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의 법칙_06] 5년 전으로 돌아가 때는 이창윤을 처음 만났던 2017년 봄. 이미 벚꽃은 지고 더운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5월의 초입이었다. “하나씩 뽑고 나와서 자기 번호에 이름 적으세요.” 예고도 없이 자리를 바꾸겠다는 담임의 말에 교실은 술렁였다. 전학 온 지 일주일. 유일하게 말을 튼 건 지금의 짝꿍뿐이었던 나에겐 그 소식이 그리 달가울 리 없었다. “15번? 너 이번에도 맨 뒤야?” “그러게. 또 뒷자리네.” “부럽다. 짝은... 아직 없네.” 게다가 짝꿍의 말대로 내 옆자리가 될 16번은 아직 빈칸이었다. 누가 되려나. 그냥 무난하고 조용한 애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3분단의 한 남자애에 의해 16번 칸이 채워졌다. 이름 좀 보려했더니만 남겨진 글씨는 한 눈에 알아보기 어려울만큼 악필이었다. 하는 수 없이 해석하기를 포기하고 그 짙은 갈색의 동글동글한 뒷통수를 바라봤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창윤] 자리를 옮기며 흘긋 본 명찰에는 그렇게 휘갈겨져 있었다. 눈이 마주치니 어색하게 말을 붙여온다. 안녕, 그래 안녕. 대충 인사를 받고 앉으려는데, “그, 전학... 맞나?” 그 다음 건넨 말이 그거였다. '전학생 맞지?'도 아니고. '일주일 전에 전학 온 애'도 아니고. '그 전학'.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데 명찰을 내려다보더니 아 미안,하며 멋쩍은 듯 웃는다. 무표정일 땐 몰랐는데 웃는 게 꽤 귀엽다. 뭐라 대답하기도 뭐해서 그냥 짧게 따라 웃었다. 그게 이창윤과의 첫 만남이었다. 짝이 바뀐 것 말고는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인사를 나눈 뒤론 한 마디도 못해봤는데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 어느새 나른해지던 6교시였다. “...이게 다 뭐야?” 그런데 갑자기 내 책상 오른쪽 끝에 줄 세우듯 빵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한 이창윤. 뻔히 앞에 놓인 그것들이 뭔지 모르는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 갑작스런 행동이 당황스러워 그렇게 물었다. “어떤 거 먹을래?” “뭐?” “난 이거 추천. 이게 제일 맛있어.” 아 근데 이것도 진짜 맛있는데. 아니다 그래도 이게 제일. 혼자 고민하더니 그 중 가운데 빵을 들어 내 책상 가운데에 놓는다. 뭐지? 아, 혹시 선생님이 반 애들 나눠주라고 시킨 건가? “애들 다 나눠주는 거야?” “아니? 너만 주는 건데.” 당연하다는 그 대답에 눈만 깜빡였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 이유를 찾았다. 분명 나눈 대화라고는 통성명이 다였는데. 굳이 찾아 끼워 맞춰보자면, 아까 ‘그 전학’이라고 부른 게 미안해서라던가, 혹은 5교시 수업 때 내 배에서 났던 꼬르륵 소리를 들었다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두 가지가 다일 텐데 말이다. “그럼 하나면 되지, 이걸 왜 이렇게 많이...” “이 중에 안 먹는 거 있을 수도 있잖아.” 아니 그래도 그렇지. 매점의 빵이란 빵은 다 털어온 걸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게다가 또 어차피 자기가 골라줄 거면서. 그래도 걔가 추천해 준 그 빵은 먹어본 것 중에 제일 맛있었다. 그래서 아까처럼, 이번에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수업대신 자습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길래 간만에 집중해서 공부 좀 해보려는데 오른쪽에서 자꾸만 거슬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집중한 모습의 이창윤이 보였다. 그런 모습은 또 처음이라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이어폰을 꽂은 채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는 걔의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음악소리였다. 저기, 불렀으나 듣지 못한다. 손바닥을 펴 눈앞에 휘저었다. “저, 이창윤?” “어? 왜?” “그 노랫소리 말이야.” “너도 들을래?” 소리 좀 줄여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악의없는 눈으로 이어폰 한 쪽을 내민다. 당황한다. 그러자 이창윤이 웃으며 손수 내 귀에 이어폰 한 쪽을 꽂아준다. 그러니까 이게... 뭐지? 내가 어쩌다 얘랑.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와 함께 머릿속에는 물음표들이 잔뜩 그려졌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노래 좋다.” 우습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처음 듣는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 그 말에 걔가 웃는 것도. 그래서 자습시간이 다 지나도록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그런 내 자신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냥 이창윤이 귀찮게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드는 이상한 애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루는 수업이 모두 마친 방과 후였다. 이번 주 청소당번이었던 나는 복도 청소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교실 문이 미처 닫히지 못하고 약간 열려있었다. 틈 사이로 내 자리 주변에 모여있는 몇 남자애들이 보였다. 보아하니 쉬는 시간마다 내 자리 주변으로 모여드는 이창윤의 친구들인 것 같았다. 들어가려고 문에 손을 얹는데, 들려오는 내 이름에 멈칫했다. “근데 창윤아, 너 전학생이랑 꽤 친해진 것 같더라?” “그러니까. 어떻게 친해졌냐. 난 걔한테 말 못 걸겠던데 맨날 무표정으로 다녀서.” "맞아. 뭔가 말 걸면 무시할 것 같은 스타일이잖아.” 제각각의 목소리로 동의하는 어조가 오갔다. 뒤에서 얘길 듣는 기분은 아무래도 별로 좋지 않았다. 이런 것에 의연하게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음과는 다르게 도무지 들어갈 용기가 생기지가 않았다. 그대로 올렸던 팔을 떨구고 뒷문에 기대어 섰다. 그 때였다. “안 그래.” 또렷한 이창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 걸면 대답도 잘해주고, 잘 웃어.” “어... 진짜?” “너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래.” “그, 그런가? 의외네.” “예전에 나한테도 그랬잖아. 가만히 있을 때 차가워보여서 말 걸기 어려웠다고. 근데 아니었잖아. 똑같은 거지 뭐.” 자칫 이상해져버릴 뻔한 분위기가 웃음기 어린 창윤이의 마지막 말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맞다, 그랬네. 이창윤도 워낙 낯 많이 가려가지고. 하며 다들 와하하 웃는다. 동시에 내 입가에도 작은 미소 하나가 떠올랐다. ...점점, 마음속의 무언가가 움트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친구가 된 그 날은, 아마 단축수업을 하는 날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교실은 떠들썩했다. 앞자리에 옹기종기 모인 여자애들도 이따 뭐할까, 밥 먹고 인생 네 컷 찍으러 가자, 떠들며 한껏 들떠있었다. 내 귀에까지 들어오는 대화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 애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게 요즘 유행한다는 그건가. “...저, 너도 같이 갈래?” “어? 나?” 나도 모르게 그 쪽을 빤히도 바라봤는지 눈이 마주친 한 아이가 조심스레 말을 붙여왔다. 응. 우리 이따 끝나고 놀러갈 건데 같이 가자. 두어 번 말을 섞어본 기억이 있는 여자애들이었다. 불편할 거라는 생각에 평소 같으면 단박에 거절했을 테지만,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남자애들의 대화가 떠올라서였다. “좋아, 그럼 이따 로데오 정류장 앞에서 봐.” 전학 온 후 처음 잡힌 약속이었다. “어, 로데오 가? 나도 이따 애들이랑 거기서 놀기로 했는데.” “...진짜?” 매점에 다녀온 건지 초코우유 하나를 내밀며 자리에 앉는 이창윤이다. 앞서 우리 대화를 들었는지 빨대를 입에 물고선 싱긋 웃는다. “응. 진짜.” “...만날 수도 있겠다.” “만나면 인사하기.” “그래.” 괜히 기분이 좋아서 약속장소에 15분이나 일찍 와버렸다. 그런데 벌써 정류장에서 기다린 지도 30분 짼데 아무도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 짧은 대화로만 잡힌 약속이라 연락수단이 있을 리 없었다. 5분만 더 기다려보자, 아니 10분만 더. 기다려도 오지 않는단 걸 50분 만에 깨달은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왠지 씁쓸한 기분에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앞에 탁 멈춰 섰다. “왜 너 혼자 여깄어?” “...이창윤?” “애들은,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아직. 아마... 한 40분 지났나.”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얼떨떨하게 대답하는데 이창윤이 내 어깨 너머 정류장 뒷편으로 무언갈 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너,” “......” “이거 나랑 찍어.” “뭐?” 그리곤 무작정 날 어디론가 끌고 들어간다. 야 이창윤! 어디가! 저 멀리 모여 있던 친구들이 창윤이를 불렀지만 미안 다음에 맛있는 거 살게! 하며 딸랑 문을 연다. 아까 여자애들이 얘기하던 그 인생 네 컷이었다.내가 뭘 물을 새 없이 이미 촬영 부스 안으로 들어온 후였고, 걔는 내 머리 위에 머리띠 하나를 우스꽝스럽게 얹어주었다. “이게 무슨,” “이거 되게 금방금방 찍혀.” “뭐?” “그러니까 포즈 빨리 생각해 놔. 그리고 다음에 가고 싶은 곳도.” 순식간에 찍혀진 사진처럼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피씨방 가서 게임하고,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고, 둘이서 떡볶이 3인분까지 먹고, 기어코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오니 금세 어두워진 바깥.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내다보다 문득 입을 열었다.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한 거야?” 왜냐면 단순히 친해지고 싶어서라기엔 내가 그리 살가운 스타일도 아닐뿐더러, “나보단... 애들이랑 놀고 싶었을 텐데.” 따라서 친구들과의 시간까지 포기하고 하루종일 나와 놀아준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던 창윤이가 분홍색 스푼을 든 채로 날 바라본다. 스푼 위의 아이스크림이 녹을랑 말랑한다. “...걔네는 떡볶이 싫어해.” “뭐?” “아마 노래방도 같이 안 갈걸. 자기들 노래 못한다고.” “......” “저번에 내가 너한테 추천한 빵도 별로래.” 장난기 배인 그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근데 넌 좋다고 해줬잖아.” 그 대답이 지극히 이창윤다웠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피식 웃었다. 아이스크림 한 스푼을 떴다. “그게 이유야?” “그냥,” “......” “너랑 있으면 재밌어.” 입 안에 달콤함이 퍼진다. 우습게도 그 엉뚱한 대답이 마음에 든다. “그러니까 내일도 나랑 놀자.” 이제 막 다가오기 시작한 초여름 밤 특유의 공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가로등 밑을 걷다 아까 그 말에 대한 늦은 대답을 했다. “...좋아.” “어?” “좋다고.” “뭐, 뭐가?” “아까 네가 내일도 놀자며. 좋다고. 그러자고.” 그제야 그 대답을 이해한 이창윤이 따라 웃는다. 진짜? 약속한 거다? 그래. 앗싸 내일은 뭐하고 놀지. 그건 걔의 말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아주 잠깐동안 이창윤에게 품었던 감정에 대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걸 기점으로 그 마음은 곧 우정이 되었다. 그리고 이젠 친구가 아닌 이창윤은, 상상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왜?” 대충 머리를 정리하던 창윤이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는 내게 궁금한 듯 묻는다. “아냐, 얼른 찍자.” 한 번 찍힌 사진은 영원히 남는 것처럼, 아마 우리가 변함없는 친구라는 사실은 영원할 것이다. 또, 이창윤이 내게 있어 여전히 정말 많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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