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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냉정하게 떠나버린 박지민은 저를 찾아온 민윤기 선배와 룰루랄라 떠나버렸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필기를 다 끝냈는지 가방을 정리하며 나갈 준비를 하는 정호석이 보였다.
언제 또 저를 피할지 몰라 급하게 맨 앞줄로 내려가 정호석 앞에 섰다.
사람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라고 엄마가 몇 번을 말해줬는데도 그새 까먹은 나는 무작정 호석의 앞에 섰지만
무슨 말부터 건네야 할지 떠오르지 못해 그저 멍하니 서있었다.
"..할말있어?"
"아 그, 그게.. 그러니까"
아 진짜 멍청하게 말을 왜 더듬어서. 차마 고개를 못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자 저 뒤에서 동기들이 인사를 건네는 소리가 들려왔다.
탄소야 잘가, 호석아 너도! 인사는 받아야겠어서 삐그덕거리며 고개를 올리자 내 눈 앞에 보인건
"응 너도 잘가고."
하며 환하게 웃은채 손인사까지 해주는게 아닌가. 순간 사과를 하러 왔다는걸 새까맣게 잊은채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뭐야 너?"
"뭐가."
"또, 또 정색. 너 아까는 웃으면서 인사 해주더니 나한테는 왜그러는데?"
"..."
"싫으면 싫다고 말해. 그렇게 사람 무시하지말고. 아는척 안해줄테니까."
그렇게 생각없이 쏘아붙이다 씩씩거리며 강의실을 빠져나와 캠퍼스 안쪽에 있는 쉼터 벤치에 앉았다.
사과를 해도 모자랄판에 징징대다 화내는 꼴이라니. 하여튼 욱하는 성격 고쳐야돼 진짜.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다 날 정신차리게 해준건 바로 박지민의 전화.
"어 지민아, 왜?"
-너 어디야?
"아까 강의실 있던 건물 뒤쪽 쉼터에. 왜?"
-어, 아냐 아무것도. 너 거기서 움직이지마. 알겠지? 꼭이다!
오늘 왜이런담 정말. 제 할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지민이 덕에 어정쩡하게 일어나있던 나는 다시 벤치에 털썩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혹시 박지민이 여기 오려는건가. 이미 다 마셔버린 파란 음료 캔을 찌그러트리며 손장난을 치는데 내 뒤쪽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툭 쳤다.
역시 박지민이 내 기분을 알고 와준걸꺼야! 하며 방긋 웃으며 뒤돌았을땐 박지민도, 친한 동기도 아닌 바로 정호석이었다.
"지민..!아.. 가 아니구나. 하하. 호석아, 무슨 볼일 있니?"
"..."
내가 잘못한게 무수히도 많았기에 얼굴을 보자마자 꼬리를 내렸다. 어째서 정호석이 여기에. 왜. 뭐때문에?
공간스런 혼란을 느끼며 호석이를 올려다보니 말없이 날 빤히 쳐다보던 호석이 자리를 옮겨 내 옆자리에 앉는것이었다.
"..그, 혹시 많이 화났어?"
날 찾아온것만으로도 모자라 내옆에 앉기까지한 정호석이 심지어 되려 나보고 화났냐고 물어본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말이 안나온다 그랬던가. 벙쪄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내가 화났다고 느꼈는지
정말 정호석 답지않게 소심모드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아, 어떡하지. 너 진짜 기억 못하는거야?"
"..뭘?"
한참을 말하기 뜸들이던 호석이 진짜 기억 못하는거냐며 내게 물었다. 차마 삼키지 못한 침이 흐를까 급히 삼키고 난뒤
난 정말 기억이 나질 않아 조심스럽게 뭐냐고 물었다. 호석이는 머리를 두어번 헝클이더니,
"하.. 너 싫어하는거 아냐. 그냥, 네 얼굴 똑바로 마주치기 힘들어서 그래."
뭐야. 그럼 내 얼굴이 보기 힘들정도란건가? 심각한 고뇌에 빠져 헛된 상상만 하고 있을때쯤
귀 끝까지 빨개진 호석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아, 몰라 박지민한테 물어보던가. 도저히 못말하겠어. 나 간다 안녕!"
하곤 급히 자리를 뜨는게 아닌가, 뭐야 얼굴은 왜 빨개진건데? 박지민한테 물어보라니?
내게 수많은 궁금증만 안겨준채 그렇게 정호석이 떠나버리고 나는 당장에 지민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 탄소야 얘기 잘 끝났어? 흐헤
"흐헤는 무슨 흐헤야 정호석이 너한테 물어보라는데 뭔소린데?"
-그럴줄 알았어. 호석이가 말할리가. 너 진짜 기억안나?
"아니, 나 진짜 모르겠대도? 뭔데 도대체?"
-너, 그 복학생 선배랑 술마신날 기억하지?
"응, 당연하지"
-그럼 호석이가 너 데려다 준것도 기억해?
"어.. 기억은 안나고 선배가 말해줘서 알았어"
-그럼 니가 호석이한테 안겨서 뽀뽀했던건?
"...퐐든?"
-푸하하 얘 진짜 기억안나는가보네. 아무튼 난 말해줬다. 그러니 다음은 너 알아서 해!
맙소사. 그제서야 모든게 이해가 갔다. 정호석이 날 제대로 못본것도. 그렇게 정색을 할수밖에 없던것도. 모두.
끊긴 전화기를 집어넣을 생각도 하지 못한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나는
그 자리에서 입을 틀어막고 한참을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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