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모범심즈
모범생 정재현 X 날라리 너심 썰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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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똑같았다.
"그래서 정수정이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그 오빠 이제 꼴도 보기도 싫대.
박수영은 저 소리도 지겹다면서. 웃기지."
"그러게요. 저도 수정선배가 그 말하는 거
벌써 몇 번째인 것 같은데."
요즘 꽂힌 오빠가 있다며 하루하루 바뀌는 관계의 정의는
나와 박수영의 정말 귀찮은 주제였다.
나는 들고 있던 포크로 파스타를 대충 휘젓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로 놓았다.
그러자 정재현은 의아하듯 나를 쳐다보았다.
"아까 너 만나기 전에 너무 배고파서 과자 먹었더니 별 생각이 없네."
"그래도 좀 들어요, 그러다가 이따가 배고파."
난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뜻을 보였다.
정재현은 잠시 날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의미 모를 적막이 우리 사이에 고개를 내밀자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정재현의 손이
내 손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평소라면 나도 다가가 힘껏 잡았을텐데....
내 맘 속의 구석에서 자리잡은 찌끄러기 하나때문에
선뜻 나서질 못했다.
그렇게 그냥 애꿎은 손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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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벽에 딱 하나 걸려있는 시계가 제일 눈에 들어왔다.
그냥 하얀 시계 하나.
시침이 제자리에서 멈칫 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너도 답답하겠다.
"내가 볼 땐 정재현이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전혀 생각지 못한 이태용의 생각을 듣자
어지럽혀져 있던 퍼즐들을 맞추려 애썼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정재현도 자신을 잘 모른다고."
나는 이내 콧방귀를 끼었고 맞추려 시작한 퍼즐게임을 그만 뒀다.
"말도 안돼. 정재현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자신이 제일 잘 알아. 정재현이 어떤 사람인데."
"글쎄, 난 그렇게 안보이는데."
이태용은 멍하니 무언가를 생각하려 애쓰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의 천성은 바뀌지 않는다던데 아니더라고.
다만 바뀔 수 있는 계기가 없었던 거지.
나도 그래. 하루하루 변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신기한건 매한가지야. 옛날의 내가 어땠는지 가물가물 하기도 해.
내가 까먹는 건지, 아니면 잊어버리려 애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혼자 땅바닥을 보며 홀리듯 중얼거리는 이태용을 보면서
나도 잠깐 밀려오는 생각에 잠겼다.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다.
어쩌면 그 사실을 서로도 알고 있지만
서로를 외면하는 것 같았다.
그저 모서리에 아슬하게 걸쳐있는 유리잔을 보며
저 잔은 곧 떨어질 것이라는 걸 알지만
아직 버티고 있는 잔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주하는 것.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우리 사이.
내 앞에 있는 이태용이 시작이었는지
AS 맡겼다고 거짓말한,
아직 내 책상 서랍 안쪽에 있는 시계가 시작이었는지
붙잡을 수 없이 오해의 꼬리가 점점 굵고 길어지고 있었다.
"아, 몰라. 답답해 그냥."
벌써 희미해진 아이스아메리카노 잔을 끌어당겨
보라색 빨대를 쭉 들이켰다.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흐르는걸
엄지손가락으로 턱 막고는
다시 손을 떼었다.
"정재현은 아무렇지않게 대하는데
그게 더 미칠 것 같아.
내가 너랑 친하게 지내는걸
정재현한테 왜 숨기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시계도 고장나면 고장났다고 말할걸
그때 왜 거짓말 했는지도 모르겠고
정재현이 아무말 안하니까 그게 더 이상,"
"우리 친해?"
"...뭐?"
뜬금없이 내 얘기 듣던 이태용이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개뚱딴지같은 소리야 쟤는,
"너가 그랬잖아. 우리 친하게 지낸다고."
"근데 그게 왜?"
"듣기 좋아서, 그 말이."
"안 친하면 내가 이렇게 너랑 카페와서 같이 커피 마시겠니?"
내가 눈썹을 찡그리며 타박하자
이제는 킥킥 웃던 이태용이 괜히 앞머리를 헝클였다가
다시 정돈하며 어수선하게 자리를 고쳐앉았다.
"아니, 며칠 전에 너가 나랑 안 놀거라고 했었잖아."
"야, 그건..!"
"그냥 친구 하나 잃었다고 생각했지."
나는 반박하려 빨리 입을 열다가
이내 다시 닫아버렸다.
그랬었지... 불과 며칠전에는...
"정수정이랑은 달라."
"?"
"너한테 뭔가 털어놓으면... 속이 시원해."
갑자기 나의 고백으로 인해 썰렁해진 것 같지만
한 번 시작한 이야기는 끝맺음 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수정이랑 친구가 아니란 건 아닌데,
아니, 수정이한테 고민을 말 못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생각할 게 생기면 자연스레 너도 떠올라."
"알았어, 이해됐어."
"너 이용해 먹는거야, 멍청아."
"알았다니깐."
뜬금없는 나의 말에 이태용은 기분이 좋은듯
테이블 위에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들겼다.
-
-내일은 좀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선배 내일 약속 없죠?-
"아, 응. 아무것도 없어."
-내일 그럼 종례하고 반 앞으로 갈게요.-
"응, 알았어."
다 씻고 누워서 통화하다가
갑자기 몰려오는 졸음에
내 대답이 시원찮았는지
정재현이 다시 나긋한 목소리로
다정한 말을 걸어왔다.
-선배, 많이 졸려요?-
"으응. 졸리다. 재현이 너는 안 졸려?"
-아까 커피 마셨더니 잠이 안오네요.-
"...커피? 아까 어디 다녀왔어?"
-아.. 아까 누가 사다줬어요.-
누가? 라는 질문이 나오기 전에
눈이 떠지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괜히 그것까지 물어보면 좀 그러려나.
-같은 학생회 친구가요.-
내가 머뭇거리며 선뜻 물어보지 못하는 것이
거기까지 느껴졌는지
정재현은 아무렇지 않게
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그래? 착한 친구네."
-네. 평소에 도움도 많이 주고 그래요.-
"재현이도 평소에 주변 사람들 많이 챙겨주잖아.
재현이한테 고마운 사람들이 그렇게 표현하는거야."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쑥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드러나는
정재현의 감정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조용히 웃음소리를 내었다.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아요, 선배 웃음소리.-
나는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자세를 고쳐 누웠다.
그러다 적막을 가로질러
다시 조심스러운 정재현의 목소리가
휴대폰 밖으로 넘어왔다.
-선배 요즘 걱정 있어요?-
이미 잠은 달아난지 오래고
정신이 멀쩡하다지만
내 입은 얼어붙은 듯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고민 있으면 저한테 털어놓아도 돼요, 선배.
나 선배 남자친구잖아요.
선배 말로는 요새 내가 바쁘다고는 하지만
저 안 바빠요.-
"나 고민 없어, 재현아."
드디어 떨어진 입에서 나온 말은
내 마음과 정반대로 튀어나갔다.
지금 말해도 될 것 같은 이 순간을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말하려니 어떻게 말해야될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부터 수없이 떠오르던 말들이 그냥
입 안에서 맴돌기만 하는 것 같았다.
-알았어요,
나중에라도 생기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대충 인사를 하고 끊긴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깜깜한 방 안의 천장의 중간점을 찾고 있었다.
또, 거짓말을 해버렸다.
"아냐, 얼굴 보고 말하려고 그래."
합리화하듯 그래, 그런거야. 라며 나를 토닥이고
다시 무거워진 눈을 감았다.
재현아, 내일 내가 말할거야.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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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모범심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