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의 법칙_05] “누나, 어제 잠 못잤어?” “음... 언제 끝났어...” 가까스로 반쯤 뜬 눈 사이로 보이는 건 대체 뭘 쓴 건지 알아볼 수조차 없는 글씨들이 널브러진 전공 책. 그리고 그걸 보며 기겁하는 박민균이다. 의도치 않은 밤샘과 숙취. 거기에 흡사 자장가 같은 교수님의 목소리까지 더해진 결과는 역시나였다. “일단 발표 과제는 다다음 주까지래. 이거 비중 커서 안하면 아예 그냥 F라더라.” “아... 얼른 해야겠네. 땡큐땡큐...” “근데 나도 오늘 졸아서 과제얘기밖에 제대로 못 들었는데 큰일났네.” “어떡하지, 에타에라도 물어볼까?” “아니야. 그래도 내가 필기는 좀 했으니까 다음 주에 보여줄게. 가자.” 이거 혼자 들었으면 진짜 큰일날 뻔했다. 민균이한테 밥 한번 사야겠다고 다짐하며 찌뿌둥한 몸을 겨우 일으켜냈다. 짐을 챙겨 강의실을 나서는 민균이를 바짝 뒤쫓는다. “어제 너 희망이 아파서 못 온 거라며.” “응... 나도 가고 싶었는데...” “희망이는 어떻대, 괜찮대?” “안 그래도 아까 아침에 창윤이 형도 물어보던데, 다행히 그냥 가벼운 감기래.” 이창윤과 떨어져 듣는 몇 안 되는 수업. 첫 오티 날 혼강할 생각으로 들어간 강의실에는 반갑게 손을 흔드는 민균이가 있었다. 민균이를 처음 본 건 작년 창윤이 휴가 때. 역시나 이승준이 데려왔다. 어쩌다 같은 과 후배를 타과생에 의해 알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제 재밌었겠다. 늦게까지 놀고.” “야, 말도 마. 이승준 이창윤 둘 다 취해가지고.” “승준이 형은 그렇다치고, 창윤이 형도?” 전공책을 고쳐들며 고개를 끄덕이면, 왜일까. 커다래진 민균이의 눈에 아쉬움이 서린다. “아, 아쉽다. 오랜만에 창윤이 형 취한 거 볼 수 있었는데.” “...그걸 봐서 뭐해?” “형 취하면 완전 귀엽잖아.” “그게 어딜 봐서 귀엽냐? 실실대기만 하는데.” 그리고 어젠 취했는데도 딱히 그러지도 않던데. 그렇게 말하려다 그냥 뒷말은 꾹 삼켰다. “왜, 귀여운데.” “그럼 다음에 또 취해달라고 하던가.” “형 원래 그 때까지 잘 안 마시잖아, 누나 챙긴다고.” 내 뻘소리에도 진심으로 받아친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은 그 투덜거림이 흘려듣던 말 중에서도 유난히 귀에 꽂힌다. 그러면 어제의 기억이 또 다시 떠올라서, “...에이, 그냥 예전에 하도 마셔서 질린 거지 뭘 또.” “그런가? 그래도 어쨌든. 창윤이 형이 유독 누나 잘 챙기는 건 맞잖아.” 이를 떨쳐내려 던진 말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래? 난 잘 모르겠, ...어. 죄송합니다.” 그렇게 정신을 빼놓고 있던 결과,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내가 잘못 걷다 부딪친 건데 오히려 상대는 떨어진 내 전공책을 주워준다. “아 제가 주워야 되는 건데... 감사합니다.. 어,” “......” “효진 오빠?” “...어, 여주였네. 어디가?” “아 전 수업 끝나서 이제 밥 먹으러... 맞다 그, 옷은... 아직 안 말라서 내일 꼭 갖다드릴게요. 오빠는 어디 가세요?” 나는 학회실에 잠깐, 천천히 줘도 돼. 미소지은 얼굴이 순식간에 내 가슴을 설렘으로 가득 채운다. 어제 새벽 그 시간과 공기를 다시금 재현하는 향. 불과 몇 시간만에 다시 보는 김효진이다. 난 숙취에 잠도 못 자서 이 모양 이 꼴인데 김효진은 오히려 더 말끔해졌다. 두근거림을 뒤로 하고 그런 그를 눈에 담았다. 예쁘게 웃는 모습. 뭔가 생각난 듯한 표정. 무언갈 꺼내는 모습까지. “나도 너 만나면 주려고 했는데. 이거.” “네?” “머리 아플 것 같아서.” “...아.” “승준이가 너 숙취해소제 싫어한다고 하길래 맛 괜찮은 걸로 고른다고 고르긴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 “내가 이런 걸 잘 안 마셔봐서.” 내 손에는 숙취해소제 두 병이 쥐어졌다.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고 마음은 잔뜩 부풀어오른다. '머리 아플 것 같아서.' 그 말과 함께 귀엽게 자신의 머리를 톡톡 치던 모습이 아른거려 웃음이 입가에 가득 번진다. “감사합니다... 어, 근데 왜 두 개예요?” “어제 창윤이도 많이 마셨던 것 같길래. 이따 만나면 전해줘.” 이창윤 걔는 뭐가 예쁘다고 챙겨줘요.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기분좋게 뛴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완벽할 수 있을까. 다정함을 사람으로 표현한다면, 그건 김효진이 아닐까? “뭐야, 어제라니? 그리고 누나 저 형 어떻게 알아?” “너도 효진 오빠 알아?” “당연하지. 우리랑 같은 과잖아.” 김효진이 자리를 뜨자 예상대로 박민균은 질문세례를 퍼붓는다. 그렇게 어제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이승준이 김효진을 부른 이유가 내가 그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는 것만 쏙 빼고. “신기하네. 효진이 형 원래 술자리 잘 안 간댔는데.” “진짜?” “엉. 학생회 회식같이 꼭 가야되는 자리만 간다더라. 술을 잘 안 먹나봐.” 정황을 다 듣고 난 후에야 의외라는 듯 중얼거린다. 어쩐지. 어제 맥주도 입에 잘 안 대긴하더라. 술은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왠지 김효진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아 기분이 좀 좋아졌다. "...근데 누나.” 그런데 박민균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게 깐다. 아무래도 영 불길하다. 혹시나 ‘저 형 좋아하지’ 라는 말이 튀어나올까 바짝 긴장이 되고. 숨을 들이키고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순간, "나도 저 형이랑 친해지고 싶어!" 안도감과 허탈함이 섞인 헛웃음이 지어진다. 순간 이창윤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제일 단순한데 또 제일 예측하기 힘든 게 박민균이라던 말. 생각해보면 그동안 내가 무시했던 이창윤의 말들 중 뭐 하나 틀린 게 없다. ...앞으로는 잘 새겨들어야지. “뭐야, 벌써 끝났나?” 다음에도 불러달라, 자기도 같이 만나게 해 달라 졸라대던 박민균을 겨우 보내고 힘들게 왔건만 이창윤이 있어야 할 강의실엔 아무도 없다. 설마 오늘 휴강이었나? 생각했는데 아까 민균이가 아침에 봤다고 한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고. 설마설마 하는 생각에 핸드폰을 꺼내 이창윤 번호를 누르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이쯤 됐으면 이런 장난을 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는 걸 잘 알 법도 한데, “밥 먹으러 가자.” “...야.” “너네 수업 왜 맨날 늦게 끝나.” 또 당하고 말았다. 자신의 손가락에 볼을 찔린 나를 보고 뭐가 재밌는지 웃는다. 어제 뒤척이다 잠도 못 잤던 내가 참 한심하게 느껴진다. 이제야 좀 원래 이창윤 같네. 언제적 장난이냐며 짜증을 확 내려다 대신 들고 있던 숙취해소제를 냅다 들이밀었다. 이거나 마셔 하고. “뭐야?” “효진 오빠가 준 거야. 너랑 나 마시라고.” “너 이거 안 마시잖아.” “뭐 그렇긴 한데 이건 맛 괜찮던데?” 창윤이 말대로, 사실은 맛이 별로라는 이유로 다음날 숙취해소제 대신 이프로 같은 걸로 때우곤 했으나 김효진이 준 건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인가, 아니 짝사랑의 힘. 그런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창윤의 동그란 입술이 묘하게 나와있다. 삐졌을 때 나오는 표정인데 저거. 갑자기 왜지? 그러더니 숙취해소제 뚜껑을 따며 묻는다. “그래서, 어젠 잘 들어간 거야?” “그치. 어제 네가 긱사 키 갖다줬잖아. 그러고 바로 올라갔는데?” “아... 그랬지. 아니 올라가서 잘 잤냐고, 그 말이지.” 생각이 딴 데 가 있는 사람처럼 잠깐 당황한다. 응 잘잤지 뭐. 나 역시 사실은 어젯밤 뒤척이다 잠을 설쳤기에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나에게서 무언가 발견한듯한 이창윤이 웃음을 겨우 참아낸다. “잘 못 잔 것 같은데. 졸았지?” “...아닌데?” “반응보니까 맞네.” “아니야. 나 원래 수업은 열심히 들어.” 그걸 얘가 어떻게 알았지. 눈치 한 번 되게 빠르네. 시치미를 떼 보지만 말이 빨라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럼 이건 뭐야?” 이창윤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가오길래 뭐, 뭐가. 잠시 주춤하는데 그대로 내 볼에서 볼펜자국을 닦아낸다. ...오늘도 뿌렸네 이 향수. 손목에서 훅 풍겨오는 시원한 향에 잠시 망각하고 말았다. 그걸로 인해 이창윤에겐 날 두고두고 놀릴 거리가 하나 더 적립되어버렸다는 걸 말이다. “딱 보니까 박민균 일부러 안 알려준거네.” “그만하지?” ...안 그래도 그러고 김효진이랑 얘기했다는 거 하나로도 창피해죽겠으니까. 기어이 내 살벌한 미소까지 보고나서야 신나서 웃던 이창윤은 꼬리를 내리고 숟가락을 든다. 여기는 24시 국밥 집이다. 둘 중 한명이라도 전날 술을 마셨다하면 다음 날 꼭 여길 오곤 했다. “요즘 여기 자주 오는 것 같다.” “...이제 금주해야지.” “올해들은 말 중에 제일 웃겼어.” 술 마신 다음날 해장은 필수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하여 생긴 일종의 암묵적인 룰이다. 또 다시 내 심기를 살살 건드는 말을 깍두기 씹듯 잘근잘근 씹고 고개를 들었다. “머리랑 속은 어때. 아파?” “아프다고 하면 좀 걱정해주나?” “아니 내가 왜? 혼자 맥주 먹다 갑자기 소주로 갈아탄 게 누군데. 그럴 거면 애초에 나처럼 처음부터 마시던지.” “취해서 나 더 먹이자고 부추기고, 내 맥주잔에 소주 들이부은 게 누군지는 기억 안 나고?” 순간 스치는 기억에 찔려서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웃는 창윤이의 눈을 피했다. “넌 취하면 맨날 까먹더라.” “맨날이 아니고 가끔 그런 거야. 아 왜 그랬지. 효진오빠도 있는데...” 웃으며 숟가락을 들던 창윤이의 손이 내 말에 잠시 멈칫한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중요하지 그럼. 나 많이 별로였어? 막 이상한 말 하고 그러진 않았지?” “...몰라. 기억 안 나.” 뭐야. 왜 또 표정이 별로인건데. 왜 모르냐고 되물으려했는데 숟가락을 내려두는 창윤이의 얼굴엔 묘하게 서운함이 배어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 먹었으면 가자.” 이창윤은 앞에 놓인 물을 들이키더니 계산하러 자리를 떠버린다. 나도 모르는 새 걔가 꺼내놓은 이프로 캔만 내 자리에 놓여있다. “뭐야 이창윤, 오늘은 내가 산다니까...” “있잖아 우리.” “어?” “오랜만에 저거 찍을래?” 이프로를 들고 어물쩡 따라나왔는데 멈춰서서 어딘가를 보던 이창윤이 묻는다. 그가 느닷없이 가리킨 곳은, “뭐? 갑자기?” 나온지 꽤 됐는데 아직도 많이들 찍는다던 인생 네 컷이었다. 아 오늘 상태 별론데. 아까 그 서운한 표정이 마음에 걸려 거절도 못했다. 그래도 이걸로 기분 좀 풀어지면 그걸로 됐지 뭐. 얼굴상태가 썩 맘에 들진 않지만 대충 확인하곤 촬영 화면을 바라본다. 그러면 문득, 자동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다. ‘이거 나랑 찍어.’ 그 기억은, 교복차림의 나와 이창윤. 5년 전 그 때로 되돌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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