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렇게 체력이 좋은 아이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아이들이 달리는 만큼 달릴 줄 아는 평범한 학생이었고 특별하지 않게 운동을 좋아하는 그저 그런 무난한 학생. 그런 내가 심장이 터질듯이 달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꿈, 그리고 전정국이었다.
도대체 내 꿈속에서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을까. 한시라도 빨리 그 아이가 그곳에서 벗어나기 전에 그곳에 도착해야했다.
"하아.. 하.. 다 왔다.."
뿌연 새벽 안개처럼 흐릿하게 가득했던 고민들과 두려움들이 덜컥 내 앞에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가로등 불빛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 어두운 골목을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없던 폐쇄공포증이 생길지경이었다. 두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한 발작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엔 뭔지 몰라도 순찰 아저씨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긴장감이 이 어둠과 정적 속에 뒤엉키고 있었다. 본적없는 특유의 스산함이 봄바람처럼 뼛속깊게 파고들고 있었다. 그 사이 내 눈은 어느덧 짙은 어둠에 적응을 하고 있었고 제 각기 자신의 빛을 내고 있었다. 정말 좁은 골목은 미로처럼 구불거리며 펼쳐졌고 색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은 보기드문 비포장도로로 이루어져 있었고 정말 중요한 것은 이 길의 끝도 모를 뿐더러 나가는 방법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내가 미쳤지.. 그냥 내일 전화해서.. 아.. 전화번호 모르지.."
그때 이곳 뒤에 있는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몸을 감쌌다. 그리고는 느껴지는 사람의 에너지라고 해야할까 그런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난 야생의 야행동물 같이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거기.. 누구세요..?"
"..."
"누구 있는거에요..? 혹시.. 전정국..?"
"쉿."
"읍.. 이어디마데.."
"뭐야. 남자애네.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거야. 재수없게."
분명 막힌 골목쪽에서 느껴졌던 사람의 기운이 어느새 등뒤에서 나의 입을 막고는 내 등에 바짝 기대어 내 귀 깊숙하게 이야기를 내뱉었다.
"...."
그는 이내 내가 자신의 입막음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함을 깨닫고 입을 막았던 손으로 나의 목을 가볍게 쥐었다. 아릿한 근육의 땡김과 갑갑함이 느껴졌고 내 손과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직감적으로 이건 정국이가 아니라는 것을 안좋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진리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왜 이러세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도시괴담 같은거 믿나?"
"도시 괴담..이라니요?"
"요즘 이 동네에 도는 소문 못들었어? 기집애들이 아니라 들을 필요가 없던건가?"
"그게 무슨..."
모르는 척 말을 꺼내는 순간 내 뇌리를 스쳐 지나는 생각이 있었다. 동네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누군가 나쁜짓을 하는 사람이 돌아다닌다는 사실. 그것 하나가 생각이 났고 난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모르면 이제부터 잘 들어. 내가 말이야 그 소문의 주인공이거든. 내가 또 주인공이 아니면 마음에 안들어서 말이지. 그래서 난 항상 나를 빛내줄 조연들이 필요해. 너가 그 조연이 되어 주면 좋겠는데.. 어떠니? 너가 최초로 남자 조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은데 말이야."
"하.. 피.. 필요 없어요. 저 이만 집에 가야할 것 같...윽..."
집에 가보겠다며 이 또라이를 밀치고 미친듯이 달려보려던 찰나였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그 좁은 골목을 이용하여 녀석은 나의 팔을 낚아채 벽으로 힘껏 밀어부쳤다.
"야 이새끼야. 여긴 내 구역이야. 니 마음대로 들어왔어도 마음대로는 못가지. 주인이 이렇게 화가 났는데 말이야. 감히 내 명령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너가 이 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단 말이지? 길도 모르면서 말이야... 아.. 오... 역시 난 대단한 것 같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아주 섹시한 생각이지. 생각만으로도 피가 들끓는데"
"그.. 그게 뭔데요.."
"흐흐... 너에게 딱 30초를 줄꺼야. 그 안에 도망갈 수 있는데까지 어디 한 번 도망가봐. 잡히면 넌 내꺼야. 알겠지 애기야? 아, 가기 전에 난 여기 지리를 안다는 것만 알아두고. 그럼 시.작."
난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길을 아는 듯이 이 골목길이 나를 집어 삼켰다. 솔직히 왔던 길로만 쭉 가면 될 줄 알았는데 집이라도 있는 미로였다면 특징이라도 있을테지만 똑같은 벽들이 이어지는 이 곳에서 특징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은 다급해져 갔고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마침내 큰 소리가 들려왔다.
"삼십!! 우리 애기 어디 있나?"
"하아.. 안돼.. 제발.. 제발..."
"발소리 들린다!! 꼭꼭 숨어라!! 어차피 못나갈테니까!!"
"하아.. 제발.. 어디라도 제발... 엇.."
다급하게 달리는 내 팔을 익숙하게 누군가 잡아당겼다.
***
(지민 ver)
평소 태형이에게 화를 잘 내지 않던 나였다. 어떤일이 있어도 나에게 모질고 무뚝뚝하게 굴어도 어디 한 번 똑같이 대하거나 내 모습에 변화를 준 적이 없었다. 이런 내 모습은 나 마저도 너무나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아마도 태형이에게는 훨씬 혼란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우리 둘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다른 친구들이 중간중간 우리의 무리가 되었어도 우리는 그 무리 안에서도 제일 친한 사이였다. 아마도 그 애들한테도 우리는 무언가 뚫을 수 없는 벽같은 느낌이 있었겠지. 그러나 이번은 뭔가 달랐다. 그런 쉽게 생각할 인연들이 아니었다. 전정국이 태형이에게 관심이 있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난 한 번도 태형이가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인것을 본적이 없다. 오히려 남자들끼리의 오묘한 감정들에 무디고 싫어했으면 했달까. 전정국이 진심이라고는 느낄 수 없었지만 만약 진짜로 좋아하는 거라면 난 도대체 어떻게 그 둘을 도와줘야 할까. 전정국 편에서 도와주자면 그 둘을 자꾸만 이어주어야 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난 태형이 편에서 그 둘이 이어지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나의 선택은 분명 후자였다. 그런데 내가 요즘 속상했던건 전정국이 우리 사이에 끼고부터 태형이를 바라보는 전정국의 눈빛에서 무언가 알고 있음이 느껴졌고 그 눈빛은 내가 태형이에게 보낼 수 없는 눈빛이었다. 워낙 속마음은 잘 말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번과 같이 나에게 화를 내거나 저런 싸늘함을 보여준 적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시험과 걱정이 겹쳐 그런걸까 그 스트레스를 풀어주려 같이 나가자고 했던 거였는데 그렇게 둘이 나란히 장난치며 걸어오는 모습은 정말 나의 기분을 바닥을 치고 끝도 없이 추락시켰다. 태형이는 나에게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런 뻔한 변명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자존심에 그 어떤 연락도 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은 난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걱정이었다. 태형이와 멀어지는 것도 전정국이 태형이 옆에 있도록 해주는 것도 난 너무나 불안하고 두려운 것들이었다.
"하여튼 내가 먼저 풀어야지 항상... 나쁜새끼.."
그렇게 난 집문을 열고 나왔다.
***
(정국 ver)
"흠... 여기가 그 형사네 집이란 말이지?"
미혼 남성 혼자 살기에는 깔끔하고 군더더지 없는 모던한 스타일의 집이었다. 부엌은 오픈키친에 화장실 하나 방 하나 조그만 거실하나 다용도실. 이정도면 생각보다 괜찮은 집이었다. 생각에는 집이 더 난장판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뭐.. 괜찮네 나름. 그나저나 이 사람도 꿈에 대해서 안단 말이지.. 김태형보다 이 사람이 먼저인가.."
그가 만지고 갔던 느낌이 드는 구역들을 골라 책이나 꿈에 관련된 내용들이 있는 것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꽤나 많은 양들을 모을 수 있었다.
"형사라고 하더니... 생각보다 조사력이 풍부하네."
그리고는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그 책을 복사한 복사본을 발견했다. 처음 꿈에대해 얼마 알지 못하던 때라면 이 것으로는 꿈의 효력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가고 꿈속 세계로 몸을 많이 담구게 될 수록 아마도 이정도로도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될지도 몰랐고 그것은 하나의 흰트 같이 제공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거 몰래 가져가야겠다."
삑삐빅삐-
"아이씨.. 왜이렇게 빨리 와.."
다급하게 복사본을 꾸겨 주머니에 넣고 창문으로 빠져나왔다.