셋은 더더욱 말을 잊지 못했다. 그저 속으로 생각했지.
김여주, 네가 와서 해명 좀...
이유는 간단했다. 여주와의 만남은 극히 짧았고, 그 사이에 창균이란 존재를 설명할 순 없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 목소리를 오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거.
승관) 그럴리가 없어. 김여주 성격에?
찬) 그래. 말이 안돼.
원우) 타지에서 의존할 만한 애를 만나가지고 그렇게 된 거-,
정한) 안되지! 안돼!
명호) 솔직히 가능성은 있다.
지훈) ..그딴게 어딨어.
민현) 그래. 잘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지만..
석민) 근데 막 드라마에서 보면, 막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런 드라마에서도! 엄청 극악의 상황에도 소지섭이랑 임수정이랑 사랑에 빠지잖아!
민규) 그건 드라마잖아!
원우) 야 드라마 같은 상황도 배제하면 안되지.
모두가 모인 저녁식사 시간, 여주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잘 꺼내지지 않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밥을 먹던 아이들은 밥을 먹다말고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고, 진실을 알고보면 귀여워보였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준휘) 이러지 말고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보는게 어때
민현) ..........
명호) 다들 암묵적으로 그 남자가 또 받을 것 같아서 못하는거 아냐?
민규) 야 누가! 누가!
석민) 그래 누가!
명호) 너희가.
민규) 참나 아니거든? 여주 남친 없거든?
찬) ...그럼 그냥 걸어보자.
승관) ....아니 근데,
찬) 야 솔직히 이거 안걸어보고서는 아무도 모르잖아.
민현) ...그치 그건 맞는 말이지.
식탁에 정적이 맴돌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밥을 오물오물 씹던 순영이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있던 민규가 뭐해? 하고 물었고, 순영의 덤덤한 대답에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순영을 향했다.
순영) 전화하려고.
민규) ...여주한테?
순영) 응.
승철) 야 순영아. 우리 이따 해보는게 어때.
석민) ..그래 일단 우리 식탁부터 치우고-,
순영) 이미 걸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걸자는 아이들의 말에 순영은 여주와의 통화 화면을 아이들에게 보여줬다가 스피커로 돌렸다. 별로 달갑지 않은 신호음이 부엌에 울려퍼지고, 아이들은 숨죽인 채 순영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하거나, 민현이나 지훈이를 흘끗 거렸다.
'여보세요.'
순영) ...여주,
'아직 안일어났는데. 일어나면 연락하라고-,'
민규) 그 쪽 누구신데요.
'...........'
표정을 굳힌 민규가 순영의 팔목을 잡아 휴대폰을 제 쪽으로 돌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답이 없었고, 순영의 맞은 편에 앉은 원우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순영을 쳐다봤다. 민규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민규) 저기요. 누구시냐구요. 아까도 그 쪽이 전화 받았잖아요.
'...이따 여주한테-...'
승관에게 말했던 것 처럼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창균이었다. 자신이 누군지 밝히면 여주가 어떻게 택배를 보낼 수 있었는지, 자신과 친한 민혁이를 추측해 낼 것이고, 그럼 민혁의 입장도 곤란해질 게 뻔했으니.
그런 창균의 목소리 뒤로 작은 원우의 목소리가 순영을 향했다.
원우) 야, 얘 걔 아니야?
순영) ....누구?
민규) 누군지 말하기 싫으면,
'............'
원우) 걔, 고딩 때 나랑 짝했던,
순영) 그게 한 둘이냐.
민규) 어떤 사인지라도 말해.
'.............'
원우) 걔 있잖아. 여주 좋아했던, 니가 찍은 여주 사진 훔쳐봤던,
순영) ..민혁이?
원우) 걔 말고.
순영) .....아.
민규) 남자친구야?
'............'
순영) ..임창균!!
정한) 뭐?
민현) 임창균?
지훈) ...고2 때 같은 반이었던,
순영) 너 임창균이야?
'............'
순영) 너 임창균 맞지.
순영의 확실한 음성에 창균은 옅은 한숨을 뱉어냈다.
민혁) 갑자기 왜-,
정한) 다 알고 왔어.
민혁) ..........
정한) 언제부터야.
갑작스러운 전화에 민혁은 부랴부랴 준비하곤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단단히 화가난 듯한 표정의 민현과 정한을 보고 안좋은 일임을 직감한 민혁이었다. 둘은 마치 입장료처럼 커피를 산 듯 커피는 깨끗했고, 민혁은 눈치가 보여 입을 대지 못했다.
민혁) ...삼년 됐어.
정한) 뭐?
민혁) ..........
정한) 너 우리 만난지가 4년째인데, 3년됐다고?
정한의 물음에 민혁은 제 손가락만 바라보며 아무 말 없었다. 민현은 멍을 때리는 건지 의식을 차리는 것 조차 힘든 건지, 그것마저 분별이 불가능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정한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자 민혁이 말을 이었다.
민혁) ..창균이 알지? 걔 고딩 때, 서울대 못가면 유학 당할거라고.
정한) ...........
민혁) 창균이가 결국 서울대 못가서 유학 준비하고 준비 되자마자 바로 미국 갔었어.
그게 7년 전인가 그랬는데, 걔 그렇게 가고나서 종종 연락도 하고 한국도 자주 들어오고 그랬지. 그리고 나서 난 그냥 전문대 졸업하고 바로 취업했는데, 거기서 순영이를 만난거야. 그게 4년전이었나 아마. 순영이 만나고서 너희 만나고 그랬으니까.
근데 너희 만나고 1년 지나니까 갑자기 창균이가 대뜸 여주 얘기를 꺼내는거야. 한국에 있어야 할 여주를 미국에서 봤다고. 그래서 내가 말했지, 여주 한국에 없다고. 너희랑 얘기했는데 3년전에 아무것도 안남기고 떠났다고. 그랬더니 며칠 뒤에 다시 연락이 왔어.
미국에 있는게 여주 맞다고. 카페에서 알바하던 걸 자기가 우연히 봤다 그랬나. 그래서 창균이가 여주랑 계속 만나게 된거야. 아니아니, 연락하고 아는 사이로 지내게 된거지.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말하려했더니 창균이가 말하지말래. 여주가 안말했음 좋겠다고 그랬대.
그래서 내가 그랬어. 그게 뭔 개소리냐. 여기 애들이 얼마나 목빠지게 걔 소식을 기다리는데 그걸 말하지 말라니. 그랬더니 창균이 말로는 여주가,
민혁) ...그냥 너희 소식만 좀 전해달라고.
민현) .........
민혁) 자기가 해야할 게 있으니까 소식 좀 전해달라고 그랬대.
...그렇게 얘기해서 나도 뭘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어.
민현) ..그럼 갑자기 한국엔 왜 왔던거야?
민혁) ............
얼마 전에 정한이 쓰러진 거, 그거 내가 창균이 보고 여주한테 꼭 말하라 그랬거든. 그럼 한국 와서 얼굴 한 번 비치지않을까 싶어서.
민혁) ..근데 창균이가 말 안했대. 그냥 휴가가자고 데리고 온거였대. 그리고 데리고 와서 한국에서 너 쓰러졌던 걸 말한거야. 그래서 여주가 하숙집 근처까지 갔다가 승철이 만나서 도망친거고.
정한) ......그래서. 지금 창균이랑 여주랑 같이 있다는거야?
민혁) ...응.
근데, 여주 상태가 많이 안좋은가봐. 창균이가 계속 여주 집에 있대.
"..........."
"그만 두자."
"..........."
"아님 휴직을 하자. 응? 조금만 쉬자."
"..........."
여주의 마지막 휴일. 창균이 여주에게 한 말이었다. 제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던 여주의 시선엔 초점이라곤 없었다. 자신도 잘 알았다.
지금 제 상태가 온전치 않다는 것쯤은.
"..너 3년동안 커리어도 잘 쌓아왔고, 잠깐 쉰다고해서 복직하는거 어렵지도 않아."
"............"
"그니까 우리 조금만 쉬자. 미국와서 쉰 적도 없잖아. 응?"
"............"
여주의 집은 꽤나 깨끗했다. 화이트 톤의 벽지와 우드의 가구들. 그리고 애초에 물건들을 많이 두는 타입이 아닌 여주 덕이었고, 며칠 간 여주의 집에 머무르며 깨끗하게 치운 창균의 덕이었다.
줄곧 창 밖을 바라보던 여주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그 깨끗한 집 안을 훑었다. 그리고서 마지막으로 창균의 눈을 맞췄다. 여전히 텅 빈, 공허한 시선이었다. 갈라진 입술과 창백한 얼굴, 그리고 며칠간 말을 하지 않아 갈라진 목소리가 창균을 향했다.
"...힘들어."
"............"
"............"
"............."
"...아프다."
너무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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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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