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비가 왔다. 눅눅한 실내 공기에 조금 답답해져 소파에서 꾸역꾸역 일어나 창으로 향했다. 촤륵. 연 회색 커튼이 시원하게 걷혀졌다. 통 유리로 된 벽 아래로 물기를 머금은 도시의 풍경이 펼쳐졌다.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들리지도 않는 경적소리를 내며 바삐 움직이는 차들을 바라보다, 이내 지루함을 느끼고 다시 하품을 쩌억 한 뒤에 소파로 가 벌러덩 드러누웠다.
투둑. 툭. 유리를 때리는 빗방울들의 소리를 제외하곤, 아, 아니다. 이따금씩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시계 초침 소리를 제외하고 집안은 온통 고요했다. 잠시 하얀 천장과 하얀 전등에 서선을 고정하고 다리를 뒤척이다 상체를 일으켰다.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기역자로 이어진 옆 소파에서 잠든 네 숨소리가 여전히 규칙적이라는 걸 확인하곤 몸을 뉘였다. 나는 그제야 웃음기를 머금은 채 다시 회색 양털 담요를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비 내린 도시의 오후는 나른했다.꽃들이 만개한 푸르른 들판 위에 누워 그 위로 흘러가는 구름들에게 하나씩 이름을 지어주었다. 너는 보들보들 달콤해 보이니까 솜사탕, 쟤는 뚱뚱하고 입이 크니까 하마, 저기 가는 조그만 애는 부리와 날개를 달았으니 참새.
얼마나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구름과 놀았을까. 콧노래를 부르면서 하늘을 향해 뻗었던 손가락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이며 뒷 머리칼에 잔뜩 달라붙은 꽃잎들을 떼어낼 생각도 않고 들뜬 걸음으로 달려가 숲에 다다랐다. 익숙한 음계로 노래를 부르자 저만치서 커다란 덤불이 부스럭 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덤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두 가지가 작게 떨며 잎사귀를 흘리곤 숨겨져 있던 커다란 몸뚱아리를 드러내 보였다. 또각. 또각. 발 굽 소리가 점차 가까워 지고, 얼마 안 가 눈 앞에 예의 그 커다란 인영이 멈춰섰다. "* 솜니움. 당신을 보러 왔어." 활짝 웃으며 건낸 내 말에 그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긴 목을 숙여 제 뺨을 내밀어왔다. 두개의 가지들 아래에 놓인 색색의 꽃 화관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서둘러 손을 뻗어 그의 뺨부터 목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쿵. 그리 강하지 않은 동작으로 그가 왼쪽 앞발을 구르자 잠시 머리 위로 가볍게 바람이 일더니, 이내 연분홍 빛 꽃잎들을 동반한 산들바람이 시원하게 머리칼을 헝클이고 지나갔다. 나는 답례의 의미로 양복을 빼 입은 신사처럼 한 팔을 가슴에 붙인 채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와 동시에 숲 전체를 울리는 봄의 노래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 sómnĭum (솜니움) = 라틴어로 '꿈' , '몽상' , '허황된 희망' 등을 의미.뜨거운 햇살. 시끄러운 매미 소리. 풀벌레 소리. 곳곳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 낡고 오래 된 집. 주름이 자글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빌딩 숲 사이에서 나고 자란 소년의 흥미를 자극하기엔 전부 너무나도 볼품없는 것들이었다.
소년은 들어와서 수박 먹어, 하는 여인의 외침에도 그저 뚱한 얼굴을 한 채 마당 한 구석에 길쭉하게 자란 잡초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허름한 마당을 지나, 녹슨 청록색 대문을 지나, 생생한 초록빛 작은 밭을 바라보다 그 너머로 시선을 옮기던 찰나였다. 밭 사이로 난 좁은 길에서 홀로 산책을 하던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치고 만 것이었다. 소년은 잠시 주춤했으나 굳이 먼저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에 반해 조그만 여자아이는 냅다 좁은 길을 달려, 곧장 소년이 서있던 집의 바로 옆집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소년은 파랬던 하늘이 빨갛게 변하도록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혹시나 여자아이가 다시 나오진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그랬으리라. 하얀 반팔티에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 분홍색의 삼선 슬리퍼. 촌스럽게도 턱선에 딱 맞춰 떨어지는 까만 단발. 소년은 찰나의 순간에 포착한 아이의 모든 것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소년은 빨간 하늘이 보랏빛으로 변하기 전에 서둘러 낡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중년 여인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곤 잊히지 않는 아이의 모습을 머릿속에 담아 둔 채로 꾸역꾸역 저녁식사를 마쳤다. 막 깨끗이 비운 밥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참이었다.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다가온 노년의 여인은 투박하게 굳은살 박힌 손으로 소년에게 온갖 전들이 한아름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옆 집에 갖다주고 오려무나. 양이 많아, 나눠먹는게 좋을 것 같구나. 소년은 노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망설임 없이 접시를 받아들었다. 무작정 옆집 대문 앞으로 달려온 것 까진 좋았다.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려니(초인종이 없었기 때문에) 뒤늦게야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결국 한참의 고심 끝에 소년이 결연한 얼굴로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였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낡은 파란색 대문이 끼이익,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홱 젖혀졌다. 소년이 놀라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아까 그 아이가 대문 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소년이 어색하게 접시를 내밀었다. 아이는 말없이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소년 또한 아이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내밀어진 팔이 저려오는것도 모르고. 쌍커풀 없이 크고 동그란 눈. 까만 눈동자. 자세히 보니 시골 애 치고는 그리 까만 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하얗다면 하얀. 소년은 눈을 깜빡였다. 아이는 그제야 시선을 거뒀다. 소년이 들고있던 접시를 한번 더 소심한 동작으로 들이밀었다. 아이는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들었다. 수줍어 하는 모양새가 제법 귀여웠다. 뜨끈한 온돌 바닥에 드러누운 소년이 그 옆에서 바느질을 하던 중년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우리 여기서 얼마나 있다가 간다고 했지? 여인은 잠시 소년의 얼굴을 흘겼다가 다시 손에 쥔 녹색 천으로 시선을 돌렸다. 글쎄, 일주일 정도? 여인의 말에 소년은 입꼬리를 올려 작게 웃었다. 소년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여인에도 아랑곳 않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여인이 호기심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안 가. 그냥 별이나 보려고. 대답을 채 마치기도 전에 현관으로 뛰쳐나온 소년이 황급히 슬리퍼를 신고 마당 쪽으로 향했다. 방에 남은 여인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이내 웃으며 다시 바느질을 이어갔다. 하늘 참 예쁘다. 집 가면 이런거 못 보는데. 소년은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그리곤 내일 아이에게 뭘 하면서 놀자고 해야 좋을지를 고민하기 위해 마당에 놓인 사각형의 마루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내 뒷머리에 깍지낀 손을 받쳐 마루 가운데로 드러누운 소년이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시골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네.겨울이 내려앉은 왕국. 그 너머 생명의 발길이 닿지 않은 눈보라 치는 언덕. 맨발의 어린 소년은 정처없이 깨끗한 눈의 언덕 위에 발자국을 새긴다.
새하얀, 그렇지만 붉은 발자국들. 눈보라는 그칠 기미 없이, 태초부터 그래왔던 듯 매섭게 소년의 야윈 몸을 채찍질하며 재촉한다. 더 빨리. 더 멀리 가렴. 소년은 묵묵히 얼어붙은 지 오래인 두 다리를 움직인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나. 등 뒤로 펼쳐져 있던 왕국의 모습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을 즈음, "길을 잃었니?" "...응." "가엾어라."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의 여정 한 가운데서 소년은 그를 만난다. 정확히는, 단단한 두개의 뿔이 머리 위에 우뚝 솟아난, 눈처럼 새하얀 털로 뒤덮인 거대한 체구의 짐승 한 마리를. "너, 피곤해 보이는구나." "..."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니?" "...나를 업어줘." "그 쯤이야." 소년은 길고 긴 겨울의 여정에 어느 정도 지쳐있었기에 그의 낮선 호의를 마다 할 여유가 없었다. 소년은 망설임 없이 순록이라 불리우는 커다란 짐승의 등에 올라탔다. 조금은 힘겹게. 눈보라에 날린 보드랍고 흰 털이 소년의 발그레한 뺨을 간질였다. 소년은 상체를 낮추고 엎드리다시피 해, 제 몸집에 두배는 더 될 법한 순록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곤 피곤한 목소리로, 하지만 어딘가 전보단 편안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네 이름을 가르쳐 줄래?" 순록은 곧장 대답했다. "* 모르스." 순록은 넓직한 등판에 어린 소년을 태우고 정처없이 걸었다. 하늘은 계속해서 하얀 잿더미를 토해냈다. 새하얀 언덕 위에 이제 맨발의 어린 소년이 새긴 두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새하얀, 그렇지만 붉은 발자국들. 짐승의 등에 업힌 소년의 고른 숨소리는 점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눈보라는 여전히 매서운 채찍질로 소년의 드러난 마른 등판을 쉴 새 없이 때려댔다. 그럼에도 소년은 초연한 얼굴을 하고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새하얀 순록은 계속 걸었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보라가 그칠 때 까지. 그렇게, 정처없이. * mors (모르스) = 라틴어로 '죽음' , '끝' 등을 의미. - 석진 호석 남준은 다음에. (찡긋) 원래 각 글마다 비지엠도 따로 준비했는데, 자동재생이 되니 음악이 섞여 이상해지길래 뺐습니다. (우울) 이런 류(?)의 글은 오랜만이라 좀 떨리네요, 헤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