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괴롭혔던 변백현
6
W. 백빠
“한나 얼마 전에 그만 뒀어요, 여기.”
변백현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한에리의 가명을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나가 아니었나, 한나가 아니라 뭐였지? 그러나 매니저는 백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덧붙여 말했다.
“에리씨 말씀하시는거 아니에요?”
“..아, 네 맞긴 합니다만.”
“그만 뒀어요, 걔. 갑자기 전화로 급한일 때문에 며칠 못나온다고 그저께인가 전화했었어요.”
“무슨 급한 일 말입니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다시 전화해봤더니 휴대폰도 꺼놨더라고요.”
매니저도 갑작스러운 통보를 받은 것인지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다는 얼굴로 허, 실소를 터트렸다. 백현은 어째서? 라는 단어 하나가 머릿 속에 반짝 떠올랐다. 문득 그녀가 우는 얼굴이 떠오르며 혹시 나 때문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그녀를 어디론가 숨게 만든거라면? 매니저는 자신이 백현의 신경을 거스른 건 아닌지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 최근에 저한테 돈을 좀 빌릴 수 있냐고 묻긴 했는데. 별 대수롭지 않게 물어보긴 했었지만 왠지 의심이 갔었어요.”
“돈이요?”
“네. 오천만원인가 얼마 빌려줄 수있냐고, 이유가 뭐랬더라… 여튼 원체 돈 얘기는 안하는 앤데 이상하더라고요.”
“혹시 에리를 알만한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매니저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이제서야 문득 왜 이렇게 이 남자가 한에리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뭐 단골로 몇 번 오기도 했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며 그의 질문에 에리의 친했던 동료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누가 한나와 친했더라……?
“흠. 글쎄요, 그렇게 친하다 싶은 동료가 없네요.”
“단 한명도요?”
“네. 애들이 말하기를 친해지기 어려운 애라고 했습니다. 아마 없을거에요. 예, 확실히 없어요.”
백현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녀가 숨어버렸다. 내가 한국으로 들어와 그녀를 찾기 시작한 그 원점으로 돌아가버렸다. 백현은 일단 알았다고 대답을 하곤 가게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었다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다시 꺼버렸다. 시트에 고개를 기대 눈을 감았다. 고작 2주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만든 그녀였고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결정을 하기까지 꽤 큰 결단력이 필요했지만 이 감정을 풀어보기도 전에 그녀는 사라져버렸다. 백현은 윤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사장님, 대체 갑자기 어딜 그렇..]
“한에리가 없어졌어.”
[..예?]
”당장 어딨는지 찾아내. 지금 어디 숨어있는지.”
[아, 네. 알겠습-]
비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은 백현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조수석에 던져버렸다.그녀를 다시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하는걸까. 답답했다. 온 몸이 수갑에 채워진 듯이.
그녀가 우는 얼굴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날 보는게 괴롭다며 우는 그녀. 혹시 떠나버린게 나 때문은 아니겠지, 하는 불안함이 저 끝에서부터 몰려왔다. 만약 그렇다면 어떡하지. 사라지고 싶을만큼 날 보는게 괴로운거라면? 그렇다면 내가 그녀를 찾는 것이 옳은 일인걸까? 수십가지의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의 마음이 시키고 있는 단 한가지의 일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에리를 찾는 것.’ 거스를 수 없는 본능이었다.
간밤에 잠을 푹 자지 못한 백현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뒷좌석에 몸을 기대곤 눈을 감았다. 조수석에 있던 윤비서는 아침인사를 건냈지만 변백현은 물었다. 한에리는? 윤비서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찾을 수 없었습니다.”
“…….”
백현이 눈을 떴다. 기댔던 몸을 떼내곤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 “뭐?” 그러자 윤비서는 손에 들려있는 파일을 펼쳐들었다.
“일단 휴대폰은 꺼놓았기에 위치추적이 불가능 했고 호적 상 주소엔 말씀 드렸듯 어머니만 살고 계십니다. 재혼하신 어머니와 새남편, 그리고 아들 셋이서.”
통화기록엔 가게 매니저가 가장 많았고 엄마와 최근 두 번, 그리고 모르는 번호가 여러번 찍혀있긴 했는데 대포폰이라서 출처를 알 수 없었구요. 메세지는 스팸 말곤 온 게 없었고… 친하게 지내는 타인은 없는 듯 합니다. 가족과도 거의 연락을 안하는 상태고.
백현은 그녀에 대해 읊는 비서의 말을 들으며 어쩐지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느껴졌다. 삭막한 사막 같았다. 누구도 발걸음 하지 않는, 텁텁한 공기에 숨쉬기조차 힘든 그런 사막. 아무도 그녀의 곁에 없다는 말은 그녀는 누구에게도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었고 동시에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다는 말이었다. 문득 그날, 그녀가 그렇게 갑자기 눈물을 터트렸던 것이 지독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외로움, 그건 백현의 고등학교 시절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였다. 그는 재벌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외로워야했다. 태어날 때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누구도 그를 친구로 대해주지 않았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면서도 아이들은 백현에게 잘보이기 위해 항상 아부를 떨어댔고 고등학교에 오자 또래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가식은 극심해졌다. 아이들은 까라면 깠다. 기라면 기었고. 치트키를 써버린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순수하게 그 자신, 변백현에게 다가오는 사람보다는 후계자 변백현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는 그 권력을 이용하면서도 언제나 삭막함이 느껴졌다.
백현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다른 고등학교로 전학을 간 것도 이러한 사실에 근거한 이유였다. 아이들은 누구나 변백현의 말이라면 개처럼 짖을 준비를 했다. 그래서 변백현은 개처럼 짖어보라고 한 것 뿐이었다. 그러니까, 변백현은 그저 알아서 길 준비가 되어있는 애들에게 기어보라고 말한 것 뿐이었는데 그건 곧 갑을관계로 번져나갔다. 그게 잘못 된 건지도 몰랐다. 모두가 몰랐다. 갑의 다리사이로 을이 기어야한다는 게 잘못됐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게 잘못 됐다는 걸 백현이 알게 된 건 ‘을’ 중 한명이 그의 실태를 은밀하게 소문내고 다녀 부모님 귀에까지 들어갔을 때였다.
변백현은 아버지에게 어느 날 죽도록 맞은 후 외딴 학교로 보내졌다. 2학년만 마치고 미국으로 가야했던 백현은 새로운 학교에 쉽게 적응할 수도, 적응할 생각도 없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모두들 백현이 누군지 알았고 입을 다물어주었지만 새로운 학교는 누구도 백현을 몰랐다. 딱히 다가오는 애도 없었고 다가가고 싶은 애도 없었다. 한번만 더 문제 일으키기만 해봐, 백현을 때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던 아버지에 조용하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 눈에 띈 것이 한에리, 그녀였다. 아니 백현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
‘야, 너 근데 벙어리 아니지? 말이 존나 없길래.’
‘사내새끼가 키가 이렇게 작아서 어떡하냐. 키 작으면 돈은 많아야될텐데, 그치.’
니가 내게 처음으로 건냈던 말이다. 사실 충격을 받았다면 받았다. 어떻게 반응 해야할 지 몰라 받아주기만 했다. 그러다 귀찮아졌고 짜증도 났지만 참아야한다는 일념 하에 그냥 받아줬었다. 그러나 흔히들 드라마에서 나오는, 나를 그렇게 대한 여자는 니가 처음이야 심리는 실제로 존재했다. 그녀는 그 이후로 백현을 괴롭혔고 신경질만 냈지만 그녀에게 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군데군데 있었다. 그건 자신을 처음으로 ‘변백현’ 그 자체로 봐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일수도 있었고 신기함 혹은 신선함일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그건 첫사랑으로 변질 되어갔다. 그렇게 사람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무언가를 피워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 이상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변백현은 많은 생각으로 윤비서의 대부분의 말들을 놓쳤지만 마지막 말을 끝으로 정신이 들었다. 지금 백현이 얻은 정보는 그저 그녀가 한없이 외로운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 뿐이었다. 그녀는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사라졌고 백현은 더이상 그녀를 찾을 수 없다. 또 다시 찾아야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찾아낼 수 있겠지만 백현은 그러지 않았다. 무언가를 피해 도망친 그녀를 그렇게 인형뽑기에서 뽑아내듯 찾아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그녀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싶어졌다. 뒷좌석에 기댄 백현은 말했다.
“…됐어, 이젠.”
그리고 백현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 회사에서 업무를 보았고 윤비서 또한 그녀에 대한 모든 것에 손을 놓았다. 이 찝찝하고도 무언가 마무리 되지 않은 기분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지만 그녀를 억지로 찾아낸다하더라도 별반 다른 기분일 것 같진 않았다. 토독, 토독.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비가 오기 시작했다.
[ 오늘 아침부터 시작된 비는 내일 밤까지 계속 될 것으로 예측되며 최고……]
하루종일 비가 왔다, 끝도 없이.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더 일에 집중한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더 아파왔다. 창 너머 캄캄해진 바깥을 한번, 11시를 가르키는 시침을 한번, 백현은 피곤한 듯 TV를 끄곤 커다란 소파에 털썩 누워버렸다. 쉼없이 내리는 빗소리는 점점 아득해지고 그렇게 잠에 빠져갈 때 즈음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나즈막한 진동 소리를 내며 울려댔다. 손을 뻗어 거절로 넘기려는데 액정 위에 모르는 번호가 반짝 거리며 빛을 발했다. 백현은 괜한 생각을 떠올린다. 혹시나 하는.
결국 그는 전화를 받는다.
“네, 변백현입니다.”
[…….]
“..말씀하세,”
[..나 좀 도와줘, 백현아.]
“…….”
[한번만 도와주라, 제발….]
*
내가 짐을 가지고 택시를 타고 간 곳은 집에서 거리가 있는 허름한 여관이었다. 얼굴에 잔뜩 묻은 눈물자국을 벅벅 닦으며 남자들이 했던 말들을 생각해보았다. 오천. 오천만원을 갚아야한다고 했다. 엄마는 없어졌고. 연락을 해보고 싶었지만 전원을 끈 휴대폰은 장롱 속 비밀금고에 있었고 나는 그 집으로 다시 갈 용기가 없었다. 내가 가진 건 소량의 옷가지와 생활용품들, 그리고 주머니 속 구겨진 변백현의 명함이였다. 나는 성실하다면 성실하게 큰 욕심 없이 내 삶에 충실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대체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하는지 억울했다.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합니다.’
여관 전화로 엄마의 번호를 하염없이 눌러보았지만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고 소리샘에 음성을 수십통 남겨놓았지만 어느날 엄마의 전화번호는 바뀌어있었다. 번호가 바뀌었다. ..이해한다.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엄마는 가족이 있으니까, 책임져야할 사람이 있으니까… 나를 애써 합리화 하며 달랬다. 가게에까지 해코지 할까 싶어 다음날이 되자마자 매니저에게 전화해 그만두어야겠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전화선을 뽑아놓았다. 번호를 딱히 외우려고 했던 적은 없었지만 매니저 번호를 외우고 있었다는게 신기했다. 아빠 번호는 못 외웠는데.
비가 왔다. 여관에 틀어박힌지 4일 정도 된 후였다. 혹시 내 휴대전화로 엄마가 바뀐 번호라던가 메세지를 남겨놓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집을 가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여관에만 있다가는 엄마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고 또 엄마가 지금 무사히 있는지가 뼈저리게 궁금했다. 그래서 다시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고 다행히 그 날은 아무도 주위를 어슬렁대고있지 않았다. 혹시라도 집 앞에 있을까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도 조심스러웠다. 소리나지 않게 살금살금 올라가서는 문에 귀를 대보았다.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고장나있는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안에는 누구도 없었고 그들 중 한명이 금방이라도 집에 올까 빠르게 휴대폰만 가지고 나오려 장롱 쪽으로 발을 뗀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따님 드디어 모습을 비추십니다.”
“…….”
“한참 기다렸어요, 언제 오실까하구. 이 씨발년아.”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어떤 남자가 내 머릿채를 잡아 바닥에 집어 던졌고 나는 침대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쳤다. 으으, 신음을 흘리며 침대 옆에 쓰러져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엄마를 찾아오든가, 돈을 갚든가. 술집년이라 몸으로 떼우는게 익숙한가? …한참을 험한 말을 내빝더니 그들은 종이 한장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집 다 뒤져서 인감 찾아갔더니 계약서를 지장으로 찍었더라고. 나머지 우리 열심히 갚자, 응?”
내가 일어나려고하자 남자는 내 배를 강하게 발로 차고는 널부러지듯 쓰러진 나의 손을 제멋대로 들어 손가락에 빨간 인주를 가져다댔다. 지장은 찰나에 찍혔고 나는 순식간에 팔백 남짓한 이 집의 보증금을 빼앗겼다. 나는 그저 기침을 해대며 그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자, 그럼 사천 이백 남았네? 기간은 이틀 줄게. 이틀 내에 사천 이백을 만들어오는거야.”
“…….”
“엄마를 찾아서 갚으라고 하든 이틀 뒤에 니 힘으로 만들어서 바치든, 알았지?”
“…….”
“말했다, 나는. 이틀 뒤라고. 그 날도 못 갚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자. 응?”
그들은 침을 몇 번 바닥에 뱉고는 집을 나갔다. 그렇게 내 집이 사라졌다. 몸을 일으키자 배에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장롱으로 향해 안에 있는 비밀금고를 열어 휴대폰을 켜보았지만 배터리가 없어 켜지질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한참을 울었다. 내가 잘못한게 뭔지 궁금했다.
울음이 겨우 진정된 후에야 나는 집을 나올 수가 있었다. 아직도 비가 오고 있었다. 비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으니까. 어디로 가야 그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 아까 그렇게 울었지만 서러운 마음은 여전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채로 하염없이 길을 걷다 공중전화 박스를 발견했고 나는 비라도 피하려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여지껏 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네 명함이 기억났다.
백현은 평소보다 조금 더 거칠게 차를 몰았다. 비가 쏟아지듯 내려 시야가 불안했지만 그래도 상관 없었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백현은 무어라 생각도 하기 전에 이미 차키를 챙겨 문을 나섰고, 주소를 듣자마자 전화를 끊고 네가 있다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과속 카메라에 수십번은 찍혔을만큼 악셀을 밟은 백현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한 장소 근처였다. 와이퍼는 빠르게 움직였고 백현은 그 사이에서 어렴풋이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오는 여자의 실루엣을 본다.
“…….”
한에리였다. 비에 온 몸이 젖은 그녀가 백현의 차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뒷좌석의 우산을 들고는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2주하고 3일만에 보는 그녀는 비에 한껏 젖어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우산 아래 얼굴이 새하얗게 창백해진 얼굴이 보인다. 껴안아주고 싶었지만 우산을 씌워줘야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묻고 싶은게, 알고 싶은게 너무 많았지만 백현은 우선 그녀를 차에 태우고는 제 겉옷을 벗어 다리 위에 덮어주었다. 따뜻한 차 안에 들어와 겨우 생기를 되찾으려하고있는 그녀의 입술이 작게 움직인다.
“...고마워.”
“일단 집으로 가서 얘기해. 너네 집 어디야.”
“나 집 없어.”
“뭐?”
“...쫒겨났어.”
그녀는 무릎에 덮힌 백현의 따스한 겉옷을 만지작 거리며 대답했다. 쫒겨났어. 백현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게 무슨 말인지 물어보고 싶지만 물에 빠진 생쥐꼴인 그녀를 먼저 어떻게 해야할 것 같아 그는 핸들을 돌려 자신이 왔던 길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우선 급한대로 자신의 집으로.
극적인 재회라면 재회였고 반복된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녀는 제 몸이 따뜻해지고 정신이 돌아오자 변백현에게 전화를 한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때 그렇게 칼같이 쳐내놓고 지금와서 도와달라 전화를 했다니… 얼마나 나를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을까. 제 전화에 곧장 달려와준 그가 고맙기도 했고 왜 그렇게 바로 왔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고 한번만 참을 걸 반성하기도 했다.
창문 밖으로 백현의 오피스텔 건물이 보였다. 내가 살고 있는 빌라촌과는 차원이 달라보였다. ..내가 정말 미쳤지, 아무리 전화할 사람이 없어도 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는건데. 왜 나는 내 스스로 수치스러운 짓을 벌여야만 했을까. 왜 나는 변백현의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을까, 왜 나는 너에게 전화를 해야한다고 생각했을까.
백현이 능숙하게 차를 세웠고 에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닥에 넘어져버리고 말았다. 아까 누군가에게 맞고 하도 긴장을 했던 탓인지 차를 타고 오며 다리 힘이 잔뜩 풀려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괜찮다며 스스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맘대로 쉽지가 않았다. 백현이 업히라며 등을 내보였지만 그녀는 끝까지 혼자 일어날 수 있다고 끙끙 대며 바닥을 짚었다.
“고집 부리지말고, 한에리.”
“아냐, 나 진짜 괜찮, 아읏.”
결국 변백현이 그녀를 공주님 안기로 들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백현의 목에 손을 둘러야했고 이 상황이 창피스러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그녀의 발목과 손목 군데군데에 멍이 있는 걸 보았다. 백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씻고와. 앞에 입을 옷 둘테니까.”
“..그래도 돼?”
“도와달라며, 니가.”
그 말에 대답 없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쪽팔렸다. 들어온 화장실은 내가 살던 집보다 1.5배는 더 큰 것 같았다. 당연히 좋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더 좋은 듯한 집에 그녀는 얼굴이 벌개질정도로 수치스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쪽팔림의 연속. 내 선택, 이 상황, 화장실에 들어와있는 나, 날 데리러 온 너, 모두가 날 쪽팔리게 만들었다. 대체 왜 나는 전화를 했을까. 돈을 빌리려고? 아니면 있을 곳이 없어서? 누군가 내 영혼을 조종한 것처럼 홀린 듯이 전화를 걸고 말았던 나를 후회한다. 그러나 그를 본 순간 안도감과 반가움이 들었던 것은 그녀 스스로 부정하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그녀가 제 몸보다 훨씬 큰 그의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 그녀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꾹꾹 누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백현을 힐끔 본다. 보송보송한 그녀의 얼굴에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백현의 눈길이 떼어지질 않았다. 맨 얼굴도 저렇게 귀여웠구나.
“이리 와 앉아.”
“…응.”
반바지를 입은 그녀의 다리에 푸르스름하게 멍이 여기저기 들어있었다. 백현은 인상을 한번 찌푸렸다. 도대체 뭘 하고 다녔길래 다리에 저렇게 멍이…. 그녀가 조심스레 백현의 옆에 앉았다. 고개를 숙인 채 부끄러운지, 아니면 미안한지 그를 잘 쳐다보지 못했다.
“……미안. 갑자기 전화해서.”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들릴 듯 말듯 말하는 그녀. 백현이 아무 말도 없자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제서야 백현은 나지막하게 묻는다.
“일은 왜 그만 뒀어.”
“어, 니가 어떻게 그걸…?”
“어제 니가 일하는 데 갔었어. 도저히 안되겠어서.”
“…….”
뭐가 도저히 안되겠었는지 모르겠으면서도 알 것 같기도 한 마음에 가만히 백현을 쳐다보기만 했다. 내 상황을 설명하려면 어디서부터 말해야할 지 막막했다. 내가 끝내 변백현 너에게 전화를 해버린 그 이유를 말하려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부터 말해야할지도 몰랐다.
“엄마 빚 때문에 잠깐 그만 둬야했어. ...자세하게는 못해. 얘기가 길어.”
“해봐.”
“너가 별로 듣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닐거야.”
“아니, 듣고 싶어.”
“…….”
“해줘.”
변백현의 말에 별안간 두려움이 저 속에서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는 ‘나’의 이야기였다. 누군가에게 내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니. 심장박동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뭐, 이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정상적인 심장박동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어디서부터 말을 할까, 더듬더듬 첫부분을 찾아 머뭇거리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 그녀가 처음으로 시도한 일이었고 처음으로 그녀가 쌓은 관계론을 어긴 일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부모님 사업이 잘 안됐었어. 그때 이혼하셨고 난 혼자 지내야했었어.”
“혼자?”
“어. 아무도 안챙겨줬었거든. 그래서 집도 잘 안들어갔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따로따로 각자의 삶을 살았어.”
나 이래도 괜찮은건가. 내가 괴롭혔던 애에게 이런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게 죄책감이 들었다. 변백현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나 자신을 갉아먹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 안에서 회오리 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편안했다.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이 이야기를 변백현에게는 해도 될 것 같다는 바보같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느끼는 안정감이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빠짐없이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녀가 얼마나 아픈 삶을 살아왔는지 새겨넣듯 들었다. 이야기를 하다 서러움이 북받칠때면 얇은 목울대가 움직이며 눈물을 꾹 참으려는 게 눈에 선했다. 안아주고 싶다. 그녀를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싶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느라 말이 멈출때면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노라고 고백하고 싶었다. 그 여린 눈망울을 보면서.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시간이 꽤 오래 지나있었다. 백현에게는 이틀 후까지 돈을 만들어야한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마지막 자존심이 그걸 용납하지 못했다. 정말 밑바닥까지 닳고 닳다가 마지막 한 칸 남은 나의 자존심이. 사실 도와달라고 전화를 걸었던 건 그것 때문이면서. 그녀는 차라리 얘기를 시작하지 말걸, 생각하며 갑작스레 하던 말을 끊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 이제 일어나야겠다. 내 얘기는 대충 이정도야.”
“아직 얘기 안한 거 많잖아. 그래서 빚이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까지 갚아야되는지.”
“그건... 그러니까, 어떻게든 만들 수 있어. 금방 갚을거고. 너가 신경 안써도 되는거야.”
“내가 말했지, 너 거짓말에 소질 없다고.”
“…….”
“신경 안쓸테니까 말해, 얼른.”
“..아냐. 나 이만 가볼게. 오늘 진짜 고마웠어, 미안했고.”
그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지금쯤이면 방 안에 걸어두었던 옷도 다 말랐을거다. 그러나 백현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도와달라고 했던 건 너야, 한에리.”
“…….”
알아, 안다고. 그리고 지금은 미치도록 후회중이고. 내가 왜 너한테 도와달라고 전화를 해선 내 얘기를 다 해버렸지? 왜 항상 일을 벌려놓고 후회하고 다시는 그러지않겠다고 다짐해놓고 또 반복해버리는걸까. 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미안하다며 눈에 띄지 않게 숨어살아도 모자를 지경에 도와달라며 청승맞은 얘기까지 줄줄이 늘어놓고. 이제와서 돌이키고 싶은 마음은 내 욕심이겠지.
“..미안, 내가 괜히 너한테 전화했던 것 같아. 정말 미안... 나 그냥 갈게.”
“이 시간에 어딜 가?”
“택시타고 아빠네 집 가있으면 돼.”
“아버지랑 연락도 안된다며, 너.”
“…….”
백현은 자꾸 그녀 자신이 만들어놓은 선에 다가가려하면 화들짝 놀라며 도망가기에 바쁜 그녀를 답답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다가가면 갈수록 그녀는 그 전보다 더 깊숙히 숨어들었다. 도저히 가까워질 수가 없게. 그는 그녀의 손목을 더 꽉 잡았다.
“알았어. 아무것도 안물어볼테니까 그냥 여기 있기만 해, 그럼.”
“난 너가 집에 데려와준것만으로 충분해. 더 신세지면 내가... 힘들 것 같아.”
“니가 힘들게 뭐가 있는데. 그냥 여기 있기만 하라는데.”
“이제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근데 아직도 죄책감이 들어. 니 얼굴 보는게 힘들어..”
피하려고만 한다. 도대체 마음의 문을 열려고하질 않고 도망치려고만 한다. 널 포기하려고 했던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도저히 신경쓰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들어놓고는 이제와서 도망가려고한다. 나는 이렇게 너를 좋아하는데. 변백현은 그런 그녀가 안타까우면서도 화가 났다. 그는 그녀의 손목은 놓지 않은 채,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에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도 내가 싫어. 어쩌자고 전화를 해서는 이런 껄끄러운 일을 만들어버렸는지.
“내가 괜찮다잖아. 내가 괜찮다는데 니가 왜 죄책감이 드냐고.”
“...내가 너한테 미안한게 많아서 그래.”
“…….”
“아까 내가 너무 절박해서 널 보는게 힘들거란 생각까지 못했던 것 같아...미안해, 정말.”
화가 날 만도 할거다. 도와달라고 전화해선 신경 써줬더니 네 얼굴 보는게 힘들다고 하는 내가. 말했듯, 나도 이런 내가 싫었다. 그녀는 한쪽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는 백현을 보며 제 손목을 잡은, 남은 그의 한쪽 손을 밀어내었다. 이제 정말 끝이야. 이제 정말… 다시 만날 일은 없을거야.
그러나 백현은 그녀의 손목을 놓기는 커녕 더 강한 힘으로 붙잡아왔다.
“그렇게 미안하면 참아.”
“……뭐?”
“옛날에 내가 널 참았듯이 이젠 니가 날 참으라고.”
나는 더 이상 못참겠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백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겨 무작정 자신의 품 안으로 껴안았다. 단단한 그의 품 안, 어느 때보다 가까이 닿은 살결. 변백현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너 좋아해, 아직도.”
“…….”
“그게 니가 날 참아야 할 이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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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o - Bad Bl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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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못와서 죄송해요...정시준비 실기준비 ㅈ같아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치만 독자님들을 보며 힘내는 1人(☞☜)
솔직히 오늘 분량 좀 괜찮지않았나요? 칭찬해죠
+ 암호닉 신청은 최근편에 해주세용♥ 암호닉 신청해놓고 자주 안오면 미워하꼬얌
++추천과 댓글은 작가의 힘이에요..(애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